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는 아주 유머러스한 소설이다. 이 책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스페인의 펠리페 3세가 지방 순찰을 나갔다가 길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어떤 남자가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로 크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왕은 말했다. "저 남자는 미쳤거나 아니면 『돈키호테』를 읽고 있을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큰 소리로 웃고, 어떤 독자는 빙그레 웃고, 어떤 독자는 겉으로 웃고, 또 어떤 독자는 속으로 웃는다. 그리고 어떤 독자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기이한 감정 상태로 읽는다. 세르반테스의 유머는 정의하기가 어렵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중에서

 

 * * *

 

흔히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라 일컫는 『돈키호테』를 오래도록 붙잡고 있다. 그것도 장장 두 달에 걸쳐서.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2년에 걸쳐서 읽는' 소설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굼뜨게 책을 읽는 나를 스스로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무슨 소설 한 권을 가지고 해를 넘겨서까지 다 읽지를 못하고 끙끙대냐고 말할 사람도 물론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내가  이 소설을 두 달째 붙잡고 늘어지는 이유는 내가 생각해도 좀 엉뚱하다. 그저 읽다 보니 이 소설의 분량이 어느날 갑자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으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난생 처음으로 작심하고 읽은『돈키호테』는 고작 그 이야기의 '1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까마득한 옛날 스페인에서 쓰여진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 바로 돈키호테가 아니던가. 그 줄거리 또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듯한 그 뻔한 소설을 내가 '돈키호테만큼 나이를 먹도록' 여태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책망하지 마시라. 어디 그런 유명한 책들이 한둘이던가. 그런데 뒤늦게 내가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게 하필 작년 11월이었고, 마침 그 무렵에는 내 눈과 귀로도 무슨 새로운『돈키호테』가 1,2권으로 나뉘어 새롭게 출판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으레 그렇듯이 나는 그 얘기를 나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인 줄로만 알고 귓등으로 흘려듣고 말았다. 왜냐하면 마침 그때 내가 읽기 시작했던『돈키호테』만 하더라도 이미 책은 충분히 두꺼웠으며(731쪽), 그 책만 다 읽으면 나는 당연히『돈키호테』를 '전부 다' 읽는 줄로만 알았으니까.

 

언제 구출될 지도 모르는 채 기약없는 세월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책장에 갇혀 있던 그 '시공사 판'의 익숙한 『돈키호테』가 겨우 그 소설의 '1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한동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 말자 '슬픈 몰골의 기사' 돈키호테와 그의 종자인 산초 판사에게 금새 매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책 속에서 끊임없이 쏟아내는 온갖 '기발한 모험들'과 '기막힌 말솜씨'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소설 속의 소설' 즉 '삽입 소설'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지고 말았는데, 그렇게 많은 모험과 등장인물과 대화와 이야기도 모자라서, 그 작가가 '돈키호테의 2부'를 또다시 추가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돈키호테 1부'를 다 읽고 나면 자연스레 '2부 마저' 더 사서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좀 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 끝에 나는 '옛날에 나온 돈키호테'를 바쁜 연말연시임에도 불구하고 틈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읽어 나갔다. 이만큼 재미있는 소설을 뒷전에 제쳐두고 다른 책을 읽는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될 뿐더러 이 소설을 쓴 작가는 물론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에게도 모독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나는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시간들'을 빼놓곤 가급적 이 소설을 읽는 데 드는 시간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틈을 자꾸만 엿보고 있었다는게 좀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심지어 '불요불급한 일'들은 좀 뒤로 미루고서라도 이 책을 조금이라도 더 읽고 싶은 생각에, 도대체 내가 '어데서' 그런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를 잠시 궁리해 볼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바뀌었고, 내 손에는 이미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 2부'가 절반쯤이나 '밑줄이 좍좍 그어진 채로' 나의 손길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으며, 이제는 겨우 나머지 절반만 깨끗한 채로 남은, 다시 말해서 '돈키호테 전체'로 따지자면 4분의 1만이 나에게 '미개봉'인 상태로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전체의 4분의 3쯤 읽고 나니 문득 작가 세르반테스의 위대함이 자꾸만 새록새록 더 크게 다가옴을 어디에라도 고백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울 듯한 마음이 들고, 그 작가와 작품에 대해 내가 이토록 굳게 입을 다물고 끝내 이 소설을 마저 읽는다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좀 아니다 싶어 이렇게 갑자기 두서없는 글을 끄적이게 되었다. 이렇게 어지러운 이야기라도 『돈키호테』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어느 누군가는 반드시 내 얘기를 읽어줄 사람이 있으리라 믿고 어쨌든 내 얘기를 계속 이어나가 보겠다.

 

이 소설을 쓴 세르반테스는 비록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종이라도 주워 읽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대학 과정을 밟은 적도 없고, 『돈키호테』1부를 출판(1605년)한 58세 때까지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20대 초반에 그는 '스페인 법'을 어긴 일이 있었는데, 별로 중대하지도 않은 죄목으로 중벌에 처해지자 그는 고향 마드리드를 떠나 이탈리아로 도망쳤고, 거기서 2년 동안 고위급 사제의 시종이자 수행원으로 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된다.

 

그가 참전한 전쟁은 그 유명한 '레판토 해전'이었다. 거기서 그는 용감무쌍하게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어 왼손을 잃게 되면서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 후에도 그는 5년 동안이나 더 군대에 몸담았다. 마침내 명예롭게 전역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그는 그만 태풍에 휩쓸려 터키 해적의 습격을 받은 끝에 알제로 끌려가 그리스인 해적에게 양도되어 5년 동안이나 포로로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만다. 포로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네 번의 탈출 시도가 모두 실패했지만 교회 수사의 도움으로 몸값을 치르고 극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가 전역후 직장에서 맡은 일도 <무적함대>에 식량을 납입하고 조달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도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하는 등 그는 늘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곤궁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돈키호테』를 구상한 것도 감옥에서였다고 한다. 체납 세금 징수원으로 일하던 50세 때 하필 징수한 돈을 예금해 둔 은행이 파산함으로써 세비야에서 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이토록 굴곡진 삶을 살았던 그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 58세 때 내놓은 소설이 바로『돈키호테』(원제는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 돈키호테 '1부')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68세 때 또다시 『돈키호테』(원제는『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 돈키호테 '2부')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어림잡아 따져 보더라도 소설 『돈키호테』 가 세상에 나온 건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을 막 끝낸 즈음일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그토록 오래 전에 살았던 옛 인물이 쓴 소설이 도대체 어떻게 그 수많은 쟁쟁한 소설가들을 모조리 다 따돌리고 아직까지도 '세계 최고의 소설'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른단 말인가. 그 점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숱한 언급들을 계속 보태왔으니 나까지 나서서 구차스럽게 새로운 말을 덧보탤 이유가 없을 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내게 가장 설득력있게 다가온 말은 단연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한 다음 말이었다.

 

 "아!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텐데."

 

스페인을 대표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철학자로도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 저런 말을 내놓았을 정도이니, 평범한 독자가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떻고 저떻고를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으며 그가 사물을 다루는 방식을 도대체 어떻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싶기도 하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키호테에 관한 명상 Meditaciones del Quijote》(1914), 《등뼈 없는 스페인 Espa?a invertebrada》(1921), 《예술의 탈인간화 Deshumanizaci?n del arte》(1925), 《대중의 반란 Rebeli?n de las masas》(1930), 《관객 El Espectador》(1916-1934), 《칸트 Kant》(1931), 《사랑에 관한 연구 Estudios sobre el amor》(1940) 등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작품이든지 전작이 있고 나서 나중에 후속편이 나오면 대개 그 후속편은 전작 만큼의 감동을 주기 어려운 게 보통이다. 그렇지만 늘상 예외없는 법칙은 없는 법이듯이 『돈키호테』또한 그런 통념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작품이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옳게' 알았으면 좋겠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속편을 얼마나 훌륭하게 썼는지를 알게 되면 돈키호테의 전편만 읽고 소설 『돈키호테』를 다 읽었다고 말하는게 얼마나 한심스러운 얘기일 수 있는지를 누구나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여기서 잠시 (작가의 말도 들어볼겸) 소설 『돈키호테』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보자.

 

「그런데 혹시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 작가가 후속편을 약속하고 있소?」 

 

「그럼요.」삼손이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책이 나올 것인지 안 나올 것인지 우리도 궁금해하고 있답니다. 이런 사정인 데다 <속편은 절대로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어서 후속편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들 생각하지요. 토성보다 목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돈키호테 같은 짓을 더 보여 다오. 돈키호테는 돌진하고 산초 판사는 말하라,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것으로 즐거울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긴 하지만요.」

 

「작가는 어쩔 생각이라 하오?」

 

「그가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즉시, 다시 칭찬을 얻겠다는 뜻에서라기보다 그에 따를 이익 때문에 인쇄로 넘기겠지요.」

 

 - 『돈키호테 2』 <4. 산초 판사가 학사 삼손 카라스코의 의문을 풀어 주고 질문에 대답한 내용, 그리고 알아 두고 이야기할 만한 다른 일들에 대하여> 중에서

 

 작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2부를 얼마나 긴밀하고도 흥미롭게 1부와 서로 엮어 놓았는지, 또한 1부에서 다뤘던 '두 번의 모험'을 통해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겪은 온갖 흥미진진한 사건들과 그 밖의 이야기들을 통해 그가 꾸미고 만들어 내놓지 못할 이야기가 없을 정도라고 느낀 독자들을 다시 한번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가 돈키호테 2부에서 얼마나 새롭고도 닮은 이야기들을 더욱 풍성하게 꺼내 놓았는지를 알게 되면 다시 한번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소설이 지닌 빼놓을 수 없는 매력 가운데 하나는 분명 '소설 속의 소설'이라고 불리는 '삽입 소설'을 읽는 데 있음도 부인하기 어려울 듯하다. 물론 그 '삽입 소설'에 대해서 작가가 아무리 능청스럽고도 교묘하게 그걸 깎아내리는 것처럼 포장하면서 너스레를 떨더라도 말이다. 그 대목을 끌어들이는 작가의 얘기는 다음과 같다.

 

「그 이야기의 결점 중 하나는······.」학사가 말했다. 그 이야기 안에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넣은 것이오. 이 이야기가 재미없다거나 내용이 엉망이라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들어갈 게 아닌 데다가 돈키호테 나리의 얘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지요.」

 

「내기를 걸어도 좋아요.」산초가 말했다. 「어떤 개자식이 양배추와 바구니를 섞어 놓은 겁니다요.」

 

「그렇다면······.」돈키호테가 말했다. 「내 이야기의 작가는 현자가 아니라 무식한 수다쟁이라는 말이군. 생각도 없이 어름어름하면서 그것을 썼다는 얘기요. 우베다의  화가 오르바네하가 했던 것처럼 말이오. 이 사람한테 무엇을 그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결과적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지. 한번은 수탉을 그리고 있었는데 너무나 못 그려 전혀 닮지가 않자 그림 옆에다 <이것은 수탉이다>라고 대문자로 써놓아야 했다는 거요. 내 이야기도 아마 이런 식인 게 틀림없을 것이니, 그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설명이 필요할 테지.」

 

「그런 건 아닙니다.」삼손이 대답했다. 「아주 분명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건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손으로 가지고 놀고, 젊은이들은 읽으며, 어른들은 이해하며, 노인들은 기린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다들 읽어 알고 있어서, 비루하고 비쩍 마른 말을 보기만 하면 누구나 <저기 로시난테가 간다> 하고 말할 정도죠. 그 책을 가장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시동들입니다. 『돈키호테』한 권쯤 놓여 있지 않은 주인집 응접실은 없는데, 누가 가져다 놓으면 다른 사람이 집어들지요. 누구는 덤벼들어 빼앗아 읽기도 하고 또 누구는 빌려 달라고 조르기도 한답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서 가장 재미있으며 가장 무해한 오락거리라는 겁니다. 책 어느 한 군데서도 기독교적이지 못한 생각이나 불순한 말을 찾아볼 수 없고, 그 비슷한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 『돈키호테2』, <3. 돈키호테, 산초 판사 그리고 삼손 카라스코 학사 사이에 있었던 우스꽝스러운 토론에 대하여> 중에서

 

소설 『돈키호테』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삽입 소설 가운데 내게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이야기 또한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이 이야기는 작가 세르반테스가 오비디우스로부터 얼마나 깊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세르반테스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라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시도 때도 없이 여러 차례 등장시키지만, 그 이야기에서만큼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속에 담긴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 케팔루스와 프로크리스에서 직접 끌어온 이야기임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내의 정절'을 실험해 보려고 하다가 결국 자신과 아내가 모두 파멸하고 만다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바로 그 얘기이다.(돈키호테를 우리말로 옮긴 역자가 '내가 추정한' 바로 이 내용을 주석에까지 달아놓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시공사'와 '열린책들' 모두 어떠한 주석도 없다. 이건 순전히 내 주장이다.)

 

근대 심리 소설의 효시라고도 불릴 정도로 흥미로운 이 <무모한 호기심에 관한 이야기>는 총 4부 52편에 이르는 '돈키호테 1부'에서도 무려 3편을 차지할 만큼 매우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그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 게다가 작가는 편력 기사를 자처하는 돈키호테의 무모한 모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라고는 독자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사랑과 우정 사이의 절묘한 줄타기'나 다름없는 이 이야기를 너무나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다. 세르반테스가 '두 절친한 친구와 한 여자'를 등장시켜 꾸며놓은 그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교훈'을 던져준다.

 

······ 훌륭한 여자는 반짝이는 맑은 유리 거울 같지만, 그것에 닿는 어떠한 입김에도 흐려지게 마련이네. 정숙한 여인에게는 성스러운 유물을 다루는 방식을 사용해야 하네. 그것들을 찬양하지만 만지지는 않는 것처럼 말일세. 훌륭한 여인은 마치 꽃과 장미가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을 지키고 소중히 하듯이 해야 하네. 그 정원의 주인은 어느 누구도 그곳에 들어가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해야 하네. 멀리서 철책 사이로 그 향기와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전부지, 마지막으로 나의 뇌리를 스치는 시구를 들려주고 싶네. 이것은 어느 현대극에서 들은 것인데,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와 꼭 맞는 것 같네, 어느 신중한 노인이 젊은 아가씨의 아버지에게 딸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잘 지키고 감추라고 충고하고 있었는데, 다른 말들 중에서도 그는 이런 말을 했네.

 

여자는 유리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시험하면 안 된다,

깨지는지 안 깨지는지.

모두 깨지고 말 테니.

 

깨지기는 쉽고

다시 붙일 수는 없으니

깨질 위험이 있는 곳에 두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한 일.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나에* 가 세상에 있다면

황금의 비 또한 있을 것이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의 어머니. 다나에가 낳을 아들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운명 때문에 그녀는 탑 속에 갇히지만, 제우스가 황금의 비가 되어 들어와 그녀는 페르세우스를 낳았고 훗날 이 아이가 예언대로 할아버지를 죽인다.

 

 - 『돈키호테』, <33. 무모한 호기심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플로렌스라는 이름난 풍요로운 도시에 안셀모와 로타리오라는 두 기사가 살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이 <무모한 호기심에 관한 이야기>는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단편'으로 봐도 좋을 만큼 이야기가 완벽하고도 재미있다. 그런데 내가 읽은 '돈키호테 1부'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시공사에서 나온 『돈키호테』였는데, 이 절묘한 이야기를 다루는 부분에서 딱 한 번 '번역이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무려 400년 전에 스페인어로 쓰여진 700쪽이 넘는 방대한 이야기를 현대에 맞는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내가 추측할 수 있는 영역이 결코 아니라고 하더라도, 평범한 독자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번역해 놓은 부분은 번역자나 편집자 또한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을 듯한데, 그 부분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문장을 가다듬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아쉬움을 '1부'를 읽는 동안 내내 떨치기 어려웠다.

 

마침 『돈키호테』가 1부만 읽어서는 그 작품 전체를 온전히 제대로 읽는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1부만 다룬 돈키호테를 다 읽고 나서 (2부를 마저 읽기 위해) 또다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돈키호테』를 (2부만 사는 게 아니라)  1,2부를 모두 산다는 게 우습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바로 이 '번역이 애매한 부분'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라도 나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를 두 권 모두 사들이는 데 조금도 망설일 게 없었다. 어쨌든 열린책들을 펼쳐보니 시공사에서 애매하게 번역한 부분이 아주 명쾌하게 번역되어 있어서 그점 하나만으로도 나는 '다 읽은 1부'를 새로 산 걸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번역이 애매하다고 느낀 부분'을 옮겨 놓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과연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별 문제도 아닌데...' 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다. 어쨌든 나는 그 부분을 읽는 데 애를 좀 많이 먹었다. 물론 문맥상 '잘못 번역된 부분'이 어떤 뜻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판단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절친한 두 친구 가운데 로타리오가 한 이 말(인용문)은 물론 '결혼한 안셀모'가 자신의 아내의 정절을 시험해 달라고 친구인 로타리오에게 부탁하는 말에 뒤이어 나오는 장면이다. 물론 안셀모의 '제안' 또한 얼핏 들으면 구구절절 옳은 말처럼 들린다. 안셀모의 '이상한 제안'도 매우 길게 이어지지만 '도입부'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다. "친구, 나를 괴롭히는 소망은 내 아내 카밀라가 내가 생각하는 만큼 착하고 완벽한 여인인지 알고 싶다는 거라네. 불꽃으로 금의 순도를 증명하듯이 아내의 정숙함을 확인할 만한 시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네. ······"

 

"오, 친구여! 나는 자네가 내게 한 말들을 농담으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면 계속 말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네. 자네가 나를 모르거나 내가 자네를 잘 모르는 게 아닌가 싶네. 하지만 그럴 까닭이 없잖은가. 자네가 안셀모라는 걸 알고, 자네는 내가 로타리오라는 걸 잘 알지 않나. 문제는 나는 자네가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자네 또한 나를 평소의 로타리오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네. 자네가 나에게 말한 것들이 나의 친구 안셀모의 말이 아니고, 나에게 부탁한 것들도 자네가 알고 있는 그 로타리오에게 청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네. 어느 시인도 노래했듯이, 절친한 친구 사이를 시험하거나 우정을 평가할 때에는 반드시 '제단까지만'으로 한정해야 하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반할 만한 일에 우정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길세. 우정에 대해 이교도가 이렇게 생각했는데, 하물며 기독교인이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신성한 우정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친구에 대한 우정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경의를 멀리하면서까지 그 신성한 우정을 포기하는 건 친구의 명예와 생명에 관한 일이기 때문이지, 이렇게 하찮고 아주 순간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네. 자, 안셀모. 자네가 나에게 말해주게. 지금 말한 이 두 가지 중 무엇 때문에 내가 자네를 기쁘게 하고, 자네가 청하는 그토록 증오스러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네. 내가 생각하기엔 오히려 이 일이 내가 자네의 명예와 생명을 빼앗고, 게다가 나의 것마저 빼앗을 걸세. 내가 만일 자네의 명예를 빼앗기 위해 애써야 한다면, 내가 자네의 생명을 빼앗게 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네. 명예를 잃어버린 인간은 시체보다 못하지 않나. 그래서 자네가 바라는 대로 내가 자네를 이토록 나쁜 상황에 빠뜨리는 도구가 된다면, 나 역시도 불명예스럽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나? 잘 듣게, 나의 친구 안셀모. 자네가 소망하는 일들에 대해서 내가 자네에게 해줄 말을 끝마칠 때까지 묵묵히 들어주게나. 자네가 내게 반박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고 그 말을 경청할 테니 말이네." (448∼449쪽)

 

* 그리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한 말로, 친구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만 아니라면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시공사판 『돈키호테』

 

 

「오, 내 친구 안셀모! 자네가 한 말이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네. 정말 그런 말을 자네가 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군.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게 계속 지껄이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걸세. 자네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그 긴 사설을 멈추게 했겠지. 내가 보기에 이건 아무래도 자네가 나를 모르거나 내가 자네를 모르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네. 하지만 그건 아니잖은가. 나는 자네가 안셀모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자네는 자네대로 내가 로타리오라는 것을 알고 있잖은가. 문제는 내가 자네를 평소의 안셀모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자네 역시 내가 여느 때의 로타리오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틀림없네. 왜냐하면 자네가 한 말은 내 친구 그 안셀모의 말이 아니고, 자네가 부탁한 일은 자네가 알고 있는 그 로타리오에게 부탁할 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니 말일세. 좋은 친구라면,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제단 밑으로까지 친구를 시험하거나 이용해서는 안 되네.278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에 우정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이교도조차 우정을 이렇게 느꼈으니, 기독교인이 인간적인 우정 때문에 신과의 우정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더 훌륭한 일이겠는가?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나 몰라라 한 채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할 정도가 되려면 일시적이고 가벼운 일이 아니라 친구의 명예와 목숨이 달린 일이어야 한다네. 그러니 말해 보게 안셀모, 내가 자네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자네가 요구한 것처럼 그렇게 혐오스러운 일을 해야 할 만큼 자네의 명예와 목숨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겐가? 분명 둘 다 아닐세. 오히려 내가 보건대, 자네는 내가 자네의 명예와 목숨을 빼앗고 내 것도 같이 빼앗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네. 자네가 요구한 그 일로 내가 자네의 명예를 실추시키면 그것은 곧 자네의 목숨을 빼앗는 일임이 분명한데, 명예를 잃어버린 인간은 죽은 자보다 못한 법이니 말일세. 또한 자네가 원하듯이 내가 자네를 엄청난 불행에 빠뜨리는 도구가 된다면 나 역시 불명예스럽게 남겨져 결국 죽은 사람과 같지 않겠는가? 친구 안셀모여, 욕망 때문에 자네가 저지르려는 일에 대해 내게 떠오른 생각들을 다 말할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들어 주게. 자네가 내게 반박할 시간과 내가 그것을 들을 시간은 있을 테니 말일세.」(509∼510쪽)

 

278 플루타르코스Plutarkhos(50∼120)에 의하면 그리스 정치가인 페리클레스Pericles(B.C.495∼B.C.429)가 친구로부터 거짓 증언을 부탁받았을 때 이 말을 하여 거절했다고 한다.

 

 - 열린책들, 『돈키호테 1』

 

이쯤에서 나는 다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만나러 세르반테스의 소설 속으로 서둘러 되돌아가야겠다. 마침 돈키호테는 이번 모험에서 '기쁨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다. 진짜로 공작 부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편력 기사들의 꽃이자 정수이신 분이시여,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그들 모두, 아니 거의 대부분이 돈키호테와 공작 부부 위에다 병에 든 향수를 뿌렸다. 이 모든 것이 돈키호테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은 그는 자신이 환상 속에서가 아니라 진짜 편력 기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전적으로 실감하고 믿게 되었다. 책에서 읽은 지난 세기의 편력 기사들이 받은 것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돈키호테의 모험은 아직도 나에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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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호 2016-05-10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키호테 시공사꺼, 2004년판읽고있는데요~ 2편은 2015년판 2편으로 읽어도되나요???

oren 2016-05-11 11:30   좋아요 0 | URL
1편을 시공사판으로 읽으셨다고 해서 굳이 2편마저 시공사판으로 읽으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시공사판으로 2편을 읽는다고해도 별달리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저라면 역시 2편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을 집어들고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안영옥 교수님 번역이 썩 훌륭하니까 말이지요.
 

 

 

희망

희망을 그렇게도 강력한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미래가 동시에 여러 형태로, 그것도 모두 동일하게 미소지으며 동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원하던 것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다른 것들을 희생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들로 가득차 있기에,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결국 미래 자체보다도 더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보다는 희망에서,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한다.

(역주) 여기서 희망을 논하는 것은 다음의 기쁨과 슬픔, 특히 기쁨을 그것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미래가 필연적 진행으로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될지 모르게 열려 있다는 것이 베르크손의 철학이므로, 그런 무한한 가능성이 현재에 대해 제공하는 그낌 자체가 바로 희망이며, 그것은 무한이 인간에 주는 말하자면 <계시>이다. 빠스깔적 무한의 은총이 베르크손에게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

 

 -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 * *

 

새해의 첫 날 오후에, 벌써 아득한 심연 속으로 까마득히 묻히고 만 '지난 한 해'를 다시 되돌아보는 게 무슨 소용일까마는, 정초의 마음가짐이라는 게 늘 '작년보다는 올해가 좀 더 나으리라'는 밑도 끝도 없는 낙관과 굳건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깊게 들이마시는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한 번쯤 지난 세월로부터 새롭게 열릴 나날에 대한 희망을 슬쩍 엿보는 일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 싶다.

 

2014년이 비록 '세월호'와 함께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끝없는 심연 속으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을 아직도 여전히 떨칠 수 없지만, 그래서 '그날' 이전과 이후가 이토록 극명하게 우리들 마음속에 뚜렷한 구분을 낳은 적이 있었나 싶다가도, 조금만 더 멀리 되돌아보기만 해도 우리는 그보다 더한 아픔들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겪으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마침 올해가 남북이 분단된지 70년째 되는 해라고 하니, 무려 수만 년을 함께 살아온 동족들이라 하더라도 그걸 하루 아침에 70년은 너끈히 버텨낼 만큼 확고하게 갈라놓을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를 과연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싶은 의문도 든다.

 

영화 한 편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비록 나보다 한 세대쯤 앞선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겪었던 삶이라 하더라도, 휴전협정을 맺은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땅에 태어난 내가 부모 세대를 왜 모르겠는가. 영화 '국제시장' 얘기다. 내 얘기가 갑자기 너무 먼 과거로 달아날까 두렵다. 그래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문득 지난 여름 휴가때 독일 뮌헨에서 우연히 만났던 '파독 광부' 출신 교민 한 분의 모습이 다시 생각나서 그 얘기를 조금만 덧붙이고 싶다. 그분은 52년 전에 한국인으로서는 맨 처음으로 '파독 광부'로 독일에 건너와 광부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독일에서 대학까지 나와 수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을 경영할 정도로 크게 성공하신 분이었다. 한때 '뮌헨 한인회장'도 맡으셨고, 어느새 팔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뮌헨 시내에서 최고로 꼽히는 '한국음식점'을 운영하시며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살고 계셨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일로 건너 오신 곱게 늙으신 사모님과 함께. 비록 우리와는 이틀 밖에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둘째 날 밤이 늦도록 독일 맥주와 한국 소주를 함께 마시며 서로 어깨를 걸고 '흘러간 옛노래'를 함께 부를 때, 고국과 고향을 그리는 애타는 마음 때문에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슬픔에 젖어 눈시울을 계속 붉히시던 그 슬픈 눈과 눈물을 나는 아마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났더니 문득 그 할아버지와 그때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던 게 더욱 아쉽다. 아마 그 할아버지도 머지않아 틀림없이 그 영화를 보시며 많은 눈물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리라 믿는다. 그 분에게도 아직까지 간절한 희망은 남아 있었다. 그건 꿈에서조차 결코 잊지 못하는 '고국'에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이었다. 비록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 4월 어느 봄날, 여느해와 다름없이 벚꽃이 만개했다.

Shooting Date/Time 2014-04-06 오후 1:11:29

 

아직도 봄날~

 

 

 - 변산의 봄

Shooting Date/Time 2014-05-01 오후 12:44:58

 

변산, 내소사, 곰소 염전, 격포, 성주사지 등

 

 

 - 꽃이 슬프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새삼 절실하게 느꼈었다.

Shooting Date/Time 2014-05-06 오후 3:14:44

 

꽃들이 너무 아프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브뤼셀의 '그랑쁠라스'의 야경

Shooting Date/Time 2014-07-09 오전 5:41:51(한국시간)

 

 

 - 오스트리아 잘쯔부르크의 비 내리는 오후 풍경

Shooting Date/Time 2014-07-15 오전 1:58:59

 

 

 - 파독 광부로 52년째 독일에서 살아온 민사장님과 함께

Shooting Date/Time 2014-07-17 오전 3:57:35

 

17일 동안의 유럽 여행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 어느 황홀했던 여름 저녁

Shooting Date/Time 2014-08-01 오후 7:49:16

 

 

 -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웠던 여름밤

Shooting Date/Time 2014-08-01 오후 8:18:24

 

One summer night

 

 

 - 불타는 억새

Shooting Date/Time 2014-10-03 오후 6:05:15

 

억새에 불붙다.

 

 

 -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섬 홍도의 아침

Shooting Date/Time 2014-10-26 오전 9:01:20

 

홍도·흑산도 2박3일_첫째 날

 

 

 - 단풍이 무척이나 고왔던 화창한 어느 가을

Shooting Date/Time 2014-11-01 오후 12:14:57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까운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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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0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사계절 풍경이 아름다워요. 벌써부터 이런 멋진 풍경들이 그리워집니다.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느새 여름이겠죠? ^^;;

oren 2015-01-01 19:51   좋아요 0 | URL
사계절이 있어서 늘 천변만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게 언제나 즐겁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겨울은 너무 혹독하고도 너무 길다 싶은 생각을 떨치기 어려워요.^^

yamoo 2015-01-01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적인 사진 잘 봤습니다. 풍성한 한 해 였네요. 오렌님의 유럽 사진들이 무척 부럽게 다가옵니다. ㅎㅎ
작년 한 해 오렌님의 글과 댓글로 생각의 지평을 넓혔던 거 같습니다. 주옥같은 글들 감사합니다.

오렌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15-01-02 12:05   좋아요 0 | URL
사진으로만 보면 썩 괜찮았던 한 해였는지 몰라도, 그 나머지들을 살펴보면 그리 좋았던 한 해는 아니었지 싶어요. ㅎㅎ 그래서 저 또한 작년 보다는 올해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고요.

야무 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커다란 행운이 함께 하길 빕니다~

페크pek0501 2015-01-02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좋지만,
두 번째 사진이 가장 맘에 듭니다.
푸른 나무들을 볼 수 있는 여름의 매력이 느껴집니다.
서재의 달인이 되신 걸 축하드리며
올해 2015년에도 님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합니다. ^^

oren 2015-01-02 15:24   좋아요 0 | URL
아... 저때가 5월 1일이었어요. 온 산이 푸른 나뭇잎으로 우거져 말할 수 없이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던 때였죠. `청춘`이라는 말과 `신록`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음미하면서 산길을 걷던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pek 님도 올 한해 내내 건강하시고, 또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랄께요~
 

 

 

명예와 불명예에 관한 중용은 '포부가 큰 것(megalopsychia)'이고, 지나침은 어떤 종류의 허영심이며, 모자람은 '포부가 작은 것'(소심함)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중에서

 

 * * *

 

         연  도

       작성한 글

    (리뷰/페이퍼)

   작성한 글자수

 <엄마를 부탁해>

 같은 단행본으로

       몇 번째 1년간 총방문자수

        2014년

 201 (117/ 84)

         4,001,226        34.73권           140          68,697
        2013년    135 (  11/124)            501,774          4.36권           243          24,420
        2012년    105 (  41/  59)            320,891          2.79권           362          21,028
        2011년  111 (   9/  92)            303,860          2.64권           481            9,118

 

(표 설명 : '작성한 글자수'가 갑작스레 늘어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밑줄긋기' 형태로 '베껴쓰는 글'을 많이 남겼던 탓이다. 그러나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쓰는 허접한 글보다는 '글쓰기의 영웅들'이 남긴 멋진 문장들이 훨씬 더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방문자수가 늘어난 데 대해서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설사 하루에 10만이나 100만 대군이 몰려와도 나는 별로 우쭐할 것 같지 않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쭐해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무슨 성가신 일이나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할 지도 모르겠다...)

 

 

알라딘 서재에 들를 때마다 늘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고 있음을 고백하고 싶다. 늘 더 많은 혹은 더 훌륭한 리뷰를 써서 이곳에 남겨 보고 싶은데, 늘 그러지 못해 (알라딘이나 알라디너 분들이나 혹은 '나의 서재'나 '나'에게까지도) 괜히 미안하고, 안타깝고, 답답하고, 조바심이 날 때도 있고, 아주 가끔씩은 짜증이 나기도 한다.

 

'새해엔'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상투적이니 그냥 '앞으로는'이라고 표현하는 게 조금은 낫겠다. 앞으로는 좀 더 리뷰 쓰는 일에 충실하자. 내가 여기에 둥지를 튼 중요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까.

 

언제 어디서건 내가 '몇 번째'에 드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늘 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마치 낮잠 자던 토끼가 느닷없이 잠에서 깨어나 '혹시나 부지런한 거북이가 이미 저만치 앞질러 간 건 아닐까' 싶어 화들짝 놀라며 조바심을 낼 때 드는 느낌과 닮았다고나 할까. 인간을 대상으로 행해진 수많은 실험들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약점이자 본능인 '불타오르는 경쟁심' 때문에 중단된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지금의 내 알라딘 서재 지수만으로도 감지덕지하고 있다. 남들은 얼마나 애쓰며 저 먼 데까지 부지런히 걸어갔을까를 생각하면 나는 여기까지 거의 콧노래를 부르며 온 듯한 느낌도 없지 않고, 그런 면에서 의식적인 노력은 남들보다는 좀 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알량한 자존심도 가끔은 느끼곤 한다.

 

나는 댓글과 추천 버튼 앞에서는 늘 망설인다. 망설임에 대한 미학 또한 결코 없지는 않다고 보기 때문인데, 매사에 조심스러워하는 성미가 무엇보다 그런 망설임에 큰 바탕이 되고 있다. 조금만 더 '젊은 기분으로' 댓글과 추천을 별 망설임 없이 꾹꾹 누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젊은 시절에는 육체의 성장이 진행되는 까닭에 젊은이들은 마치 술에 취해 흥겨운 사람의 상태처럼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젊은 기분으로' 라고 표현한 건 '술취한 기분으로'라는 뜻을 미리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통계로 확인이 가능한 기간인) 지난 4년 동안 제 서재에 들러 수많은 댓글과 추천과 땡스투를 아낌없이 선사해주신 알라디너 분들께 이런 기회를 빌어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리고 싶다.

 

 * * *

 

이런 글을 쓰고 보니 자꾸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내가 이 드넓고도 비좁은 듯한 묘한 알라딘에서 쉽사리 포기하기 싫은 한가지 욕망이 있다면 그건 '남들이 결코 쉽게 읽지도 못하고 또 그 책에 대해 쉽게 리뷰도 쓰지 못하는 책들'에 대해 멋진 리뷰를 남기는 일이다. 올해 만난 책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책을 두고서 아직까지도 '리뷰'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내가 이런 건방진 의욕을 함부로 드러내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래에 인용하는 글들을 '눈'으로 읽는 동안, 나는 '나를 포함한 다양한 알라딘 이웃들'이 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걸 좀처럼 억누르기 어려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그때 생각이 깊숙히 묻혀 있다가 연말이 되니 다시금 슬며시 떠오른다.

 

흔히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entima)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가장 잘 하고 있는 것들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 포부 있는 사람에게 고유한 일이다. 큰 명예나 성취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신중하고 삼가는 것, 그리고 많은 것을 하지는 않지만 명성이 남는 큰일을 하는 것도 포부가 큰 사람이 하는 일이다.

 

포부가 큰 사람은 쉽게 경탄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 나쁜 일들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도 아니다. 지난 일들을 기억해서 불편해 하는 것, 특히 나쁜 일들에 대해 그러는 것은 포부가 큰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니까. 차라리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포부가 큰 사람의 특징이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자도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타인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칭찬받는 일에도 다른 사람이 비난을 받는 일에도 모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쉽게 칭찬하는 사람도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험담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심지어 적이라 하더라도, 오만(hybris) 때문이 아니라면 그는 험담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 완만한 움직임과 깊이 있는 목소리, 안정적인 말투는 포부가 큰 사람에게 속하는 것 같다. 중요하게 여길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매사에 서두르는 일도 없으며, 대단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긴장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 때문에 음성이 날카로워지고 몸짓이 빨라지는 것이니까.

 

그러니 이러한 사람이 포부가 큰 사람이다. 반면에 모자라는 사람은 포부가 작은 사람(mikropsychos)이며, 지나친 사람은 '허명을 좇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이들이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다만 그들은 잘못을 저지를 뿐(hamartanein)이다. 포부가 작은 사람은 본인이 좋은 일들을 할 만한 사람임에도 자신이 할 만한 것들을 스스로 박탈한다. 또 그는 자신이 그 좋은 일들을 할 만하지 않다고 평가함으로써 어떤 나쁨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실제로 좋은 것이었으며, 자신이 할 만했던 그것들을 추구했을 테니까. 그래도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위축된 사람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그들을 심지어 더 열등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것들을 추구하는 법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일을 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고귀한 행위들로부터도, 그리고 고귀한 노력으로부터도, 마찬가지로 외적인 좋음들로부터도 멀찌감치 떨어져 삼가기 때문이다.

 

반면에 '허명을 좇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며,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자들이고, 더욱이 그런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자들이다. 그들은 실상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도 아니면서 명예롭게 보이는 일들에 착수하지만, 곧 그 정체가 탄로나 버린다. 그들은 옷이나 겉모습, 그와 같은 것들로 꾸미며, 자신들의 좋은 운들이 널리 드러나기를 바라고, 이것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명예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들의 좋은 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포부가 큰 것에 더 반대되는 것은 허영심(허명을 좇는 것)보다 포부가 작은 것이다. 포부가 작다는 것이 더 흔한 일이고, 더욱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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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4-12-31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건강하시고 책과 더불어, 가족분들과 더불어 더욱 더 행복하시길! ^^

oren 2015-01-01 14:15   좋아요 0 | URL
새해 첫날 첫 댓글로 야클 님과 만나니 더욱 반갑네요.
야클 님께서도 새로운 한 해 더더욱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시길 빕니다~

yamoo 2015-01-0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2014년 정말 많은 글들을 쓰셨군요! 대단하세요~

oren 2015-01-02 15:34   좋아요 0 | URL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단행본으로 34권쯤 되는 분량을 제가 언제 어떻게 `책을 보면서, 자판을 두드렸을까`, 저도 몹시 궁금하더라구요. 혹시 무슨 통계에 오류가 있지나 않았을까 싶기도 하구요. ㅎㅎ
 

 

(2014-12-17 01:07 작성)

책을 읽는 취향이 골라 보는 영화까지도 바꿀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제는 폭설이 예고되었지만, 내가 사는 동네에는 겨울비만 주룩주룩 내리는 바람에 여간 다행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영화를 보려다가, 너무 슬플 듯한 생각이 들어 느닷없이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로 바꿔서 봤다.

 

두 영화 사이에는 차마 헤아리기 어려운 '드넓은 간극'이 있음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주인공 두 사람만 해도 그렇다. 한 쪽 영화에는 신이나 마찬가지 신분인 이집트의 파라오와 모세가 주인공이다. 또다른 한 쪽은 지극히 평범한 이 땅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주인공이고. 한 쪽 영화는 무대 배경이 기원전 1,300년이다. 다른 한 쪽은 요즘이고.

 

어쩌면 두 영화가 다루는 주제 또한 이만큼 커다란 차이가 벌어지기도 어렵지 싶다. 한 쪽은 모세의 기적과 십계명을 다루는 이야기이고, 다른 한 쪽은 어느 노부부의 지극한 '부부애'를 다루는 것이니. 거기다가 여러 물리적 차이까지 보태자면 두 영화는 애초부터 비교하는 일 자체가 우습게 여겨진다. 내가 애초에 보려 했던 영화를 포기하고 금세 마음을 바꿔 실제로 보게 된 그 영화는 도대체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을지 궁금할 정도로 화면을 압도하는 '어머어마한 물량들'이 넘쳤다. 다른 한 쪽은 아직까지 보지도 못했으니 뭐라 말할 처지는 못되더라도 '물량 면에서' 어떤 영화일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거기다 두 영화 사이에는 러닝 타임의 차이도 상당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 영화보다 상영 시간이 '두 배나 길다'는 건 어쩌면 가장 사소한 차이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영화를 보더라도 '고전적인' 영화를 대체로 좋아했던 듯하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닌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고대로마 시대로 대표되는 '영광스런 과거'에 대한 향수는 내가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좋아하게 된 '시대 배경'으로 은연중에 자리잡게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듯하다. <벤허>니 <글레디에이터>니 <트로이>니 <300>이니 <제국의 부활>이니 하는 영화들을 내가 얼마나 조바심내며 기대했던가를 떠올려봐도 그렇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콘택트>니 <아바타>니 <그래비티>니 <인터스텔라>니 하는 흥미진진한 공상 과학 영화들을 반드시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뜻 말하기도 어려운 게 솔직한 심정이다.

 

대학에 다닐 때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너무 좋아해서 그 가운데 단 한 편이라도 '대한극장'과 같은 멋진 개봉관을 떠날 때까지 미적거리다가 그런 가슴벅찬(?) 영화를 허름한 삼류극장에까지 찾아가서 투덜거리며(?) 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 무렵에 개봉된 고전 명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본 것도 아마 '대형 스크린'을 자랑하던 대한극장에서였지 싶다. 그러고 보니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허리우드극장, 서울극장, 명보극장 등에도 제법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피비 케이츠 주연의 <파라다이스>나 브룩 쉴즈 주연의 <끝없는 사랑>뿐 아니라 정윤희 주연의 <정사(情事)>,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차타레 부인의 사랑>, <개인교수> 등을 깔끔한 개봉관에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보는 데에도 회수권(학생용 시내버스 승차권)을 아끼지 않았던 듯하다. 물론 <나인 하프 위크>,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원초적 본능> 등이 큼지막한 화면과 멋진 사운드를 자랑하는 개봉관을 떠날 때까지 놔둔 적도 별로 없었던 듯하고.

 

그렇다고 내가 무슨 영화광이었던 건 절대 아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여태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사실 누구라도 다 웬만큼은 영화를 즐겨 보면서 살아갈 테고, 나 또한 그런 '막연한 평균'에서 어느 쪽으로든 크게 벗어나 있다는 생각을 할 만큼 영화에 크게 쏠렸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

 

(2014-12-25 23:57 작성)

어쩌다 보니 이 글을 쓰다가 멈춘 지 어느새 열흘 가까운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동안 이 글을 이어서 쓰지 못할 정도로 특별히 바빴던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 반대로 이런 정도의 글을 두고 '기어이'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의욕이 계속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던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이 모양이고 이 꼴이다.

 

갑작스레 툭 끊어진 영화 얘기를 조금 더 억지스레 이어붙이자면 이렇다. 엊그제 '좋은 좌석'을 골라 예매해 놨던 <국제시장>은 갑작스레 날라든 친한 선배님의 장인상 부고 때문에 지방까지 문상을 다녀오느라 부랴부랴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라도 보고 싶었던 그 <국제시장>은 예매 시점 기준으로는 '마땅한 좌석'이 거의 보이지 않아 또다시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어젯밤 은근히 매섭던 겨울 날씨에 조금 지나치게 쏘다닌 덕분에 얻게 된 감기몸살 덕분에 하루 종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잠에만 빠져 지내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국제시장>이 염두에 있을 리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어젯밤 아내랑 둘이서 <본전 횟집>에서 참가자미 세꼬시를 안주 삼아 소주를 두 병씩이나 마시고 나서 제법 거나하게 술에 취한 끝에 나눴던 말도 떠오른다.

 

"여보, 국제시장은 빈 좌석이 거의 없으니 이참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나 보러 갑시다. 술도 좀 거나하게 취했으니 '눈물'을 와락 쏟아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형편이 아니겠소."

 

그런 객적은 소리에 아내가 옳커니 하고 맞장구를 치며 따라줄 가능성은 물론 어림반푼어치도 없다. '그런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을 쏟아내게 되면 그게 또 새롭게 슬픈 감정을 자꾸만 지어내고 덧보태게 되어 며칠 씩이나 그 후유증을 겪을 게 뻔하니, 그 영화는 아예 나랑 같이 볼 생각을 말고 당신 혼자 가서 보란다. 그러는 사이에 그 영화는 어느새 관람객 수가 300만을 넘어섰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던 연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맞다. 영화《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을 봤더니 그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고대 이집트'가 정말로 아주 그럴 듯하게 펼쳐져 있더라는 것부터 말하고 싶었었다. 물론 그토록 웅장하고 멋진 배경을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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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들은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을 보면서 내가 다시금 떠올리게 된 '실제 이집트 풍경들'이다. 어느새 저 아득한 곳을 다녀온 지도 7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지만 언제나 기회만 되면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 석양이 비추는 가운데 룩소르 신전 내부로 들어가는 우리 일행들 모습......

 

 

 

 - 어마어마한 134개 열주의 숲이 하늘을 찌르는 카르낙 대신전. 이 신전은 이집트에서도 규모가 제일 큰 신전

 

 

 

 - 돛단배를 능숙하게 조종하는 이집트인과 함께 나일강을 건너는 우리 일행들

 

 

 

 - 호루스 신전,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와 그의 아내인 이시스의 아들을 신으로 모신 곳

 

 

 

 - 아부심벨 대신전. 람세스2세가 천연의 사암층()을 뚫어서 건립한 건축물

 

 

 

 -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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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파라오가 사는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로 지어진 궁전이나 신전들이 영화 속에서는 모두 '가짜'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영화는 언제나 영화일 뿐'이라는 뻔한 생각을 좀처럼 떨치기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고대'를 다룬 영화들은 그런 '떠올리지 말았으면 좋았을 불필요한 생각들'이 스며들 때마다 언제나 약간은 실망스럽다. 그래서 그런 영화를 볼 때는 늘 '가짜'를 '진짜'처럼 여길 수 있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억지스러운 순진무구함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괜히 스크린에 비치는 웅장한 배경들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발견하는 데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이내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내 자신이 스스로 훼방놓고 있다는 걸 깨닫고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다시금 영화에 몰입하려 애쓸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러고 보니 최근에 봤던 영화 가운데 아마도 <폼페이: 최후의 날>만큼 그런 '불편한 차이'가 도드라져 보이는 영화도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나는 정말 그 영화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었다. 아주 어릴 때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책을 읽으며 생생하게 상상했던 풍경들이 실제로 스크린에 펼쳐지는 걸 보면서 '책과 영화 사이의 극적인 해후'에 환호작약하기도 했고, (그보다는 훨씬 덜 오래지만 그래도 꽤 오래 전에) 난생 처음으로 유럽 여행에 나섰을 때 잠시 들렀던 그 잿더미에 뒤덮힌 폼페이를 다시금 떠올리며 그 영화에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 은연중에 애를 쓰며 봤지만, 결국 영화 속 주인공들이 전차를 타고 그 불구덩을 헤치고 탈출하는 장면들이 너무나 극적인 상황들의 연속이어서 도리어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결국 그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내 나름대로는 적잖이 흡족스럽다며 애써 자기합리화에 골몰하고 있는 나를 쳐다보며 아내가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그 영화의 사실성과 작품성(?)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듯해 가벼운 정신적 충격을 느낄 정도였다. 아내의 말인 즉슨, "무슨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너무 하더라"는 거였다. 지나친 과장이 결국은 폐단이 되고 만 셈이다. 그런데 '고대 영화'치고 그렇지 않은 영화가 정말 몇이나 되더란 말인가. 가만 생각해 보니〈노아〉를 보고 나오면서도 아내로부터 그런 소릴 들었던 것 같고, <헤라클레스:레전드 비긴즈>를 보고 나올 때도 그보다 더한 말을 들으면 들었지 덜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헤라클레스에 관한 신화'를 일부러 조금 더 뒤적거렸던 나로서도 정말 그토록 뛰어난 그리스 최고의 영웅을 고작 그 정도로밖에 다루지 못했나 싶어 크게 실망하긴 했다.)

 

글을 여기까지 쓰고 보니 대략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이 조금 더 떠오른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아무래도 내 독서 취향을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 덧붙여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게 바로 '책과 영화 사이의 방향성'에 관한 생각이었다. 나로서는 책으로부터 비롯된 흥미가 영화를 보도록 이끄는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그만큼 그 둘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끈'이 무척이나 강렬하다고 나는 자주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반대 방향으로 이어지는 끈은 (결국 똑같은 끈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언제나 느슨해 보인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지던 줄이 갑자기 툭 끊어져 이러저리 축 늘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 어설픈 끈을 붙잡고 '영화에서 책으로' 거꾸로 난 길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가령 <까라마조프 형제들>이나 <레미제라블>을 읽었던 추억으로 말미암아 똑같은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져 나오면 나는 그 영화를 어떻게든 봐야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기 시작하고 그 영화를 볼 날을 손꼽아 기다릴 만큼 조바심을 내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가령 <노예 12년>이나 <나를 찾아줘>와 같은 영화를 내가 아무리 감명깊게 봤다고 하더라도 그런 영화의 밑바탕이 되는 '원작 소설'까지 찾아서 읽는 일은 내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영화를 통해 '감동의 엑기스'를 거의 다 맛본 터에, 기껏해야 그 영화를 새삼스레 떠올리게 할 뿐인 데다가 자칫 따분해 보일 정도로까지 변해버린 듯한 '원작'을 다시금 '거꾸로'  찾아 읽는 일은 책을 읽기 전부터 뭔가 김이 좀 많이 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것이다. 영화까지 보고 난 뒤에 그 영화를 다룬 원작을 다시 바라보게 될 때면 언제나 떨치기 어려운 강한 선입견-도대체 무슨 재미가 더 있을까-이 그 '역주행'을 자꾸만 틀어막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책이 지닌 엄청난 장점 가운데 하나인 '한계 없는 포용성'을 생각해 볼 때, 영화가 불가피하게 생략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수많은 멋진 장면들과 대화들'을 추가로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완전히 도외시할 수는 없다. 가령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라든가 <오만과 편견> 같은 작품만 하더라도 영화보다 원작이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안겨줄 것만 같은 놀라운 예감을 누구든 쉽게 떠올릴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수많은 영화평론가들이 영화와 책, 그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들을 찾아 온갖 미사여구를 잔뜩 늘어놓는지도 모르겠다.

 

(2014-12-27 23:47 작성)

이쯤에서 이 글을 마무리지어야겠다. 어젯밤도 오늘밤도 송년 모임 때문에 책과 영화와 글쓰기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져 지냈다. 그저 만나면 반갑기만 한 수십 년지기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고 놀기 바빴다. 그래도 어쨌든 때는 바야흐로 틈틈이 짬을 내어 영화관을 찾기 좋은 연말연시다. 나로서는 차일피일 미뤄왔던 <국제시장>은 물론 눈물을 잔뜩 흘릴 각오로 덤벼야 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도 마저 다 보고 올 한 해를 건넜으면 싶다. 잠시 되돌아 보니 올해는 이래저래 참으로 슬픈 한 해였구나 싶다. 눈물이 도대체 마를 날이 없었던 그 슬픈 봄이 그토록 힘겹게 지나가나 싶더니 어느새 문득 한 해의 마지막 주말에 다다랐다. 고작 며칠 밖에 남지 않은 한 해를 마저 건너기에도 이토록 벅차다. 왠지 '눈물' 없이는 이 해를 마저 건너기 어려울 듯하니. 결국 애써 이어가며 쓴 글이 이렇게 흐지부지 어설픈 결말을 보고 마는구나. '책과 영화 사이'를 터무니없이 갈라 놓으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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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정과 유정 사이
    from Value Investing 2016-01-24 20:01 
    알라딘이 가끔씩 놀라운 마법을 부리는 건 나도 이미 몇 차례 겪어 봐서 조금쯤은 안다고 생각한다. 북플도 그럴까? 물론 그 요물(?)을 쓰기 나름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스맛폰을 무슨 '병맛'처럼 여기고 2G폰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SNS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니, 북플을 무슨 밥상 끄트머리에 붙은 밥풀떼기처럼 취급하는 사람들도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병맛'이 무슨 뜻이냐고? 나도 정확한 뜻을 몰
 
 
cyrus 2014-12-28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부심벨 신전이 사진으로 보는 것과 달리 엄청나게 웅장하군요. 영화와 사진에만 늘 보던 것을 직접 가서 보게 되면 그 감동의 여운이 오랫동안 남을 것 같습니다.

oren 2014-12-29 11:04   좋아요 0 | URL
이집트의 최남단에 위치한 아부심벨 신전은 가장 강력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의 신전인 만큼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어진 `세계 최대 규모의 석굴사원`이지요. 그런데 저 신전은 외관도 웅장하지만 직접 내부로 들어가 보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 대단하더라구요.(신전 정면은 폭 38미터, 높이 33미터이며, 중앙 입구에서부터 신전 가장 깊은 곳까지는 55미터..) 일일이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수많은 방들이 있고, 벽면마다 빼곡하게 그려놓은 그림들이 보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데, 그 가운데 특히 `히타이트 제국과 벌인 카데시 전투에서의 승리를 칭송하는 부조`가 가장 유명하지요. cyrus 님께서도 언제 기회가 되시면 꼭 한번 가보세요~


qualia 2014-12-28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허>니 <글레디에이터>니 <트로이>니 <300>이니 <제국의 부활>이니 하는 영화들을 내가 얼마나 조바심내며 기대했던가를 떠올려봐도 그렇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콘택트>니 <아바타>니 <그래비티>니 <인터스텔라>니 하는 흥미진진한 공상 과학 영화들을 반드시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뜻 말하기도 어려운 게 솔직한 심정이다.

→ 위 문장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뭐 문장의 표면적인 의미만 놓고 본다면 그런대로 이해가 가능하기도 합니다만, 저로선 ‘정확한’ 그 진의가 무엇인지 단정하기 어렵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SF 영화에는 좀 관심이 있어서요. oren 님도 SF 영화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oren 님의 SF 영화 리뷰를 읽을 수 있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대개의 경우 남자가 열광할 때 여자는 시큰둥하거나 심드렁하죠.^^ 그게 정상이죠. 이런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면 물론 더욱 재미있어지고요~

oren 2014-12-29 11:23   좋아요 0 | URL
qualia 님께서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ㅎㅎ 저도 저 문장을 저렇게 애매모호하게 써 놓고 나서 영 께름칙했었지요. 제가 가진 정확한 진의를 어떻게든 달리 표현해 보려고 애를 써봐도 좀처럼 제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어서 `문장을 고쳐보려는 시도`를 성급하게 포기하고 얼렁뚱땅 넘어갔으니까요. 영화에도 여러 장르가 있는데 가령 어떤 장르를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장르를 그보다 `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더` 좋아하는 것도 아닌, `더`와 `덜`을 구분하기 애매한 그런 상황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가령,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팝송도 나름대로 그와 비슷한 정도로 좋아하는 경우와 닮았다고나 할까요.(그래서 여기에 꼭 맞는 인용은 아니지만 앙리 베르그송의 책에서 읽었던 한 구절을 이 댓글의 끝에 덧붙여 봤습니다.) 그리고 저는 SF 영화를 보는 건 좋아하긴 해도 리뷰를 써 볼 생각은 여태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건 아무래도 확실히 제 능력 밖인 듯해서 말이지요.ㅎㅎ
* * *
<더>와 <덜>의 구별

사람들은 보통 감각, 감정, 열정, 노력과 같은 의식의 상태들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어느 한 감각이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감각보다 두 배, 세 배, 네 배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음을 확언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정신물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정신물리학의 반대자들조차 다른 감각보다 더 강한 감각, 다른 노력보다 더 큰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하여 순전히 내적인 상태들 사이에 양적인 차이를 수립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그 점에 관해 상식이 취하는 태도는 조금의 주저도 없다. 사람들은 더 덥다거나 덜 덥다거나, 더 슬프다거나 덜 슬프다고 말하며, 그러한 <더>와 <덜>의 구별이 주관적인 사실이나 비연장적(非延長的)인 사물의 영역으로 확장될 때조차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매우 불분명한 점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가 있다.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즈런나모 2015-08-0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qualia 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저도 약간 의아했었지요.. 혹 다른 의도가 있었어인가 하고...
그렇지만 저도 대충 넘어갔었지요.. 아마도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장르)과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미처 닿지 않은 것(장르)이거나, 궂이 표현할 것까지는 없다고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했거나, 혹은 생각의 정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연스레 무심히 넘어가지는 그런 것(장르) 쯤으로 여겼었지요.. ㅎㅎ
댓글을 보니 조금 더 이해가 가는군요..
하여간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oren 님.. qualia 님.. 모든 분들의 평화를 빕니다.. ^^

oren 2015-08-03 12:07   좋아요 0 | URL
즈런나모 님 반갑습니다. 님께서도 제 글을 읽으시면서 qualia 님과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다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저도 그 대목을 고쳐 볼까, 아니면 없앨까 몇 번을 고민하다가 그냥 대충 얼버무린 게 결국 제 글을 읽는 많은 분들께 고스란히 들키고 말았다 싶네요. 아무튼 제게 유익한 참고가 될 만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반 고흐 그림은 가짜요."

 

로맹 가리의 단편 소설 『가짜』는 이렇게 시작된다.

 

진짜와 가짜. 이 둘 사이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음모와 협잡과 긴장과 속임수가 있었을까. 상상하기도 어렵다. 진짜로 보이기 위한 가짜가 어느 시대에 어떤 목적으로 얼마나 많이 만들어졌는지를 제대로 헤아려 본 사람이 있기나 했을까. 대체로 가짜는 결국 언젠가는 들통나게 마련이다. 진짜를 닮은 가짜는 그 종류도 너무 많다. 무슨 유명한 화가의 그림뿐일까. 값진 보석들만 하더라도 진위를 가리기 힘든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책도 예외는 아니다. 한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왕의 특명으로 '희귀한 책들'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을 때, 몰래 그 틈을 타서 그 유명한 도서관에 자리잡게 된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은 가짜로 판명되기까지 무려 수백 년이 걸렸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책들이 모두 진짜였던 것은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이 고전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위조범들이 왕들에게 가짜 아리스토텔레스 논문을 팔았는데, 그 논문들은 학자들이 몇 세기에 걸쳐 연구한 끝에야 가짜로 판명되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그런데 가짜는 사람이 만들어낸 물건에만 판을 치는 것도 아니다. 온갖 생물들에도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기 마련이다. 값비싼 산삼이나 녹용 같은 건 말할 필요도 없으며, 우리가 흔히 먹는 광어조차도 양식을 자연산으로 속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홍어 또한 흑산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진짜는 시중에 유통되는 물량의 5%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고 한다. 국산이 아닌 게 국산으로 버젓이 유통되는 수많은 농산물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사람의 경우에는 어떨가. 사람에 대해서도 진짜와 가짜에 대한 구분이 필요할까. 물론이다. 사람도 얼마든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도리어 진짜가 가짜 행세를 하기도 한다. 작년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검찰총장의 아들'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자신의 진짜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사코 부정하느라 그 아들의 친부는 온갖 '거짓말'을 다 지어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진짜와 가짜, 참말과 거짓말 사이에는 무한히 가깝고도 먼 어떤 '거리'가 있다. 진실은 단 하나밖에 없지만, 거짓말은 무한대로 그 모양을 지어낸다.

 

글뭉치들이 담긴 자루를 꺼내며 드는 생각

 

다시 로맹 가리의 소설 『가짜』로 되돌아 오자. 내가 다루고 싶은 진짜 얘기는 그 단편 소설과 그 작품을 읽으며 저절로 떠오르던 내 생각이니까. 그가 다루는 소재는 딱 둘이다. 가짜 그림과 가짜 인간. 정말 탁월한 조합이다. 그 작품에 등장하는 그림 중개상 바레타는 '반 고흐의 가짜 그림'을 진짜로 인정받기 위해 거물급 화상(畵商)인 주인공 S···에게 협조를 간청하지만 끝내 거부당하고 만다. 결국 바레타는 훗날 주인공 S···에게 치명적인 복수를 한다. 바로 주인공 S···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물보다 가장 확고하게 믿었던 미모의 아내가 바로 '가짜'였음을 밝히는 방식으로. 그러니 그 소설이 얼마나 자기전복적이고 짜릿할지는 말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 언젠가 쇼펜하우어가 했던 말이 비수처럼 파고드는 순간이다.

 

온갖 협잡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강철같은 의지를, 운명의 일격을 막아낼 갑옷을,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지녀야 한다. 인생은 하나의 기나긴 전투다. 인생의 매 단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테르가 정확히 말했듯이,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내가 이 단편 소설을 읽으며 떠올린 '숱한 가짜'를 다 들춰내자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딱 하나만이라도 소개하고 싶어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건 바로 사이버 세상에도 숱한 '가짜'가 존재하고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고, 거기서 범위를 훨씬 좁혀 나가다 보니 최근에 론칭된 어플 가운데 하나인 '북플'에 등장한 '수많은 마니아'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북플을 통해 '떠오른' 숱한 마니아들을 보면 그 정도(굳이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가짜'라기 보다는 진실에서 벗어난 정도?)가 너무 심하다 싶다. 우선 당장 나만 하더라도 그렇다. 내가 무슨 무슨 마니아에 도대체 얼마나 많이 올라 있는지를 보면 나 자신조차 너무 당혹스럽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여러 권의 책에서 '1번째 매니아'에 오른 것도 모자라, 분야별 마니아에도 민망할 정도로 여러 곳에 랭크되어 있다. 이게 과연 '내가 맞나' 싶다.

 

서양고전문학 4번째 마니아(3015점) 

생명과학 2번째 마니아(1953점)

심리학/정신분석학 6번째 마니아(1659점)

뇌과학 2번째 마니아(1468점)

신화/종교학 2번째 마니아(1301점)

서양고전사상 2번째 마니아(1260점)

자연에세이 2번째 마니아(908점)

사회운동 4번째 마니아(754점)

 

더욱 놀라운 건 저자/아티스트 분야에도 '마니아'라는 딱지가 여기 저기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에 나오는 '저자'들에 대해서 내가 모두 '5번째 이내에 드는 마니아'라니. 정말 낯이 화끈거릴 지경이다.(그런데 내가 정말 좋아하는 몽테뉴, 아담 스미스, 찰스 다윈, 쇼펜하우어 등은 정작 '매니아 리스트'에 아예 뜨지 않는다. 이 분들에 대한 나의 애정은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건가? 도대체 뭘 보고 마니아라는 딱지를 붙이는지 모르겠고, 대략 난감하다.)

 

 

 

 

 

어쨌거나 이건 좀 너무 심하다 싶고, 도무지 말이 안 된다 싶다. 좀 더 심하게 얘기하면 북플 마니아는 '무늬만 매니아'인 경우가 너무 많은 게 아닐까 싶고, 심지어는 '가짜 매니아'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는 생각마저 든다.

 

여기서 다시 로맹 가리의 작품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다. 우리의 주인공 S···가 단정적인 어조로 내뱉은 "당신의 반 고흐 그림은 가짜요."라는 말에 뒤이어, 그 말을 듣고 있는 그림 중개상 바레타의 모습이 '그림처럼' 소개된다.

 

회색 넥타이에 흑진주 장식, 순백의 머리칼, 은근한 품위를 풍기는 단정하게 재단된 정장, 살집 좋은 체격과 어룰리지 않는 외알박이 안경, 지중해의 역동성이 어린 통통한 이목구비를 한 바레타는 소파 깊숙이 앉아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반 고흐의 그림'을 경매를 통해 여러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꽤나 비싸게 사들인 바레타가 S···의 날카로운 지적에 진땀을 흘리며 애원 섞인 반론을 가한다. 그에 뒤어이 나오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결코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란 말이오? 그런 걸작을 소유했다는 걸 행복해하면 될 텐데."

 

"내가 선생한테 바라는 건 떠들고 다니지만 말아달라는 거요. 압력을 가하지 말란 말이오."

 

'북플 마니아'에 대해서도 혹시 저런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걸 옹호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그런 '훈장'을 소유했다는 걸 행복해하면 될 텐데 뭐가 문제냐 할 수도 있겠고, 나같은 경우라면 그게 가짜처럼 보인다고 좀 떠들고도 싶고, 또 '진위'를 밝혀야 한다며 어딘가에 압력을 가하고도 싶은, 그런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반 고흐의 그림 경매에서 어렵사리 그 그림을 차지한 바레타는 S···가 제발 그 그림에 대해 더이상 위작 여부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줄 것을 간곡히 요청한다. 그런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자못 흥미롭다.

 

"이보시오, 우리 진지해집시다. 내가 반 고흐 작품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진품임을 의심하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부상한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내가 저 작품을 샀다면, 당신은 그걸 손에 넣지 못했을 거요. 그러면? 당신은 내가 정확히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라시오?"

 

"선생은 이 그림에 맞서 온갖 권위 있는 견해를 동원했소." 바레타가 말했다. "난 알고 있소. 선생이 자신의 영향력을 모두 동원해서 저 그림이 가짜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는 걸 말이오. 선생의 영향력은 막강하오. 당신이 한마디만 해도 ······."

 

이런 대화에 뒤이어 우리의 주인공 S···가 바레타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대목이 정말 압권이다.

 

"유감이오, 친애하는 선생. 정말 유감이오.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건 원칙의 문제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오. 난 사기 사건에 공범이 될 순 없소.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라도 말이오. 당신은 정말 멋진 소장품들을 갖고 있소. 그러니 이번엔 솔직하게 당신이 속았다는 걸 인정해야 하오. 난 작품의 진위 문제에 대해 타협 같은 건 하지 않소. 속임수와 거짓된 가치가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확실성이 있다면 걸작의 그것 아니겠소. 우리는 온갖 위조범들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켜야 하오. 내게 예술작품이란 신성한 거요. 나에게 작품의 진위는 종교라고 할까 ······. 당신의 반 고흐 작품은 가짜요. 그 불행한 천재는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배반을 맛보았소. 적어도 사후에는 우리가 그를 배신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잖소."

 

"말 다했소?"

 

"놀라운 일이오. 당신처럼 명망 있는 사람이 내게 그런 조작에 공범이 되어달라고 하다니······."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지난 여름에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 '반 고흐 미술관'에서 직접 느꼈던 그 '불행한 천재'의 눈물겨운 그림들을 여러 장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가짜 그림이 비싸게 팔린다 하더라도 최소한 반 고흐의 작품에 대해서만은 제발 가짜를 그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내게도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Shooting Date/Time 2014-07-07 오후 11:41:01, 한국시간)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심각한' 대화는 계속해서 좀 더 소개할 필요를 느낀다.

 

"어쨌든 선생이 불길한 말을 내뱉은 후, 내 그림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취하는 당혹스런 태도라니······. 어쨌든 선생이 이해를 해줘야······."

 

"이해하오." S···가 말했다. "하지만 인정할 순 없소. 그 그림을 태워버리시오. 그거야말로 당신 수집품의 진가를 높이는 것은 물론 명망 높은 인사인 당신의 평판까지 높이는 일이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을 문제삼는 게 아니오. 반 고흐의 작품을 문제삼는 거지."

 

바레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S···가 늘 보아오던 표정이었다. 자신이 시장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칠 때면 그들의 얼굴에 어김없이 떠오르던 표정. 좋은 기회이긴 한데, 하고 그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이럴 때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건데······. 하지만 문제는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고 있고, 그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를 건드리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인 작품의 진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런 욕구를 갖고 있는지 자문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기묘한 동경이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환상을 전혀 갖지 않은 데서 연유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 모든 것이 자신의 놀라운 재정적 성공과 누리고 있는 권력과 돈 덕택이라는 것, 자신이 아첨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이 작품 속 주인공인 S···는 사실 출신이 좋지 못한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다.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고, 항구에서 에로 엽서나 팔던 스미른의 부랑자'가 온갖 노력 끝에 '벼락 출세'한 처지의 인물이었다.

 

정체성이 분명한 예술작품은 불안정한 영혼 속에서 절대적인 확실성만이 일깨울 수 있는 그런 경건함을 그에게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성 두 채와 뉴욕과 런던의 최고급 거처, 흠잡을 데 없는 취향,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장식품들, 영국 여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창하게 구사하는 일곱 개 국어에 배어 있는 리듬 섞인 억양의 흔적과, 수메르에서 이집트, 아슈르에서 이란까지 예술이 융성했던 시기의 조각상에서도 확인되는, 편의상 '중동인'이라고 불리는 신체적 특징만으로도, 그가 짙은 사회적 열등감-차마' 인종적' 열등감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에 시달리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수집품들은 그리스 미술 작품들만큼이나 막강했고, 그의 집 거실에는 반 미게렌의 위작 이후 발견된 유일한 진품인 베르메르의 그림과 티치아노의 그림들과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머잖아 또다른 대가의 작품이 걸린다면 정말 벼락부자처럼 보이리라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S···는 자기 등뒤에서 난무하는 이런 피곤한 독설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당연히 감내해야 할 경의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그의 융숭한 대접 때문에라도 파리의 명사들이 그를 위해 '정보 제공자' 역할을 마다할 수 없었던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의 과시적인 사치를 앞장서서 비웃는 사람들이야말로 열심히 그를 따라다니면서 '그런 사치를 조바심내며 이용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아첨하고 빌붙고 있다는 사실도, 자기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좀 모호한 자신의 허영심도 그는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그들을 '내 가짜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자기 집 탁자에 앉아 있거나 자신이 제공한 고속 모터보트가 이끄는 수상스키를 타고 있는 것을 빌라의 창을 통해 바라보며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만족의 빛이 역력한 눈길로, 의심의 여지 없이 진품인 자신의 가장 귀한 수집품들을 바라보곤 했다.

 

'가짜 그림'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바레타와 그 작품이 위작임을 기어이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S···· 사이에 결국 파국이 찾아온다. 그 장면에 대한 작가의 묘사 또한 일품이다.

 

그는 바레타가 소장하고 있는 반 고흐 작품의 진위를 밝히려는 운동을 벌이고 있긴 했지만 바레타에게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나폴리의 작은 식품점에서 출발해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식품회사의 대표가 된 그 사내는 오히려 그가 좋아하는 타입의 인물이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가문(家紋)인 거장들의 그림을 동원해 자기 집 벽에 남아 있는 살라미 소시지와 고르곤졸라 치즈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그런 욕구를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반 고흐 그림은 가짜였다. 바레타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전문가의 승인이나 묵인을 돈으로 사서 그 그림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는 바람에 그는 도리어 타협의 여지 없이 힘의 영역으로 들어선 셈이었다. 게임의 법칙을 엄격히 지키는 이들에게서 교훈을 얻는 것이 마땅했다.

 

"내 책상 위에는 팔켄하이머의 감정보고서가 놓여 있소." S···가 말을 이었다. "그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했는데 당신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오늘부터 그 보고서를 신문사에 돌려야겠소. 친애하는 선생, 좋은 그림을 살 능력이 있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소. 우리 둘 다 돈이 있소. 진품에 대해 소박한 경의는 표해야 하오. 진정한 경애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예술품이란 경배의 대상이니 말이오."

 

마침내 바레타는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S···는 그런 위협적이고 원한에 찬 표정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반드시 복수하겠소." 이탈리아인은 이를 갈며 말했다. "내 말을 믿어도 좋소. 우리는 비슷한 삶의 여정을 거쳤소. 나폴리 거리에서도 스미른 거리에서만큼이나 치사한 짓거리를 배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요."

 

바레타는 서재를 나갔다. S···는 자신을 그 무엇에도 끄떡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아무리 부자라 해도 자신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시가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그의 두뇌는 그의 재산을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인 기민함을 동원해 자신이 하고 있는 거래들을 검토했고, 모든 구멍들이 잘 막혀 있다는 것, 어디에도 물 샐 틈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쯤에서 소설은 다시 무대를 바꾼다. 그가 '피우던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빛의 응접실에 있는 아내에게로' 다가가는 장면으로. 단편 특유의 빠른 전개와 경쾌한 필치도 인상적이지만, 우리의 주인공 S···의 아내에 대한 '탁월한 미모'를 묘사한 대목이 아주 절창이다.

 

그는 이 년 전 로마의 레바논 대사관에서 점심식사를 하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성장한 시칠리아에 있는 집안 소유의 영지를 처음으로 떠나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 온 참이었는데, 유난히 권태로워진 사교계에 몇 주에 걸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말 그대로 '귀한' 것이었다. 마치 자연이 자신의 전지전능한 권위를 과시하고, 인간의 손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그녀를 창조한 것 같았다. 빛을 받는다기보다는 빛에게 자신의 광채를 빌려주는 듯한 검은 머리채 아래 이마와 눈과 입술은 예술에 대한 생명의 도전인 양 조화로웠고, 개성과 꿋꿋함까지 갖춘 섬세한 코는 그 얼굴에 경쾌한 터치를 부여함으로써, 위대한 영감의 순간이나 우연의 신비로운 작용 가운데 자연만이 도달하거나 피할 수 있는, 지나친 완벽 추구와 거의 언제나 짝을 이루는 그런 차가움으로부터 그 얼굴을 구해 주고 있었다. 걸작, 그것이야말로 알피에라의 얼굴을 바라보는 이들의 한결같은 의견이었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만난 지 삼 주 만에' 결혼식을 올린다. '전 세계 증권거래소와 연결된 전화에 줄곧 매달려 있는, 이유는 모르지만 '모험가'라고 불리는 '해적' S···가 그렇게 빨리 '얌전'해질 수 있으리라는 것, 사업이나 수집품보다 젊은 아내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친절하고 헌신적인 남편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세계 각국에 있는 그이 대리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물건과 계획되고 있는 굵직한 매매에 대한 보고서를 줄곧 그에게 타전했지만, 그 무엇도 그를 알피에라에게서 벗어나게 할 수 없음은 명백했다. 행복감 때문에 세상이 멀고 재미없는 위성 정도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당신, 걱정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오. 개인적으로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어떤 사람의 최대 약점인 허영심을 공격하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게 이제 내가 하려는 일이오."

 

"어째서요?"

 

S···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고, 짜증이 날 때면 늘 그렇드싱 가락 있는 억양이 평소보다 더 심하게 드러났다.

 

"원칙의 문제라오, 여보. 위조된 작품에 대해 수백만 달러를 동원해 묵인의 공모를 얻어내려 하고 있소. 만약 우리가 거기에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품과 가짜를 가려내는 일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될 테고, 그러면 최고의 수집품도 의미가 없어질 테니······."

 

이제 소설은 마지막 클라이막스만 남겨 두고 있다. '반 고흐의 알려지지 앟은 걸작'을 둘러싼 논쟁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뒤 약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무런 설명도 들어 있지 않은 사진 한 장'이 S···에게 배달되었고, 똑같은 사진을 담은 우편물은 그 후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그에게 전해졌다. 그때마다 그는 '흉물스런 매부리코의 그 얼굴'을 계속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는 사진과 함께 동봉된 짤막한 쪽지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용은 물론 간단했다. "당신이 소장한 걸작은 가짜요." 이쯤 되면 그 이후의 전개는 불보듯 뻔하다. 등장 인물들에 대한 로맹 가리의 기가 막힌 묘사들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다 들통난 이후 '성형 미인' 알피에라는 '한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애원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울고 있었고····· 하지만 주인공 S···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알피에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알지도 못하는, 위조범의 노련함이 그의 눈길로부터 영원히 감춰버린 다른 낯선 여자였다. 거역 못 할 어떤 힘이 그를 밀어붙여 그 사랑스러운 얼굴 위에다 딱 벌어진 탐욕스런 콧구멍이 달린 끔찍한 매부리코를 되살려내고 있었다. 그는 예리한 눈길로 구석구석을 살피며 가짜임을 나타내는 흔적, 간사한 중개상의 손길을 드러내는 표시를 찾고 있었다. 가혹하고 가차없는 무언가가 그의 마음속에서 움직였다. 알피에라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오, 제발, 절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진정하시오. 당신도 알 거요. 이런 상황에서 ······"

 

S는 이혼 결정을 내리기까지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처음에 내세운, 언론에서 논란이 된 이혼 사유, 곧 아내의 얼굴이 가짜라는 사실은 법정의 빈축을 샀고 예심에서 기각되었으므로, 알피에라 일가와의 은밀한 협상-정확한 금액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끝에야 그는 진품만을 원하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

 

로맹 가리의 작품 소개에만 너무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함께 떠올렸던 '가짜스러운' 북플 매니아 얘기를 쏙 빼먹고 한 걸음도 더 전개시키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아마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들은 이 글을 읽는 동안 나처럼 계속 '북플 매니아'를 머릿속에 오버랩시키면서 읽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수많은 얼굴을 지닌 '가짜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그 정도면 나로서는 이 글을 쓴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가짜'가 지닌 '치명적인 위험'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 로맹 가리의 이 단편이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언뜻 스치는 '껍데기는 가라'던 어느 시인의 절규까지 이 글에 덧보태는 건 아무래도 좀 지나친 비약이겠지 싶어 이쯤에서 내 글을 마무리짓고 싶다. 아무튼 북플 매니아는 '비록 악의는 별로 개입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여러모로 좀 '가짜'스러운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더군다나 무슨 분야에서는 내가 '1363번째 마니아'라는 사실까지도 친절히 알려 주던데, 그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필요하단 말인가. 무슨 '레이스'를 벌이자는 것도 아니고. 이쯤 하자. 내 글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을 테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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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떤 공동체
    from Value Investing 2016-01-05 23:03 
    알라딘은 말하자면 어떤 공동체이다. 거기선 서로 얼굴도 모른 채 마치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인 양 시도 때도 없이 인사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꼭 인사성이 밝은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떨 땐 다른 사람과 코가 맞닿을 만큼 아주 가까이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냥 아무런 인사도 없이 불쑥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간다. 그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굴'을 하나씩 파고 있다. 물론 활달한 사람들은 수시로 자신의 '굴'에서 빠져 나와 남의
 
 
2014-12-11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2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4-12-12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 마니아... 이야기 공감해요!
뭔 앱인가를 안 깔아서 내 기록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컴터에서 보여지는 마니아를 보면 좀 황당했어요.

oren 2014-12-12 11:55   좋아요 0 | URL
`마니아`라는 타이틀을 너무 졸속으로 꾸미다 보니, 온갖 책들과 분야와 저자들에 대해서 `마니아` 타이틀을 주렁 주렁 달아 붙여 놓은 꼴이 너무 우습다 싶은 생각부터 앞서더군요. 만든 취지는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과 같은 방식은 좀 아니다 싶어요.

yamoo 2014-12-16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짜>를 보니 전에 이 페이퍼를 볼 땐 생각이 나지 않았던 영화였었는데...혹시 안보셨다면 <베스트 오퍼>를 꼭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쓰신 페이퍼를 보니 이 영화 생각이 계속 났는데, 제목이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oren 2014-12-16 15:27   좋아요 0 | URL
<베스트 오퍼>라는 영화도 있었군요. 언제 기회가 되면 꼭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야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