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와 불명예에 관한 중용은 '포부가 큰 것(megalopsychia)'이고, 지나침은 어떤 종류의 허영심이며, 모자람은 '포부가 작은 것'(소심함)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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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도 | 작성한 글 (리뷰/페이퍼) | 작성한 글자수 | <엄마를 부탁해> 같은 단행본으로 | 몇 번째 | 1년간 총방문자수 |
2014년 | 201 (117/ 84) | 4,001,226 | 34.73권 | 140 | 68,697 |
2013년 | 135 ( 11/124) | 501,774 | 4.36권 | 243 | 24,420 |
2012년 | 105 ( 41/ 59) | 320,891 | 2.79권 | 362 | 21,028 |
2011년 | 111 ( 9/ 92) | 303,860 | 2.64권 | 481 | 9,118 |
(표 설명 : '작성한 글자수'가 갑작스레 늘어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밑줄긋기' 형태로 '베껴쓰는 글'을 많이 남겼던 탓이다. 그러나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쓰는 허접한 글보다는 '글쓰기의 영웅들'이 남긴 멋진 문장들이 훨씬 더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방문자수가 늘어난 데 대해서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설사 하루에 10만이나 100만 대군이 몰려와도 나는 별로 우쭐할 것 같지 않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쭐해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무슨 성가신 일이나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할 지도 모르겠다...)
알라딘 서재에 들를 때마다 늘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고 있음을 고백하고 싶다. 늘 더 많은 혹은 더 훌륭한 리뷰를 써서 이곳에 남겨 보고 싶은데, 늘 그러지 못해 (알라딘이나 알라디너 분들이나 혹은 '나의 서재'나 '나'에게까지도) 괜히 미안하고, 안타깝고, 답답하고, 조바심이 날 때도 있고, 아주 가끔씩은 짜증이 나기도 한다.
'새해엔'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상투적이니 그냥 '앞으로는'이라고 표현하는 게 조금은 낫겠다. 앞으로는 좀 더 리뷰 쓰는 일에 충실하자. 내가 여기에 둥지를 튼 중요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까.
언제 어디서건 내가 '몇 번째'에 드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늘 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마치 낮잠 자던 토끼가 느닷없이 잠에서 깨어나 '혹시나 부지런한 거북이가 이미 저만치 앞질러 간 건 아닐까' 싶어 화들짝 놀라며 조바심을 낼 때 드는 느낌과 닮았다고나 할까. 인간을 대상으로 행해진 수많은 실험들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약점이자 본능인 '불타오르는 경쟁심' 때문에 중단된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지금의 내 알라딘 서재 지수만으로도 감지덕지하고 있다. 남들은 얼마나 애쓰며 저 먼 데까지 부지런히 걸어갔을까를 생각하면 나는 여기까지 거의 콧노래를 부르며 온 듯한 느낌도 없지 않고, 그런 면에서 의식적인 노력은 남들보다는 좀 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알량한 자존심도 가끔은 느끼곤 한다.
나는 댓글과 추천 버튼 앞에서는 늘 망설인다. 망설임에 대한 미학 또한 결코 없지는 않다고 보기 때문인데, 매사에 조심스러워하는 성미가 무엇보다 그런 망설임에 큰 바탕이 되고 있다. 조금만 더 '젊은 기분으로' 댓글과 추천을 별 망설임 없이 꾹꾹 누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젊은 시절에는 육체의 성장이 진행되는 까닭에 젊은이들은 마치 술에 취해 흥겨운 사람의 상태처럼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젊은 기분으로' 라고 표현한 건 '술취한 기분으로'라는 뜻을 미리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통계로 확인이 가능한 기간인) 지난 4년 동안 제 서재에 들러 수많은 댓글과 추천과 땡스투를 아낌없이 선사해주신 알라디너 분들께 이런 기회를 빌어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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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쓰고 보니 자꾸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내가 이 드넓고도 비좁은 듯한 묘한 알라딘에서 쉽사리 포기하기 싫은 한가지 욕망이 있다면 그건 '남들이 결코 쉽게 읽지도 못하고 또 그 책에 대해 쉽게 리뷰도 쓰지 못하는 책들'에 대해 멋진 리뷰를 남기는 일이다. 올해 만난 책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책을 두고서 아직까지도 '리뷰'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내가 이런 건방진 의욕을 함부로 드러내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래에 인용하는 글들을 '눈'으로 읽는 동안, 나는 '나를 포함한 다양한 알라딘 이웃들'이 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걸 좀처럼 억누르기 어려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그때 생각이 깊숙히 묻혀 있다가 연말이 되니 다시금 슬며시 떠오른다.
흔히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entima)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가장 잘 하고 있는 것들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 포부 있는 사람에게 고유한 일이다. 큰 명예나 성취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신중하고 삼가는 것, 그리고 많은 것을 하지는 않지만 명성이 남는 큰일을 하는 것도 포부가 큰 사람이 하는 일이다.
포부가 큰 사람은 쉽게 경탄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 나쁜 일들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도 아니다. 지난 일들을 기억해서 불편해 하는 것, 특히 나쁜 일들에 대해 그러는 것은 포부가 큰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니까. 차라리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포부가 큰 사람의 특징이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자도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타인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칭찬받는 일에도 다른 사람이 비난을 받는 일에도 모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쉽게 칭찬하는 사람도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험담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심지어 적이라 하더라도, 오만(hybris) 때문이 아니라면 그는 험담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 완만한 움직임과 깊이 있는 목소리, 안정적인 말투는 포부가 큰 사람에게 속하는 것 같다. 중요하게 여길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매사에 서두르는 일도 없으며, 대단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긴장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 때문에 음성이 날카로워지고 몸짓이 빨라지는 것이니까.
그러니 이러한 사람이 포부가 큰 사람이다. 반면에 모자라는 사람은 포부가 작은 사람(mikropsychos)이며, 지나친 사람은 '허명을 좇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이들이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다만 그들은 잘못을 저지를 뿐(hamartanein)이다. 포부가 작은 사람은 본인이 좋은 일들을 할 만한 사람임에도 자신이 할 만한 것들을 스스로 박탈한다. 또 그는 자신이 그 좋은 일들을 할 만하지 않다고 평가함으로써 어떤 나쁨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실제로 좋은 것이었으며, 자신이 할 만했던 그것들을 추구했을 테니까. 그래도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위축된 사람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그들을 심지어 더 열등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것들을 추구하는 법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일을 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고귀한 행위들로부터도, 그리고 고귀한 노력으로부터도, 마찬가지로 외적인 좋음들로부터도 멀찌감치 떨어져 삼가기 때문이다.
반면에 '허명을 좇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며,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자들이고, 더욱이 그런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자들이다. 그들은 실상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도 아니면서 명예롭게 보이는 일들에 착수하지만, 곧 그 정체가 탄로나 버린다. 그들은 옷이나 겉모습, 그와 같은 것들로 꾸미며, 자신들의 좋은 운들이 널리 드러나기를 바라고, 이것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명예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들의 좋은 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포부가 큰 것에 더 반대되는 것은 허영심(허명을 좇는 것)보다 포부가 작은 것이다. 포부가 작다는 것이 더 흔한 일이고, 더욱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