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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 시드니 ㅣ 걸어본다 7
박연준.장석주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평점 :
“네 이름을 발음하는 내 입술에 몇 개의 별들이 얼음처럼 부서진다.”
어휴, 시인들은 이런 연서를 쓴단 말이지. 장석주가 박연준에게 쓴 연애 메일의 첫 문장이란다. 뭔가 반칙 같은 느낌이 든다. 곧장 장석주 시인에게 달려가 (임채무처럼 8대 2 가르마를 하고는) 옐로우 카드를 번쩍 치켜들고 싶다. 저런 문장에 안 넘어가는 여자가 이상한 거 아닐까.
박연준 시인은 ‘얼음을 주세요’란 제목으로 시를 썼다지. 얼음을 달라니, 아니, 그걸로 뭐 하실려고? 아우, 왜 이리 에로틱하냐. 나만 그런 것일까.
처음 읽는 책임에도 기시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블로그 이웃이나 북플 이웃들 서평이나 리뷰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왜 이리 반가운지. 특히나 이 책은 박연준 시인의 문장이 쏙쏙 박힌다. 그러니까 이제 문장들은 박연준의 것도, 당신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닌, ‘우리의 것’이란 말이지?
문장에 콩깍지가 씐다.
대개 사랑은 콩깍지가 씐 상태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콩깍지가 벗겨졌는데, 그것도 한참 전에 벗겨졌는데도 그 사람이 좋은 것이다. 모든 단점들을 상쇄시키는 것, 이해 불가능한 상태가 사랑이다.
- P 52
롱 블랙이라. 아메리카노와 비슷하다는데.
내 멋대로 ‘긴 긴 밤’이라고 의역도 해봤다. 긴 긴 밤 한잔이요! 얼마나 멋진가? 밤을 한 잔 마시는 시간이라니. 커피 속에 기다란 검정도, 기다란 기차도, 기다란 밤도 넣어보며 홀짝였다. 이름이 중요한 법이다. 무엇이든 호명하고, 불러주고, 사랑해주는 순간 빛나게 된다. 완전히 달라진다.
- P 70.
한 달 동안 시드니에서 살 수 있다니.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어우 부러워. 글은 장석주, 박연주지만 기획은 김민정 시인인 듯하다. 김민정 시인의 오지랖은 왜 이리 사랑스러운 걸까. 이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야. 나에게도 오지랖을 가해주었으면.
(김민정 시인, 요즘 이뻐지셨던데? 얼굴에 칼 대신 건가요? 아니면 이제야 화장술을 배우신건지요?? 아무쪼록 줄기차게 ‘이쁜 짓’ 해주세요^^)
“걷기는 ‘곳’안에서 무엇의 길을 트고, 시간 안에서 무엇을 구멍낸다.”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신비한 결속>에 나오는 구절이다......목적 없이 걷는 사람은 도착할 곳이 없다.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한곳에 머무는 사람, 그가 머무는 곳은 자신의 생각 속이다. 종착지는 ‘생각의 끝’이 될 것이다. 생각의 끝에서 길이 멈추고, 비로소 ‘곳’이 생기는 것이다.
- P74
모든 밤이 지극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밤은 너무나 지극해서 머리카락 한 올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식물의 키가 밤새 줄어드는 소리나 전깃줄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까지, 몰래 접어둔 걱정 한 덩이가 뒤척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들어라, 사랑하는 이여, 걸어오는 밤의 /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를 들어라.” 보들레르의 시구처럼 , 밤은 고요를 안개처럼 끌고 터벅터벅 걸어온다.
- P 92.
알베르 카뮈는 산문집 <여름>에서 “나는 바다에서 자라 가난이 내게는 호사스러웠는데, 그후 바다를 잃어버리자 모든 사치는 잿빛으로, 가난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라고 쓴다.
- P 134
1730년에 신부 카스텔은 이렇게 쓴다. “파란색은 하늘의 색깔이므로 하느님의 빛깔이다. 하느님은 출발점의 음이므로 옥타브의 첫 번째 음인 도에 해당한다. 따라서는 도는 파란색이다. ”푸른 하늘의 음계는 ‘도’다.
- P 140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이라고 쓴다.
- P147
날마다 1백억 개의 세포가 죽고 죽은 세포들은 새 세포들로 교체된다. 생물학에서는 이를 아포토시스apotosis라고 말한다. 아포토시스 과정이란 날마다 세포 단위에서 겪는 작은 죽음들이다. 인간은 그런 작은 죽음들 끝에 큰 죽음과 만난다.
나란 존재는 장강 같은 생명의 긴 역사에서 찰나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물방울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