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의 희곡 『들오리』는 제목만 들어서는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특이한 작품이다.

 

들오리? 집오리도 아니고?

 

그 작품을 다 읽고 나서 갑자기 들오리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해서 이미지를 검색해도 마땅한 게 도통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 들오리는 잠수의 명수다! 그러니 들오리를 구경하기가 그만큼 힘이 드는 게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입센의 『들오리』는 생각할 거리를 아주 많이 던지는 '비극적 희극'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쨌든 대략이나마 요약하면 이렇다.(5막극인 이 작품은 3막극인 『인형의 집』이나 『유령』보다 훨씬 길다. 심지어 같은 5막극인 『민중의 적』보다도 두 배쯤 길다. 그러니 짧은 요약이 쉽지는 않다.)

 

주인공은 얄마르 엑달이라는 남자다. 그는 아내 지나와 열네 살 된 딸 헤드비와 늙은 아버지 엑달 노인, 넷이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직업은 사진사다. 가난한 탓에 아내까지도 사진 작업을 열심히 도와 준다. 아버지인 엑달 노인도 옛 친구네 집에서 따내 오는 필사 작업으로 용돈벌이는 하고 지낸다.

 

얄마르는 어느 날 제재소 등을 경영하는 거상(巨商) 베를레 씨네 집으로 만찬 초대를 받는다. 베를레 씨와는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지만 그의 아들 그레거스와는 학교 동창이자 친구다. 그가 간청하는 바람에 가게 된 참이다.

 

얄마르와 베를레 씨와는 오래 전부터 상당한 인연이 있던 사이였다. 우선, 자신의 아버지인 엑달 노인이 베를레 씨와 젊을 때부터 친구 사이였고, 사업상으로 동업자 관계였었다. 그런데 베를레 씨의 간교한 속임수에 걸려드는 바람에 엑달 노인은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전과자로 전락했고, 그 후론 영영 회복불능이 되어 늙어서도 자식 한테 얹혀 사는 인생의 낙오자 신세다. 그런데도 엑달 노인과 얄마르는 베를레 씨가 꾸몄던 음모를 전혀 모른다.

 

베를레 씨의 아들인 그레거스는 아버지의 공장에서 경영자 수업을 받고 있지만 내심 불만이 많다. 어려서부터 온갖 권모술수에 능란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온갖 나쁜 짓을 서슴치 않는 아버지를 오래도록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엑달 노인을 어떻게 나락으로 빠트렸는지 그 내막을 빤히 꿰고 있다. 더군다나 남편 때문에 속이 문드러지다시피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하직한 어머니로부터도 '아버지의 나쁜 행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터였다. 그는 스스로 '진실의 사도'임을 내세우면서 아버지에게 대항한다.

 

연극의 시작은 이렇다.

 

거상 베를레의 집. …… 식당에서 떠들썩한 말소리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가 나이프로 유리잔을 두드린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건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박수가 일고 다시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들린다.

 

페테르센(하인) (난로 위 등불을 켜고, 갓을 씌운다) 옌센, 지금 나리가 셀비 부인을 위해 저렇게 길게 건배하는 거지?

 

옌센(임시고용 급사) 그 소문, 진짜야?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연극의 첫 대사만 봐도 거상 베를레는 이미 불미스런 소문에 휩싸인 부도덕한 인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을 일군 덕분에 떵떵거리고 살지만, 아내에게는 골치만 썩이는 못난 난봉꾼일 뿐이었고, 아들에게도 불한당처럼 비춰질 뿐 존경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고 차츰 시력도 나빠져 곧 실명할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 부랴부랴 집안의 가정부로 일하던 셀비 부인과 '재혼'을 도모하는 중이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갈등 구조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외관상으로 가장 도드라지는 갈등은 거상 베를레와 아들 그레거스 사이에 존재한다. 아들은 늙은 아버지의 재혼 자체도 반가울 리 없지만 아버지의 과거 행적에 대한 누적된 불만 때문에 도무지 아버지를 존중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저녁 만찬을 끝낸 뒤 그레거스와 얄마르는 오랜만에 만난 만큼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나눈다. 그들 사이엔 '지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커다란 인식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얄마르 가족은 '알고 보면' 그레거스의 아버지 때문에 이만저만 고생을 겪은 게 아니다. 그런데도 얄마르네 식구들은 그게 그저 '그 끔찍한 사건' 때문에 우연히 격게 된 불행인 줄로만 알고 지내왔다. 그게 다 베를레의 교묘한 흉계 때문인 줄도 모른 채.

 

그레거스 그건 그렇고 얄마르, 어때, 지금은 다 잘 되지?

 

얄마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응, 그럭저럭, 불평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니까, 처음에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으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 그 밖에도 모든 것이 변했으니까, 아버지에게 닥친 그 끔찍한 시련…… 수치와 오명, 그레거스…….

 

그레거스 (동정하며) 응, 알지, 알아.

 

얄마르 공부를 계속할 생각은 꿈도 못 꿨어. 손안에는 한 푼은커녕, 있는 거라곤 빚더미뿐이었지. 그것도 대부분은 자네 아버지에게서 빌린 돈이었고.

 

 

더우기 얄마르는 자신이 사진술을 배워 사진사가 된 것도 베를레의 보살핌 덕분인 줄로만 안다. 산 속의 공장에서만 일하다가 16∼17년 만에 마을로 내려와 옛 친구 얄마르를 만난 그레거스는 이런 사정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겐 일부러 이런 사실들을 비밀로 숨겨왔기 때문이다. 얄마르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도 그레거스의 아버지 덕분이란다. 세상에! 자기 아버지가 그런 착한 일까지?

 

그런데 결혼한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과정에서 그녀가 지나임을 알게 된다. 그레거스의 집에서 한때 잠깐이나마 가정부로 일하던 바로 그 지나 한센이 얄마르의 아내였던 것이다! 세상에! 얄마르가 지나를 사귀게 된 것도 아버지의 주선 덕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부부가 되었고, 결혼 이후 사진 기술을 배운 것도 베를레 씨 덕분이었단다.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차린 그레거스는 나중에 얄마르네 집으로 다시 방문할 것을 약속한 후 그와 작별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나누자면서. 그를 돌려보내자 말자 그는 대뜸 아버지에게 따지듯 대든다.

 

그레거스 엑달 일가는 어떡하고요?

 

베를레 그래, 그 사람들한테 어떻게 해줘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엑달은 교도소에서 나올 때 이미 폐인이 되어 있었어. 구제할 길이 없다고, 세상에는 총알 한두 방에 맥없이 밑바닥까지 잠겨서 두 번 다시 떠오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야. 거짓말이 아니다, 그레거스, 나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의혹이나 가십거리를 뿌리고 다니지도 않았고……

 

그레거스 의혹이요? 아, 그렇군요.

 

베를레 엑달에게는 사무소에서 필사하는 일만 시키고 실제보다 훨씬, 훨씬 높은 임금을 주고 있어…….

 

그레거스 (고개를 돌리며) 흥! 어련하시겠어요.

 

 

이렇게 해서 베를레의 '과거의 행적'은 서서히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다. 그레거스는 그날 저녁에 곧장 친구 얄마르네 집으로 찾아간다.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불편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그런데 그 와중에 돌연 들오리가 등장한다. 오밤중에 웬 들오리가? 그레거스는 친구네 집에서 엑달 노인과 오랫만에 반갑게 재회한다. 그 두 사람은 이내 까마득한 옛날 엑달 노인이 아버지와 함께 산 속 공장에서 일할 때 자주 함께 사냥을 즐겼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러던 와중에 엑달 노인은 자꾸만 그레거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엑달 노인은 '야생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던 옛 시절을 잊지 못해 집안 한 켠에 있는 창고 속에 온갖 새들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엔 비둘기와 토끼도 있었고, 들오리도 있었다.

 

그레거스 상자 안에 새가 한 마리 있는 것 같은데요.

 

엑달 흠…… "새"라고……?

 

그레거스 오리 아닙니까?

 

엑달 (발끈하며) 오리인 줄 아는군.

 

얄마르 어떤 오리인 것 같나?

 

헤드비 그냥 오리가 아니에요……,

 

엑달 쉿!

 

그레거스 터키오리는 아닌 것 같고.

 

엑달 이봐, 베를레 군, 이건 그냥 오리가 아니라 들오리야.

 

그레거스 네, 정말입니까? 들오리요?

 

엑달 그렇다네, 자넨 새라고 하겠지만, 들오리지, 우리 집 들오리라고,

 

헤드비 내 들오리예요. 저건 내 거니까요.

 

 

저걸 어떻게 잡았냐는 물음에 노인은 자초지종을 자세히 들려준다. 베를레 씨가 사냥을 하던 중에 저 오리를 노렸는데, 시력이 나빠진 탓에 날개만 맞혔고, 들오리는 곧장 잠수했단다. "들오리란 그게 버릇이니까. 곧장 바닥으로 잠겼지.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끝까지. 그러고는 온갖 물풀에 닥치는 대로 매달려 두 번 다시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거지."

 

그래서 엄청 영리한 개를 시켜 오리를 물 속에서 끄집어 냈고, 베를레 씨가 하인한테 처리를 맡겼고, 그 소식을 들은 엑달 노인이 마침내 그 들오리를 집으로 데려오게 된 것이고, 이제는 손녀딸 헤드비에게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친구가 된 거라고 했다. 창고에서 자란 그 들오리는 어느새 살도 통통하게 오르고, 진짜 야생 생활이 어떤 건지 잊어버릴 정도로 잘 지내고 있다고. 이쯤에서 2막이 끝난다.

 

3막에서는 인물들 간의 갈등이 차츰 고조된다. 그레거스는 화가 치민 나머지 아버지의 집에서 가출한 끝에 당분간 얄마르네 셋방에서 지내기로 한다. 그 소문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온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뿌리 깊은 불화의 원인들'을 샅샅이 들춰내며 격렬한 말싸움을 주고받는다.

 

베를레 어젯밤 네가 이상한 말들을 했었다……. 그래 놓고 이렇게 엑달의 집으로 이사를 와 있으니, 네가 나한테 반항할 마음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구나.

 

그레거스 제가 생각하는 건 얄마르 엑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일입니다. 자기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똑똑히 알아야 하니까요. 그것뿐입니다.

 

베를레 그게 어제 네가 말한 네 사명이냐?

 

그레거스 네, 아버지가 제게 주신 건 그것뿐이니까요.

 

베를레 네 머리가 돌아버린 것도 내 탓이란 거냐, 그레거스?

 

그레거스 아버지가 제 인생을 망친 겁니다. 어머니에 관한 건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도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는 건 아버지 때문입니다.

 

베를레 내 참! 이상한 양심도 다 있구나!

 

그레거스 전 아버지에게 반항했어야 했습니다. 엑달 중위 앞에 함정을 놓았을 그때 말입니다. 그분에게 경고할 걸 그랬어요. 결과가 어떨지는 제게도 훤히 들여다보였으니까요.

 

 

제4막은 지나와 딸이 아빠의 귀가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식사시간도 지나서 겨우 모습을 나타낸 얄마르는 완전히 돌변한 태도로 가족들을 대하기 시작한다. 그레거스를 통해 얄마르가 기어코 '아내의 추악한 과거'를 알아내고 말았기 때문이다.(그녀가 베를레 씨네 집에서 가정부로 일할 때 그레거스의 아버지가 그녀를 범했고, 열네 살 난 딸 헤드비는 알고 보니 베를레의 자식이었다. 헤드비는 베를레를 닮아 시력이 몹시 나쁘다. 더군다나 베를레는 임신한 가정부가 집을 나가자 엑달 노인의 아들과 결혼하도록 일을 꾸미기까지 했다.) 얄마르는 아내와 딸에게 온갖 이상한 태도를 내보인 끝에, 마침내 자신의 딸(?)과 창고에서 생일파티를 열기로 약속한 일에서조차 짜증을 부린다.

 

헤드비 하지만 아빠, 약속했잖아요. 거기서 내일 축하하기로…….

 

얄마르 흠, 그렇군……. 그럼 모레부터. 재수 없는 들오리 새끼,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고 싶다고.

 

헤드비 (비명을 지르며) 들오리를 왜요!

 

지나 그런 심한 말을!

 

헤드비 (아버지를 흔들며) 아빠, 저건 제 들오리잫아요!

 

얄마르 그래서 안 하잖아. 할 마음도 없어……. 네가 불쌍하니까, 헤드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꼭 그러고 싶다. 그런 자식한테 받은 건 이 집에서 한 마리도 기를 수 없으니까.

 

 

지나와 얄마르는 '아내의 과거'를 두고 누구의 잘잘못인지를 두고 격렬한 말싸움을 벌인다. 헤드비는 지산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갑자기 차갑게 돌변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더군다나 아빠와 엄마의 말싸움으로부터 자신이 아빠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마저 눈치채고 만다. 이 와중에 그레거스는 친구의 딸을 도와준답시고 헤드비에게 이상한 권유를 한다. 들오리만 보면 아빠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는 형편이니, 아빠를 위해,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아끼는 보물을 스스로 희생하면 어떻겠니?' 하고.

 

아빠를 위해, 아빠와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다시 평화롭고 따스하던 옛 가정의 회복을 위해, 아빠가 보관해 놓은 권총을 들고 몰래 창고로 들어간 헤드비는 끝내 들오리 대신 자기 자신을 죽이고 만다. 연극은 이처럼 비극적으로 끝나고 만다. 독자나 관객들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여운만 남긴 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비극이?

 

《들오리》에는 아주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이 작품을 발표할 당시 입센의 입지는 확고부동했다. 《인형의 집》과 《유령》과 《민중의 적》을 마치 3부작처럼 연이어 발표하면서 문제적 작가로 확실하게 자리를 굳혔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들오리』는 출간되자 말자 초판 8천 부가 순식간에 동이 났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재판을 찍었다. 그러나 그 재판이 다 팔리는 데까지는 무려 30년이 걸렸다. 독자들이 이런 작품을 받아들이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얘기다. 심지어 전문 비평가들도 처음엔 이 작품의 진가를 잘 몰랐다고 한다. 그만큼 걸작으로 인정받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얘기다. 독일의 시인이었던 릴케는 1891년에 파리에서 이 연극을 감상한 뒤 시(詩)처럼 느껴진다고 술회했다.

 

이 작품 직전에 발표했던 《민중의 적》을 통해 '허위에 기초한 사회악'을 고발했던 작가는 후속작인 《들오리》를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평범한 인간이 과연 '과거의 진실'을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지를 그려보고자 했다. 이 작품에서 '추악한 과거'를 숨긴 핵심 인물은 베를레였다. 지나 역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며 살아왔지만, 진실을 덮기 위해 일부러 애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베를레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베를레의 아들인 그레거스는 두 사람의 추악한 과거를 드러내기 위해 몹시 안달하는 인물이었다. 그레거스의 눈에 비친 알마르의 결혼은 마치 베를레의 총에 맞아 창고에 갇힌 채 더이상 날지도 못하는 불쌍한 들오리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는 조급한 정의감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이제는 날지도 못하는 들오리를 구제하기 위해 억지를 쓰는 인물처럼 보인다. 얄마르는 사진사 일은 부인에게 미뤄놓을 정도로, 늙은 아버지인 엑달 노인과 함께 '새로운 사진술 발명'에 몰두한다. 그는 아버지의 잃어버린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할 영광스런 그날만 기다린다. 또한 시력이 몹시 나빠 장래가 걱정되는 딸과 가난한 아내를 행복하게 해 줄 꿈을 소중히 간직한 채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느닷없이 자신들의 삶에 불쑥 끼어든 옛 친구 때문에 결국 맥없이 주저앉는다. 그는 폭로된 진실 앞에 당황하면서 '들오리를 죽이고 싶다'는 뜬금없는 분풀이 욕망을 드러낸다. 순식간에 아빠의 사랑을 잃어버린 헤드비의 해결책 또한 아빠 대신 들오리를 쏘아 죽이는 일로 왜곡되어 표출된다. 도대체 들오리한테 무슨 잘못이 있길래.

 

극도로 예민한 사춘기 소녀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들오리를 쏘려다가 도리어 자신의 가슴으로 총구를 돌린 것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갑작스레 아빠의 사랑을 잃은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같은 존재였던 들오리마저 죽이고 나서 도대체 무슨 힘으로 삶을 견딜 수 있겠는가. 이 작품을 읽으면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이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조현아 동영상에 등장하는 '두 귀를 틀어막은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상처입은 들오리가 겹쳐 떠오르는 건 이상할 게 조금도 없다. 과거의 상처 혹은 출생의 비밀 때문에 평화롭기만 하던 가정에 거센 소용돌이가 생겨나고 가족이라는 튼튼한 울타리가 하루 아침에 얼마나 쉽게 풍비박산이 나고 마는지는 최신의 드라마가 즐겨 다루는 핵심 주제들이다.( ☞ 궁금해하지 말라)

 

이 작품이 출간된 해인 1884년은 청나라가 베트남과 전쟁을 벌이고, 네덜란드인이 보르네오 섬을 정복하던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극작가 입센이 벌써 그 무렵에 이토록 현대적인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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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참 이상하다. 나는 그저 '들오리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해서 인터넷을 조금 뒤졌을 뿐인데, 그런 궁금증이 결국 이런 엉뚱한 글로 이어졌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내가 원래부터 쓰기로 마음 먹었던 글은 '들오리의 습성'과 관련된 다음 문장을 인용하고 내 생각을 아주 조금 덧붙이는 정도였다.(들오리의 모습을 찾게 되면 왠지 조금은 더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지나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글을 다 쓰고 보니 엉뚱하게도 내가 진짜로 인용하고 싶었던 글은 아예 수면 아래로 깊숙히 잠기고 말았다. 그 대목을 이런 식으로라도 되살리고 싶다...

 

 

그레거스 그러면서 저 창고에는 저런 것들을 기르나? 일에 방해가 되거나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아?

 

얄마르 당치 않은 소리.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네. 나라고 일 년 내내 한 가지 문제만 생각하며 사는 줄 아나? 기분전환거리가 있어야지. 영감이나 계시 같은 건 다 때가 되야 오는 거야. 애간장 태운다고 오는 게 아니라니까.

 

그레거스 얄마르, 자네한테는 들오리 같은 구석이 있군.

 

얄마르 들오리? 무슨 의미지?

 

그레거스 자네는 물속에 들어가서, 바닥에 난 물풀에 매달려 있는 거야.

 

얄마르 그걸 말하는 거군. 그 일격. 하마터면 아버지도 쏴 죽여서 내 신세까지 망치려고 했던?

 

그레거스 그런 뜻이 아니야. 자네 신세가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고. 하지만 자네가 독이 든 진창 속에 빠져 있는 건 사실이네, 얄마르. 자넨 잠행성 질병에 걸려 있어. 그래서 자꾸만 물속으로 파고드는 거네. 어둠 속에서 죽으려고.

 

얄마르 내가? 어둠 속에서 죽는다고? 이봐, 그레거스, 그런 이야기는 집어치우게.

 

그레거스 그렇게 당황할 것 없어. 조만간 내가 재기시켜 줄 테니까. 나도 내 사명이 어디에 있는지 그 정도는 똑똑히 안다고. 어제 그걸 깨달았지.

 

얄마르 그건 잘된 일이지만, 나는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군. 분명히 말해 두지만, 우울한 천성을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불만이 없으니까.

 

그레거스 불만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독에 감염됐다는 증거야.

 

얄마르 그만하세, 그레거스. 질병이니 독이니 하는 이야기는 그만두자고. 그런 이야기는 익숙하지 않아. 식구들은 그런 듣기 싫은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니까.

 

 - 《들오리》, <제3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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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jmmm 2021-07-26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많은 작품들 가운데 여태껏 내가 읽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 정말? 정말!

 

그런데 이렇게 내 독서 경험의 좁고 얕음을 빤히 드러내도 괜찮을까. 물론이다. 괜찮고 말고! 내 마음이 불편했다면 이런 글을 애시당초에 쓰지도 않았을 터. 그런데 이런 뻔뻔함이 다 나이 탓이라는 걸 소세키는 이렇게 표현한다.

 

"간단히 말하면 늙어빠졌다는 거네."

 

"선생님은 왜 예전처럼 책에 흥미를 가질 수 없는 거죠?"

 

"딱히 이유는 없지만……. 말하자면 아무리 책을 읽어도 그만큼 훌륭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탓이겠지. 그리고……."

 

"그리고 또 있습니까?"

 

"또 있다고 할 만한 이유는 아니지만,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 나선다거나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모르면 수치인 것 같아서 거북했는데 요즘에는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다 보니 무리해서라도 책을 읽어보려는 마음이 안 생기는 거겠지. 간단히 말하면 늙어빠졌다는 거네."(75∼76쪽)

 

 

나쓰메 소세키의 특징들은 『마음』 하나만 읽어도 금세 알 것만 같은 착각도 든다. 그의 글이 독자들의 마음에 아주 쉽게 와닿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형체도 없는 사람의 마음을 참 잘도 건드리고 다독이고 어루만진다. 그가 왜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지 알 것도 같다. 비록 그가 셰익스피어처럼 기가 막힌 대사들을 시적으로 화려하게 펼쳐놓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의 작품의 또다른 특징 하나는 책 뒷면에 커다랗게 박힌 글씨 대로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들린다는 점이다. 그런 느낌을 나는 『마음』을 읽는 동안에 너무 자주 맛보고 있다. 가령, 다음의 대목 하나만 읽어도 그렇다.(그 대목을 잠시 뒤에 인용하는 점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소세키의 문장을 인용하기 전에 이쯤에서 뭔가 끼워넣어야 할 것만 같은 우리들의 현재 사정들에 관한 얘기가 있어서 그렇다.)

 

요즘처럼 취업난이 심각한 때가 도대체 언제였던가. 젊은이들의 취업난은 너무나 심각해서 차마 글로 옮기기가 두려울 정도다. 주변에서 매일같이 들리는 이야기가 '청년들이 취업이 안 된다.'는 얘기 뿐이다. 뉴스에 보도되는 취준생들과 공시생들의 규모만 봐도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다. 옛날엔 이런 적이 없었다.

 

중장년층들의 어려움도 사정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만 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 50대에 평생 직장인 줄로만 알고 다니던 회사에서 짤리는 순간, 특별한 능력과 스펙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일자리를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공인중개사니 공동주택관리사니 온갖 자격증을 따놓은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파트 관리소장 한 사람 뽑는데 4,50 명씩 지원한다니, 도대체 무슨 수로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내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자식들은 거의 다 컸지만 그네들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니, 다니던 직장에서 밀려난 늙은 애비라도 일자리를 얻어 딸린 식구들을 부양해야 할 처지인데, 그것조차 도통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사정이 나빠도 옛날엔 이 정도로 나쁘진 않았던 듯하다. 우리의 부모 세대들은 조혼 풍습도 한몫 했던 터여서 50대에 설사 은퇴를 하더라도 30대의 자녀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부모를 부양했었다. 물론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가. 50대가 아니라 70대, 80대가 되어도 자식들에게 부양의 의무를 지우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노후는 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는게 보편적 상식이 되었다.

 

많이 꾸물거렸다. 다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로 돌아오자. 작가의 말대로, 『마음』은 1914년 4월부터 8월까지 도쿄와 오사카의 《아사히 신문》에 동시에 연재한 소설이다. 지금으로보터 무려 105년 전에 일간지에 연재된 소설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어떻게 된 게 요즘은'으로 시작되는 옛 어른들의 푸념섞인 말투가 요즘 사람들이 들어도 어쩌면 그토록 생생하게 들어맞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정말? 정말!

 

9월 초가 되어 나는 드디어 도쿄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당분간 지금까지처럼 학자금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서 이렇게 있어봐야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나는 아버지가 바라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쿄로 가겠다고 말했다.

 

"물론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만요." 하고도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일자리가 아무래도 내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그 반대로 믿고 있었다.

 

"그야 얼마 안 되는 기간일 테니까 어떻게든 마련해보마. 그 대신 길어지면 안 된다. 적당한 일자리를 얻는 대로 독립해야지. 원래 학교를 졸업한 이상 다음 날부터는 남의 신세 같은 걸 지면 안 되는 거니까. 요즘 젊은 사람은 돈을 쓰는 것만 알지 버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아버지는 그 밖에도 이런저런 잔소리를 했다. "옛날에는 자식이 부모를 부양했는데 어떻게 된 게 요즘은 부모가 자식을 먹여 살린다니까" 하는 말도 했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121∼122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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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2-15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재밌게 읽었어요. 유머가 있고 짠하게 만드는 게 있고 통쾌한 부분도 있고
교훈도 있어요. 무엇보다도 도련님의 따뜻한 마음이 감동으로 전해 와서 좋았어요.

oren 2019-02-15 21:44   좋아요 0 | URL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와 『도련님』(1906)이 워낙 유명한 덕분에 그 작품부터 읽은 분들이 많을 듯해요. 그런데 어떤 평론가는 ‘전작은 재기가 너무 과다하게 발휘되고 있고, 후작은 감상이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평을 남겼더라구요. 자신으로서는 『마음』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나요. 그래서, 저도 『마음』부터 읽어보기로 마음먹고 그 책부터 읽어보고 있어요.^^

겨울호랑이 2019-02-17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많이 접하질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사실, 다른 작가들 작품도 마찬가지긴 합니다만.ㅜㅜ) 작가의 글이 시원하다는 느낌을 oren님께서 소개해주신 글을 통해 느껴 봅니다.^^:)

oren 2019-02-17 23:32   좋아요 1 | URL
저도 나쓰메의 작품들을 읽어본 게 없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탁월한 문장가임엔 틀림없는 듯합니다.^^
 

 

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 몽테뉴

 

 * * *

 

우리가 지나온 세월을 잊어버리기는 얼마나 쉬운가.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면서 유난스러울 정도로 나이에 대한 흥미로운 단상들을 자주 내보였다. 그가 재치있는 말로 풀어 놓은 각각의 나이에 대한 느낌들은 음미할 때마다 새롭다. 그는 카메라와 같은 기막힌 물건은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시대를 살았다. 그러니 자신을 그려 놓은 옛 초상화를 보면서 자신의 변화를 깨닳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젊을 때의 한 순간을 붙들어 매는 작업이란 얼마나 번거로운 일이었을까. 초상화를 그려줄 화가부터 찾아야 했고, 예약 날짜를 잡아야 했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꼼짝도 못하고 자리를 지켜야 했을 터이니 말이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자신의 모습을 기록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이제는 자신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쉬울 지경이다. 더군다나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순식간에 여러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전파할 수도 있다. 수단은 도처에 널려 있다. 단체 카톡방,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페, 블로그, 인터넷 서재 등등 도처에 SNS는 넘쳐 나니까.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정은 지금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카메라는 대표적인 귀중품이었고, 사진을 찍는 데는 적잖은 돈이 들었다. 필름값 따로, 현상비 따로, 인화비 따로, 때로는 사진을 조금 더 크게 확대하는 데에도 별도의 비용이 들었다. 그러니 사진을 남기는 일은 아주 특별한 때에나 생각할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추억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초상화나 사진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다. 특정한 장소, 특정한 음악, 특정한 음식, 특정한 사물만 있어도 우리는 단숨에 과거로 뛰어들 수 있다. 그런 사물들 가운데 책이 빠질 수는 없다. 맞아, 맞아, 바로 그 무렵에 내가 그 책을 읽었었지, 하는 느낌이야말로 그 순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강력한 사다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더군다나 그 책을 읽은 기록까지 더불어 발견한다면!

 

그런 기록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물건 하나가 바로 일기장이다. 옛날엔 노트조차 귀한 물건이어서 일기장 따로, 독서 노트 따로, 하는 식으로 여유를 부릴 계제도 아니었다. 아무튼 일기장에 담긴 독서 기록이야말로 특정한 사람들에겐 아날로그로 남겨진 최고의 기록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제는 겨울호랑이 님의 글을 읽다가 홀연 '채근담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채근담을 내가 언제쯤 읽었더라,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게 너무 까마득한 과거였기 때문이다. 아마 30년은 족히 지났음에 틀림없었다. 찬찬히 따져보니 아직 40년은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채근담을 읽은 건 대학교 2학년 진학을 코앞에 둔 무렵이었다. 책 내용이 그 당시 내 마음에 얼마만큼 쏙 들어 왔던지, 한자 공부를 겸한다는 마음으로 하루에 얼마씩이라도 꼬박꼬박 일기장에 옮겨 보자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그런 마음이 아직까지도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 그런데 저 책 속에 담긴 내용은 어느새 내 기억 속에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굳은 결심마저 느껴지는 한자 또한 까마득히 낯선 글자로만 느껴진다.

어느새 내가 이토록 그때의 나 자신과 멀어졌단 말인가.

 

 

 

 

두 번째 문장을 보니 더욱 기가 막힌다.

점염, 기계, 연달, 박로, 곡근, 소광 등등이 모두 딴 세상의 낱말 같다.

도대체 언제 내가 저런 한자를 쓴 일이 있기나 했던가 싶다.

 

 

 

 

아하, 옥온주장(玉韞珠藏)이라는 말도 있었구나!

 

 

 

 

이 대목은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얼마나 다행인지!

 

 

 

 

만일 말마다 귀에 기쁘고, 일마다 귀에 쾌하면,

이는 곧 인생을 들어 짐독(鸩毒) 속에 묻음이니라.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짐독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낯설고 멀고도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짐새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새이길래 깃에 있는 독이 그토록 맹렬하단 말인가.

 

 

 

 

이날 하루는 진도가 꽤 나간 듯하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이날도 성과가 그리 나쁘진 않다. 아무튼 하루라도 건너뛰는 일은 없어야 옳다.

 

 

 

 

불궤라는 말도 다 있구나.

불궤(不匱) : 다함이 없음, 오래 지속됨.

 

 

 

 

여전히 어려운 말들로 가득하구나.

 

 

 

 

그래도 꾸준히 여기까지 이어져 온 모습만은 좋아 보인다. 어쨌든 작심삼일과는 거리가 머니까.

 

 

 

 

이날 적은 기록은 아무래도 '채근담'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고교 수업 시간에 배웠던 한시 중에 암송하고 있는 시들을 한자로 그냥 한 번 써 본 듯하다.

 

 

 

 

이 무렵에 읽었던 소설 중엔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형제들』도 있었다.(사진은 채근담을 기록한 일기장의 맨 뒷쪽 부분이다.) 목차 속에 천연덕스럽게 보이는 한자들이 지금은 영 낯설기만 하다.

 

아, 참. 채근담의 추억을 떠올려 준 겨울호랑이 님의 글 속엔 마침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도 끼어 있었다. 나는 그 책을 군복무 시절에 읽었었다. 대략 84년쯤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책의 내용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때의 독서 기록은 아마도 PX에서 구입한 노트에 적었지 싶은데(유난히 볼펜똥이 많이 나오던 볼펜도! 그래서 글씨가 번져 보인다. 그에 비하면 일기장은 얼마나 품질이 좋은지!), 1,2년 사이에 글씨체가 참 많이도 바뀌었다는 걸 느낀다.

 

 

 

그런데 이제는 손글씨를 쓸 일조차 거의 없다. 이제는 글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쓴다!

 

 

"오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오오, 멋진 신세계여!"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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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9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으실땐 필사광이셨군요 그리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굿뜨~☕️

oren 2019-02-09 20:46   좋아요 1 | URL
암튼 원문이 한자로 된 책을 베껴보기는 『채근담』이 처음이지 싶어요. ㅎㅎ

syo 2019-02-09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같은 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oren님은 이미 벌써 오늘날의 저를 꿀떡 씹어드실 만큼의 소양을 갖추신 상태셨군요.....

oren 2019-02-09 22:36   좋아요 0 | URL
오, 오, 오십이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모름지기 옛말에 후생이 가외라 하였으니, 그저 후생이 두려울 뿐입니다...
* * *
“자왈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공자가 말했다. 뒤에 태어난 사람이 가히 두렵다. 어찌 오는 사람들이 이제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으랴.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으면, 이 또한 두려워할 것이 못될 뿐이다.)”

막시무스 2019-02-09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씨체가 너무 부럽습니다! 힘차고 자신감이 강해 보이네요!

oren 2019-02-09 23:3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입대 이전에 쓴 글씨들은 어딘지 모르게 초딩스러워 보여서 별로 마음에 안 들고,
입대한 뒤로 조금씩 가다듬은 글씨체는 그나마 차분한 느낌이 들어 조금 나아졌다 싶기도 합니다.^^

페크pek0501 2019-02-15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참 잘 쓰십니다. 필체가 좋습니다. 볼 줄 모르지만 필체에서 꼿꼿한 정신이 느껴집니다.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하는 형, 원칙을 중요시하는 형.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형 같습니다.
혹시 오렌 님은 의지의 사나이 이십니까? ㅋ

oren 2019-02-15 14:42   좋아요 1 | URL
그런데 페크 님께서는 아주 캐캐묵은 옛날에 써 놓은 글씨체 하나를 보고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시는 거 아닙니까? 거, 유행가 가사에도 나오잖습니까. 지금 우린 그 옛날의 우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 * *
지금 지금 우리는
그 옛날의 우리가 아닌 것
분명 네가 알고 있는 만큼 나도 알아
단지 지금 우리는 달라졌다고 먼저
말할 자신이 없을 뿐

농부 2019-12-20 1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채근담 읽어보고 싶어요 !

oren 2019-12-20 20:46   좋아요 0 | URL
네... 채근담 꼭 읽어보세요~~

ULYSSEZ 2020-06-19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상입니다..
지금도 알라딘에 글을 올리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좋아했던 ‘채근담‘ 에서 멈춰서 다 읽고 감사한 마음에 흔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링크를 알게되었지만, 기억해 두었다 보고 싶을 때 또 오겠습니다.

2020-06-13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이라는 상품

 

작가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첫 작품 출판에 얽힌 아픈 일화가 겹쳐 떠오릅니다. 소로우도 작가적 재능은 탁월했지만 (『월든』으로 대박이 나기 전까지는) 늘상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작가였고, 초판 흥행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작가님과는 비교도 하기 어려울 만큼 참담한 실패를 겪었던 인물이기도 하고요.

 

오로지 자신의 처녀작 집필에만 전념하기 위해 일부러 월든 호숫가로 나가 오두막을 짓고 글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소로우는 자신의 처녀작을 인쇄해 줄 출판사마저 구하지 못했고,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간신히 돈을 빌려 자비로 출판한 초판 1,000권 중에서도 4년 동안에 팔린 책이 겨우 294권에 그쳤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기증본 75권이 포함된 수치라고 하고요. 그에 비하면 작가님의 첫 소설집은 정말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작가님이 번역하신 책들은 워낙에 큰 출판사에서 밀고 있는 유명한 작품들이니만큼 앞으로도 오랫동안(!) 흥행에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건투를 빕니다.^^

 

 * * *

 

얼마 전에는 한 원주민 행상이 우리 동네에서 상당히 유명한 변호사의 집에 바구니를 팔려고 왔다. 원주민은 "바구니를 사시겠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아니요, 우리 집에는 바구니가 필요 없어요"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자 원주민은 "뭐라고요! 우리를 굶겨죽일 생각입니까?" 라고 소리치고는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원주민은 주위 백인들이 열심히 일하면 잘사는 걸 보고, 특히 변호사가 변론을 잘 짜내기만 하면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재물과 지위가 따르는 걸 보고 '나도 사업을 해야겠다. 바구니를 짜야겠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원주민은 바구니를 짜면 자기 일을 끝낸 것이 되고 그렇다면 백인들은 당연히 바구니를 사야 하는 걸로 생각했던 것이다. 백인들이 살 만한 가치 있는 바구니를 만들거나, 적어도 백인들이 바구니를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살 만한 다른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나도 가늘게 쪼갠 나무로 바구니 같은 것을 엮어본 적이 있었지만, 백인에게 팔 만한 것으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102 하지만 나는 바구니를 엮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남들이 살 만한 바구니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대신 내 바구니를 굳이 팔지 않아도 괜찮은 방법을 연구했다. 사람들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며 칭찬하는 삶은 그저 삶을 살아가는 한 방법에 불과하다. 그런데 다른 모든 방식의 삶을 짓밟아가며 하나의 삶만을 과대평가할 이규가 어디에 있는가?(54∼55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 달린 월든』중에서 

 

주석)

 

102. 소로우의 첫 책,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을 가리킨다. 이 책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소로우는 출판사에 빚진 290달러를 갚는 데 4년이나 걸렸다. 소로우는 1853년 10월 27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엉뚱하게 '출판업자'라 불리는, 내 책을 출간해준 출판사가 아직 팔리지 않은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재고들을 어떻게 처분해야겠느냐고 묻는 편지를 지난 한두 해 동안 가끔 보내다가, 재고들이 차지한 공간을 그들이 급히 싸용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내게 알려왔다. 그래서 나는 전부 여기로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그 책들이 속달로 오늘 도착했다. 짐마차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4년 전에 먼로에게 사서 그 이후로 조금씩 값을 치렀지만 아직 완납하지 못한 1,000권 중 남은 706권이었다. 그 책들이 마침내 내게 보내졌고 이제야 내 물건들을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됐다. 그 책들을 등에 짊어진 채 층계참을 돌고 두 계단을 올라, 그것들이 원래 있었을 곳과 비슷한 공간까지 옮겼다. 290권 남짓한 책들 중 75권은 기증하고 나머지가 겨우 팔린 것이었다. 이제 나는 거의 900권에 달하는 책이 있는 서고를 갖게 됐지만, 그중 700권 이상이 내가 쓴 책이다. 저자가 자신이 기울인 노고의 열매를 지켜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 책들이 내 방 한 귀퉁이에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다. 내 오페라 옴니아(opera omnia, 모든 저작물-옮긴이)다. 내가 원작자고, 내가 머리를 짜내 빚어낸 작품이다.(일기 5:459)

 

 

 

자신의 처녀작 출판을 도와줄 곳을 찾지 못해 끝내 자비로 - 그것도 에머슨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 출판한 첫 책이 저토록 참담한 실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일기에 저런 내용을 남겨 놓는 여유를 즐겼다. 그런 내공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불후의 걸작인 『월든』이 탄생한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월든』에서 방금 인용한 문장에 잇따라 이어지는 다음 대목은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로 간 진정한 까닭'을 밝히는 부분이므로 덧붙여 인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뜻밖에도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서 홀로 오두막을 짓고 살게 된 진짜 이유에 대해서 너무나 자주 오해하기 때문이다.(물론 소로우가 직접적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대신에 일부러 다른 일에 빗대어 말장난처럼 표현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와 함께 호흡하는 시민들이 내게 법원의 일자리나 목사 보조 등 그 밖의 먹고살 만한 자리를 제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 힘으로 먹고살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여느 때보다 열심히 숲으로 얼굴을 돌렸다. 숲에서는 내가 그런대로 얼굴이 알려진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대로 자본금이 모이기를 기다리지 않고, 수중에 있는 빈약한 수단을 사용해서 곧바로 내 사업103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월든 호수로 간 목적은 돈을 들이지 않고 살려는 것도 아니었고 거기에서 힘들게 살려는 것도 아니었다.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개인 사업104을 하고, 상식도 없으며 계획을 해서 사업을 꾸려갈 만한 재능도 없어 어리석게는 보여도 그만큼 한심하게는 보이지 않을 일을 하는 데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다.(55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 달린 월든』중에서

 

주석)

 

103. 여기에서 '사업하다'는 어떤 경제적 이득이나 생활의 향상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관심 있는 일이나 신경 써야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힘쓰겠다는 뜻이다. 뒷 문장에 쓰인 '개인 사업'과 맞추어 말장난한 것이다. 

 

104. 개인 사업은 1842년 파상풍으로 사망한 형에게 바친 책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을 쓰는 것을 가리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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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9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오노 나나미는 “신은 세부에 깃든다”란 말을 했는데 진짜 디테일에 강하신 오렌님^^ 굿밤하소서~

oren 2019-02-09 13:35   좋아요 1 | URL
시오노 나나미가 저런 고상한 말도 남겼군요.^^
저랑 그다지 큰 연관은 없는 얘기겠습니다만,
그래도 뜨거운 격려의 말씀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9 14:23   좋아요 1 | URL
늘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오렌님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oren 2019-02-09 14:27   좋아요 1 | URL
늘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9 0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oren님께서 알려주신 소로우의 일화에 오늘 페이퍼의 글까지 읽으니 한결 이해가 깊어진 것 같습니다. 소로우가 월든 숲으로 간 것이 개인 사업과 삶을 위한 것임을 알고나니, 깨달음을 위해 반드시 가톨릭의 ‘피정‘이나 불교의 ‘동안거‘가 필요한 것이 아님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9-02-09 13:48   좋아요 2 | URL
아무리 그래도 하버드 졸업식때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할 정도로 탁월했던 젊은 청년이 ‘속세의 성공‘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호숫가에 외딴 오두막을 짓고 홀로 살면서‘ 불후의 작품을 쓰겠다고 한 걸 보면 대단한 결심과 비범한 실천력을 갖춘 인물임이 분명한데,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쓴 처녀작이 참담한 실패를 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월든』으로 승화시켰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이더군요.

처녀작을 에세이로 쓰기 전에는 랄프 왈도 에머슨으로부터 오랫동안 개인 과외 교습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작시(作詩) 훈련을 받았으나, 마침내 ‘자신의 시재(詩才)가 어느 정도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스승의 말을 듣고, 수많은 자작시들을 단칼에 모조로 불태웠다고 하고, 그 시들은 지금까지도 전해지는게 없다고도 합니다.
 

 

살다 보면 아주 가끔씩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아!

 

물론 대개는 그럴 때 죽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때는 정녕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지, 결코 죽음으로 뛰어들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질투심이라는 격정에 휩쓸려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졸라 죽이고야 만 오셀로에게 가장 죽고 싶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런 질문은 하나마나다. 격분에 사로잡힌 그가 아무런 죄도 없는 아내를 죽이고 난 직후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탄에 빠졌을 때다. 그는 곧장 자결한다. 그러나 그는 원래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데스데모나를 죽인 직후 로도비코(베네치아 귀족)가 자신의 행적과 인간성을 베네치아 정부에 고할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라고 말한다.

 

무엇을 줄이거나

악의로 적지도 마시오. 그러면 당신은

분별없이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을

질투를 쉽게 하진 않지만 하도록 만들면

극도로 혼란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자기네 부족보다 더 값진 진주를 던져 버린

비천한 인도인 같은 자를, 차분한 두 눈은

기분 따라 쉬 녹진 않지만 아라비아 나무가

약용 진액 흘리듯 눈물을 줄줄 쏟는 사람을

말해야만 할 것이오.

 

 - 『오셀로』, 제5막 제2장 중에서

 

 

그는 함부로 질투심을 일으키는 시덥잖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갖춰야 할 용기와 위엄을 두루 지녔고, 정직성과 당당함뿐 아니라 다정다감한 감정까지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 중이던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섬을 지키기 위해 용병대장 오셀로를 총독으로 파견한다. 베네치아 함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던 오셀로 일행은 도중에 격렬한 태풍을 만나 뿔뿔이 흩어진다. 뒤늦게 간신히 그 섬에 당도한 오셀로는 아내 데스데모나가 자신들보더 도리어 먼저 키프로스 해안에 무사히 도착한 걸 알고는 좋아서 까무러칠 지경이다. 그때 오셀로가 느낀 황홀감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격정적인 인물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오, 내 영혼의 기쁨이여,

폭풍 뒤에 언제나 이런 평온 깃든다면

바람은 죽음을 일으킬 때까지 불고 불어

고생하는 돛단배를 바다 언덕 저 위로

올림포스만큼 올렸다가 천국에서 지옥 가듯

다시 내리꽂아라. 난 지금 죽어도 지금이

가장 행복할 것이오, 왜냐하면 내 영혼은

절대 만족 맛봤기에 이 같은 안락이

미지의 운명 속에서도 이어질 것인지

염려하기 때문이오.

 

 - 『오셀로』, 제2막 1장 중에서

 

이 장면에서 오셀로가 느끼는 감정은 절정의 행복감이지만, 그 이면에는 벌써부터 미래에 심상찮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염려가 끼어든다. 이런 행복이 과연 '미지의 운명 속에서도 어어질 것인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결국, 오셀로는 이아고의 유혹 장면에서 너무 쉽게 질투심에 불타오르고, 전후 사정이나 자초지종을 자세히 살펴 보지도 않은 상태로, 이아고에게 휘둘린 끝에 아내인 데스데모나와 부하인 카시오 사이의 불륜을 갑자기(!) 확신한다.

 

물론 여기서 오셀로의 질투심이 빚은 비극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오셀로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아고가 오셀로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 사용한 트릭이 너무나 교묘하고 그 효과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도 오셀로에게는 쉽게 파멸에 이르는 또 한 가지 약점을 더 지니고 있었다. 데스데모나와 자신의 결혼이 결코 탄탄한 바탕 위에 이뤄진 게 아니고, 갑작스런 유혹으로 이뤄진 허약한 기반 위에 있다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그는 피부조차 검은 나이 많은 무어인이었고, 데스데모나는 베네치아에서도 소문난 미모를 갖춘 고관대작의 딸이었으니 말이다. 이아고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사이의 틈을 벌이기 위해 그런 점까지도 교묘히 파고든다.

 

"데스데모나가 이 무어인을 계속 오래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중략) 그도 마찬가지고. 그녀로선 격정적인 출발이었으니까 그에 걸맞은 결별을 보게 될 거야.(중략) 이 무어인들은 욕심이 변하는 자들인데(중략) 지금은 그에게 캐롭처럼 맛있는 음식도 머지 않아 땡감처럼 떫은 맛이 날 거야. 그녀는 그를 젊은 남자와 바꿔야 해. 그의 몸에 물리게 되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 테고 사람을 바꿔야만 해. 반드시."

 

이아고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나쁜 악당이지만 그만큼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인간의 마음은 늘상 변하게 마련이고, 그 변화는 욕망이 좌우하며,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의 관계처럼 서로 분명한 차이가 나는 결합은 그 열기가 식을 경우 언젠가는 깨어지기 마련이다. 이아고는 그걸 끊임없이 강조한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의심하여 마침내 스스로 파멸할 때까지. 이런 천하에 몹쓸 악당!!

 

 * * *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라리사는 런던에 사는 쉰두 살의 여성이다. 그녀는 유월 중순의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꽃을 사러 집을 나선다. 그날 저녁에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날따라 그녀는 기분이 몹시 상쾌한 느낌을 받는다.

 

얼마나 상쾌한 아침인가, 마치 바닷가의 아이들에게나 찾아오던 아침처럼 신선했다.

 

그녀의 의식은 여기서 곧장 열여덟 소녀 시절로 날아간다.(소설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아래 문장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소위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이다. 문장 사이의 도약 덕분에 '과거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기분이 든다!)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다. 부어턴에서 프랑스식 유리문을 열어 젖히고 ㅡ 그 문의 경첩이 약간 삐걱대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ㅡ 활짝 열린 대기 속으로 뛰어들 때면 언제나 그런 느낌이 들곤 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고요했던지. 물론 오늘 아침보다도 더 조용했었다. 파도의 찰싹임처럼, 파도의 입맞춤처럼, 싸늘하고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당시 열여덟 살이던 소녀에게는) 엄숙했다. 거기 그렇게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노라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꽃들과, 나무들과, 나무들을 감돌아 지나가는 연기와, 갈까마귀들이 날아오르고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노라면.(7∼8쪽)

 

 

유월 중순의 어느 날 아침에 꽃을 사러 집을 나선 클라리사가 맨 처음으로 떠올린 추억 속의 그 사람은 피터 월시였다. 한때 너무나 격정적으로 사랑했고, 벌써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와의 아픈 이별만 생각하면 가슴앓이를 겪어야만 하는 남자, 옥스퍼드를 중퇴하고 지금은 영락한 처지지만 늘 보고픈 남자가 피터였다. 

 

그가 곧 돌아온다지. 유월, 아니면 칠월? 잊어버렸다.

 

피터에 대한 추억들도 어느새 뇌리에서 사라지고 얼마쯤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 클라리사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옛 친구는 샐리 시튼이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놀라운 능력을 지닌 여자 친구였다. 클라리사에게서는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재능과 개성들을 지닌 그녀. 샐리는 정말이지 사람들을 너무 자주 놀라게 했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것은 샐리에 대한 감정의 순수함, 그 완전함이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감정과는 달랐다. 전혀 사심이 없고, 여자들, 막 사춘기를 지난 여자들 사이에나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 편에서는 다분히 보호자 같은 감정이기도 했다. 둘만의 연맹이라도 맺은 듯한 느낌, 자신들을 갈라 놓을 무엇인가에 대한 예감(그들은 결혼을 항상 파탄으로 이야기했다)에서 생겨난 이 기사도적인 감정은 샐리보다는 주로 그녀 편에서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 시절 샐리는 정말이지 겁이 없어서, 허세를 부리느라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들을 감행하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테라스 난간 위를 달린다든가, 여송연을 피운다든가, 묘한, 아주 기묘한 애였어. 하지만 그 매력은 대단했지.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밤에 자기 침실에서 더운물이 든 병을 손에 든 채로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이 지붕 아래 있어 ……. 그녀가 이 지붕 아래 있는 거야!> 하고 소리 내어 말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48∼49쪽)

 

 

그녀가 세월의 변천에 따라 얼마만큼 많이 그녀와 멀어지고, 그 모습조차 서로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는지는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다. 소설의 말미에서 클라리사는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찾아 온 사람들을 일일이 신경쓰느라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나 마찬가지였던 옛 친구들인 피터 월시와 샐리 시튼과는 살가운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다. 클라리사가 피터와 샐리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런 말들 뿐이었다. 「하지만 가봐야 해.」 「나중에 올게. 기다려.」 이 모든 사람들이 가버릴 때까지...

 

클라리사와 샐리 사이에 언제나 함께 하리라고 믿었던 그 옛날의 특별한 감정들이 언제 연기처럼 갑자기 사라졌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다만 그 두 사람 사이에 언젠가 한 순간 '지금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라고 느꼈던 그런 순간이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아니, 그런 말들은 이제 아무 뜻도 없었다. 그 옛날 감정의 희미한 메아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흥분하여 몸이 떨리는 기분, 반쯤 취한 기분으로 머리를 빗던 것은 기억할 수 있었다(머리핀을 빼어 화장대 위에 놓고 머리를 빗기 시작하니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창밖의 분홍빛 저녁노을 속에서 갈까마귀들이 퍼덕이며 날던 것도.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홀을 가로지르면서 <만일 지금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이리> 하는 심정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의 느낌 ㅡ 오셀로의 느낌이었고, 그녀는 셰익스피어가 오셀로에게 불어넣었던 만큼이나 강렬하게 그런 심정을 느끼고 있다고 확신했다. 오로지 새햐얀 드레스를 입고 샐리 시튼을 만나러 저녁 식탁에 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49쪽)

 

 

 * * *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라리사는 샐리 시튼과 남녀간의 애정 비슷한 감정을 느낄 만큼 특별한 사이였다. 싱그러운 꽃처럼 모든 게 향기롭게 피어나던 시절엔 그랬다. 그녀는 샐리 시튼 때문에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결혼까지 할 뻔했던 피터조차도 그럴 땐 그녀와 샐리 사이를 가로막는 훼방꾼일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샐리를 위한 배경일 뿐이었다. 샐리는 벽난로 곁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운 음성은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이 다정한 애무처럼 들리게 했다. 이야기를 듣던 아빠도(그는 그녀에게 빌려 준 책이 테라스에서 푹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한 후로 쉬이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이런 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니!」 그래서 그들은 모두 테라스로 나가 이리저리 걸었다. 피터 월시와 조지프 브라이트코프는 줄곧 바그너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녀와 샐리는 조금 뒤에 처졌다. 그러고는 그녀의 평생 가장 황홀한 순간이 다가왔다. 꽃이 담긴 돌항아리 곁을 지날 때였다. 샐리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꽃을 한 송이 꺾어 들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온 세상이 거꾸로 도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까마득히 멀어졌다. 그녀는 샐리와 단둘이 있었다. 선물을 받았는데, 꽁꽁 포장한 선물을 들여다보지 말고 그냥 가지고 있어,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이아몬드나 뭔가 무한히 소중한 것이 겹겹이 싸여 있었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동안 그녀는 살짝 그것을 열어 보았던가, 아니면 그 타는 듯한 광채가, 계시가, 종교적인 감정이, 뚫고 나왔던가! ㅡ 그때 조지프 노인과 피터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별을 보는 거야?」 피터가 말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화강암 벽에 얼굴을 찧은 것만 같았다! 난데 없고, 끔찍했다!(50∼51쪽)

 

 

그토록 소중한 친구였던 샐리가 언젠가부터 클라리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존재로, 또한 서로가 너무나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삶의 표층 아래에 도사린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자 삶의 아이러니다.

 

「나중에 올게요.」 그녀는 서로 악수하고 있는 옛 친구 샐리와 피터를 보며 말했다. 샐리는 뭔가 옛날 기억이 난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음성에는 그 옛날의 매혹적인 울림이 없었고, 그녀의 눈은 예전처럼 빛나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고 스펀지 백을 가지러 간다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복도를 내달리던 그 시절처럼. 앨렌 엣킨스는 말했었다. 「신사분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러나 모두들 그녀를 용서했다. (중략) 대담하고 무모하고 자기가 모든 일에 중심이 되어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능히 그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클라리사는 뭔가 무서운 비극이 일어나리라고, 때 아닌 죽음이라든가 순교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그녀는 결혼을 했고, 그것도 커다란 단춧구멍만큼 머리가 벗어진, 맨체스터의 방적 공장 주인과 결혼을 해서, 아들을 다섯이나 두었다고 한다!(236∼237쪽)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오셀로가 했던 말을 버지니아 울프가 클라리사에게 다시 부여한 것은 생각할수록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악당 이아고가 했던 "지금은 그에게 캐롭처럼 맛있는 음식도 머지 않아 땡감처럼 떫은 맛이 날 거야." 라는 말은 클라리사와 피터와 샐리 사이의 관계에서도 절묘하게 들어맞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땡감처럼 떫은 맛은 알겠는데 캐롭은 도대체 무슨 맛이냐고? 글쎄,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로 기가 막힌 맛이 아닐까. 아무튼 기분이 너무 좋을 땐 꼭 '죽여준다'는 느낌이 들 테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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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2-02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아고의 이간질이 오셀로의 파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작품에서 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아고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가짜뉴스가 생각나네요... 시대를 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위대한 문호의 힘이라 생각됩니다. 글을 읽다보니, 오셀로가 향하는 곳이 베네치아에게는 비극적인 ‘파마구스타 함락‘의 아픔이 있는 키프로스라는 점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베네치아의 아픔과 오셀로의 아픔을 같이 보이기에는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oren님 항상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19-02-02 16:59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가 『오셀로』를 쓴 때가 1601∼1604년 무렵이었는데, 이때는 벌써 오스만 투르크가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을 정도로 세력을 떨칠 때였죠. 『오셀로』의 시대 배경이 1571년에 일어난 역대급 전쟁이었던 <레판토 해전> 직전의 어느 시기, 다시 말하자면 ‘파마구스타 함락‘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조차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한창 전운이 감돌던 위태로운 시기의 어느 한 때였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키프로스 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졌던 <레판토 해전>은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참전해서 왼팔을 잃는 바람에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은 전쟁으로도 기억되는데, 문득 거기가 어디쯤인지 찾아보니 레판토는 그리스의 파트레 만 근처이며 현재는 나브팍토스라 불린다는군요.

겨울호랑이 2019-02-02 17:01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제가 알기로는 레판토 해전 직전에 파마구스타가 함락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잘 못 알았나 봅니다. oren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oren 2019-02-02 17:04   좋아요 1 | URL
제 댓글이 약간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군요.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순서는 겨울호랑이 말씀이 맞습니다. <레판토 해전>(1571년>이 있기 전에 ‘파마구스타 함락‘(1570년)이 일어났고, 그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어드메쯤이 『오셀로』의 시대 배경이 아닐까 하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2 17:13   좋아요 1 | URL
^^:) 네 oren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실 시대적 배경에 몇 년의 차이는 작품의 생명력에 비한다면 소소한 문제라 여겨집니다. ^^:) 세익스피어 작품 여러 곳에서 베네치아가 언급된 것을 보면, 베네치아는 지금과는 달리 강대국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oren 2019-02-02 17:32   좋아요 1 | URL
베네치아는 딱 한 번 가봤는데, 이름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정말 환상적인 도시더군요. 수많은 작가들이 베네치아(혹은 베니스)를 무대로 작품을 썼던 것도 이해할 만하고요. 나폴레옹이 거길 차지하고 앉아서 ‘유럽의 응접실‘로 불렀던 것도 그럴 듯하다 싶고요. 전 가끔씩 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도 한답니다. 어딜 가나 두루 아름답고, 한때 몹시 번창했고, 세련됐고, 매혹적이고, 역사적이고, 음악적이고, 종합적으로 너무 예술적인 도시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겨울호랑이 2019-02-02 17:39   좋아요 1 | URL
oren님 말씀을 듣고보니 베네치아에 꼭 가보고 싶어 집니다. 괴테도 「이탈리아 기행」에서 베네치아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 것을 보면 많은 것을 품은 도시라 여겨집니다^^:)

oren 2019-02-02 17:54   좋아요 1 | URL
문득 궁금해서 방금 알라딘 도서 검색에서 ‘베니스‘를 검색해 보니 189종의 책이 나오네요.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 말고도 아주 흥미로운 책들이 많아 보입니다.^^

<릴케의 베네치아 여행>도 있고,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작품도 보이고, 국내 작가가 쓴 <베니스에서 죽다>라는 작품도 보이네요. 심지어는 <책공장 베네치아>라는 책도 있고요.^^

겨울호랑이 2019-02-02 18:21   좋아요 1 | URL
^^:) 이런. 이 정도면 유럽 지식인들에게 베네치아는 관광지가 아니라 순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치아는 ‘유럽 문명의 성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oren 2019-02-02 19:20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니 베네치아는 ‘복식부기의 발상지‘로도 기억할 만하네요. 『1494 베니스 회계』라는 책을 보니 문득 그 책을 번역한 분이 제게도 한 권 선물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2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두 분 대화에 낄 수가 없네요 거장이란 고래 사이에 카알 새우 등 터지는 소리! 🎶

oren 2019-02-03 12:39   좋아요 1 | URL
카알 새우는 과연 어떤 맛을 지닌 새우일까요? 너무 궁금하네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9-02-03 13:27   좋아요 1 | URL
카알 새우는 맛 옵써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