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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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명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나는 이슬람과 관련한 정수일 선생의 명성은 들었으되 역서고 저서고 간에 그분의 책 한 권 읽어보지 않았다.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감되었다는 소식도 석방되었다는 소식도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라는 책을 읽고 싶었던 것은 이 책이 그가 그의 아내에게 보낸 옥중편지 묶음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편지글을 엮어내며'라는 제목의 맨 앞글에서  편지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이를 어기고 책을 내는 것에 대해 당혹스럽다고 밝혀놓았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 '분단의 아픈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성인이 남긴 글로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써놓아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자신을 지성인이라고 이렇게 당당하게 칭하는 분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졸고를 어쩌고 저쩌고 하는 상투적인 겸손도 지겨웠지만 자신을 지성인이라고 너무도 당당하게 표현하는 부분이 멋져보이면서도 조금 생경스러웠다고 할까.

그가 옥중에서 아내에게 써서 보낸 이 편지들은 나중에 책으로 묶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쓰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엄숙하고 정갈하고 한결같을 수가 없다.

13, 4년 전 나도 광주교도소에 몇십 년째 복역중인 한 장기수 어른과 몇 년 동안 꽤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환갑을 조금 지난 분이었는데 얼마나 다정하고 재기가 넘치는 편지를 쓰시는지 그의 편지를 읽으면 옥중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과, 또 우리들의 연령이 바뀐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편지 속에서 느꼈던 넘치는 그 에너지대로 그분은 출소하자마자 옥중에서 혼자 책으로 공부한 한의학 지식을 살려 민중탕제원에서 일을 하시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식까지 올리셨다. 나는 신문을 통해 그분의 출옥 소식을 듣고 결혼 소식을 들었다.  아이를 업고 남편과 신림동인지 봉천동인지 무슨 성당에서 열린 그의 결혼식에 참석했지만 인파를 뚫지 못하고 먼빛으로 뵙고만 왔다. 영화 <송환>을 보러가서 극장 화면을 통해 본 내 옛 펜팔 남자친구(?)는 여전히 젊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이어서 기분이 좋았다.(언젠가 페이퍼로 쓴 적이 있다.)

1980년대 말, 몇 년째 줄기차게 백수였던 나는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며 한 구절 한 구절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엎어지고 자빠졌다. 신영복 선생은 나에게 그 책을 통해 용기를 줌으로써 인생에 어떤 모션(!)을 취하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나는 취직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이렇듯 책은 어떤 사람의 인생 행로를 구체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이 정도면 내가 사람들의 옥중서신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가 이해 될 것이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담담하고 정갈하되 어쩌면 조금은 심심한 옥중서신이다. 어느 날 불쑥 엄습한 외로움과 괴로움을 아내에게 에둘러 호소할 법도 한데 눈을 씻고봐도 그런 기미는 찾아볼 수 없다.

'쓸데없는 양념을 치지 않은 담백하고 순수하고 평범한 삶이 진짜 삶'이라는 일절이나 , 민들레를 일러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수수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에서 그의 철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배고프면 밥먹고 곤하면 잠잔다' '새끼줄을 톱삼아 나무를 베다'  '얼마간 부족한 것이 행복의 필수조건' 이라는 소제목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이 책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서울구치소에서 대구교도소로 이감하기 전날 면회온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입산수행하는 셈치고 마음 편히 보내세요." 옥중의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는 아내라니! 그녀의 편지까지 몇 장 실었으면 정말 얼마나 좋았을까?

화답이라도 하는 듯, '감옥은 한낱 외로움과 괴로움의 공간만은 아니고 서로의 사랑과 믿음, 연대를 확인하고 굳히는 공간이기도 하오.' 출옥 전날 그가 아내에게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가 얼마나 이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고결한 학자인지 실천적인 지식인인지 존경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인간의 풍모를 보았다. 읽고 있는 책 여백에 녹두장군의 시를 메모하고, 또  국어사전에서 만난 낯선 우리말을 빽빽히 독서중인 책의 여백에 적어가며 복습한 사진을 보고는 잠시 숙연한 기분에 젖기도 했다.  결혼기념일 날 아내에게 쓴 편지  '너그럽고 검소하게'는 내 수첩에 몽땅 옮겨 적고 싶었고......

어쩌면 들뜨고 조급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읽어내려간 이 책에서 나는 저자가 말한 많은 것을 놓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직접 말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그가 아내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마음은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민족과 학문에 대한 한 지성인의 절절한 회고록을 두고  무슨 사랑 타령이냐고? 글쎄 말이다. 그런데 난 그런 이상한 독법으로 이 책을 읽었다.

 


'수고하는 당신에게'라고 써내려간 선생의 편지. 그는 아내에게 어떤 행운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직접 만든 듯한 네잎클로버 도장으로 네 페이지의 편지 귀퉁이를 맞춘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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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3-13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전 책을 읽으면서도 저 네잎클로버를 놓쳤네요. 지금 처음 봤습니다. 에구..

깍두기 2005-03-1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숙하고 정갈하고 한결같은 거 나 싫어하는데....당신이 보고 싶어서 밤에 잠을 못 이룬다던지, 뭐 그런 말 없으면 이 책 안 읽을테여요.

로드무비 2005-03-13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깜찍하시기는! ㅎㅎ
(아내의 편지가 한 통 실려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야요.)
블루님, 어떻게 저렇게 중요한 걸 놓칠 수가 있죠?^^

balmas 2005-03-13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서평이에요.
이 주의 리뷰 같은 데 안 뽑히나???
추천 하나요~

로드무비 2005-03-13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그러고보니 정말 이 주의 리뷰 뽑혀서 책 공짜로 사고 싶어요.ㅎㅎ
에이 괜히 가만 있는 사람 가슴에 바람을 넣으시곤.
추천은 덥석 고맙게 받겠습니다.^^

파란여우 2005-03-1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 '지금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 없으면 저도 안 읽을래요....

마냐 2005-03-14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깍두기성님과 파란여우성님에게 줄 설래요~ (분위기 파악중..)

Phantomlady 2005-03-14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주의 마이리뷰 꼭 뽑히길 바라며 추천 누르고 갑니다~

마태우스 2005-03-1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대단한 리뷰입니다....저도 모르게 추천에 손이... 전 이런 분들의 쉽사리 손이 안갑니다. 읽으면 나태한 자신이 부끄러워질까봐요.....

로드무비 2005-03-14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추천 고맙고요.
그리고 부끄러워하실 것 하나도 없답니다.
님이 얼마나 훌륭하신데요.^^
snowdrop님, 응원해 주셨건만 이 주의 마이 리뷰 뽑혔다는 소식이 없네요.ㅠ,.ㅠ
마냐님, 참으로 현명하십니다.^^
파란여우님, 저도 그게 끝까지 아쉬웠답니다.
리뷰는 리뷰니까 저렇게 썼지만......
그래도 네잎클로버로 표현한 선생의 애정 깜찍하지 않나요?^^

urblue 2005-03-15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마이리뷰, 뽑히셨잖아요!! 역시!!
축하드려요~

비로그인 2005-03-15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uh huh, 비무드 부인, 축하해여! ^^

숨은아이 2005-03-15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아아아, 축하드려요!

로드무비 2005-03-15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뽑혔군요.
알라딘 리뷰 선정 기준이 문득 궁금해집니다.
닭털이 더 낫지 않았나요?ㅎㅎ
아무튼 기쁘네요. 책 사게 되어서......
블루님, 노웨이브님, 숨은아이님, 알려주시고 축하해주셔서 고마워요.
특히 블루님(찡긋ㅠ.ㅜ 뭔 뜻인지 아시죠?ㅎㅎ)
추천해주시고 관심 갖고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고맙다는 인사 전합니다.^^

balmas 2005-03-16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어째 선정될 것 같더라니 ...
무비님, 제가 보기에는 선정하는 분들이 고심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소걸음을 줄까? 닭털을 줄까?? 아님 둘다 줄까???
그런데 왜 둘 중에 소걸음이 뽑혔을까? 네 잎 클로버 도장을 발견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말이 돼??)

starrysky 2005-03-16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로드무비님 너무너무 축하드려요!! 멋진 글도 잘 읽었고요.. ^^
안 그래도 지금 보관함을 뒤적이면서 이 책을 살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딱 로드님 리뷰가 보이잖아요. 그래서 읽으면서 내려왔더니 이렇게 금주의 리뷰에 뽑히셨다는 희소식까지!!
오랜만에 들렀는데 기쁜 축하인사 드릴 수 있어서 더더욱 기쁩니다. 4월부터는 좀더 자주 놀러올게요~ ^^

아영엄마 2005-03-1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로드무비님! 새벽부터 축하인사 받으시느라 바쁘셨군요!! 쬐끔 늦었지만 무지무지 축하드립니다.

로드무비 2005-03-1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하나도 안 늦었습니다.
축하해주셔서 고마워요.
요즘 아영엄마님 리뷰며 글들이 예사스럽지 않던데
님도 마이 리뷰 상금 빨리 타시기 바랄게요.^^
스타리스카이님, 반갑습니다.
바쁜 일 빨리 끝내시고 4월엔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아, 우리 스타리스카이님 청춘인데 일만 하시고...어쩐답니까?^^;;
발마스님, 다 님 덕분인 줄 아뢰옵니다.
댓글에다가 노골적으로 마이 리뷰 안 뽑히냐고 덕담을 해주셨으니...
닭털이든 소걸음이든 상관없습니다.
적립금만 무사히 들어오면...ㅎㅎㅎ
고맙습니다!

반딧불,, 2005-03-1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어쩐지 심상치가 않더라구요^^
좋은 아침이죠^^

로드무비 2005-03-16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심상치 않긴요.ㅎㅎ
고맙습니다. 좀 있다 아이 학교 가봐야 해요.^^

icaru 2005-03-1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님...당선되셨어요!!! 진짜~ 축하드려요!!.. 적립금으로 무슨책을 사시는지 구경가야겠다~

잉크냄새 2005-03-1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전 적립금으로 사신 책 벌써 구경했죠.^^

stella.K 2005-03-16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로 당선의 영애를 얻으셨군요. 부러워요. 축하합니다.^^

니르바나 2005-03-1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신영복 선생의 글을 좋아하시는 이상이시군요.
남들은 하나도 못 올리는데 이 주일의 리뷰를 보니 첫 화면에 두개나 보이네요.
축하드립니다. 추천하였습니다.

마냐 2005-03-1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지금 다시 보니...마이리뷰도..'뽑혀라', '뽑혀라' '뽑혀라' 하면 뽑히는 군요. 로드무비님뿐만 아니라 눈밝은 알라디너들도 만세~ ^^

플레져 2005-03-17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리뷰로 뽑혀 마땅하신 글입니다. 추천은 당연하거지요...

마늘빵 2005-03-1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제 봤어요. 축하드립니다~~ ^^;

분홍달 2005-03-18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발적 반응이네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로드무비 2005-03-1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 주시고 댓글 남겨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어제 하루 인터넷 연결이 안되어 이제야 봅니다.
마냐님 메모가 무지 웃기네요.
맞습니다. 신통한 예언력을 가지신 발마스님과 뽑히기를 빌어주신
님들 덕분입니다.
앞으로 마음에 드는 리뷰 보면 '뽑혀라!' 덕담 해주기로 할까요?^^

릴케 현상 2005-03-1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뒷북이지만 축하드립니다

로드무비 2005-03-1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뒷북 절대 아닙니다.
고마워요.^^

미누리 2005-03-2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로드무비 2005-03-2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el 님, 미누리님 고맙습니다.^^

달팽이 2005-04-1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들렀군요...앞으로 자주 들르겠습니다...

로드무비 2005-04-19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달팽이님, 반갑습니다.^^

비연 2005-04-2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우수리뷰로 뽑히신 걸 지금 확인했어요^^
넘 축하드립니다...좋은 리뷰를 접하니 기분이 좋네요~~

로드무비 2005-04-29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연님, 언제 오셨어요?
참, 이것 퍼가셨죠?
고마워요.^^

poptrash 2005-05-12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완전 뒷북이지만; 부끄럽지만; 축하드릴께요. 하하. 부러워요 T_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