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인생 강의 -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사는 변신의 삶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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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설문에 참여하고자 무인도에 가지고 갈 세 권의 책을 한 달간 고민했다. 설문은 끝났건만 아직도 두 권을 정하지 못했다. 한 권은 고민하지 않았다. 수백만 권의 책 중에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아닐까. 무인도니까 이왕이면 독일어판을 가져가고 싶다. 책은 니체 생전,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내졌다. 세계에서 단 7. 오늘날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가장 많이 출간되는 철학자가 있다면 니체다. 매달 니체관련 신간이 나오는 것 같다. 왜 오늘날 니체는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가 된 것일까.

 

신은 죽었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물론 종교적 광신도들이 저지르는 온갖 죄악과 폭력에 나날이 신도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것은 오늘날 인간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역으로 이렇게 말했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신이 없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니체는 그의 말처럼 망치를 들고 철학을 했다. 니체는 인간이 아니고 다이너마이트다. 모두가 신의 존재를 믿었던 19세기에 그는 신의 죽음을 선포한 것이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적인 가치가 상실됐다는 뜻이다. 이제 추구해야 할 아무런 가치도 없다.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허무주의다. 니체가 오늘날 팔리는 건 그만큼 오늘날의 사람들이 허무에 빠져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니체를 단지 허무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망치로 머리를 내려쳐야 한다.

 

권력에의 의지

 

권력에의 의지란 신이 없으므로 히틀러같은 파시스트가 되란 말인가? 노예가 되지 말고 노예를 부리는 주인이 되란 뜻인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베르크손의 용어로 말하자면 엘랑비탈이 아닐까. 약동하는 생명 말이다. 권력은 저항이다. 권력은 허무에 빠져들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는 힘이다.

 

위버멘쉬 ; 초인과 최후의 인간말인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가 무엇인가? 그것이 위버멘쉬’, 초인이다. 이에 대립되는 시장의 인간. 이들이 바로 최후의 인간이다. (‘최후의 인간보다 말인末人이 더 적확한 역어로 보인다. ‘말인인간 말종을 연상시키지 않은지?)

 

말인은 안락하다. 현재를 바꾸고 싶지 않다. 자신들이 노예라는 걸 모른다. 니체는 인간에게 초인이 되라고 말한다. 초인은 자신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목표는 어디 있는가? 목표는 없다. 초인은 목표를 스스로 만든다. ‘말인을 한병철의 용어로 하자면 오늘날의 성과주체.

 

사람은 짐승과 초인 사이를 잇는 밧줄, 하나의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점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넘어가는 과정이요, ‘내려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

 

영원회귀

 

만일 우리가 영원히 똑같은 삶을 반복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사상이다. 내가 지금 한 뻘짓이 다음 생에 또 다시 반복 되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삶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그럼에도 니체는 영원회귀를 긍정하라고 말한다. 순간을 긍정하고 삶을 긍정하라고. 만일 지금 이 순간에 한 행동이 수 억번 반복된다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내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원회귀가 거짓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영원회귀가 있다고 믿어본다면?. 만일 영원회귀가 사실이라면 지금 이 순간 게임이나 하고 있어야 할까.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을 때마다 파블로프의 개 마냥 영원회귀사상을 떠올려보자.

 

정신의 세 단계 : 낙타, 사자, 어린 아이.

 

낙타의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 이 낙타에 가장 어울릴법한 캐릭터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의 말 복서와 성석제 <투명인간>의 주인공 만수가 떠오른다. 만수는 온갖 의무만을 짊어진다. 가족, 사회, 직장, 국가..... 만수는 기존의 관습, 도덕에 복종하기 바쁘다. 전두환이 국민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만수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가족들을 돌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없다. 티비에서 누군가를 빨갱이라고 하면 그렇게 믿는다. 우리 주변엔 이 만수, 이 낙타들이 수 천만 명 있다.

 

낙타의 정신이 너는 해야 한다에 복종한다면 사자의 정신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명령에 맞서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가치에 복종만 한다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선 우선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마지막 어린 아이의 정신은 창조를 놀이처럼 긍정하는 정신이다.

 

어린아이는 순진 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낙타의 정신이 기존의 가치를 답습하는 것이라면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한다고 해서 삶이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아이의 정신으로 도약해야 한다. 자크 아탈리의 <언제나 당신이 옳다>를 읽다보면, 악이 부상하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가치를 실천하는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의 일화가 소개된다. 어린아이를 거룩한 긍정이라 말한 것은 우리의 현실을 단지 비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아모르 파티 : 네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를 읽을 때 마다 춤을 못 배운 게 한이다. 니체는 춤출 줄 아는 신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디오니소스 처럼. 허무한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폴론적인 것만으론 부족하다. 가끔은 술도 마시고 춤도 춰야 한다. 이성과 논리뿐만이 아니라 광기와 예술도 필요하다.

(홍대 클럽과 이태원 클럽은 주민등록증 검사를 철폐하라! 철폐하라! 나이 들어도 춤춰야 한다!! 막춤은 춤이 아니라 단지 몸짓이란 말인가. 캬바레는 구리다! 구리다!)

 

니체의 철학을 단 한 마디로 말하자면 부정성을 긍정하는 것이 아닐까. 권력에의 의지, 위버멘쉬, 영원회귀, 어린 아이의 정신, 아모르 파티 등 니체의 모든 사상들은 결국 이 한 가지로 수렴한다. ‘삶은 고해의 바다지만 우리는 삶을 긍정해야 한다.’


니체는 삶이 허무함을 인정한다. 삶이 고통스럽다는 걸 인정했다. 그러나, 단 한번도 허무에 ,고통에 주저앉자고 말하지 않았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만 말자. 니체가 말한 초인처럼 살다간 위인들 중에 조르바가 떠오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순간을 영원처럼

영원을 순간처럼 살자. 

우리는 자유다.  


 

그리고 그대들이 비록 큰 일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다! 가자!


높은 종족에 속할수록, 완성하는 일은 드물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충분히 완성되지 않은 게 아닐까?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그 모든 것이 그대들 항아리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부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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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6-06-0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고 싶게 해주는 명리뷰네요. 감사 ^^

시이소오 2016-06-06 09:02   좋아요 0 | URL
읽고 싶어지셨다니,
이럴 때 가장 리뷰 쓴 보람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

막시무스 2016-06-06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은지가 좀 되었는데 덕분에 다시 새록해지네요!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6-06 12:56   좋아요 0 | URL
복습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

fledgling 2016-06-06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 리뷰 정말 잘 쓰셨네요~ 다른 책에서 본 기억으로는 ˝권력에의 의지˝가 판본마다 달라서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니체의 동생인가? 히틀러때문에 출판당시 판매를 위해 수정했다는 에피소드도 있구요. 히틀러가 권력에의 의지로 해석해서 열광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강신주 책이었는지,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이었는지 다시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여하튼 권력으로 번역할지 힘으로 번역할지 학자들 의견이 분분한 것 같은데 저는 권력보다 힘이 맞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넓은 의미로 보면 힘도 권력에 포함되기도 하네요

시이소오 2016-06-06 18:24   좋아요 0 | URL
거기까진 생각해보진 않았는데요. 분명 권력이란 역어가 부정적 뉘앙스를 풍겨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한듯 합니다. ^^

cyrus 2016-06-06 21:25   좋아요 1 | URL
fledgling님 기억이 맞을 겁니다. 니체의 여동생이 오빠의 저작물을 관리, 편집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녀 때문에 니체의 글이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왜곡되었고요. 히틀러는 그런 그녀를 좋아했고, 니체의 여동생은 히틀러의 관심 속에서 명예를 누리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시이소오 2016-06-06 22:00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ㅎ ㅎ

pada 2016-06-06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인도에 가지고 갈 책이라. 생각해봐야겠네요. 그전에 많은 책을 읽어봐야 할 듯. ㅠㅠ.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시이소오 2016-06-06 22:01   좋아요 0 | URL
파다님, 제가 더 감사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