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 몽테뉴

 

 * * *

 

우리가 지나온 세월을 잊어버리기는 얼마나 쉬운가.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면서 유난스러울 정도로 나이에 대한 흥미로운 단상들을 자주 내보였다. 그가 재치있는 말로 풀어 놓은 각각의 나이에 대한 느낌들은 음미할 때마다 새롭다. 그는 카메라와 같은 기막힌 물건은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시대를 살았다. 그러니 자신을 그려 놓은 옛 초상화를 보면서 자신의 변화를 깨닳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젊을 때의 한 순간을 붙들어 매는 작업이란 얼마나 번거로운 일이었을까. 초상화를 그려줄 화가부터 찾아야 했고, 예약 날짜를 잡아야 했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꼼짝도 못하고 자리를 지켜야 했을 터이니 말이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자신의 모습을 기록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이제는 자신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쉬울 지경이다. 더군다나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순식간에 여러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전파할 수도 있다. 수단은 도처에 널려 있다. 단체 카톡방,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페, 블로그, 인터넷 서재 등등 도처에 SNS는 넘쳐 나니까.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정은 지금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카메라는 대표적인 귀중품이었고, 사진을 찍는 데는 적잖은 돈이 들었다. 필름값 따로, 현상비 따로, 인화비 따로, 때로는 사진을 조금 더 크게 확대하는 데에도 별도의 비용이 들었다. 그러니 사진을 남기는 일은 아주 특별한 때에나 생각할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추억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초상화나 사진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다. 특정한 장소, 특정한 음악, 특정한 음식, 특정한 사물만 있어도 우리는 단숨에 과거로 뛰어들 수 있다. 그런 사물들 가운데 책이 빠질 수는 없다. 맞아, 맞아, 바로 그 무렵에 내가 그 책을 읽었었지, 하는 느낌이야말로 그 순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강력한 사다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더군다나 그 책을 읽은 기록까지 더불어 발견한다면!

 

그런 기록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물건 하나가 바로 일기장이다. 옛날엔 노트조차 귀한 물건이어서 일기장 따로, 독서 노트 따로, 하는 식으로 여유를 부릴 계제도 아니었다. 아무튼 일기장에 담긴 독서 기록이야말로 특정한 사람들에겐 아날로그로 남겨진 최고의 기록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제는 겨울호랑이 님의 글을 읽다가 홀연 '채근담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채근담을 내가 언제쯤 읽었더라,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게 너무 까마득한 과거였기 때문이다. 아마 30년은 족히 지났음에 틀림없었다. 찬찬히 따져보니 아직 40년은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채근담을 읽은 건 대학교 2학년 진학을 코앞에 둔 무렵이었다. 책 내용이 그 당시 내 마음에 얼마만큼 쏙 들어 왔던지, 한자 공부를 겸한다는 마음으로 하루에 얼마씩이라도 꼬박꼬박 일기장에 옮겨 보자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그런 마음이 아직까지도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 그런데 저 책 속에 담긴 내용은 어느새 내 기억 속에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굳은 결심마저 느껴지는 한자 또한 까마득히 낯선 글자로만 느껴진다.

어느새 내가 이토록 그때의 나 자신과 멀어졌단 말인가.

 

 

 

 

두 번째 문장을 보니 더욱 기가 막힌다.

점염, 기계, 연달, 박로, 곡근, 소광 등등이 모두 딴 세상의 낱말 같다.

도대체 언제 내가 저런 한자를 쓴 일이 있기나 했던가 싶다.

 

 

 

 

아하, 옥온주장(玉韞珠藏)이라는 말도 있었구나!

 

 

 

 

이 대목은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얼마나 다행인지!

 

 

 

 

만일 말마다 귀에 기쁘고, 일마다 귀에 쾌하면,

이는 곧 인생을 들어 짐독(鸩毒) 속에 묻음이니라.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짐독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낯설고 멀고도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짐새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새이길래 깃에 있는 독이 그토록 맹렬하단 말인가.

 

 

 

 

이날 하루는 진도가 꽤 나간 듯하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이날도 성과가 그리 나쁘진 않다. 아무튼 하루라도 건너뛰는 일은 없어야 옳다.

 

 

 

 

불궤라는 말도 다 있구나.

불궤(不匱) : 다함이 없음, 오래 지속됨.

 

 

 

 

여전히 어려운 말들로 가득하구나.

 

 

 

 

그래도 꾸준히 여기까지 이어져 온 모습만은 좋아 보인다. 어쨌든 작심삼일과는 거리가 머니까.

 

 

 

 

이날 적은 기록은 아무래도 '채근담'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고교 수업 시간에 배웠던 한시 중에 암송하고 있는 시들을 한자로 그냥 한 번 써 본 듯하다.

 

 

 

 

이 무렵에 읽었던 소설 중엔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형제들』도 있었다.(사진은 채근담을 기록한 일기장의 맨 뒷쪽 부분이다.) 목차 속에 천연덕스럽게 보이는 한자들이 지금은 영 낯설기만 하다.

 

아, 참. 채근담의 추억을 떠올려 준 겨울호랑이 님의 글 속엔 마침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도 끼어 있었다. 나는 그 책을 군복무 시절에 읽었었다. 대략 84년쯤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책의 내용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때의 독서 기록은 아마도 PX에서 구입한 노트에 적었지 싶은데(유난히 볼펜똥이 많이 나오던 볼펜도! 그래서 글씨가 번져 보인다. 그에 비하면 일기장은 얼마나 품질이 좋은지!), 1,2년 사이에 글씨체가 참 많이도 바뀌었다는 걸 느낀다.

 

 

 

그런데 이제는 손글씨를 쓸 일조차 거의 없다. 이제는 글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쓴다!

 

 

"오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오오, 멋진 신세계여!"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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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9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으실땐 필사광이셨군요 그리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굿뜨~☕️

oren 2019-02-09 20:46   좋아요 1 | URL
암튼 원문이 한자로 된 책을 베껴보기는 『채근담』이 처음이지 싶어요. ㅎㅎ

syo 2019-02-09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같은 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oren님은 이미 벌써 오늘날의 저를 꿀떡 씹어드실 만큼의 소양을 갖추신 상태셨군요.....

oren 2019-02-09 22:36   좋아요 0 | URL
오, 오, 오십이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모름지기 옛말에 후생이 가외라 하였으니, 그저 후생이 두려울 뿐입니다...
* * *
“자왈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공자가 말했다. 뒤에 태어난 사람이 가히 두렵다. 어찌 오는 사람들이 이제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으랴.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으면, 이 또한 두려워할 것이 못될 뿐이다.)”

막시무스 2019-02-09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씨체가 너무 부럽습니다! 힘차고 자신감이 강해 보이네요!

oren 2019-02-09 23:3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입대 이전에 쓴 글씨들은 어딘지 모르게 초딩스러워 보여서 별로 마음에 안 들고,
입대한 뒤로 조금씩 가다듬은 글씨체는 그나마 차분한 느낌이 들어 조금 나아졌다 싶기도 합니다.^^

페크pek0501 2019-02-15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참 잘 쓰십니다. 필체가 좋습니다. 볼 줄 모르지만 필체에서 꼿꼿한 정신이 느껴집니다.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하는 형, 원칙을 중요시하는 형.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형 같습니다.
혹시 오렌 님은 의지의 사나이 이십니까? ㅋ

oren 2019-02-15 14:42   좋아요 1 | URL
그런데 페크 님께서는 아주 캐캐묵은 옛날에 써 놓은 글씨체 하나를 보고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시는 거 아닙니까? 거, 유행가 가사에도 나오잖습니까. 지금 우린 그 옛날의 우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 * *
지금 지금 우리는
그 옛날의 우리가 아닌 것
분명 네가 알고 있는 만큼 나도 알아
단지 지금 우리는 달라졌다고 먼저
말할 자신이 없을 뿐

농부 2019-12-20 1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채근담 읽어보고 싶어요 !

oren 2019-12-20 20:46   좋아요 0 | URL
네... 채근담 꼭 읽어보세요~~

ULYSSEZ 2020-06-19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상입니다..
지금도 알라딘에 글을 올리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좋아했던 ‘채근담‘ 에서 멈춰서 다 읽고 감사한 마음에 흔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링크를 알게되었지만, 기억해 두었다 보고 싶을 때 또 오겠습니다.

2020-06-13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