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트 클럽 SE [dts] - [할인행사]
데이비드 핀처 감독, 브래드 피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두 명의 주요 남자 연기자가 결국 한 인물, '타일러 더든'을 연기 했다는 것을 영화의 맨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된다. '에드워드 노턴'이 '브래드 피트'였고 '브레드 피트'란 인물이 바로 '에드워드 노턴'이란 사람이었다. '진정한 한 인물, 인간, 존재 '타일러 더든'은 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현실에서 모든 인간들은 순간 순간의 행위나 판단에 있어서 갈등을 겪게 될 때가 있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동과 처신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님, 사회적 바람직성에서 벗어나서 내 몸 뚱아리가 편한 대로만 행동을 할 것인가?' 자아의 한 측면은 '극기복례'를 하라고 하고, 자아의 또 다른 측면은 개망나니처럼 '안하무인'으로 행동을 하라고 한다. 그 하나는 '에드워드 노턴'으로 대변되는 '현실에 적응한 자아'이며 또 다른 하나는 '브레드 피트'로 대변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마치 어린애 같은', 프로이드 식으로는 '이드'의 한 측면과도 같은 자아의 모습이다. 마치 브레드 피트는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품행 장애', '반사회적 성격 장애자'처럼 진단 내려진 사람인냥 마구잡이로 행동을 한다. 얻어 맏고 때리며, 음식에 소변을 보고, 쓰레기와 병을 함부로 던지며, 각종 테러들을 자행한다.    

  영화에서는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악의 대립적인 내적 갈등을 바로 외부적인 두 존재의 갈등으로 표현해 낸다. 고전적인 상징이 되어버린 '치킬 박사'와 하이드 씨'식의... 긍극적으로 내적인 한 인물을 외부적인 두 존재로 표현되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영화의 맨 처음의 사회에 적응한 하나의 인격체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삶의 과정, 문명 생활에 대한 권태와 지겨움, 그리고 겉만 화려하게 치장된 사탕 발림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피곤을 느낀다. 그동안 자신이 추구 했던 가치의 상실과 허무함, 직업적 세계에 불만과 회의를 느낀다. '유행'과 '유명 메이커들'의 물건들은 그 무슨 허상의 무가치란 말인가? 그리고 혼자만의 반란이 시작된다. 사제 폭탄으로 집을 날려버리고 문명 생활에서 원시 생활로 돌아간다. 따로 떨어져서 분리된 채 돌아다니던 두 자아는 영화가 진행될 수록 다시 통합된, 정상적인 하나의 인격체로 되는 과정을 모색해 나가려고 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그리나 서로가 하나 임을, 하나 됨을 영화 속 현실에서의 자아인 '에드워드 노턴'은 인지하지 못한다. 통합된 인격 구조의 한 사람임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브래드 피트'는 이야기 한다. 절대로 '말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세번씩이나 다짐을 받는다. 자신과 함께 사랑의 행위를 나눈 여자에게 자신의 또 다른 본 모습을 숨기려는 이 남성의 심리는 무엇일까? 

  '정신 의학'과 '심리학'에서 이런 이상 행동의 유형을 '해리성 장애', '이인증'이라는 명칭으로 분류를 하는데, 사실 세상에 이런 인간은 없다고 한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임상의, 임상 심리학자들도 이런 인간들을 만나는 사례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라고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현실에 적응한 인간으로서 '에드워드 노턴'은 '브레드 피트가'가 '바로 또 다른 인간의 속성을 외부로 표출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브래드 피트'는 남남이고 타인인 존재이다. 그러나 '말라'에게 자신에 대해서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세번이나 약속을 다짐 받는 장면에서 악마적인 일탈적 존재인 '브래드 피트'는 '에드워드 노턴'이 바로 자신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암시를 준다. 그러나 정상적 인간으로서 '에드워드 노턴'은 자신 내부의 또 다른 일탈적, 범죄적, 부적응적, 악마적 자아의 측면을 부정한다. 자신이 억압한 무의식 속에서 나온 '악마적 자신', '브래트 피트'가 단지 떨어져 있고 분리되어 있는 남남으로서 서로를 이질적으로 대한다. 또 정상에 가까이 적응하려는 '에드워드 노턴'은 환시 속에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인 악막적 자아상인 '브래드 피트'를 볼 수 있다. 전형적인 정신분열증의 증상의 스펙트럼들이 나열 된다. '타일러 더든'은 지하 테러 집단의 수괴로서 자신의 과대 망상을 사회적 패배자들을 통해서 실현해 낸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이 환각 속의 혼자만이 '브래드 피트'를 '타일러 더든'이라고 볼 수 있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없어진(?) '타이러 더든'을 찾아서 이리 저리 도시들을 헤메고 다닌다. 바로 자신이 찾아서 헤메고 있는 '타일러 더든'이란 자가 자기 자신임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 '말라'와 '자신의 지하 테러 조직, 군대 부하들'과 '직장 상사'와 '경찰서의 경감들'은 바로 '에드워드 노턴' 자신을 '타일러 더든'이라고 부르면서 말하고 있는데도...  

  결과적으로 한 인간 안에 두 존재가 함께 들어 있는 것임을 영화의 끝에서 밝혀준다. 미쳐가는 인간이 자살을 하려고 총을 자신의 입에 놓고 쏜 후에 다시 원래의 올바른 정신으로 회복이 된다. 보다 선을 지향하는 인간성과 보다 악을 지향하는 인간성의 싸움은 심각한 자해를 끝으로 종말을 고한다.

  선과 악에 대한 '내적 갈등이 외적 표현', '방구같은 영화'가 바로 '파이트 클럽'이다. 이 외부적인 두 주인공의 갈등은 본질적으로 한 인간 내, 안에서의 펼쳐지는 '의식'과 '무의식' 간의 심각한 갈등, '이드'와 '수퍼 에고' 간의 갈등, '망나니 아들과 질서, 올바름으로 대변되는 아버지와' 간의 갈등,  '충동적 인간 본성'과 '억압적 현실 문화 생활과'의 갈등, '원시'와 '문명' 간의 갈등, '윤리'와 '무윤리' 간의 갈등, '질서'와 '무질서' 간의 갈등, '자아 통합'과 '자아 분열' 간의 갈등에 대한 '한 인간의 내부적 고뇌의 구도'가 영화적으로 표현된 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관객을 속인다. "영화를 무방비 상태로 보던 관객들은 과연 문제의 두 인물이 한 인격체의 부분들 이었다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짐작이나 했을까?" 물론 본인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영화는 이 두 인물을 하나로 몰고 가는데, 영화가 설정한 가정들에서 '논리적 모순'이나 '빈 틈'들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만들어 졌다.

  영화의 제목이 '파이트 클럽'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장클로드 반담 류'의 ' B급 이종 격투기 영화' 에서 등장하는 호쾌하게 잘 연출된 액션 장면들이 나올 줄알고 기다렸는데, 그런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리고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명 비판적인 내용'의 '블랙 코메디 영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가슴에 남는 대사는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대사는 '브레트 피트'가  '바'와 지하실 등의 어두운 장소에서 클럽 회원들과 또 다른 자아인 '에드워드 노턴'을 향해서 소리치는 대사들이다. 사회의 패배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소리지르며 설득한다. "직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인간들은 물질 물명을 소비하는 소비 문화의 부산물들일 뿐이다.", "자기 개발은 자위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독설과 독단에 가까운 아집으로 외치고 있지만, 말 속에 뼈가 있어서 새겨 듣고서 생각해 볼 대목들이다.

  영화가 흥행을 했는가? 흥행을 하지 않았는가? 와는 상관없이 원작이 되는 소설이 매우 훌륭함을 영화를 통해서 알 수 있고 영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대단한 프로들 이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등장 인물들이 나래이터로 등장을 해서 영화가 진행하는 동안에 에피소드와 영화 전반에 대해서 해설을 해주는 '서브 타이틀'도 색다른 묘미를 즐기며 영화를 감상하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정말 볼만한 영화를 오랜만에 본 느낌이다.' 영화를 본 후에 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퍼 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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