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잠재적으로 모든 것이 예술의 풍부한 소재이며, 우리는 파스칼의 <팡세>에서 만큼이나 비누 광고에서도 귀중한 발견을 할 수 있다.
-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중
저자는 위 구절을 인용하며 코스모스를 들여다 본 경험을 얘기한다.
사실 처음에는 이거 뭐야, 볼 거 없잖아 하고 돌아서려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 코스모스 송이마다 색깔이 다 다르더군요. 그리고 옆에 다른 풀들도 있어요. 그리고 벌들이 보여요. 십 분쯤 지났더니 두 마리, 세 마리, 열 마리가 넘는 벌들이 있더라고요. 또 그 옆에는 무당벌레가 있고요. 벌을 다시 들여다봤더니 큰 몸통에 작은 날개가 파라락대며 엄청 빨리 움직이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와, 날갯짓하는 것 좀 봐라 하며 다시 꽃을 봤더니 한 송이 꽃인데 꽃잎 색깔이 다른 것들이 있어요. 야,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하는데 옆에서는 벌들이 다리를 비비고있고요. 자세히 보니까 고양이 앞발 모양이랑 비슷해요. 어, 그런데 오전 11시인데 아직까지 이파리에 이슬이 맺혀 있네? 하고 그 이슬 맺힌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거미줄이 두세 겹으로 쳐져 있고, 또 거미를 찾아봤더니 구석에 숨어 있고, 마침 거미줄이 흔들려서 생각하니 바람이 살랑이는 게 참 좋다 싶었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삼십 분을 앉아 있었더니 얘깃거리가 생기더라고요.
세상을 신문기사처럼 본다면 우리는 결국 매일 상투적인 얘기만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의 위와 같은 관찰의 힘이 기발한 광고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토대가 아닐까?
나는? 말을 말아야지.
4강. 고은의 낭만에 취하다.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분이건만 나는 고은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다. 역시나 저
자가 <순간의 꽃>에서 발췌한 시들 역시 도끼가 돼서 나를 후려친다.
저쪽 언덕에서 소가 비 맞고 서 있다 이쪽 처마 밑에서 나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둘은 한참 뒤 서로 눈길을 피하였다 ---------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 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4월 30일 저 서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 죽은 나뭇 가지에 매달린 천 개의 물방울 비가 괜히 온 게 아니었다 -----------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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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할 도리 밖에.
5강.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알제는 해가 비칠 때면 사랑에 떨고 밤이면 사랑에 혼절한다.
- 김화영,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저자가 보기에 지중해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라고 하는데 가본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접한 지중해는 능히 그럴 것 같다.
모두가 무너지고 오직 화려한 대문만 남은 이 사랑의 성은, 그리하여 마땅히 하나의 폐허인 것이다. 폐허 위에 내리는 햇볕은 그래서 더욱 따뜻하다.
보들레르는 현대성을 ‘덧없는 것’으로 규정했다. 순간들은 찰나적이고 되돌아 갈 수 없으며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아프지만 또한 그래서 아름다운 게 아닐까?
해가 설핏해질 무렵 돌연 우리의 뼛속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저 기이한 슬픔......
햇빛 찬란한 날들이 지나면 어느덧 어둠이 다가온다. 그러면 허무함에 슬픔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시 해는 떠오르니......
여행지에서 그렇게 만났다가 그렇게 떠나보낸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 일생이 한갓 여행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행길에서 우리는 이별 연습을 한다. 삶은 이별의 연습이다. 세상에서 마지막 보게 될 얼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한 떨기 빛, 여행은 우리의 삶이 그리움인 것을 가르쳐준다.
어떤 사람들은 ‘덧없음에 대한 감각’을 타고 나는 것 같다. 그들에겐 모든 순간들이 안타깝다. 따라서 그 어떤 순간도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순간을 통해 영원을 꿈꾸는 자들이다.
나는 한 알의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리라 – 폴 세잔
저자는 김화영의 <바람을 담는 집>에 나온 위의 문구를 모티브로 삼아 한 정유회사의 광고를 만들었다고.
푸른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방울처럼 딸랑딸랑 울리던
지중해적인 삶. 그런 지중해적인 삶에 대해 저자는 ‘개처럼 살자’고 말한다. 개는 어제를 후회하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순간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기에.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있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지상의 양식도 참 좋아했던 책이었는데, 그리스인 조르바는 아직 끝까지 다 못 읽었다. 아직 대지와 탯줄을 끊지 않은 조르바처럼 나 역시 조르바의 탯줄을 붙잡아야.....
카뮈에 열광한 사람은 대개 그르니에를 읽게 마련 아닌가? 그리고 우리 세대는 카뮈와 그르니에를 김화영의 번역본으로 읽었다.최근에 카뮈의 <이방인>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새로 번역된 <이방인>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는데, 설마??
불어로는 ‘어머니’와 ‘바다’가 발음이 같다. 누군가 이방인의 주인공 이름인 ‘뫼르소’는 바다인 ‘메르’와 태양인 ‘쏠레이으’의 합성어라고 주장했었는데 그런 것 같다. 태양과 바다(엄마)를 뺀 지중해, 혹은 이방인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나는 카뮈의 <이방인>보다는 그르니에의 <섬>을 더 좋아한다. 박웅현의 후배 이원홍은 스승의 날에 꽃과 함께 이런 메모를 보냈다고.
“나는 <섬>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의 것처럼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는 그런 일을 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게 온 이 같은 행운을 기뻐할 뿐이다. ”
- 카뮈의 마음으로 내 영원한 그르니에에게
박웅현은 행복한 사람일터. 스승에 대한 저런 찬사라니!
.....겉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카뮈의 서문>
겨울 숲 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 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장 그르니에 [섬]중 김화영의 서문>
어딘가 떠나고 싶다면 <섬>을 가져가시라.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장 그르니에, <섬> 중
6강.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강의 전체를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할애하다니. 그만큼 이 소설의 스펙트럼은 넓을 것이다.
정치, 역사, 철학,예술, 사랑 등등
메타포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메타포를 가지고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메타포가 하나만 있어도 생겨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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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신학자가 천국과 양립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성교나 성교와
연관된 관능성이 아니다. 천국과 양립될 수 없는 것은 흥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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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이란 우리는 마지막 역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이 소설을 니체의 ‘영겁회귀’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키치적 관점에서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음악의 형식적 측면으로도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내게 이 책속의 한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다음의 문장을 고를 것이다.
“당신의 임무는 수술하는 거예요! ”
“임무라니, 테레사.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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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를 의무로 해석해도 될까? 살아가면서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을까?
의무 때문에 살아가는 삶이라면 얼마나 무겁겠는가?
해야 할 건 없다.
순간을 영원처럼 살면
7강 불안과 외로움에서 당신을 지켜주리니, 안나 카레니나.
아, 부끄럽게도 아직 안나 카레니나를 읽지 못했다.
읽고 쓰자.
(지금은 읽었다.)
8강.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
저자는 우리 옛 선조들의 지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들을 꼽았다. 손철주, 오주석, 법정 등등.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들 도리어 누가 되고
부귀가 하늘에 닿아도 수고에 그칠 뿐
산속으로 찾아오는 고요한 밤
향 사르고 앉아서 솔바람 듣기만 하리오.
해질녘 서편 하늘을 물들이는 장엄한 노을 앞에 섰거나, 한밤중 아득한 천공에서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무리의 합창을 들을 때, 혹은 동틀녘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는 황금빛 햇살의 광휘를 온몸에 맞으면서, 어느 누가 감히 예술을 논하겠는가. 봄날 작은 꽃망울을 떠뜨리는 햇가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길고 짧고 굵고 가는, 물기 오른 여린 가지들이 이루는 조화와 오만가지 빛깔, 그것은 기적이다. 가을 새벽 거미줄에 붙들린 조그만 이슬알갱이에 다가서 보자. 그 깜찍한 비례며 앙증맞은 짜임새도 경이롭지만 알알이 비치는 방울 속마다 제각기 살뜰한 우주가 숨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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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매병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요의 아름다움 속에 한 가닥 부푼 정이 엷은 즐거움마저 풍겨준다. 부드럽고도 홈홈한 병 어깨의 곡선이 허리로 흘러서 다시 굽다리로 벌어진 안정된 자세도 빈틈이 없지만, 그 위에 기품 있게 마감된 작은 입의 조형 효과는 이 병의 아름다움을 거의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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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출판사 인터뷰 중 지옥에 딱 한 권만 가져가면 무엇을 가져갈 것인지 저자에게 물었다고 . 의외다. 저자는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꼽았다.
늦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는 해변에 앉아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내 숨결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
깨달음에 안달 났을 때 구입한 책이건만 아직 읽지 못했다.
아, 나는 언제쯤이면 저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련지.
제가 늘 말하지만 깨달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 한형조, <붓다의 치명적 농담>
아, 어제 술 쳐 먹고 명상을 빼먹다니! 일일삼성할 것!!
만일 누가 나에게 한 권의 책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지금의 나는
<역경>을 가져가리라.
<역경>을 이제까지 점치는 책이라 잘못 알다니!!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 카프카.
책은 도끼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수없이 깨지고 깨지고 깨져야.
그런 연후에야 나는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