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삼촌, 현기영
현기영의 <순이삼촌>은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되었다. 4.3을 소재한 한 최초의 작품.
15년 전 이 작품은 내 삶의 전환점, 격동의 모퉁이가 되었다. 나름 수많은 결심을 했다. 코너를 돌아 모르는 곳에 들어설 때까지 내 앞에 무엇이 버티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 긴장은 ‘진실’이라는 신세계에 대한 두려움, 혼란, 호기심, 쾌락.....일 수 있다. 분명 한 것은, 이 긴장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이다.
이십세기 기수, 다자이 오사무
한수산의 분석이 딱 옳다. “그를 읽는다는 것은 젊은 날의 상처다. 그러므로 그 상처가 나을 때 독자는 그를 떠난다. 다자이는 홀로 거기 있다. 어린이가 자라면 또 다른 젊은이가 다자이를 만나고....다만, 나는 안다. 그는 자신의 초기 작품에서 더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나아가지 못한 작가라는 것을.”
20대 때 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했다.
40대의 나. 다자이 오사무 곁을 떠나지 못한다. 왜 나는 여전히 그 옆에서 어슬렁거리는 걸까.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소설과 달리 영화는 파커가 사라진 밀림 입구를 두 번 클로즈업한다. 통증이 느껴지는 압권이다. 소년은 엉엉운다. 살아남은 감격 때문이 아니라 7개월 넘게 함께했던 리처드 파커가 뒤도 안 돌아보고 “아무 인사도 없이” 떠났기 때문이다.
정희진도 그 장면에서 울었다.
나도 울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 늦게 울었다.
은밀한 호황, 김기태, 하어영
2010년 한국 사회의 ‘화대’는 7조 원. 같은 해 영화 산업 매출 1조 2천억의 5배를 넘는다.
성 판매는 당연히 노동이다. 그것도 위험한 중노동이다. 그러나 나는 ‘성 노동’에 반대한다. 노동이되 ‘어떤 노동’인가, 수천 년간 왜 ‘여성 직종’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너무 오래된 노동을 두고 ‘노동이 VS 아니다’를 논하는 이 사회의 지성이 민망하다.
탈식민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은 “민중은 말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면서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했다. 당사자의 말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무조건 옳거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생각 역시 사회적 산물이다. 어떤 여성은 ‘생존자’보다 ‘성 노동자’라는 정의에 더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말한다. 나는 성 판매가 기존의 노동 범주에 포함되기보다는 노동 개념의 변화를 촉진하는, 새로운 문제 제기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손 무덤, 박노해
시집 <머리띠를 묶으며> 중
‘턱뼈 무덤’(어느 성형외과에 전시된 턱뼈)을 보고 박노해의 시 <손 무덤>이 생각났다. 여기서 예술다움이 무엇인가를 가장 창조적인 방식으로 질문한 그의 시를 새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0여 년 전 최소한 내 주변에서 그의 시를 ‘읽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외우고 노래했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 거리는 손을
기름 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집을 찾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공상이다. 생각은 몸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안 따른다는 말은 이상하다. 머리(의식)도 몸이다. 의식은 몸의 어느 부위인가? 그런 부위는 없다.
지금은 비가....조은
그녀의 시 <지금은 비가...>와 동일시하면서 잠시 행복하고 싶다. 남의 시로 연애 편지를 대신하는 이들처럼 이 시가 내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첫 시집 <사랑의 위력으로>에 처음 등장하는 <지금은 비가....>는 시집 전체를 운명 짓는다. 서른 즈음에 어떻게 이런 언어를! 차갑고 뜨거운 전율이다.
시집 <사랑의 위력으로>중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 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
아, 기적같이
부르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은 비가......
벼랑에서 만나기를 원한다. 삶 자체가 벼랑의 선택이다. 사방이 배수(背水)의 집이다.
벼랑에 살다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벼랑을 경멸하는 자, 벼랑으로 몰릴까 봐 못 본 체 지나가다 넘어지는 자, 친한 척 다가와 벼랑만의 경험을 인터뷰하는 자, 그저 벼랑에서 함께 살자고 하는 자, 벼랑을 파괴하고 공사판을 벌이는 자, 벼랑에 매달린 손을 밟는 자......
인맥 관리, ‘밀당’, 포커페이스.....몸 사리고 계산해봤자다. 남김없이 준다고 해서 바닥나는 마음은 없다. 인간이 바닥을 드러낼 때는 따로 있다. 그러니, 목숨처럼 해 다오.
전화, 마종기
1976년에 출간된 시집 <변경의 꽃>에 실렸다.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외로움에 대해서도 시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지만 내겐 이 시만한 외로움은 없다. 외로움에도 고립, 좌절, 무기력 등 여러 가지 감촉이 있다. 이 시는 간절한 외로움이다. 촉각과 청각의 공감각이 뛰어난 ‘전화’소리에 몸이 젖는다. 읽고 또 읽노라면 외로움이 몸에 가득 차서 손목이라도 그어 몸 안의 외로움을 빼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 라몬 삼페드로
영화 <씨 인사이드>의 원작이다.
생애 한순간만이라도 이렇게 살아봤으면. 책장마다 간절함과 열정의 불꽃이 튄다.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는 지은이가 사지 마비 상태가 된 이후 형수 등 가족들의 도움으로 살다가, 안락사 권리를 위해 투쟁한 기록이다.
그는 안락사를 위해 법, 교회, 언론.......온 세상을 상대로 싸웠다. 그의 생의 절정은 죽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투쟁할 때였다.
안락사를 생명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생명을 무시하는 태도다. 문제의 본질은 생명이 아니라 고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