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우치다 타츠루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것도 내겐 참 기이한 일처럼 여겨진다. 우치다 타츠루의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와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를 겹쳐 읽다보니, 마르크스와 하루키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이 공통점을 우치다 타츠루가 인식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 공통점이 타츠루가 세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틀이 아닐까
유적 존재, 혹은 파수꾼을 지향하기.
우츠다 타츠루는 대학원 시절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를 전공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유대인 서문>을 썼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근대 시민 사회의 성원들은 ‘사인’과 ‘공민’이란 두 가지 모습으로 분열되어 있고, 사인의 모습이 본래적인 모습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봐, 그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아?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만, 이래라 저래라 하니까 할 수 없이 법률에 다를 수밖에’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인류가 그렇게 피땀 흘리며 노력해왔단 말이야? 인간이 참으로 해방된다는 것이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어?”
한 인간이 공과 사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고, 분열된 모습 중에 ‘이기적인 쪽’이 진짜 모습이고 ‘비이기적 =공명한 쪽’이 가짜 모습이라는 것도 이상할 뿐이야. 그게 아니라 참으로 해방된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열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웃이나 공동체 전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할 것이 분명해.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인간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닐까?“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이웃이나 공동체 전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하는 인간’을 마르크스의 용어로 ‘유적 존재’라 부른다. 유적 존재란 공과 사가 일치된 인간이다. 이 ‘유적 존재’를 <댄스 댄스 댄스>의 하루키가 제시한 용어로 치환한다면 ‘문화적 눈치우기’다. 레비나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여성적인 것’, 그리고 샐린져 식으로 말하자면 ‘파수꾼’이다.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누군가 해야 하니까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 내가 할게요’하며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인간적 질서는 그런 대로 유지됩니다. 그런 사람이 꼭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 세계의 질서는 유지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꼭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 세계의 질서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입니다. ”
-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262.
타츠루가 보기에 마르크스나 하루키는 ‘이웃이나 공동체 전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하는 인간’이다.
프롤레타리아와 알
소외론의 출발점이 ‘자신의 비참함’이 아니라 ‘타인의 비참함’을 목도한 경험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우리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을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읽을 때 ‘소외된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열의를 꼭 느꼈으면 좋겠군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화폐나 지대 같은 얘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마르크스가 지닌 인간적인 면은 그가 ‘소외된 노동자’를 생각할 때면 금방 흥분해버린다는 점이에요. 공평하지 않은 사회의 실상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것이죠.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p 149.
마르크스는 가난하긴 했지만 프롤레타리아라기보다는 부르주아였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를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고 보았다. 이 부분을 하루키의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과 대비시켜 보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두텁고 높은 벽과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 중 알을 선택할 것입니다. 벽이 아무리 올바르다 해도, 알이 아무리 잘못되었다 해도, 나는 알 편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 60
타츠루의 말처럼 연약하다고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본가, 대부분의 벽은 사악하기 일쑤다.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
최근에 타츠루의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이 출간됐다.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에서 그는 하루키 문학이 세계적인 문학이 된 이유를 누누이 말한다. 타츠루에 따르면, 무라카미 월드에는 한 가지 이야기 원형이 자리잡고 있다.
‘우주론적으로 사악한 것’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조’ 역할을 맡은 주인공들이 팀을 짜서 방어해내다는 신화적인 서사적인 원형이 그것입니다. ......사악한 것은 소설마다 다양한 모습 (‘야미쿠로’, ‘와타나베 노보루’, ‘지렁이’등)으로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그는 그 연설에서 ‘사악한 것’을 ‘시스템’이라고 불렀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 75.
이 ‘사악한 것’이 마르크스에겐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 없이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다. 그렇다면 이 ‘사악한 것’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까?
예를 들어 ‘모든 사악한 것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단 심문과 강제수용소와 대량 학살 장치가 필요해요. 반드시 필요하죠.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꺼번에 전 사회적으로 ‘좋은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프로젝트 가운데 그것에 견줄 제도를 갖추지 못했던 적은 없었어요. 다만 ‘사악한 것의 근절’이라는 목적 자체는 시비 걸 수 없을만큼 훌륭하지만,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시비 걸 곳 투성이’인 살아 있는 인간이지요.
...머릿속으로 아무리 훌륭한 일을 생각해도 몸은 머리를 따라가지 못해요. ‘살아있는 몸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뽑아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p 218
이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하루키의 방법은 무엇이었나? 그것이 ‘문화적 눈치우기’다. 그리고 눈을 치우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몸을 움직여야 한다.
머리와 몸/ 의식과 현실
마르크스는 의식보다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인간들이 이야기 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또한 이야기하고 사유하고 상상하고 표상하는 대상이 되는 인간들로부터 출발하여, 거기에서 생겨난 진정한 인간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또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이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과 반향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이야기 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머릿속의 사건’을 가리켜요. 이것에 비해 ‘살아 있는 진짜’라든가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생활 과정’이라는 말은 ‘신체적인 사건’을 의미하지요. 마르크스가 여기에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머릿속’과 ‘신체’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p216
타츠루에 따르면 하루키는 머리로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몸으로 글을 쓰는 작가다.
하루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감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에서 의미성이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의미성과 의미성이 어떻게 서로 호응하느냐는 것입니다. ‘배음’같은 것인데 배음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지만 거기에 몇 배음까지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 음악의 깊이를 좌우하지요.....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몸이 따뜻해지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배음이 들어가 있는 소리는 신체에 남습니다. 육체적으로.....하지만 그것이 왜 남는지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것이 서사라는 기능의 특징이지요. 뛰어난 서사란 사람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 제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뛰어나지 못한 서사와 기능적이고 구조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179
하루키 소설에서 ‘밥 짓기, 요리하기, 청소하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혼자 먹는 아침 밥의 빵은 ‘벽에 바른 흙 맛’이 난다. 그러나 타인(들)과 같이 아침 밥을 먹을 때 하루키의 문장은 온도가 높다. 누군가를 위해서 아침밥을 차리기. 이러한 소소한 일상을 할 수 있는 한 성실히 하는 것. 그것이 하루키가 말하는 ‘문화적 눈치우기’다.
하루키는 과연 파수꾼인가?
다른 지면에서, 나는 하루키가 <언더그라운드>이전에는 사회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언더그라운드> 이후와 이전의 하루키를 따로 해석해야 하는 걸까. 나는 우치다 타츠루의 하루키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연 하루키를 파수꾼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루키를 읽고 ‘그래, 나도 이제부터라도 사회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겠어!’라고 다짐하는 독자가 있을까.
내가 보기엔 하루키의 캐릭터들은 ‘공민’은 없고 오로지 ‘사인’만 있다. ‘누군가 해야 하니까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캐릭터. 사회의 문제 따위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캐릭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그저 나의 소소한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으로 자족하는 캐릭터. 일본 ‘사토리 세대’의 전신이랄까. 하루키가 파수꾼이라면 오로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즉 자신의 가족, 자신의 친구만의 파수꾼은 아닐까.
하루키의 소설은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만의 욕망을 추구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며 독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존 어빙과의 인터뷰 일화를 얘기한다. 존 어빙은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메인라인을 히트hit하는 것”이라 말한다. 즉, 독자를 ‘마약중독자’로 만들 것. 하루키는 ‘직통 파이프’라는 표현을 썼다. 하루키 소설이 ‘마약’과도 같다면 그건 하루키가 말한 ‘배음’때문이 아닐까.
하루키 소설은 ‘배음’과도 같아서 독자인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몸에 남는다. 즉, 머리로 쓴 소설은 머리에 남지 않지만, 몸으로 쓴 소설은 우리 몸에 남는다. 한마디로 하루키 소설은 마약이다. 하루키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우치다 타츠루의 주장처럼 ‘태곳적 내러티브’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루키 언어의 음악성과 신체성 때문이 아닐까.
한 가지 이유를 더 추가하자면 하루키 소설의 눈높이를 언급하고 싶다. 하루키 소설엔 작가가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시점이 없다. 바닥을 지향하는 눈높이라고 할까. 하루키는 이런 시점을 레이먼드 카버로부터 배웠다고 말했다. 하루키는 ‘저도 잘 모르지만 같이 한 번 떠나보지 않을래요?’하고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내가 다 아니까 너는 나만 따라와’라고 명령하는 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는 거의 없다. 한국의 순수문학, 강단철학, 독립영화가 안 팔리는 결정적 이유기도 하다. 한국의 소설가, 영화인, 문화예술인들은 눈높이를 낮출 필요가 있다. 재미가 없다면 의미도 없는 시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나는 입에 쓴 약이 몸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문학, 예술은 독자를 ‘나르시시즘’으로 유혹한다. 현대의 독자는 안락함과 나르시시즘 외에는 관심이 없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atopos(장소가 없는)로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안락함과 편안함만을 지향한다면, 사유는 늘 똑같은 것만을 재생산하기 마련이다. 새누리당 같은 기득권들이 오늘날까지 자신과 다른 사유를 빨갱이로 모는 이유고 안락함에 젖은 대중들이 세뇌되는 이유다. 내 사유가 깨질 때라야 새로운 사유가 가능하다. 창조적 파괴. 나를 아프게 하는 책, 나를 불편하게 하는 책, 내 무지를 까 발기는 책, 나를 마취에서 깨어나게 하는 책, 즉 내 입에 쓴 책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좋은 책이 아닐까.
순간의 고통을 잊기 위한 마취는 필요하다.
그러나, ‘영원한 마취’는 질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