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가을이면 꼭 가 보리라 마음먹었다가 두 번씩이나 무산되고 말았던 월출산을 뜻밖에 지난 주말(6.6∼6.8)에 다녀왔다. 월출산은 남녘의 평야에서 불쑥 돌출한 산인 데다가 정상인 천황봉의 높이가 809m에 이르는 제법 높은 산이다. 게다가 기암절벽들이 많고 오르내림이 제법 심해 무더운 여름날씨에 종주하기에는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다행히 나보다 서너살 많은 두 분의 선배님께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함께 해 주신 덕분에 '종주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월출산이 있는 전남 영암은 서울에서도 400km 가까이 떨어져 있어서 1박2일로 다녀오기에는 기름값이 너무 아까운 곳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인근에 있는 보길도로 건너가 하루를 더 묵었고, 서울로 되돌아 오는 길에는 해남의 미황사와 고창의 선운사까지 들렀다.

영암과 해남 방면으로는 이번을 포함해서 세 번쯤 가본 것 같다. 맨 처음에는 아내랑 둘이서 작심하고 '남도여행'을 떠난 때였다. 그 땐 아이들이 모두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해외어학연수'를 떠나고 없을 때여서 어디든 마음먹은 대로 다닐 수 있어서 정말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가본 곳이 목포, 영암의 도갑사, 강진의 다산초당과 김영랑 생가, 해남의 대흥사, 보길도의 세연정과 통천석실, 완도, 보성, 낙안, 구례 등지였는데, 8월 하순의 뙤약볕 아래에서도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아이들'이 없으니 '발길 닿는 대로' 실컷 돌아다니는 재미가 특별했다.

이번에 남자 셋이서 '그 때'와 다소 겹치는 여행지를 다니면서 문득 문득 '아내와 함께' 둘이서 다녔던 '오래전 그 때 그 순간들'이 유달리 새록새록 떠올라 내심 놀랐다. 나이 들어서 '남자들끼리' 바깥을 여행다니다 보면 으레 가족들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기 마련인데 이번엔 그게 아니었다. 어쩌다 가보는 뚝 떨어진 곳이지만, 변치 않는 공간이 주는 힘이 이토록 강렬할까 싶었다. 말없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잠시 남겨진 순간의 기억들을 '공간'이 기억할 리 만무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결코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가 보다.


 - 땅끝마을과 보길도 주변




 - 온통 바위로 뒤덮인 월출산. 오른쪽 산중턱에 구름다리가 살짝 보인다.




 - 뜨거운 태양 아래 남녘의 장미는 이미 빨갛게 물들었다.




 - 구름다리는 마치 '하늘'에 걸린 듯하다.




 - 양쪽 바위가 구름다리의 '교각'인 셈.




 - 출렁다리였으면 얼마나 더 짜릿할까 싶기도.




 - 구름다리는 가파른 바위산을 오르는 '시작'일 뿐.




 - 온통 바위산이어서 곳곳에 계단과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 가파른 절벽에도 등산객이 보인다.




 - 천황봉 정상이 멀지 않았다.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




 - 천황봉 정상이다. 이름모를 등산객과 태극기가 풍경에 함께 담겼다.




 -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오른편 아래쪽으로 구름다리가 까마득하다.




 - 영암 읍내와 평야가 빤히 내려다보인다.




 - 천황봉에서 도갑사로 가는 길. 올라온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훨씬 더 멀다.




 - 도갑사로 내려가는 등산로엔 사람이 거의 없다.




 - 기암절벽들이 수려하다.




 - '남해의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 능선따라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뚜렷한데 인적은 몹시 드물다.




 - 바위는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서 있는 걸까.


 - 바람이 넘나드는 재.


 




 - 가파른 바위길을 한참이나 내려왔는데 고작 정상에서 1.1km밖에 못 내려왔다.


 - 지나온 길을 되돌아봐도 등산객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 마침내 도갑사 대웅전 앞마당까지 왔다.

 


Shooting Date/Time 2013-06-06 오후 6:43:41

 - 무더운 날씨 때문에 식수가 일찍 떨어져 갈증이 몹시 심했다. 여기서 물을 실컷 먹었다.




 - 도갑사 일주문을 거꾸로 나왔다.




 - 독천 시내에 들러 세발낙지와 함께 먹어본 낙지구이.




 - 이튿날 아침 독천터미널 한켠에 있는 '구림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 순대국 세 그릇을 주문했는데 서비스로 나온 돼지수육이 제법 푸짐하다. 지금도 침이 넘어갈 만큼 맛있었다.


 - 독천터미널 풍경.




 - 보길도 배타는 곳.




 - 해남의 땅끝 풍경.




 - 대형버스도 거뜬히 태울만큼 배가 크다.




 - 땅끝을 떠나 보길도로~


 - 노화도에 새로 생긴 선착장 때문에 이젠 드나드는 배 한 척 안 보이는 '보길도 선착장'




 - 예송리 앞바다.




 - 파도소리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해변.




 - 지난해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여파가 아직도 많이 남아 안타깝다.




 - 하루쯤 텐트에서 묵으며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 전복 양식장. 우리나라 전복 생산량의 9할 이상이 이 주변에서 나온다고 한다.


 - 세연정 가는 길목



 -고산 윤선도가 지은 세연정.




 - 바람이 마음껏 지나다닐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가 인상적이다.




 - 시인이 아니더라도 시심이 절로 우러날 듯한 풍경.




 - 소나무 한 그루가 정자를 온통 감싸고 있다.




 - 신선들의 놀이터 같은 모습.




 - 저기서 먹을 갈고 붓을 들면 시는 저절로 나올 듯.


 - 세연정은 녹음이 우거진 한여름철이 가장 어울리는 듯.


 - 직장 동료로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한 두 선배.


 - 보옥리의 공룡알 해변.




 - 축구공보다 더 큰 공룡알 바위. 파도가 만들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듯.




 - 얼마나 오래 뒹굴어야 저토록 둥글어질까.




 - 밑반찬으로 산낙지와 전복이 제법 나온다.




 - 우럭을 큰 놈으로 한 마리 시켰는데 셋이서 실컷 먹었다.




 - 보길도의 새벽.




 - 우리가 저녁과 아침은 물론 잠자리까지 해결했던 '바위섬 횟집'. 처음 가봤지만 추천할 만한 곳이다.




 - 석축이 아름다운 미황사.




 - 달마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 좋다.




- 우리 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로서 749년(성덕왕 8년)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 더욱 아름다운 대웅전 목조건물.




 - 석양이 비치는 시간이면 대웅보전과 주변 전각들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아름답다는데,
    간간이 비가 흩뿌리는 흐린 날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나뭇결들이 고혹적이다.


 - 대웅전은 1598년에 중건한 뒤 1754년과 1761년에도 중수되었다고 한다.




 - 용들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하다.


 - 미황사(美黃寺)라는 절 이름 가운데 '미(美)'자는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기 때문에 따왔다고 한다.



 - 고창의 선운사 대웅전. 577년(백제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 대웅전의 옆모습. 백제시대의 소박한 건축양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 선운사 경내. 녹음이 우거진 계곡.




 - 극락교에서 바라본 선운사.



 - 초여름 단풍도 곱기만 하다.




 - 고운 단풍으로 붉게 물들었을 때 다시 한번 찾고 싶다.




 - 이맘때 자주 봐왔던 꽃이지만 꽃이름을 모르겠다.




 - 수줍게 피어난 이름모를 노란 꽃.




 - 금방이라도 방긋 웃음꽃을 터트릴 것 같다.


 - 6월 초순의 신록이 아름답다. 마냥 푸르른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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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14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찍을 때 해상도 좀 낮게 설정하시나요? 사진 가운데 깨진 것(해상도 낮은 것)이 더러 있네요.
raw파일을 안 쓰더라도 jpg형식에서 가장 큰 해상도로 설정해서 찍어야,
나중에 작게 줄인 파일로 만들 때에도 깨지는 느낌이 나지 않아요.

..

저 분홍빛 꽃은 패랭이꽃이로군요!
그 밑에 노란 꽃은 국화 계열인데 아마 금계국인 듯해요.
저 꽃과 거의 똑같은 꽃을 골목에서도 시골에서도
참 많이 봅니다.

..

어른 남자 세 분이서 아주 좋은 신선놀이 누리셨네요.
그동안 시도 쓰셨겠습니다 ^^

oren 2013-06-14 23:19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께서 도움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사진을 찍을 땐 메모리 걱정이 없는 한 RAW파일 모드로 찍습니다. 제가 올린 사진들도 RAW화일 사이즈는 대부분 24M∼36M에 달하는 크기이며 픽셀 크기로도 2,100만 화소(5,616×3,714)에 달하는데, 웹상에 올리기 위해 픽셀크기를 너무 과도하게 줄였나 봅니다. 리사이즈할 때 픽셀크기를 가로700으로 설정했더니 파일 사이즈가 130KB까지 줄여져 있네요. 픽셀크기를 다시 늘려서 올렸는데 보시기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분홍빛 꽃은 패랭이꽃이 맞네요. 누가 가르쳐주면 쉬운데 저 꽃 이름이 도대체 떠오르지를 않더군요. ㅎㅎ
그리고 노란 꽃은 금계국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금계국이라는 꽃 이름은 조금 낯설긴 한데 저 꽃이 영암과 해남 일대의 도로마다 빼곡하게 심어져 있어서 놀랐습니다. 지금이 딱 제철인 듯 보였고 어딜가나 저 꽃이 환한 얼굴로 반겨주는 것같아 기분이 참 좋더군요.

Nussbaum 2013-06-1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보아도 좋을 사진입니다.

여름 초입 맑고 경쾌한 사진 잘 보고 갑니다. ^^


oren 2013-06-14 23:28   좋아요 0 | URL
Nussbaaum님 반갑습니다.

요즘 날씨가 너무 일찍 무더워지고 전기도 모자란다고 해서 은근히 걱정이었는데, 산으로 바다로 눈길을 돌려보니 한낮의 '무더위' 쯤은 조금도 문제될 게 없더군요. 곡식과 과일들이 나날이 더 푸르게 자라나는 데 더없이 알맞은 햇살일 뿐인데 말입니다.

숲노래 2013-06-15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줄였다가 다시 키우면 뭉개져 보이는 거였군요.
인터넷에 올릴 때에 가로700은 너무 길어서 '본문너비 초과'가 되니
'가로700' 말고 '긴축(장축)500'으로 해 보셔요.

웬만한 사이트들은 거의 모두 '500픽셀'로 표준을 맞추니,
500으로 맞추어서 올리면 한결 나으리라 생각해요.

oren 2013-06-17 14:35   좋아요 0 | URL
픽셀크기를 '가로 700'으로 리사이즈 했더니 픽셀수가 너무 적었나 봅니다.(대부분의 화일이 0.13∼0.35M까지 축소되더군요.) 그래서 평소 하던 대로 '가로 1,024'로 리사이즈했더니 0.7M 수준으로 화일이 다시 커졌습니다. 결국 화소tn가 훨씬 늘어나다 보니 이미지가 원래대로 살아난 것 같습니다.

알라딘에서는 이미지화일 크기가 1M 이하만 올릴 수 있으므로 거기에 맞춰야 하는데, 가로세로 픽셀 크기에 관계없이 '화면크기'에 맞게 자동으로 이미지 크기를 줄이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html에서 가로 사진은 width=700, 세로 사진은 width=600으로 고쳐서 쓴답니다.

함께살기님께서 남겨주신 도움말도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마천 2013-06-1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좋은 여행 축하드립니다..

oren 2013-06-16 09:49   좋아요 0 | URL
사마천님 오랜만이네요.
댓글 남겨주셔셔 감사드립니다.

숲노래 2013-06-17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서 사진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꾸 새로운 생각이 나곤 하는데요,

사람들은 어차피 '원본 큰 파일'로 사진을 보지 못해요 ^^;;;;
사진 찍은 사람이 작은크기로 줄인 파일을 인터넷에 올리면
거의 그런 사진으로 보지요.

종이로 뽑아서 보여주면
비로소 '원본 대용량 파일'로 찍어야 이렇게 보기 좋은 사진이
되는구나 하고 깨닫지만, 인터넷에서는 다들 그렇게 안 느끼더라고요.

그래서, 저 스스로 요즈음은
'작게 줄여서 볼 때'에 또렷하며 맑게 볼 수 있는 사진을
처음부터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

oren 님도 사진을 찍으면서 한 번 생각해 보셔요.
'어차피 줄여서 올려야' 한다면,
작은크기로 볼 때에도 사람들이 감동할 만한 사진은
어떠해야 할까 하고 생각해 보셔요~

oren 2013-06-17 14:32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의 말씀에 저도 공감합니다.

사진의 크기에 따라 보는 느낌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사진의 크기'에 관계없이 '좋은 사진'을 찍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겠지요. 그래도 조그마한 사진보다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크기' 정도의 사진이라면 훨씬 더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오리라는 아쉬움은 늘 듭니다.(사진을 40여 년 찍고 계시는 어떤 작가분은 '인터넷의 일반 게시판'에는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사진 사이즈가 너무 작게 나와 '본래의 사진'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구요.)

장영길 2013-06-23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의 사진과 여행기를 잘 보고 갑니다.
저의 행적이 담겨 있는 곳들이군요.
다시보니 더욱 새롭 습니다.
월 출산은 저가 세번 종주하였습니다.
어느해 여름 휴가로 땅끝마을에서 지거자거로 전주까지 도보와 군내뻐스 열차로 여행하면서 남도의 멋을 흠뻑 받아 보았습니다. 다시가고 싶은 남도의 그리움이 내 심장을 박동하네요.
올해로 우리나이 73세인데도 어린 날 무전여행으로 다져진 여행의 맛이 참 좋았답니다.
여행도중에 만나본 여럿 님들이 그립습니다. 감사 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歸去來辭(귀거래사) / 陶淵明(도연명)

 

 

 

歸去來兮 (귀거래혜 )
자, 이제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산천이 황폐해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삼아온 것을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고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후회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았고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는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으니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사 지금의 생각이 맞고 과거의 행동이 틀린 것임을 알았다.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며 나아가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가는데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지나는 길손에게 고향까지의 길을 물어보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희미한 새벽빛을 안타까워한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니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僮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것들은 대문에서 나를 맞이한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구나.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아이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하다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잔에 따라 나 홀로 자작하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안의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얼굴에 미소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의기가 양양하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날마다 동산 거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으니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다가 지친 새들도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影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홀로 선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도 단절이다.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이제 서로 멀리 떨어졌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하리요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장차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아야겠다.

 


或命巾車 (혹명건차)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서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은 골짜기의 맑은 물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다시 험한 산을 넘어 언덕으로 나아가리라


木欣欣以向榮 (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음을 부러워하지만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나의 생이 영원히 휴식을 취할 날이 멀지 않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어쩔수가 없구나.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을 것이며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부귀는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며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 (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를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는 것이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 * *

벚꽃 흐드러지게 필 무렵,
고향의 침벽공원 꽃나무 그늘 아래에서,
벚꽃이 눈송이처럼 흐드러지게 흩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막걸리 술잔에 꽃잎 띄우며' 술 한잔 나누자고 했던 게 언제였던가.

그런 행복한 풍경을 가장 동경했던 내 고향 친구 한 녀석은
작년 이맘때 백혈병이 재발하여 홀연히 먼 하늘나라로 떠나가고 말았다.

올해 봄,
우리 고향 친구들이 '고향의 봄'을 못잊어 다시 모여들었다.
서울에서, 대구에서, 포항에서, 울산에서, 부산에서.

우리가 기다렸던 벚꽃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다 지고 말았지만,
그 대신 그 자리엔 아카시아 향기가 예전과 다름없이 우릴 반겨주었다.

다들 작년에 떠난 그 친구를 떠올리며 무척이나 보고싶어 했다.
그 친구만큼 고향을 사랑하고 또 그 친구만큼 친구를 사랑한 친구도 없었다.
그 친구가 4년 전 백혈병과 힘겹게 싸워 마침내 이겨냈을 때,
그때 곧바로 귀향하여 지금쯤 고향에서 농사나 짓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껏해야 고작 "그 자리에" 있을 뿐

고인의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음이 현상적으로 더 적합하게 파악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러한 식의 죽은 자와의 더불어 있음은 바로 그 고인의 본래적인 종말에 이르렀음을 경험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죽음은 분명히 상실로서 드러나지만, 그 상실은 남아 있는 자들이 경험하는 상실 그 이상이다. 어쨌거나 상실의 감수 속에서도 죽는 자가 "감수하는" 존재의 상실 그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고작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321쪽)

 

 

모든 타인과의 더불어 있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가장 고유한 가능성은 무연관적 가능성이다. 미리 달려가봄은 현존재로 하여금 그 안에서 단적으로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존재가능을 유일하게 그 자신으로부터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한다. 죽음은 그저 고유한 현존재에게 무차별하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현존재로 하여금 개별 현존재일 것을 요구한다. 미리 달려가봄에서 이해된 죽음의 무연관성은 현존재를 그 자신에게로 개별화시킨다. 이러한 개별화는 실존을 위해서 "거기에"를 열어밝히는 한 방식이다. 이 개별화는,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이 문제가 되면, 모든 배려되고 있는 것 곁에 있음과 모든 타인과의 더불어 있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현존재는 오직 그 자신이 스스로 가능하게 만들 때에만 본래적으로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352쪽)



오늘따라 문득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생각나 다시 찾아 읊어본다.
다섯 말의 쌀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관직을 박차고 고향으로 돌아간 시인의 나이는 41세였다고 한다.
50을 훌쩍 넘긴 나는 과연 언제쯤 객지생활을 박차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 * * *


 - 고향의 골목길


Shooting Date/Time 2013-05-25 오후 5:22:38

 -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병든 어머님께 끓여 잡수게 했다는 집안 할배의 효성을 기린 효자각.




 - 항일시인 오일도(1901~1946) 생가와 시공원이 있는 고향.




 - 솜사탕을 닮은 민들레.




 - 아카시아 꽃이 필 무렵이 쏘가리가 올라올 때.




 - 쏘가리, 메자, 모래무지, 쫑메리, 찬피리, 개피리...




 - 아침이슬을 머금은 고추밭.


Shooting Date/Time 2013-05-26 오전 7:30:14

 - 이른 아침 침벽공원을 거니는 친구들.




 - 작년 봄에 공무원 생활을 접고 귀농한 친구가 가꿔놓은 '참나물밭'





 - 참나물을 뜯어오는 길.




 - 어릴 적 이곳으로 봄소풍을 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쟈?




 - 고향에 와서도 팬션에서 묵는 신세.




 - 고추밭 너머로 사과나무와 아카시아나무가 싱그럽다.




 - 읍내로 진학하기 전에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녔던 '분교'가 있던 자리.




 - 노란 붓꽃




 - 보랏빛 붓꽃




 - 최근에 돈을 들여 '리모델링'했다는 종가집 소나무.




 - 겨울철 우리들의 썰매터였던 '종갓집 연못'




 -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저기' 고향집을 떠난지도 어언 30년이 지났구나.




 - 종가집과 불천위(不遷位) 사당.




 - 토끼풀.




 - 그 옛날 '꽃시계' 만들었던 그 토끼풀이 꽃밭을 이뤘구나.




 - 등이 굽은 할아버지께서 가끔씩 등에 업힌 내동생을 '토끼풀밭'에 내려주시던 기억이 날 듯 말 듯.




 - 귀농한 친구가 집앞 텃밭 한켠에 키우는 블루베리.




 - 블루베리도 이맘때 꽃이 피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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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14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랗고 보라빛 나는 꽃들은 붓꽃이로군요~

예쁜 시골입니다~

oren 2013-06-14 09:21   좋아요 0 | URL
저 꽃이 붓꽃이었군요. 정말 흔히 볼 수 있는 꽃인데도 제가 꽃이름조차 제대로 몰랐었네요.
함께살기님께서 얼른 바로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젊을 땐 시골 고향이 그리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민들레 한 포기조차 더욱 예쁘게 보이더군요. 누구나 다 비슷한 심정이겠지요.
 
10. 다시 카트만두로, 스와얌부나트와 왕궁을 둘러보다


오늘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지난 4월 하순에 네팔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히말라야의 설산'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그에 못지 않게 '험준한 산길'을 제대로 완주할 수 있을까 싶어 '긴장'도 좀 되고, 또 '고산병'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냥 들떠 있을 수만도 없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이제 무사히 내가 살던 땅, 내가 살던 집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어느새 '밀려드는 안도감'과 함께 일상적으로 즐겨 먹던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렇게 그립고 소중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아침에 짐부터 챙긴 후 나흘씩이나 묵었던 숙소를 떠나 다시 타멜의 한국식당 '경희궁'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상점들을 다니며 히말라야 사진과 그림 등을 구입한 뒤 우리는 곧바로 트리뷰반 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10박 11일 동안 우리 일행들을 빈틈없이 챙겨주셨던 목사님과도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눴다.

원시적인 몸수색이 반복되는 답답하고 지루한 출국수속을 다 마치고 나서 비행기 탑승만 기다리고 있던 우리 일행들에게 뜻밖의 행운(?)이 한가지 생겼다. '안나푸르나'를 방문하고 귀국길에 오른 '엄홍길 대장님'이 우리와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등장하신 것이다. 우리 일행은 단 한 번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통해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오른 산악계의 전설적인 영웅 두 분을 한꺼번에 만나뵙게 되었던 것이다.(이제까지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오른 산악인은 31명에 불과하다. 완등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가 한국이다.)

이제 오랫동안 열망해 왔던 '히말라야 트레킹'은 끝났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눈부신 설산'을 보며 감동에 젖어 잠시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물이 핑그르 돌던 그 순간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가슴 속에 뚜렷이 각인되어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기회가 된다면 흰 눈에 뒤덮인 그 장엄한 봉우리들을 보기 위해 또다시 카고백을 꾸리고 배낭을 챙겨 히말라야를 찾아 갈 날이 분명 있으리라 믿는다.

<여행의 기술>을 쓴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그에 뒤이어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고 말한 대목이 나로서는 좀 불만이다. 사실 인간이 비행기나 기차를 타게 된 역사는 지극히 짧다. 오히려 '걷는 것과 함께 생각하는 일' 만큼 인간에게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습관도 드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히말라야 트레킹'은 오래도록 걸으며 우리 마음 속에 깊숙히 감춰져 있던 '내면의 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가 아닐까 싶다. 이에 걸맞는 글을 보통의 책에서 다시 찾아 인용할 수 있다는 건 기분좋은 일이다.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178쪽)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216쪽)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292쪽)



히말라야 트레킹을 나서는 데 있어서 혹시 '나이 문제'가 적지 않은 장벽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 히말라야 트레킹 도중에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분들을 여러번 만났다. 멀리 제주에서 오셨다는 어느 사진작가님은 명함만 봐도 연세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무려 1947년생이었다. 나는 지레짐작으로 그 분이 '히말라야 트레킹'이 처음일 줄 알았다. 트레킹 도중에 그 분으로부터 '배터리 충전기'를 빌리는 '신세'까지 지면서 몇차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사진'에 관한 말씀만 하셨을 뿐 '다른 히말라야' 얘기는 전혀 입밖으로 꺼내지 않으셨다.

그런데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 그 분의 명함에 적힌 '포토갤러리'를 방문해 봤더니 그 분은 2010년 이후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지역의 난코스들을 두루 섭렵하신 분이었다. 게다가 트레킹 때마다 무거운 카메라와 장비들을 갖추고 엄청난 열정으로 숱한 사진들을 담아내기까지 하셨다.(히말라야의 멋진 풍광들을 담은 그분의 사진을 직접 감상하실 분들은 다음 사이트를 방문해 보시기 바란다.(
http://www.sun1947.com/xe/) 그분을 보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평범하고도 진부한 얘기를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라는 책에서 '엘랑비탈(elan vital)'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분출하는 생명력'을 인상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동물을 감수성과 깨어난 의식으로, 식물을 잠든 의식과 무감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한 동물종의 삶이 아무리 충만하고 넘치는 것처럼 보여도 마비나 무의식이 언제나 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동물의 활동에 있어서 발견되는 '수없는 쇠퇴와 퇴락'은 결국 '식물적 삶을 향한 방향전환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들 역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이런 저런 '무기력과 무감각'들을 좀 더 자주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또 불가피한 방향전환들을 감수하며 삶을 이어나간다. 그게 꼭 '식물적 삶을 향한 방향전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느덧 자꾸만 '어떤 잔해들을 쌓아가는 삶의 확실성'으로 다가서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히말라야'의 드높은 설산들을 찾아서 가쁜 숨을 내쉬며 허파꽈리들을 강하게 자극시키고 다리의 근육들을 욱신거리게 만듦으로써 그런 방향전환의 속도를 조금 더 늦출 수도 있다고 믿는다. 히말라야는 '나이'를 탓하며 너무 일찍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곳이며 '생동하는 삶의 활력'을 느껴보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페인의 철학자인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내가 전하지 않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내가 잡담처럼 길게 쓴 이 '트레킹 후기' 역시 비록 말이 아닌 글이지만 '결핍과 과잉'으로 점철된 듯싶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널리 헤아려 부족한 부분과 넘치는 부분을 알맞게 채우고 덜어내며 읽어주시길 바랄 뿐이다.

(이번 트레킹을 함께 했던 우리 일행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특히 '랑탕 트레킹'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함께 떠날 일행들을 모집한 것은 물론, 네팔 현지에서도 푸근하고 넉넉한 리더십으로 우리 일행들을 늘 앞장서서 이끌어주신 장대장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들의 무거운 짐을 날라주고 길을 안내해줬던 포터와 가이드에게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네팔 현지에서의 모든 진행을 홀로 도맡아 너무나 편안하게 '트레킹 & 시내 투어'를 두루 즐길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 박목사님께 다시 한번 깊이 머리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공항에서 만난 엄홍길 대장님.




 - 엄홍길 대장님과 함께.




 - 네팔 카트만두여 안녕~




 - 어느덧 비행기는 산소가 희박한 8,000m의 고도를 날고 있다. 히말라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 * *

"안나푸르나는 우리가 빈 손으로 갔지만 앞날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시없는 보물이다. 안나푸르나를 오르고 우리 인생의 새 장이 열렸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있다."
 - 모리스 에르조그(1950년 인류 최초로 고도 8,000미터가 넘는 안나푸르나에 오른 프랑스 원정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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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6-0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무사히 일정을 마치셨군요. 귀한 사진까지 올려주시고. 돌아오시는 감회가 특별하시겠어요.

oren 2013-06-01 23:58   좋아요 0 | URL
한국에 돌아와서도 후유증 때문에 고생이 제법 심했어요.
'물'이 바뀌어서 그런지 배탈을 보름 이상 앓다가 이제 겨우 나은 듯해요. ㅎㅎ


프레이야 2013-06-0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오셨군요! 따나신 지 얼마 안 된 듯한데 그새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군요. 무사히 귀환하셔서 축하드립니다. 숫자에 불과한 나이, 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겠어요. 이 페이퍼 다시 읽고싶어질거에요.^^

oren 2013-06-03 10:39   좋아요 0 | URL
세월 참 빠르지요..

제가 네팔로 떠날 때만 하더라도 '쌀쌀한 날씨' 때문에 벚꽃조차 제대로 피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그 사이에 벌써 철쭉도 폈다 지고, 아카시아꽃도 폈다 지고, 벌써 붉디붉은 장미가 활짝 피어 있으니 말이에요.

프레이야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는 점점 더 까먹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이 나이에....'라는 생각만 떨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오늘은 2013-06-0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팔 히말라야다녀 오신 분들 참 대단하십니다.
부럽기도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여행기 잘 봤습니다.

oren 2013-06-04 10:17   좋아요 0 | URL
어제 마침 (네팔에서 목사님까지 와 계셔서) 우리 일행 11명 전원이 모여 '뒷풀이'를 가졌는데,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배탈'로 여러날 고생했더라구요. 체중 또한 5kg 이상 빠진 사람도 있었구요. 저는 히말라야 갔다 와서 배탈로 보름 정도 고생했고, 체중은 2kg 정도 빠졌습니다.

페크pek0501 2013-06-04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대단하십니다. 그 먼 곳을 다녀오신 것도 대단한데, 사진에 글까지 곁들여 쓰신 것의 분량을 보고 감탄합니다.
읽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이것들을 올리는 작업을 마치시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헤아려 봅니다.
오렌 님의 정성으로 저를 비롯한 방문자들이 귀한 사진과 글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네요.
잘 감상하고 가겠습니다. ^^

oren 2013-06-04 14:46   좋아요 0 | URL
글 내용에 '몇 권의 책'을 더 포함시키고 싶었는데 글이 자꾸만 길어져서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ㅎㅎ

쓰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그걸 다 표현할 수가 없어 '간략하게' 쓸려고 애썼지만, 결국 글과 사진을 올려놓고 보니 분량이 정말 만만치가 않네요. ㅎㅎ
 
9. 포카라의 '낮술'에 모두가 쓰러질 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 뿐만 아니라 모두들 설사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다들 모여서 목사님께서 사오신 설사약을 먹고 다시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기 바빴다. 한낮이 되어서야 컨디션이 조금씩 회복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카트만두 시내 구경'을 나서게 되었다. 목사님 대신 비서인 뻐덤이 가이드 역할을 대신 떠맡아 우리와 함께 했다.

제일 먼저 가 본 곳은 몽키템플로 더욱 잘 알려진 스와얌부나트 사원. 이곳은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곳이기도 하다. 카트만두의 작은 언덕에 자리잡은 이곳은 무엇보다 스투파(반구형의 티벳불교 탑)
에 그려진 '지혜의 눈'이 가장 눈길을 끈다. 네팔의 관광상품을 비롯해서 길거리의 담벼락 같은 곳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네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이다.

한가한 일요일 오후에 느긋하게 불교 사원 경내에서 울려퍼지는 '독경소리'를 듣는 감상이 특별하다. 네팔 사람들과 뒤섞여 사원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불상에 절을 올리고 나서 100루피 지폐 한장을 꺼내 불전함에 시주하고 나니 문득 이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부처님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네팔 남동부 테라이(Terai) 평원에 자리잡고 있는 룸비니는 석가모니가 탄생한 성스러운 곳이다. 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현재는 각국의 사원들과 순례자들로 넘쳐나고 있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그곳은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1895년 독일의 고고학자인 포이러(Feuhrer)가 히말라야 산기슭의 작은 언덕을 배회하다 석주 하나를 발견하면서 그 비문을 해독한 결과 그곳이 바로 석가모니의 탄생지였음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그때 고고학자가 발견한 석주는 기원전 249년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이 석가모니를 찬미하며 룸비니를 찾아와 불탑과 함께 세웠던 것이라고 한다. 네팔에까지 와서 룸비니를 가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컸지만 스와얌부나트 사원에 들러 불상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각별한 느낌이 솟아나는 듯했다.

사원을 나와 다시 복잡한 골목길을 거쳐 '구왕궁'이 있는 거리로 이동했다. 왕궁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목조건물인 데다가 규모에 있어서도 웅장한 분위기는 별로 찾기 어려웠다. 네팔이라는 나라 자체가 바다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국토의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형이다 보니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형성될 여건이 되지 못했음을 '왕궁'의 규모만 보아도 능히 미루어 짐작할 만했다.

네팔은 아직도 국왕이 있긴 하지만 권력이 많이 약화되면서 정치적 상황이 대체로 불안정한 데다가 근래에는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나서도 '헌법'조차 아직까지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카스트라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사회 전반에 뿌리깊게 남아 있어서 발전을 가로막는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눈에는 네팔이라는 나라가 어디를 가든 한결같이 '너무 낙후된' 모습으로 보였다. 그저 안타까운 생각에 '도로와 전기와 수도'만이라도 어떻게든 좀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없을까를 여러번 고민해 보기도 하였다.

카트만두에 오면 반드시 가볼 만한 곳이 '더'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시내를 흐르는 조그만 강가에 있는 화장터(파슈파티나트, Pahupatinath)였다. 아쉽게도 우린 다들 몸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좋은 핑계로 거길 생략했다. '삶과 죽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장소'를 곁에 두고 그냥 지나친 것이다. 사실 그 화장터는 네팔에서 가장 유명한 힌두사원으로 창조와 파괴의 신인 시바신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이왕 네팔까지 왔으니 한번쯤 그곳에 들러 불교와 힌두교에도 심취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글을 떠올려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을텐데 싶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돌연 진지하게 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을 밖에서 보면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의미하며, 또 안에서의 느낌도 얼마나 답답하고 무의식적인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의 생활은 무기력한 동경과 고뇌이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사상을 가지고 인생의 사계를 돌아다니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꿈을 꾸듯 허우적거리며 간다. 그들은 태엽에 감겨서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움직이는 시계와도 같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이 새로 감기고, 이때까지 무수히 되풀이하여 연주된 오르골의 곡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하여 한 악절마다 한 박자마다 보잘것없는 변주를 붙여서 연주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 모든 인간의 얼굴이나 생애도 무한한 자연의 영혼이 살려고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의지의 짧은 꿈에 지나지 않고, 이 영혼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그의 무한한 지면에서 재미로 그려 보는 잠시 동안의 형상이다. 그것은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실로 보잘것없는 일순간에만 존재가 허용되고, 다음 형상에게 장소를 양보하기 위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인생의 중요한 측면이 있는 것이지만, 이들 잠시 동안의 형상이나 이 재미없는 착상들은 모두 생에 대한 의지 전체에 의해, 그 격렬함 속에서 많고 깊은 고통, 또 마지막에는 오랫동안 무서워하고 끝으로 나타나는 괴로운 죽음으로 속죄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체를 보면 우리는 돌연 진지하게 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中에서



 - 스와얌부나트 사원 




 - 라마불교의 경전이 새겨진 마니차를 돌리면서 서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일행들.




 - 스와얌부나트 사원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서 네팔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 불경을 적어놓은 오색의 '타르초'




 - '지혜의 눈'




 - 옴마니 반메훔




 - 옴마니 반메훔




 - 목조 양식의 '구왕궁'




 - 단촐해진 우리 일행




 - 나무기둥의 조각이 이채롭다.



 - 목조건물이 마치 불에 그을린 듯 많이 어둡다.




 - 옛날에는 화려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먼지가 내려앉아 '퇴락'의 느낌만 가득하다.




 - 다음 행선지는?




 - 왕궁 주변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는 네팔 사람들.




 - 왕궁을 나오니 주위는 금새 정신없이 복잡해진다.




 - 아이들에겐 이곳이 놀이터.




 - 웃음이 넘치는 네팔 노인들.




 - 골동품 가게 앞 젊은이들.




 -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뒤범벅인 왕궁 주변 도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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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1. 타멜에서 아침을,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from Value Investing 2013-06-03 14:18 
    오늘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지난 4월 하순에 네팔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히말라야의 설산'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그에 못지 않게 '험준한 산길'을 제대로 완주할 수 있을까 싶어 '긴장'도 좀 되고, 또 '고산병'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냥 들떠 있을 수만도 없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이제 무사히 내가 살던 땅, 내가 살던 집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어느새 '밀려드는 안도감'과 함께 일상
 
 
 
8. '여행자의 천국' 포카라를 가다

 
포카라에서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이튿날 '사랑곳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4시 30분에 미니버스를 타고 호텔을 출발했다. 날씨만 좋았더라면 이곳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의 일출'은 그야말로 장관이겠다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갔을 땐 연무 때문에 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여명을 뚫고 빨간 해가 짠~ 하고 나타났을 땐 속에서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일출을 감상한 뒤 호텔로 되돌아와 아침을 먹고 나서 패러글라이딩을 예약한 일곱명은 다시 사랑곳으로 올라갔다. 다시금 '날씨만 좋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청명한 가을날 여기에 왔더라면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면서 안나푸르나의 멋진 설봉들을 감상할 수도 있었을 테고, 페와 호수와 포카라 시내도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패러글라이딩을 경험하기엔 더할 나위없이 멋진 장소였지만 봄철 특유의 박무 현상은 '눈의 탐욕'을 아무때나 쉽게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엷은 장막을 계속 드리웠다. 난생 처음 타보는 패러글라이딩이었지만 생각보다 너무나 가볍게 공중을 날아 오르는 게 신기했다. 러시아에서 왔다는 스물일곱살 청년의 멋진 솜씨 덕분에 나중엔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의 곡예 비행을 '멀미가 나도록' 실컷 즐겼다.

패러글라이딩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긴 우리가 넉넉하게 남은 비행기 시간을 앞두고 '점심식사도 할 겸' 찾아간 식당은『낮술』이라는 한국 음식점이었다. 낮술에 한번이라도 제대로 취해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낮술의 '취기'가 얼마나 사람을 정신 못차리게 하는지를. 그런데 그 음식점에서 맛있게 '점심과 낮술'을 배불리 먹은 우리를 무참하게 쓰러뜨린 건 정작 '낮술' 때문이 아니었다. 우린 포카라를 떠나 카트만두에 돌아오자 말자 하나둘씩 '설사'를 앓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거의 모두가 '설사' 때문에 꼼짝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뒤늦게 우리 일행들이 곰곰히 되짚어본 추리에 의하면 '설사'의 원인은 '낮술'에서 맥주를 마실 때 서비스 안주로 나왔던 '땅콩'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우리는 '낮술'에 들러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목도 축일 겸 맥주를 제법 많이 마셨는데, 그 때 우리가 자꾸만 '더 달라'고 종업원에게 부탁했던 게 바로 '땅콩'이었고, 그 종업원은 몇 번씩이나 '땅콩'을 쟁반에 받쳐들고 와서는 빈 접시에 수북하게 채워주곤 했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도 그 '땅콩 봉지'가 왠지 모르게 조금은 불량해 보였었다.

더군다나 '땅콩'이 '설사의 주범'으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한가지 더 있었다. '낮술'은 커녕 '밤술'조차 전혀 드시지 않고, 심지어는 대학 신입생 시절에도 친구들과의 숱한 '술자리'에 좀처럼 빠지는 법이 없었지만 '술·담배'는 결코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는 목사님께서 하필이면 '설사 증세'가 제일 심각했다는 사실이다. 목사님은 우리 일행들이 '낮술'을 즐겼던 그 기나긴 시간의 대부분을 '불량 땅콩'을 드시는 데 열중하셨던 것이다!

나중에 목사님은 포카라를 이륙한 비행기가 카트만두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난 뒤(탑승객들이 모두 비행기에서 내려와 버스로 갈아탄 이후에도 한동안 그 '버스'는 움직일 줄 몰랐다) 홀연히 비행기에서 나와 트랩을 밟고 내려오셨다. 이미 그 때부터 증세가 꽤나 '심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부터 밤이 새도록 설사가 그치지 않아서 결국 이튿날 아침엔 병원까지 다녀오셨고, 일요일 '목회'조차 포기하신 뒤 하루 종일 드러눕다시피 하셨다고 한다.

사실 내가 한국에 돌아와 '히말라야 트레킹 후기'를 쓰기 위해 인터넷으로 '포카라'를 검색하다가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곳도 하필이면 '낮술'이라는 사이트였다.(
http://www.natssul.com/)   헉~ '낮술'이라면 우리 일행을 '설사' 때문에 그토록 고생하게 만든 바로 그 음식점이 아닌가. 그래서 처음엔 그 사이트가 '조금도' 반갑지가 않았다. 오히려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나 하는 다소 삐딱한 호기심부터 일었다.

알고 보니 '낮술'은 정말 매력적인 사이트였다. 그리고 그 사이트를 운영하시는『낮술』음식점의 사장님은 여행에 대한 멋진 책(
낯선 여행자, 세상과 소통하다)까지 쓰신 분이었다. '병주고 약주는 꼴'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히말라야 트레킹'과 '네팔'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은 '낮술' 사이트를 꼭 한번 방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거기엔 '네팔'과 '히말라야'의 풍경을 담은 멋진 사진들과 아름다운 글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포카라에 가게 된다면 '낮술'이라는 음식점도 빼놓지 말기를 바란다. 페와 호수가 빤히 내다보이는 곳이어서 경관도 좋을 뿐만 아니라 음식도 다양하고 맛있다고 소문난 집이다.

『낮술』사장님은 이미 오래 전에 세계 각지를 두루 여행한 끝에 '포카라'에 정착하신 듯하다. 그 분이 다녀봤던 여행지들이 수없이 많을 텐데 다른 곳을 다 제쳐두고 굳이 네팔의 포카라를 택해 음식점까지 차리고 '정주'를 시작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분이 쓰신 다음의 글 한 대목만 읽어보더라도 그런 궁금증이 다 사라지는 듯싶고, '포카라의 매력'에 대해서도 더이상 긴 말이 필요없을 듯하다.

" ······ 그 매력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다 봤다고 이삼일 만에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머지, 그 이삼일만에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 떠날 지 모르는 사람들이 된다. 일주일을 머물 지 몇 달을 머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자기가 언제 떠날 지 모르게 되는 것. 그것이 포카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이다."

 - 낮술 사이트에서 퍼온 사진

(좌측의 언덕이 사랑곳이고 우측의 산이 마차푸차레)


 - 사랑곳의 일출




-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든 안나푸르나




 - 히말라야의 일출




 - 35년 전 만났던 세 분이 안나푸르나의 새벽 햇살이 비치는 순간을 함께 했다.


 - 산악인의 포스가 느껴지는 장대장님




 - 잠시 감개무량했던 순간.




 - 하산하기 전에 모두 모여 '화이팅'




 - 각자의 방식대로~


 - 이 순간을 영원히~




 - 새벽 6시 38분. 하산길에 만난, 이른 새벽부터 가사일을 돕는 꼬맹이.




 - 이 소녀는 언제쯤 '사랑곳'을 떠나볼까?




 - 사랑곳 언덕




 - 시정은 좋지 않지만 '날기엔 좋은 날'




 - Boss와 함께~




 - '시선'의 차이




 - 옆에서 우리와 함께 날고 있는 독수리.




 - 새처럼 가볍게~




 - 발 아래는 허공




 - 우리에게 길을 묻는 한국인 관광객




 - '낮술'로 들어서는 일행들.




 - 건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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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 다시 카트만두로, 스와얌부나트와 왕궁을 둘러보다
    from Value Investing 2013-06-03 14:18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 뿐만 아니라 모두들 설사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다들 모여서 목사님께서 사오신 설사약을 먹고 다시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기 바빴다. 한낮이 되어서야 컨디션이 조금씩 회복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카트만두 시내 구경'을 나서게 되었다. 목사님 대신 비서인 뻐덤이 가이드 역할을 대신 떠맡아 우리와 함께 했다.제일 먼저 가 본 곳은 몽키템플로 더욱 잘 알려진 스와얌부나트 사원. 이곳은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곳
 
 
페크pek0501 2013-06-0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공중을 날으는 느낌이 듭니다. 저렇게 새처럼 날으면 인생관이 확 변할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므로... ^^

oren 2013-06-04 14:51   좋아요 0 | URL
패러글라이딩은 생각보다 밋밋했어요. 나중에 조종사(러시아에서 왔다는 스물여덟살의 청년)가 '재미있냐? 더 익싸이팅하게?' 묻길래 '좋다'고 했더니 그 때부터 엄청난 '공중 제비돌기 모드'로 돌변하더군요.
처음엔 '와우~ 신난다~'고 좋아라 하다가, 너무 쎄게 돌리니까 너무 어지럽고 멀미가 심하게 나서 죽는 줄 알았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