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봄빛
정지아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디선가 새 옷 냄새가 풍긴다. 바람나고픈 처녀의 설레임도 무색하게 만드는 꽃샘추위가 2009년 2월엔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포근한 햇빛이 쇼핑의 욕구를 마구 자극한다. 무엇이라도 새롭게 화사하게 바꿔보고 싶은 이 때, 그러나 집 안팎의 경제 상황이 철없는 나의 발목을 잡는다. 서둘러 찾아 온 봄에 대한 기대는 오래 전에 사두고 일년을 묵혀 둔 이 책, ‘봄빛’과 함께 시작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설이 그러하듯 이 책에서도 주인공들은 많은 문제와 삶의 불합리함 속에서 허덕이다 작가가 화해하고자 하는 어느 지점에서 독자의 긴장된 마음을 놓아준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자기가 평생 보아 온 것의 전부인 예순의 총각, 소멸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랑을 하면서도 절대 콩깍지가 씌워지지 않는 여자, 우리 근대사의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세월은 가도 술독에 빠져 살아야 하는 중년의 남성, 가혹한 운명에게서 벗어나고자 생에 대한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여자, 치매에 걸린 남편과 자신의 노년에 대한 회한과 넋두리 등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 살아봉게 말이어라. 시간은 앞으로만 흘르는 것이 아니고라. 멫살부텀이었능가는 몰라도라. 옛 기억들이 시방의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 서라, 앞도 뒤도 읎이, 말하자면 제 꼬리를 문 뱀맹키 말이얼라. 나는 말이어라. 갇힌 시간 속에서 살아온 날의 기억을 되씹는 한 마리 소가 된 것 맹키어라. 이럴 중 알았으면 말이어라, 날 서고 아픈 기억 말고라, 되새기기 좋게, 되새기먼 함박웃음이나 벙글어지는 말랑말랑 보들보들, 그런 기억이나 맹글어서라, 요리 벹 좋은 날에 뱉 속에 나 앉아 따독따독, 이삔 기억이나 따독임시로 따순 아지랑이로나 모락모락 피어올라 이승과 작별했으먼 안 좋았겄소이. 누군들 그리 살고 싶지 않았겄어라. 그리 살고 싶어도 안되는 것이 시상지사지라”(세월 234p)
첫아이를 잃고, 귀하게 얻은 딸의 이혼, 거기에 기억을 잃고 스러져가는 남편을 보며 회한에 잠긴 한 여인의 목소리다. 누구라도 들추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운 좋게 평생 그 환부를 들춰내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결국 한번쯤은 싫으나 좋으나 꼭 어떤 대상에게가 아니라도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어쩜 ‘봄빛’의 등장인물들은 그러한 기억의 복원 내지 폭로를 통해서 자신만의 치유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 살며 공평한 것을 찾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나, 봄의 햇살만큼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누추한 삶이 화사한 햇살에 대조되어 그 어둠과 밝음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축축한 지하 셋방에도 한줄기 햇살이, 그도 아니라면, 돈 안내고 비타민 합성에 면역력까지 높일 수 있는 해바라기는 그 누구나 할 수 있 것이 아닌가!
오늘은 정월 대보름, 두둥실 떠오르는 둥근 달을 보며 “날 서고 아픈 기억 말고라, 되새기기 좋게, 되새기먼 함박웃음이나 벙글어지는 말랑말랑 보들보들, 그런 기억이나 맹글어서라, 요리 벹 좋은 날에 뱉 속에 나 앉아 따독따독, 이삔 기억이나 따독임시로 따순 아지랑이로나 모락모락 피어올라 이승과 작별했으먼 안 좋았겄소이.” 이 될 수 있도록 빌어나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