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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파트릭 모디아노의 1978년 작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선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2014년 작,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로 작가와의 두 번째 만남. 안개에 휩싸인 듯 ‘도대체 뭐지’하며, 의심을 가득 담아 작가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심정으로 한발 한발 조심스레 소설을 따라 갔다. 책을 덮고 나니 그제서야 무언가가 밀려온다. 안개의 냄새를 맡는다.
‘아, 좋구나.’ 현실로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소설 속 분위기에 취해 있고 싶었다. 안개에 싸인듯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의 노스탤지어?
희붐하거나 어렴풋하거나 아득하거나 아련하거나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며 몽환적이다.
보아하니, 파트릭 모디아노의 모든 작품은 자신의 기억, 혹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도시인 오딧세우스의 이야기다. 오딧세우스와 달리 모디아노의 주인공에겐 도달해야 할 장소도 없고, 반드시 만나야할 사람도 없다. 어디를 가건, 누구를 만나건 중요하지 않다. 시간을 거슬러가는 여정의 끝에서 만나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이므로.
이 소설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처럼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별일 아닌 줄 알았다. 잃어버린 수첩, 어느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미지의 남자와의 만남, 질 오톨리니는 주인공 다라간의 잃어버린 수첩에 적힌 기 토르스텔을 안다며 그의 신변을 묻지만, 다라간은 누군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질 오톨리니와 동행한 상탈 그리페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다라간은 점차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어머니, 어머니의 친구였던 보브 뷔냥, 자크 페랭 드 라라. 살해당한 여자, 콜레트 로랑, 그리고 아니 아스트랑......사진 속, 어린 시절의 자신...
책장을 덮을 때, 육체와 달리, 내 영혼은 현재에 없었다. 과거의 순간들을 헤매고 있었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웃고 울던......사랑 앞에 설레여하고, 사랑을 갈구하고, 버림받기도 했던,..... 수줍은 표정의 어린 시절의 내가 거기 있었다. 불현 듯 이제 더 이상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자, 한 마리 짐승에게 심장 한 쪽을 베인 듯, 통증이 밀려온다.
.... 이렇게 아득하다니, ......이렇게 아련하다니.
어느새 눈은 물기에 젖어, 슬픔이 밀려오고......
....그 슬픔을 다독인다.
‘잃어버린 시간’을 거슬러 올라
안개 속에 가려지고 ‘망각’속에 버려졌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
........아, 아름다웠구나. 나의 삶도.
삶이란 이토록 덧없는 것이라니.
기쁨이 위로가 되듯 슬픔도 위안이 된다.
추억을 향유하시라.
안개에 축축이 젖어.
이제 뷔퐁의 <박물지>말고 다른 글은 읽지 않게 된 그다. 문득 어느 여성 철학자가 쓴 회고록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철학자는 전쟁통에 어떤 여자가 한 말에 충격을 받는다. "어짜라고요. 전쟁이 났다고 해서 나와 풀 한 포기 사이가 변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다라간에게 그 문장은 다른 뜻을 지녔다. 재난이 닥치거나 마음이 비탄에 잠겼을 때에는, 행여 균형을 잃고 배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된 한 지점을 찾아서 의지하는 것 말고는 살 길이 없다. 고무 튜브를 움겨쥐틋, 우리의 시선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송이의 꽃잎들에 멈춘다. 창문 너머 그 소사나무 – 혹은 사시나무 –가 보이면 다라간은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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