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강의로 박웅현을 처음 만났다. 그러나, ‘박웅현의 책이군’하고 이 책을 산 건 아니다. 제목에 이끌려 샀더니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전혀 몰랐던 책, 읽었지만 공감하지 못했던 책, ‘아, 이 사람도 이 책을 재밌게 읽었구나’ 느끼며 공감했던 책 등등, ‘공감’과 ‘차이’의 변주랄까?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은 느낌.

 

예를 들면 나는 김훈이나 카잔차키스의 소설은 그다지 재밌게 읽지 않았지만 저자와 마찬가지로 밀란 쿤데라, 알랭 드 보통, 카뮈, 그르니에는 재밌게 읽었었다.

 



1강. 시작은 울림이다.

 

반면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판화가 이철수 씨 같은 분은 금시초문이었다. 저자는 강의를 판화가 이철수로부터 시작한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 가을 사과 중>

 


논에서 잡초를 뽑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벼와 한 논에 살게 된 것을 이유로

‘잡’이라 부르기 미안하다

 

<이쁘기만 한데...> 전문

 


깊은데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개가 짖어도

법문이다

 

<개소리> 전문

 

책 속의 일부만 발췌했을 뿐이지만 예사롭지 않다.

저자는 이철수의 판화를 토대로 풀무원 광고를 만들 수 있었다고.









 

 

 



이오덕 선생의 책을 몇 권 읽었던 것 같지만 저자가 소개한 <나도 쓸모 있을 걸>은 금시 초문이었다. 아이들의 시를 엮은 책이라고.

 

엄마, 엄마

내가 파리를 잡을라 항깨

파리가 자꾸 빌고 있어

 

<경화 봉화 삼동국교 1년 이현우, [파리]>

 

가다가 손님이 오면

고약한 직행은 그냥 가고요,

인정 많은

완행은 태워줘요.

달리기는 직행이 이기지만,

나는 인정많은 완행이 좋아요.

 

<의성 이두국교 5년 박희영, [버스] 중에서>

 

껌은 빳빳하지요.

그러나 입속에 넣으면

사르르 녹지요.

아무리 나쁜 사람도

껌과 같지요.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팽개쳐 버려도

누군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주면

껌과 같이 사르르 녹겠지요.

딱딱한 마음이

껌과 같이 되겠지요.

 

<부산 감전국교 6년 김경숙, [껌같은 사람]>

 

<나도 쓸모 있을 걸>은 이런 아이들의 시를 수록한 책이라고.

그야말로 심장을 쿵쿵 내려친다. 말해 무엇하랴? 읽어봐야겠다.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이라. 저자는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란 작품을 보면서 흔히 말하는 ‘그림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체험한다.  40분 동안 그림에 사로잡혔다고 


 


나 역시 루브르에 갔었지만

 

시이불견!!

 

2강.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나는 저자와 달리 김훈의 소설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칼의 노래>같은 책들의 문장을 읽다보면 어느덧 호흡곤란이 와서 읽다가 멈추기를 계속 반복해야 했는데, 뭐랄까 김훈의 문장은 전혀 빈틈이 없다. ‘충무공 문체’라고나 할까? 숨이 막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발췌한 김훈의 <자전거 여행>의 구절을 보자니 김훈에 대한 선입견이 산산이 깨진다. 왜 로쟈 이현우씨가 김훈에게 수필가로 돌아오라고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심각 치정관계다. 이 삼각은 어느 한쪽이 다른 두 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 냉이의 저항 흔적은 냉이 속에 깊이 숨어 있던 봄의 흙냄새, 황토 속으로 스미는 햇볕의 냄새, 싹터오르는 풋것의 비리내를 된장 국물 속으로 모두 풀어놓는 평화를 이루고 있다.

 

나는 오늘 냉이 된장국이 아닌 아욱 된장국을 먹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

김훈과 같은 ‘된장에 대한 사색’이 없었던 것이다. 아욱, 이런 된장!!!

 

미나리는 발랄하고 선명하다. ....그러므로 미나리는 된장의 비논리성과 친화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추장의 선명성과 잘 어울린다. 봄 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전혀 새로운 날들이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

 

아, 몇 달 전에 난 담양에 가서 미나리를 엄청 먹었다. 거의 한 소쿠리를 먹었다. 그것도 고추장에 찍어서. 역시 나는 ‘미나리에 대한 사색’없이 돼지처럼 먹기만 했던 것이다. 이런 된장!!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

 

미나리를 너무 쳐 먹어 대 숲으로 산책을 했건만 ‘대나무는 왜 안자랄까’하고 고개만 갸우뚱 했을 뿐 대나무의 ‘단단해지는 삶’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니. 아.....

 

5월의 산에서 가장 자지러지게 기뻐하는 숲은 자작나무 숲이다. 하얀 나뭇가지에서 파스텔톤의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날 때 온 산에 푸른 축복이 넘친다. 자작나무 숲은 생명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늘 흔들린다. 자작나무 숲이 흔들리는 모습은 잘 웃는 젊은 여자와도 같다. ...그래서 자작나무 숲은 멀리서 보면 빛들이 모여 사는 숲처럼 보인다.

 

......

자두의 생김새는 천하의 모든 과일들 중에 으뜸으로 에로틱하다. 자두는 요물단지로 생겼다. 자두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적 에로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박의 향기는 근본적으로 풀의 향기다. 풀의 향기가 수분에 풀려서 넓게 퍼진다. 자두의 향기는 전혀 다르다. 자두의 향기는 육향에 가깝다. 그 향기는 퍼지기보다는 찌른다. 자두를 손으로 만져보면, 그 감촉은 덜 자란 동물의 살과 같다. 자두는 껍질을 깍을 필요도 없이 통째로 먹는다. 입을 크게 벌려서, 이걸 깨물어 먹으려면 늘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이 안쓰러움이 여름의 즐거움이다.

 

수없이 처먹었건만 한 번도 자두를 먹을 때 안쓰러운 적이 없었다니!!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메마른 땅과 뜨거운 햇볕은 여름 과일들의 고난이 아니다.

어디로 피서를 가야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온 여름이 다 지나갔다.

축복은 저 숨막히는 무더위 속에 있었던 것임을 여름의 끝물에

한 입의 과일을 깨물면서 문득 알게 된다. 이 많은 과일들을 지상에 차려놓고,

힘센 여름은 이제 물러가고 있다.

 

나는 덥다고만 짜증내고 있을 때 김훈은 저런 생각을 하고 앉아있었다니! 저자 말대로

김훈은 미쳤다.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로 당신의 흰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맥 한 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정맥에서는

새벽안개의 냄새가 날 듯했고 정맥의 푸른색은 낯선 시간의 빛깔이었다.

당신의 정맥은 팔뚝을 따라 올라가서, 점점 희미해서 가물거리는

선 한 줄이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들어갔다. 겨드랑 밑에서부터 당신의

정맥은 몸속의 먼 곳을 향했고, 그 정맥의 저쪽은 깊어서 보이지 않았다.

 

- <화장> 중 

 

화장의 기억할 만한 구절임에 틀림없다. 화장의 화자가 추은주의 정맥에 대한 묘사 부분인데,

내가 느끼는 혼란은 이런 것이다. 소설은 분명 소설가와 분리해서 읽어야 할 것인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김훈의 소설은 그렇게 읽히지가 않는다. 화장의 화자가 추은주에게 편지를 보내듯 서술한 부분은 아름다운 문장이고 심지어 서정적이기도 하지만 김훈의 얼굴이 계속 어른거려 소설 자체에 몰입할 수가 없다.

 

‘김훈이 이런 편지를 썼단 말이야? 아, 낯 간지러’

 

즉 김훈의 수필엔 바로 빠져들지언정 소설에선 그럴 수가 없다. 나로선 소설가와 소설가의 화자를 동일시하는 작가는-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김훈이 유일무이하다. 왜 그럴까?














 

3강.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통찰.

 


한 때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알아보니 이미 판권이 팔렸다고. 그 이후 영화화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영리한 감독 혹은 제작자는 이 책을 가볍게 비틀어 <러브 픽션>이란 영화를 만들었다. “너를 마시멜로 해”는 “너를 방울방울 해”로 바뀌었고......


 

영화화를 고려할 만큼 나 역시 보통의 사랑에 관한 소설을 재밌게 읽었지만 그 보단 <불안>이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같은 보통의 에세이를 더 좋아한다. 어쩌면 그의 소설이 ‘삶의 허망함, 덧없음’을 말한다면 그의 에세이는 삶의 덧없음에 대한 위로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잠재적으로 모든 것이 예술의 풍부한 소재이며, 우리는 파스칼의 <팡세>에서 만큼이나 비누 광고에서도 귀중한 발견을 할 수 있다.

 

-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중

  

 

저자는 위 구절을 인용하며 코스모스를 들여다 본 경험을 얘기한다.

 

사실 처음에는 이거 뭐야, 볼 거 없잖아 하고 돌아서려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 코스모스 송이마다 색깔이 다 다르더군요. 그리고 옆에 다른 풀들도 있어요. 그리고 벌들이 보여요. 십 분쯤 지났더니 두 마리, 세 마리, 열 마리가 넘는 벌들이 있더라고요. 또 그 옆에는 무당벌레가 있고요. 벌을 다시 들여다봤더니 큰 몸통에 작은 날개가 파라락대며 엄청 빨리 움직이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와, 날갯짓하는 것 좀 봐라 하며 다시 꽃을 봤더니 한 송이 꽃인데 꽃잎 색깔이 다른 것들이 있어요. 야,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하는데 옆에서는 벌들이 다리를 비비고있고요. 자세히 보니까 고양이 앞발 모양이랑 비슷해요. 어, 그런데 오전 11시인데 아직까지 이파리에 이슬이 맺혀 있네? 하고 그 이슬 맺힌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거미줄이 두세 겹으로 쳐져 있고, 또 거미를 찾아봤더니 구석에 숨어 있고, 마침 거미줄이 흔들려서 생각하니 바람이 살랑이는 게 참 좋다 싶었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삼십 분을 앉아 있었더니 얘깃거리가 생기더라고요.

 

세상을 신문기사처럼 본다면 우리는 결국 매일 상투적인 얘기만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의 위와 같은 관찰의 힘이 기발한 광고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토대가 아닐까?

 

나는? 말을 말아야지.



 

4강. 고은의 낭만에 취하다.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분이건만 나는 고은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다. 역시나 저

자가 <순간의 꽃>에서 발췌한 시들 역시 도끼가 돼서 나를 후려친다.

 

 

 

저쪽 언덕에서

소가 비 맞고 서 있다

 

이쪽 처마 밑에서

나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둘은 한참 뒤 서로 눈길을 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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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 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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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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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저 서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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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뭇 가지에 매달린

천 개의 물방울

비가 괜히 온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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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할 도리 밖에. 


5강.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알제는 해가 비칠 때면 사랑에 떨고 밤이면 사랑에 혼절한다.

 

- 김화영,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저자가 보기에 지중해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라고 하는데 가본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접한 지중해는 능히 그럴 것 같다.

 

모두가 무너지고 오직 화려한 대문만 남은 이 사랑의 성은, 그리하여 마땅히 하나의 폐허인 것이다. 폐허 위에 내리는 햇볕은 그래서 더욱 따뜻하다.

 

보들레르는 현대성을 ‘덧없는 것’으로 규정했다. 순간들은 찰나적이고 되돌아 갈 수 없으며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아프지만 또한 그래서 아름다운 게 아닐까?

 

해가 설핏해질 무렵 돌연 우리의 뼛속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저 기이한 슬픔......

 

햇빛 찬란한 날들이 지나면 어느덧 어둠이 다가온다. 그러면 허무함에 슬픔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시 해는 떠오르니......

 

여행지에서 그렇게 만났다가 그렇게 떠나보낸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 일생이 한갓 여행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행길에서 우리는 이별 연습을 한다. 삶은 이별의 연습이다. 세상에서 마지막 보게 될 얼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한 떨기 빛, 여행은 우리의 삶이 그리움인 것을 가르쳐준다.

 

어떤 사람들은 ‘덧없음에 대한 감각’을 타고 나는 것 같다. 그들에겐 모든 순간들이 안타깝다. 따라서 그 어떤 순간도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순간을 통해 영원을 꿈꾸는 자들이다.

 

나는 한 알의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리라 – 폴 세잔

 

저자는 김화영의 <바람을 담는 집>에 나온 위의 문구를 모티브로 삼아 한 정유회사의 광고를 만들었다고.


 

푸른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방울처럼 딸랑딸랑 울리던

 

지중해적인 삶. 그런 지중해적인 삶에 대해 저자는 ‘개처럼 살자’고 말한다. 개는 어제를 후회하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순간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기에.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있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지상의 양식도 참 좋아했던 책이었는데, 그리스인 조르바는 아직 끝까지 다 못 읽었다. 아직 대지와 탯줄을 끊지 않은 조르바처럼 나 역시 조르바의 탯줄을 붙잡아야.....

 

카뮈에 열광한 사람은 대개 그르니에를 읽게 마련 아닌가? 그리고 우리 세대는 카뮈와 그르니에를 김화영의 번역본으로 읽었다.최근에 카뮈의 <이방인>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새로 번역된 <이방인>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는데, 설마??

 

불어로는 ‘어머니’와 ‘바다’가 발음이 같다. 누군가 이방인의 주인공 이름인 ‘뫼르소’는 바다인 ‘메르’와 태양인 ‘쏠레이으’의 합성어라고 주장했었는데 그런 것 같다. 태양과 바다(엄마)를 뺀 지중해, 혹은 이방인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나는 카뮈의 <이방인>보다는 그르니에의 <섬>을 더 좋아한다. 박웅현의 후배 이원홍은 스승의 날에 꽃과 함께 이런 메모를 보냈다고.

 

“나는 <섬>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의 것처럼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는 그런 일을 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게 온 이 같은 행운을 기뻐할 뿐이다. ”

 

- 카뮈의 마음으로 내 영원한 그르니에에게

 

박웅현은 행복한 사람일터. 스승에 대한 저런 찬사라니!

 

.....겉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카뮈의 서문>

 

겨울 숲 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 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장 그르니에 [섬]중 김화영의 서문>

 

어딘가 떠나고 싶다면 <섬>을 가져가시라.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장 그르니에, <섬> 중 

 































6강.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강의 전체를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할애하다니. 그만큼 이 소설의 스펙트럼은 넓을 것이다. 

정치, 역사, 철학,예술, 사랑 등등

 

메타포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메타포를 가지고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메타포가 하나만 있어도 생겨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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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신학자가 천국과 양립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성교나 성교와

연관된 관능성이 아니다. 천국과 양립될 수 없는 것은 흥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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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이란 우리는 마지막 역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이 소설을 니체의 ‘영겁회귀’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키치적 관점에서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음악의 형식적 측면으로도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내게 이 책속의 한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다음의 문장을 고를 것이다.

 

“당신의 임무는 수술하는 거예요! ”



“임무라니, 테레사.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임무를 의무로 해석해도 될까? 살아가면서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을까?

의무 때문에 살아가는 삶이라면 얼마나 무겁겠는가?

 

해야 할 건 없다.

순간을 영원처럼 살면

 

7강 불안과 외로움에서 당신을 지켜주리니, 안나 카레니나.

 

아, 부끄럽게도 아직 안나 카레니나를 읽지 못했다.

 

읽고 쓰자.


(지금은 읽었다.) 

 

8강.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

 

저자는 우리 옛 선조들의 지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들을 꼽았다. 손철주, 오주석, 법정 등등.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들 도리어 누가 되고

부귀가 하늘에 닿아도 수고에 그칠 뿐

산속으로 찾아오는 고요한 밤

향 사르고 앉아서 솔바람 듣기만 하리오.

 

 

해질녘 서편 하늘을 물들이는 장엄한 노을 앞에 섰거나, 한밤중 아득한 천공에서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무리의 합창을 들을 때, 혹은 동틀녘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는 황금빛 햇살의 광휘를 온몸에 맞으면서, 어느 누가 감히 예술을 논하겠는가.

 

봄날 작은 꽃망울을 떠뜨리는 햇가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길고 짧고 굵고 가는, 물기 오른 여린 가지들이 이루는 조화와 오만가지 빛깔, 그것은 기적이다. 가을 새벽 거미줄에 붙들린 조그만 이슬알갱이에 다가서 보자. 그 깜찍한 비례며 앙증맞은 짜임새도 경이롭지만 알알이 비치는 방울 속마다 제각기 살뜰한 우주가 숨어 있다.

 

 

 

 

 


 

 

고려청자 매병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요의 아름다움 속에 한 가닥

부푼 정이 엷은 즐거움마저 풍겨준다. 부드럽고도 홈홈한 병 어깨의

곡선이 허리로 흘러서 다시 굽다리로 벌어진 안정된 자세도 빈틈이 없지만,

그 위에 기품 있게 마감된 작은 입의 조형 효과는 이 병의

아름다움을 거의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어느 출판사 인터뷰 중 지옥에 딱 한 권만 가져가면 무엇을 가져갈 것인지 저자에게 물었다고 . 의외다. 저자는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꼽았다.

 

늦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는 해변에 앉아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내 숨결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

 

깨달음에 안달 났을 때 구입한 책이건만 아직 읽지 못했다.

아, 나는 언제쯤이면 저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련지.

 

제가 늘 말하지만 깨달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 한형조, <붓다의 치명적 농담>

 

아, 어제 술 쳐 먹고 명상을 빼먹다니! 일일삼성할 것!!

만일 누가 나에게 한 권의 책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지금의 나는

<역경>을 가져가리라.

 

<역경>을 이제까지 점치는 책이라 잘못 알다니!!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 카프카.

 

책은 도끼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수없이 깨지고 깨지고 깨져야.

그런 연후에야 나는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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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6-19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은 도끼다』라는 책이 나오기 전에(아마 2011년 초쯤?) 우연히 사내 강좌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강좌의 제목이 `박웅현의『인문학으로 광고하다』` 였지요. 그 날 들었던 `강의내용`과 이 페이퍼에 담긴 내용들이 너무나 닮아서 깜짝 놀랐네요. 강의 내용은 나무랄 데 없이 좋았는데, 그래도 저는 아직까지도 저자한테 `불만`이 딱 한 가지 있답니다. 사내 강좌를 들으러 가기 전에 제가 일부러『생각의 탄생』이라는 책 내용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심오한 질문` 한 가지를 미리 준비해 갔었는데, 그만 `질의응답` 시간을 전혀 주지 않고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하고 인정사정없이 끝내버리더군요. 딱 강사료 받은 만큼을 모두 강의로만 꽉 채우겠다는 욕심도 느껴져서 그리 큰 불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 서운함이 조금 남아 있긴 하네요.

시이소오 2016-06-19 16:14   좋아요 0 | URL
박웅현씨, 어쨌든 광고쟁이잖아요.
자본주의의 제일선에 계신분이니, 받은만큼만 하신게아닐런지요?

오렌님, 많이 서운하셨나봐요^^

2016-06-19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0 0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6-06-20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도끼다 나오고 나서 제가 사는 지방에까지 감사하게도 강의를 오셔서 작가분을 뵌 적 있었어요. 책도 재미있게 읽었고 강의도 잘 들었는데 강의 후 새 책은 언제 나오느냐는 질문에 이제 당분간 책은 안 쓰겠다 바닥까지 싹싹 긁었다 라고 답하셨는데 오래지 않아 새책이 나오더라구요.^^;;;;;

시이소오 2016-06-20 13:17   좋아요 0 | URL
ㅋ ㅋ ㅋ ㅋ 돈 좀 되셨겧네요 ^^

alummii 2016-06-2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욱 된장! 뿜었네요 ㅎㅎㅎ 오늘 리뷰 아주 감동입니다 정독하고가요~♡

시이소오 2016-06-20 23:10   좋아요 0 | URL
아욱 된장, 웃기려고 쓴건데 웃어주시니 감사합니다 ^^

페크pek0501 2016-06-23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자기한, 재밌는 님의 글을 읽다 보니 제가 읽지 않은 책 같았어요. 읽은 책인데 말이죠.^^

시이소오 2016-06-23 14:36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

니페딘1T 2016-07-04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보고서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풍요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책 안에서 추천해 준 책들을 산다고 카드결제액도 많이 올라갔습니다. ㅠㅠ

좋은 서평을 읽으니 책을 한번 더 읽은것 같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04 12:19   좋아요 0 | URL
서평이랄게 있나요?
책이좋은거죠
제가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