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고 : 본 페이퍼에는 다수의 욕설이 포함되어 있으니 고상하고 우아하신 분들은 클릭을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대학 시절, 과에서 영화 소모임 활동을 했다. 축제 때, 영화제를 주최했다. 이른바 <섹스 & 파시즘 영화제>. 다섯 편의 영화를 틀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 두산 마카비예프의 <유기체의 신비>,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피에르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 영화제는 대박 났다. 매 상영회마다 학생들로 강의실이 꽉꽉 들어찼다. 지금이야 어디서건 야동을 다운 받아 볼 수 있지만 90년대만 해도 대학생들이 위에 상영된 영화들을 볼 수 있는 루트가 별로 없었다. 신세계였으리라.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강신우, 이상용의 <30금 쌍담>은 네 편의 영화를 토론의 소재로 삼는다. 영화제에 소개한 영화들과 세 편이 겹친다. <감각의 제국>, <살로, 소돔의 120일>, <시계태엽 오렌지>, 그리고 루이스 부뉴엘의 <비리디아나>
이 네 편의 영화를 관객들과 함께 보고, 상담한 내용들이 책으로 엮였다. 강신주의 조언들은 젊은이들에게 유용해 보인다. 강신주는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사랑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말고 일단 자라고 충고한다. 자고 났는데 이성과 섹스 말고 뭔가 다른 걸 해 보고 싶다면 사랑을 느끼는 거란다. 고개가 끄덕끄덕. 일단 자고 보시라.
언급한 여섯 편의 영화 모두 훌륭한 영화들이지만,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 120일>은 그야말로 위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파시즘이 종말을 고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네 명의 파시스트는 아홉 명의 소년, 소녀를 납치해 자신들만의 제국을 만든다. 민병대들이 소년, 소녀들을 감시한다. 한국 군인들과 견찰들은 민병대가 아닌가. 네 명의 파시스트는 누구일까? 색누리당 ,도살자의 딸과 같은 정치인, 개독같은 종교인, 삼성 같은 재벌, 양승태 같은 판사와 떡검 같은 법률가들 아닐까. 이들이 작당하여 국민의 삶은 지옥이 된다. 이 영화는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야 한다. 파시스트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우리가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건 단순히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소년 소녀들에게 서로의 똥을 먹으라고 강요한다. 죽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똥을 먹는다.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희생자들은 같은 희생자들을 고발한다. 파시스트들은 사랑을 금지한다. 그러나, 흑인 하녀와 사랑을 나누던 남자가 파시스트 앞에 서서 한 팔을 당당히 든다. 영화 속에서 네 명의 파시스트들이 유일하게 움찔한 순간이다.
엔딩의 민병대 청 년 두 명이 클래식 음악을 끄고 엔니오 모리코네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이 지옥 한 가운데에서 파솔리니는 희망을 말하고자 한 게 아닐까. <살로, 소돔 120일>은 회고적이면서 현재적이고 예언적인 작품이다. 한편의 묵시록이다.
똥이 나오니 더럽고 욕설을 하니 우아하지 못하다고? 클래식을 들으며 눈앞에 버젓이 드러나는 파시스트들의 온갖 추악한 행태를 보지 않으려는 게 우아한 걸까? 똥을 쳐 먹고 있으면서 똥인지 된장인줄 모른다. 나는 우아하고 고상하게 욕 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아니, 그러고 싶지가 않다. 개새끼를 개새끼라 하고 쌍년을 쌍년이라 하지 그럼 뭐라 불러야 할까? ‘개새끼님’이라고 할까?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사랑을 재발견할 것을 주장한다. 강신주의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너나할 것 없이 안락하고 편안한 것만 추구한다. 위의 영화들은 포르노가 아니다. 오늘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우리가 포르노다. 우리에게 똥을 먹이는 자본주의 앞에서, ‘신비로운 공명’을 바탕으로 한 사랑만이 저항의 출발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정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지배한다. 에로스의 날개짓은 우리가 ‘전인미답의 지대로의 모험을 감행할 때 ’마다 우리를 건드리는 것이다.
압도적으로 강해지자.
사랑을 재 발명할 수 있도록.
원망하는 게 가장 쉽거든요. 그 순간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선한 자가 되는 겁니다. 니체는 이걸 ‘노예 감정’이라고 말했어요. ‘주인’은 원망하지 않아요. 주인은 문제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원망하기보다 해결하고 타계할 길을 궁구하죠.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쓴 책 중에 <미니마 모랄리아>가 있습니다.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뜻이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도덕적인 부분도 ‘최대성’을 더 가치 있게 여기기보다, 최소한의 것이 무엇인지 먼저 고민할 필요가 없거든요.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개선책은, 글을 쓰는 거예요. 욕망을 배설할 방법이 필요한 거예요. 자, 이제 여기 무대 앞으로 나와 보세요. 한번 욕해 보세요. 욕하는 걸 주저하는 사람들 있죠? .....사실 욕은 굉장히 건강한 거예요. 그런데 이처럼 건강한 욕조차 못 하니까 내면에 막 쌓이는 거예요.
따라서 완전한 약자나 완벽한 강자는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전자는 폭력을 행사할 힘이 없고, 후자는 그것을 굳이 행사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그 중간에 있는 어정쩡한 사람들이다. 누군가에게는 강자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약자인 사람 말이다. 그러니 압도적으로 강해져라. 내면뿐 아니라 외면까지도!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폭력적 성향, 폭력의 유혹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