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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주름 - 3단계 ㅣ 문지아이들 13
매들렌 렝글 지음, 오성봉 그림, 최순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왜?"라고 물으면 안되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체포되는 나라가 나오는 SF영화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갑자기 그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매들렌 렝글의 환상동화 <시간의 주름>은 오래 전 비디오로 본 그 영화를 떠올리게 하였다.
오늘 나는 오랜만에 짧지 않은 장편동화 한 권을 두 시간 만에 해치웠다. 그것도 푹 빠져서...
천재과학자를 엄마아빠로 둔 열두 살의 메그는 못생기고 공부도 못하는 자신을 돌연변이라고 생각한다.
메그에게는 쌍둥이 외에도 다섯 살짜리 동생 찰스가 있는데 녀석은 상태가 더욱 심해서 말도 잘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모종의 연구(미 항공우주국과 관련된)를 위해 집을 떠났던 아빠는 언젠가부터 연락이 두절돼 동네
사람들은 메그의 집을 손가락질하며 수근거린다. 이것이 또한 스트레스인 메그.
메그와는 달리 우등생인데다가 학교 농구부에서 활약하여 인기도 좋은 편인 캘빈이 어느 날 우연히
메그의 집에 놀러오는데, 그들은 순식간에 같은 종류(스스로를 별종이라고 생각하는)의 인간임을
알아차리고 친구가 된다.
이 조금 이상한 아이들, 찰스와 캘빈, 메그가 그날밤 숲에 산책을 나갔다가 마녀의 오두막 가까이에서
저게뭐야, 누구야, 어느거야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아줌마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런데 저게뭐야, 누구야, 어느거야라는 이름의 아줌마들이 하는 말은 90퍼센트가 유명한 문인들의 작품
속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그것이 또 이 책에 묘한 활기를 부여하고 있다.
"코메 테 피치올 팔로 아마로 모르소."(단테, 사소한 잘못이 얼마나 우리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는지...)
"운 아스노 비에호 사베 마스께 운 뽀트로."(스페인 소설가 폐레스 감도스, 늙은 당나귀가 젊은
망아지보다 많이 안다.)
"핑크 세룬트 아니미, 라로 에트 페르파우카 로켄티스."(호라티우스, 행동을 적게 말은 더욱 적게 하라!)
아줌마들의 수다를 듣고 있던 아이들 중 다섯 살짜리 찰리가 버럭 짜증을 낸다.
"특히 누구야 아줌마, 그 말끝마다 인용 좀 안하면 안돼요?"(무서운 아이다!)
그러자 다른 두 아줌마가 찔끔하며 나서서 거든다.
"자기 말로 얘기하는 것보다 인용하는 게 더 편한 걸 어떡해!"
"이건 나름대로 우리 방식의 유머라구."
평소 나의 의견이라 할 만한 게 없어서 걸핏하면 책에서 인용을 잘하는 나의 어깨도 덩달아 움찔한다.
신화 속처럼 날개 달린 동물로 변신한 저게뭐야 아줌마의 등에 올라탄 아이들은 시간의 주름을 통과,
낯선 행성들을 거쳐 아빠가 갇혀 있는 카마조츠 행성에 도착하는데...
이 흥미로운 동화는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꽤나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다름'에 대한 고찰, 인생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을 노골적으로 계도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적절하게 이야기들 속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중용부인의 유리구슬에 비친 지구와 또 그 곳 어느 모퉁이에 살고 있는 자신의 엄마들을 지켜보며
아이들은 우주 속의 한 점에 불과한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데 여기서 중용부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그게 나의 제일 곤란한 문제예요. 애착심 말예요. 누굴 좋아하지만 않는다면 난 항상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나에게 있어 애착심은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어쩌면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때때로 나를 엄습하여 전율케 한다.)
아이들과 더이상 동행할 수 없게 되자 저게뭐야 아줌마는 아이들에게 금과옥조의 말을 남긴다.
"알비센트 빈 이히 니히트. 도흐 비엘 이스트 미어 베부스트."(괴테, 나는 많은 것을 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
이 말은 순수하지만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찰스에게 저게뭐야 아줌마가 따로 당부하는 말처럼 지나친
자존심과 오만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아이들끼리 도착한 다음의 이상한 나라는 모든 것이 규칙적이고 사람들이 로봇처럼 동일한 리듬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 나라를 통제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는 붉은 광채의 눈을 가진 '그것.'
그의 앞에 서자 부들부들 떨면서도 캘빈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책의 구절을 인용한다.
"두려움 그 자체 말고는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파이팅, 캘빈!)
인생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없애주겠으니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붉은눈이 아이들을 꼬시는데
다섯살짜리 찰스가 냉큼 나선다.
"고맙지만 행복이든 불행이든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리겠어요." (한마디로 입을 다물라는 소리다.)
똑똑한 만큼 과도한 자만으로 결국 붉은눈에게 장악되는 찰스, 어렵사리 여러 행성을 거쳐 찾아왔더니
모든 문제를 해결하긴커녕 무능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아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이들의 이 모험기에는 가족관계 등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사유들로 가득하다.
결과는 해피엔딩.
누구야아줌마들이 아이들에게 준 마지막 열쇠는 결국 사랑이었던 것이다.
너무 안이한 결말인 듯하여 책의 마지막 장을 덮기가 심히 아쉬웠는데 누구야아줌마들의 수다만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미련을 버리고 탁 책장을 덮었다.
'인생은 소네트와 같다'고 왜 제목을 잡았는지 궁금하신 분이라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