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몇몇은 이 소설을 한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지 싶다. 그만큼 강렬하고 생생하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고 나서 스크루지 영감을 까맣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작품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죽을 때까지 그 영감을 잊지 못하고, 더러는 해마다 그 구두쇠 영감을 떠올리는 사람도 더러 있으리라. 좋든 싫든 크리스마스는 매년 돌아올 테니까.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방금까지 그 책을 읽은 나로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스무남은 명쯤은 거뜬히 나열할 수도 있지 싶지만, 그 인물들을 굳이 여기에 옮겨 적지는 않겠다. 그런 짓은 이 글을 쓰는 목적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적지 않은 사람들은 내가 열거하는 그 인물들에 대해서 도리어 낯설게 여길 테니까.

 

아무튼, 어느 소설에서나 그렇듯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유독 마음씨가 비단결 같이 고운 처녀도 몇몇 있고, 칼날 같이 날카로운 성격을 지닌 못 된 여자도 있기 마련인데, 그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에밀리와 로사 다틀이다.(이 두 인물은 다른 글에서도 이미 다뤘지만 다시 또 불러냈다.)

 

에밀리는 비록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라나지만, 친아버지처럼 사랑을 듬뿍 쏟아붓는 외삼촌 페거티 아저씨의 따스한 보살핌 덕분에 티없이 밝고 예쁘게 자라난다. 처녀가 되어 읍내 자그마한 옷가게에 취직을 해서도 타고난 눈썰미와 몹시 아름다운 용모 덕분에 이웃 마을 여자들이 미친 듯이 시샘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때부터 페거티 아저씨네가 살고 있는 바닷가 마을로 가끔씩 놀러 온 적이 있었던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바닷가 마을 야머스로 놀러 온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런던에서 취직 자리를 알아보는 동안에 잠깐 짬을 낸 것이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고 런던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어릴 적 학교 동창생이자 옥스퍼드를 졸업한 귀한 집 외아들인 스티어포스와 함께였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친구 따라 바닷가 마을을 찾은 스티어포스는 남몰래 에밀리의 미모에 반하게 되고, 런던으로 되돌아간 뒤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기어이 일을 저지른다. 에밀리는 이미 페거티 아저씨와 함께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우직하고 성실한 청년 햄과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으나, 스티어포스가 하인인 리티머를 몰래 그 마을에 들여보내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기는 통에, 순진했던 에밀리는 헛바람에 부푼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런던내기 미남 청년인 스티어포스에게로 마음이 기울고 만다.

 

자신의 장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아름다운 처녀의 미모에 반해 천한 신분의 바닷가 처녀와 함께 무작정 도망길에 오른 스티어포스는 자신의 애인을 데리고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를 전전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고, 하루 아침에 조카딸을 잃은 페거티 아저씨는 에밀리를 찾아 나폴리까지 쫓아가 보지만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한다. 끔찍히 아끼던 에밀리를 잃고 나서 고향의 바닷가 마을을 떠나 런던에 올라온 페거티는 극심한 상실감을 달랠 길 없이 밤낮으로 시내를 전전한다. 이제나 저제나 에밀리를 찾을 날만 기다리면서.

 

여기까지가 대략 1010쪽 분량의 기나긴 소설 가운데 540쪽까지의 이야기 전개이다. 그 이후에도 에밀리와 스티어포스의 소식은 드문드문 들려 오지만 좀체로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별로 없고, 결국 나중에 그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이야기만 들릴 뿐이었다. 조카딸 에밀리를 찾아 아무런 기약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던 페거티 아저씨는 간혹 런던 시내를 떠돌다가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마주치기도 하지만 둘 모두 에밀리에 대해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하는데... 그 와중에 데이비드는 에밀리가 바닷가에 살 때 돈을 꾸러 찾아 왔던 처녀 시절 친구인 마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어쩌면 마사 덕분에 에밀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한가닥 새로운 희망이 이때부터 다시 살아난다...

 

이렇게 해서 소설은 다시 '팽팽한 긴장 국면'에 돌입하는데... 어느날 문득 마사가 데이비드를 찾아와 '함께 어딜 가자'고 앞장 선다. 먼저 페거티 아저씨한테 소식을 알리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쪽지만 남겨 놓고 왔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해서 데이비드는 마사와 함께 허름한 변두리 주택가에 살고 있는 '마사의 방'까지 찾아가는데... 거기서 엉뚱하게도 '로사 다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로사 다틀이 어떤 여자였던가.

 

그녀의 '특징'을 제대로 알려면 우리는 번거롭더라도 이 소설의 336쪽(<20장 스티어포스의 집>)으로 한번쯤 되돌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게 좋다. 그녀에 대한 기가 막힌 묘사는 다시 읽어도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식당에는 다른 부인이 있었다. 가냘프고 자그마했으며 피부가 검고, 시선을 사로잡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예쁘장하게 생긴 부인이었다. 나의 관심은 그 부인에게로 쏠렸다. 아마 뜻밖에 만났기 때문이거나, 그 부인 맞은편에 앉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 부인이 독특한 그 무엇을 지녔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부인은 검은 머리채에 눈동자도 깊고 검었으며, 야위었고, 입술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오래된 상처였다. 상처 색깔이 피부색과 다르지도 않았고 오래전에 아물었으므로, 상처라기보다는 주름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입술에서 턱까지 찢어진 상처임에는 틀림이 없고, 단지 지금은 모양이 조금 달라진 윗입술 주위를 제외하면, 식탁 너머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그 부인이 나이는 서른 살가량이고,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라고 결론을 내렸다. 부인은 오랫동안 비어 있던 터라 조금 낡은 집 같아 보였지만 제법 예쁘장했다. 그 부인이 야윈 것은 그 몸 안에서 헛되이 불이 타오른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 불은 그 부인의 위태로운 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 부인은 미스 다틀이라고 소개되었지만 스티어포스와 그의 어머니는 로사라고 불렀다. 미스 다틀은 이 집에서 살며, 스티어포스 부인의 오랜 친구였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생각한 것을 절대로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멀리 에둘러서 말하다 보니 어쩐지 무게 잡는 것 같았다.(336∼337쪽)

 

 

로사 다틀을 더 자세히 소개하기 위해서는 몇 쪽 뒤에 나오는 짧은 대화도 놓칠 수 없다. 그녀는 무엇이든 '숫돌'에 대고 뾰족하게 갈아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나는 스티어포스가 농담을 했거나, 아니면 미스 다틀의 속내를 이끌어내게 하려고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가버리고 우리 둘만 난롯가에 앉았을 때, 나는 스티어포스가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다만 미스 다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대단히 영리한 여자 같은데?" 나는 오히려 되물으며 말했다.

 

"영리하다고? 그 여자는 무엇이든 숫돌에 대고 뾰족하게 갈아야 직성이 풀리거든. 요 몇 년 동안 자기의 얼굴을 뾰족하게 갈아온 것처럼 자기 자신을 날카롭게 갈아버렸지. 온몸이 칼날 같은 여자야."

 

"그건 그렇고 그 여자 입술 위의 상처가 굉장하던데!"

 

스티어포스는 고개를 숙이고 잠깐 말을 삼켰다.

 

"사실은 말이야. 그 상처는 내가 냈어."

 

"무슨 불행한 사고라도 있었어?"

 

"아니야, 내가 어렸을 때, 그 여자가 약을 올려서 내가 망치로 때렸어. 그때의 나로 말하면 장래가 촉망되는 천사와도 같은 아이였지!"(339쪽)

 

 

이제 다시 에밀리를 만나기 위해 '로사 다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마사의 방'으로 되돌아갈 차례다. 과연 거기서 에밀리를 만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녀의 행방을 오랫동안 알 수 없어서 참으로 답답했던 차였다.

 

 

"저라고요?" 조용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에밀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요." 미스 다틀이 대꾸했다. "난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당신은 이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그 얼굴이 부끄럽지도 않나요?"

 

그녀의 단호하고 가차없는 증오에 찬 말투,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를 듣자, 지금 그녀가 밝은 곳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 눈앞에 그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번쩍이는 검은 눈동자와 분노에 떠는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그녀의 입술을 가로지르는 흰 흉터가 말할 때마다 움찔거리며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난 제임스 스티어포스의 혼을 뺀 여자, 남자와 달아나서 고향의 천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여자ㅡ제임스 같은 사람의 상대라기엔 너무도 뻔뻔하고 교활한 여자가 대체 어떻게 생겼나 알고 싶어서 왔어요."

 

모욕적인 언사를 뒤집어쓴 그 불행한 아가씨가 문 쪽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욕설을 퍼붓던 자가 재빨리 그 앞을 가로막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서 얼마 동안 침묵이 뒤따랐다.

 

미스 다틀은 이를 악물고 발을 구르며 말했다.

 

"거기 있어! 그렇지 않으면 이 집과 온 동네에 네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테야! 네가 나를 피해 달아나려고 한다면 머리채를 휘어잡고 돌멩이 세례를 받게 해줄 것이야!"

 

겁에 질려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 대화를 어서 끝내주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과연 내가 나서도 좋을지 자신이 없었다. 지금 나서서 에밀리를 구해줄 사람은 오직 페거티 씨뿐이었다. 그는 오지 않는 것일까? 나는 초조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제야 찾았어!" 로사 다틀은 경멸하듯 웃으며 말했다. "연약하고 수줍은 체하고, 고개 숙여 내숭떠는 모습에 속아 넘어가다니, 제임스도 참 가엾기도 하지!"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에밀리는 애원했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딱한 저의 내력을 알고 계실 테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저를 살려주세요. 당신도 구원을 받고 싶으시다면!"

 

"뭐, 구원을 받고 싶다면이라고! 잘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내가 너와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단 말이야?" 미스 다틀이 불같이 화를 냈다.

 

"같은 여자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에밀리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같은 천한 계집이 말은 잘하는구나! 설사 내 가슴에 너에 대한 멸시와 혐오감 이외에 다른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네 그 한마디로 꽁꽁 얼어붙고 말거다. 같은 여자라구? 참 명예롭기도 하겠구나!"

 

"무슨 말씀을 하셔도 좋아요." 에밀리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서운 일이에요! 부탁이에요, 제가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으며, 얼마나 괴로운가를 생각해주세요. 아, 마사, 돌아와줘요! 아, 돌아와요, 제발 돌아와요!"

 

미스 다틀은 문에서 보이는 곳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에밀리가 자기 방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말을 잘 들어! 그런 수법은 네 봉한테나 쓰도록 해. 눈물 따위로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봐야 네 미소로 날 매혹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소용없어. 이 돈에 팔린 노예야!"

 

"아, 제발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에밀리는 말했다. "제발 저를 동정해주세요. 아니면 전 아마 미쳐서 죽을지도 몰라요."

 

"그래 봐야 네가 지은 엄청난 죄에 비하면 대단한 참회도 아니야." 로사 다틀은 말했다. "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있니? 네가 엉망으로 망쳐놓은 가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아, 밤이고 낮이고 그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에밀리는 말했다. 이때 그녀의 모습이 슬쩍 보였다. 무릎 꿇고 고개를 뒤로 젖혀 핏기 없는 얼굴로 상대를 계속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친 듯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빌었고, 머리카락이 양쪽 어깨를 가득 덮고 있었다. "자나깨나 그 집이 제 눈앞에 떠오르지 않은 적이 없어요. 제가 영원히 등을 돌리고 나온 그 모습 그대로의 집! 아, 집, 집! 아, 그립고 그리운 아저씨! 제가 타락한 뒤에도, 저에 대한 아저씨의 사랑 때문에 제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가를 아신다면 아무리 저를 사랑하셨다 해도, 그렇게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제게 표시하시지는 않았을 거예요! 분명 일생에 한번쯤은 제게 화를 내셨겠죠. 그렇게 해주셨더라면 오히려 제게 위안이 되었을 텐데! 아아, 저는 너무 괴로워요. 모두들 저에게 너무 잘해주시기만 하시는 걸요!" 에밀리는 로사 다틀의 옷자락을 잡고 필사적으로 애원하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오만한 모습 앞에 울면서 쓰러졌다.

 

로사 다틀은 동상처럼 꼿꼿한 자세로 에밀리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어지간히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면 아름다운 에밀리를 짓밟을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곽 물고 있었다. ㅡ나는 내가 생각한 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얼굴과 성격이 모두 이 표정 하나에 모아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 페거티 씨는 끝내 오지 않는 것일까?

 

"이 지렁이같이 천한 것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희 집이라고! 내가 네 집 따위를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는 줄 아니? 아니면 너 같은 천한 것의 집이 대단한 것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딴 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그것도 훨씬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손해일 뿐이야. 기가 막히는 구나! 넌 너희 집 상품의 일부에 불과한 거야. 그러니까 넌 너희 집 사람들이 취급하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고팔리고 한 거야."

 

"아, 그렇지 않아요!" 에밀리는 말했다. "저에 대해서는 무슨 말씀을 하셔도 좋아요. 그러나 당신 못지않게 훌륭한 우리 집 식구들에게 제가 하지도 않은 일로 치욕과 창피를 씌우진 말아주세요! 아무리 제가 미우셔도, 당신도 숙녀라면 조금 더 그 사람들을 존경해주길 바라요."

 

그러나 이러한 애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에밀리가 붙잡고 있는 치맛자락을 마치 더러운 것에 닿는 것처럼 끌어당기며 말했다.

 

"난 제임스의 집,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그 집에 대해 말하는 거야. 너는 귀부인인 어머니와 신사인 아들 사이를 갈라놓은 원흉이야. 하녀로도 써주지 않을 그런 집안에 슬픔을 안겨준 장본인이고, 분노와 한탄과 치욕의 원인이야. 물가에서 주워다가 한동안은 소중히 여겨졌겠지만 결국은 다시 본디 장소로 되던져진 이 더러운 계집!"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에밀리는 두 손을 꽉 맞잡고 외쳤다.

 

"그분을 처음 뵀을 때ㅡ아아, 차라리 그날의 태양이 영원히 떠오르지 않고, 내가 무덤으로 끌려가는 날에 뵈었더라면 좋았을걸!ㅡ저도 당신이나 다른 어떤 숙녀와도 다름없이 정숙하게 자랐으며, 당신 같은 숙녀들의 상대로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남성의 아내가 되기로 약속까지 했었습니다. 당신이 그분 댁에 살고 계시고 그분을 잘 아신다면, 연약하고 허영된 소녀에 대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가를 잘 아실 겁니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지만, 그분이 그 힘을 이용하여 나를 속였다는 것과, 제가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고, 그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은 모르더라도 돌아가실 때에는 분명 이 일로 괴로워하실 것입니다!"

 

로사 다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분누로 일그러진 험악한 얼굴로 에밀리를 때리려고 달려드는 바람에, 하마터면 나는 그들 사이에 뛰어들 뻔했다. 그러나 따귀를 때리려던 손은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덧없이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그녀는 증오를 드러내고 경멸과 분노로 치를 떨며 그대로 서 있었다. 이런 광경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임스를 사랑한다고, 네가?"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쳤다. 마치 이 가증스러운 계집을 찌를 흉기가 없는 것이 아쉬운 것처럼.

에밀리가 몸을 움츠려서, 내게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답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게 그 따위 말을 지껄여? 그 더러운 입술로? 어째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매질하지 않는 걸까? 내게 명령만 내릴 권한만 있다면, 이런 계집애는 때려 죽이게 했을 텐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섬뜩한 모습이 이어지는 한 모자걸이 하나도 안심하고 놓아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웃음을 터뜨리더니, 에밀리가 신과 인간들 앞에 놓인 치욕의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한 손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이런 계집이, 이 타락한 계집이 사랑이라니! 그리고 제임스에게 사랑받았다니! 하, 하, 하! 얼마나 천한 계집인지 모르지만 그런 뻔뻔한 거짓말을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 비웃음은 노골적인 분노보다도 더 질이 나빴다. 나 같으면 차라리 후자 쪽이 더 참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분노를 쏟아낸 것은 아주 잠깐 뿐이고, 그 뒤로는 곧바로 화를 억누르며,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는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다.

 

"순수한 사랑의 옹달샘 같은 소리를 지껄이지만, 내가 여기 온 것은, 처음에도 말했듯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여자인지 보고 싶어서야. 정말 궁금했거든. 이젠 소원이 풀렸어. 그리고 이제 넌 서둘러, 너를 기다리고 있는, 네가 돈만 들고 가면 기뻐할 식구들 품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돈이 다 없어지면, 또 믿든 사랑을 하든 마음대로 해! 난 너라는 인간을 수명이 다 된 고장난 장난감, 한때는 금박을 둘렀지만 지금은 버려진 장난감이라고만 생각했어. 그런데 네 얘기를 들으니 넌 진짜 금, 진정한 숙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독한 꼴을 당했지만 지금도 영원한 사랑과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는 걸 알겠구나. 보고 있으면 그런 면이 없지도 않고, 네 얘기와도 잘 들어맞으니까! 그러니 몇 마디 더 해야겠으니 잘 들어. 나는 한다고 하면 반드시 실천에 옮기니까. 이봐, 아가씨, 듣고 있어? 난 입 밖에 낸 말은 꼭 실천한다고!"

 

그녀의 분노가 한순간 다시 끓어올랐으나 이내 경련처럼 얼굴을 스쳐가고 미소를 되찾았다.

 

"어디로든 몸을 감추도록 해."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집이 아니더라도 어디로든,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아무도 모르게 숨어 살아ㅡ아무도 모르는 새에 죽어버리면 더욱 좋지만. 네 그 사랑의 심장이 이대로 사그라지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 잠재우는 방법을 모르는 쪽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그런 방법이 있다는 말은 나도 들은 적이 있으니까,ㅡ 아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에밀리의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미스 다틀은 말을 멈추고, 음악을 듣는 것처럼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성질이 묘한 탓인지도 모르지만, 난 네가 마시고 있는 공기 속에선 마음껏 숨을 쉴 수가 없어, 병에 걸릴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청소를 하려는 거야. 여기서 나가도록 해. 만일 네가 내일도 여기에 살고 있다면, 난 네 이야기와 네 품행을 적어서 이 공동 계단에 붙여놓겠어. 이 공동 주택에도 점잖은 부인네들은 제법 있는 것 같은데, 아무도 네 얘기를 모른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야. 아니면 여길 나가서 이 런던 어딘가에 숨을 생각이니? 네가 어떤 여자인지 분명히 밝힌다면 나도 방해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는 즉시 또다시 같은 일을 할 거야. 얼마 전까지 네게 관심이 있었다는 한 신사의 도움이 있으니,ㅡ 그런 것쯤은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아아, 페거티 씨, 끝내 오지 않을 것인가? 나는 얼마나 더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얼마나 더 참고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아, 저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에밀리는 아무리 매정한 마음이라도 감동시킬 것 같은 구슬픈 투로 소리쳤지만,ㅡ 로사 다틀의 미소에는 아무런 용서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느냐고?" 다틀은 말했다. "넌 옛일이나 떠올리면서 즐겁게 살면 되는 거야! 제임스 스티어포스의 상냥함을 추억하며 깨끗하게 살아. 그는 너를 자기 하인(리티머를 말함)의 아내로 삼으려 했잖니? 아니면 너를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했던 그 정직한 하인에게 감사하면서 사는 것도 좋겠지! 너한테는 딱맞는 사내니까. 그런 자랑스러운 기억이나 네가 말하는 그 여자의 미덕인가 하는 것 덕분에 너도 세상의, 쓰레기 같은 사람들 눈으로 보면 제법 출세한 셈이야.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면 역시 리티머와 결혼하도록 해.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거야. 만일 어떻게도 할 수 없다면 죽는 게 나아! 절망하여 죽은 사람에게는 나갈 문과 쓰레기장이 있으니,ㅡ 그중 하나를 찾아 어서 빨리 하늘나라로 날아가버려!"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먼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틀림없었다. 그것은 그의 발자국 소리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미스 다틀은 이렇게 말하고, 내가 엿보고 있는 문 앞에서 움직여 사라졌다. "하지만 명심해 둬." 그녀는 방에서 나가려고 다른 문을 열면서, 천천히 그리고 준엄한 투로 말을 덧붙였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네가 미워. 그러니 내 손이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버리든지, 아니면 그 위선적인 가면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나는 반드시 널 내동댕이치기로 결심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야. 하지만 나는 말한 것은 꼭 실천한다는 것을 알아둬!"(824∼830쪽)

 

 

이만하면 다른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폭언의 홍수'가 아닌가? 어떻게 이런 정도로까지 심한 말을 끝도 없이 잘도 꾸며서 쏟아낼 수 있는지, 디킨스의 놀라운 입담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온갖 추악한 미투 폭로 사례'를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건 나만의 지나친 상상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도대체 에밀리가 무슨 크나큰 죄를 저질렀다고 이토록 끔찍한 비난을 받아야만 하는가.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피폐해진 자신의 삶만 해도 이미 추스리기 어려운데 여기에 더해 또다시 저토록 가혹한 '2차 피해'를 입어야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자란 환경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배운 지식이나 가진 재산이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어울리지 않는 남녀 사이에서 일어난 연애사건'이 문제가 될 때마다 왜 이토록 여자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온갖 심한 모욕과 가혹한 비난을 모조리 뒤집어써야만 할까.

 

최근에 폭로된 온갖 추악한 성추문 사건들에서도 '미스 다틀의 그림자'가 너무나 자주 얼씬거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피해자의 처절한 절규'조차도 따스한 손길로 보듬을 줄은 모르고, 도리어 야만스럽기 그지 없는 온갖 폭언과 비난을 쏟아부을까. 전쟁과 맞먹을 만큼의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은 피해자의 삶은 어찌 되든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숱한 '폭언들'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쓰라린 상처를 또다시 고통스럽게 헤집는지를 왜 헤아리지 못하는 걸까. 그들도 미스 다틀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숫돌에 갈아서' 기어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악다구니처럼 야만스럽게 피해자에게 달려들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다들 숫돌에 갈아서 자신이 뾰족해 질수록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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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이 글에서 로사 다틀의 폭언을 너무나 길게 인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장장 7쪽이나 되는 분량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폭언은 내용 못지 않게 분량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쏟아져 나온 미투 폭로 사례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의 죄악도 고려해서 말이다. 그들의 죄악이 분량이 너무 많다고 해서 일부러 사소한 부분들을 생략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거듭 느끼지만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소설이다. 분량이 많은 게 좀 흠이긴 하지만...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양적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장편소설이다. 아무리 세계 걸작으로 이름 높은 작품이라도 이 정도로 길면 두세 군데는 이야기가 느슨해지기 때문에, 독자는 지루해도 다음에 올 절정을 기대하며 꾹 참고 책장을 넘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러한 곳이 전혀 없다. 어느 부분을 골라 읽어도 독특한 재미가 있고, 계속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이야기에 이끌려가는 게 아니라 뒤쫓아 가는 것이다. 늘어지는 곳 없이 팽팽하게 조여진 소설, 이것이 이 작품이 많은 독자를 사로잡은 까닭이다. 인생의 고뇌와 비통을 날실로 삼고, 오락성과 환희를 씨실로 삼아 작품 전체를 옹골지게 엮어냈기 때문이며, 눈물과 더불어 웃음이 절묘하게 얽혀서 혼연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1109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 생애와 문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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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23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쟝 크리스토프」를 읽었을 때 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데이비드 코퍼필드」역시 이에 못지 않은 장편인 것 같습니다. 배우가 영화에서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몇 달씩 고민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와 같은 작품을 쓰는 작가는 대체 얼마나 변신을 거듭해야할지 상상이 안가네요... 더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치밀하지 않으면 캐릭터가 붕괴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디킨스라는 작가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oren 2018-03-23 21:22   좋아요 2 | URL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쟝 크리스토프」를 살펴보니 1,2권 합해서 1,725쪽이나 되는군요.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다행히(?) 그 정도로 길진 않네요.

동서문화사 월드북 판은 판형도 같고, 글자 크기도 같고, 1페이지에 30줄씩 인쇄되어 있어서 작품의 ‘분량‘을 서로 비교하기 좋은 듯합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까라마조프 형제들』이나 『돈키호테』와 분량이 엇비슷한 분량의 소설로 판단하면 좋을 듯합니다. 궁금하기도 해서 ‘동서문화사 판형‘으로 나온 몇몇 책들의 쪽수를 상호 비교해 봤더니 대략 다음과 같네요.
* * *
『데이비드 코퍼필드』 1,010쪽
『까라마조프 형제들』 1,158쪽
『돈키호테』 1,263쪽
『몽테뉴 수상록』 1,260쪽
『전쟁과 평화』 1,656쪽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924쪽

겨울호랑이 2018-03-23 21:33   좋아요 0 | URL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역시 분량면에서 압도하는군요! ^^:) 그래도 이 책은 옴니버스식 구성이라 장편이라 보긴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전쟁과 평화」도 분량은 만만치 않네요. 분량도 그렇지만, 유기적인 작품의 구성을 살펴보면 대가들의 작품은 역시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oren 2018-03-23 22:42   좋아요 1 | URL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로 나온 책들을 기준으로 다른 작품들을 조금 더 추가해 봤습니다.
물론 해설을 제외한 ‘순수한 작품의 분량‘만을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일부러 비소설 분야도 추가해 봤습니다. 두껍기로 소문난 책들 중심으로요.
저는 이 가운데 딱 13권 읽었네요.. 완역본 기준으로요.
안 읽은 책들을 보니 하나같이 이름난 명작들뿐이네요..
02, 07, 09, 15, 16, 18, 20, 21, 22.... ㅠㅠ

* * *

01.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______________560쪽
02.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_______________ 648쪽
03. 허먼 멜빌,『모비딕』_______________________738쪽
04. 헤로도토스, 『역사』_______________________764쪽
05. 토마스 만, 『마의 산』________________________898쪽
06. 단테, 『신곡』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980쪽
07. 찰스 디킨스, 『황폐한 집』_____________________985쪽
08. 아담 스미스, 『국부론』_______________________996쪽
09.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__________________1,006쪽
10. 찰스 디킨스,『데이비드 코퍼필드』____________ 1,010쪽
11. 도스토예프스키,『까라마조프 형제들』___________ 1,158쪽
12.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_____________________1,200쪽
13. 세르반테스,『돈키호테』________________________ 1,263쪽
14.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_______________________ 1,260쪽
15. 무라사키 시키부, 『겐지 이야기』___________________1,405쪽
16. 알렉상드르 뒤마,『몬테크리스토 백작』_______________1,533쪽
17.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_____________________ _______1,656쪽
18.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___________________________1,725쪽
19.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_____________________ 1,924쪽
20. 미하일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____________________________1,964쪽
21.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36쪽
22.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3,272쪽

겨울호랑이 2018-03-23 22:24   좋아요 0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분량면에서 단연 많군요... 에고 저는 말씀하신 책중에서 1/4정도만 읽어본 듯 합니다...ㅜㅜ 저야말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oren 2018-03-23 22:46   좋아요 1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웬만한 책 열 권 내지 스무 권과도 맞먹는 분량이니,
단번에 깔끔하게 해치우자면 ‘상당한 준비 운동‘ 혹은 ‘단단한 중무장‘이 필요하지 싶습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 독자가 흔히 겪게 되는 가장 놀랍고도 다채로운 경험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감정이입'이 아닐까 싶다. 숱한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인공들과 주변 인물들을 만날 때마다 독자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설 속 상황' 속에 '자신이 겪은 경험'을 대입시킨다. 그럴 경우에 독자들이 저마다 소설 속에 이입시키는 감정들이 얼마나 각양각색일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다. 왜냐하면 아무리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독자들이 저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유일하고 독특한 경험만큼은 결코 남들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감정이입'이 매우 비슷하게 나타날 만한 드문 예외가 있다면 과연 어떤 경우일까?

 

만약에 어떤 특정한 시기에 몇몇 독자들이 어떤 특정한 작품을 거의 동시에 읽는 경우가 있다면, 그들은 비록 서로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약간이나마 서로 비슷한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어떤 강렬한 충격을 던져 주는 놀라운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와서,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이 한동안 그런 사건들에 지배당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럴 경우라면 아마도 몇몇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읽고 있는 어떤 특정한 작품 속에서 '비슷한 감정이입'을 느끼는 아주 특이한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독자들이 저마다 겪은 삶의 경험들이 비록 아무리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이런 희안한 상상을 하게 된 까닭은 바로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는 도중에 경험한 '다소 기이한 감정이입' 때문이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떤 기묘한 '연애 사건'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어느 유명한 미투 사건'을 떠올렸는데, 만약에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더라도) 나와 똑같이 이 소설을 읽은 독자가 나 말고도 몇 사람쯤 더 있었더라면, 그 사람도 틀림없이 나와 비슷한 '감정이입'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흥미진진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최근의 미투 사건 당사자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어찌 그리 쏙 빼닮았는지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이왕 얘기가 여기까지 나왔으니 내가 적잖은 놀라움을 가지고 '거듭' 읽었던 그 대목을 여기에 잠깐 소개해 보고 싶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연애 사건'은 예로부터 너무나 자주 다뤄지는 몹시도 전형적인 '연애 사건'이기 때문에 '서로의 속사정'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사건의 개요는 대략 이렇다.

 

여자 주인공인 에밀리는 청순 가련하면서도 몹시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지만,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배운 거나 가진 게 거의 없는 시골 처녀이다. 남자 주인공인 스티어포스는 어릴 때부터 홀어머니가 온갖 정성을 다 쏟아 키운 훌륭한 집안의 귀한 자식이다. 옥스퍼드를 졸업했을 정도로 두뇌도 명석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 품성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서 장래가 몹시 촉망되는 젊은이다.

 

어릴 때 같은 학교에서 동창생으로 함께 어울려 지냈던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어느 날 스티어포스와 함께 시골 바닷가로 2주일쯤 여행을 가게 되고, 거기서 두 사람은 데이비드의 어릴 적 유모였던 페거티 양의 오빠네 식구들과 함께 어울려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선원으로 일하는 페거티 씨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던 에밀리(매형의 딸)와 햄(형의 아들), 그리고 동료 선원의 미망인인 거미지 부인과 함께 넷이서 바닷가에서 '배로 만든 집'에서 함께 살면서 너무나 행복하게 오손도손 지내던 터였다.( ☞ "디킨스 소설속 거미지부인 닮아가지만"…하퍼 리 편지 사후공개)

 

에밀리는 꼬마일 때부터 너무나 예쁜 모습이어서 페거티 씨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이따금씩 페거티 씨네 뱃집으로 여행을 왔던 데이비드 코퍼필드까지도 그녀에게 첫눈에 홀딱 빠질 정도였다. 차츰 나이가 차게 되자 에밀리는 우직하고 믿음직스런 총각인 햄을 사랑하게 된다. 그와 함께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밀 생각만으로 들떠 있던 에밀리의 얼굴에 언제부턴가 알 수 없는 희미한 옅은 그늘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녀는 어느 날 하루 아침에 홀연히 바닷가 마을에서 사라지고 만다! '편지 한 장'만 딸랑 남긴 채.(☞ 꼬마 에밀리, 잊을 수 없는 첫 사랑 - 데이비드 코퍼필드...)

 

자초지종을 알아본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런던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함께 시골 바닷가로 놀러 왔던 스티어포스가 런던으로 되돌아간 이후, 아무도 몰래 자신의 충직한 하인을 시켜 바닷가 마을에 몰래 남아 에밀리를 꼬드겼던 행적이 밝혀졌고, 처녀 에밀리가 동네에서 사라진 날 아침에 바로 그 하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바닷가를 급히 떠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도 있었다. 에밀리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햄의 충격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친딸처럼 몹시도 아끼고 사랑했던 페거티 씨도 비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작정 조카딸 에밀리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고, 이내 데이비드와 함께 런던에 있는 스티어포스네 집까지 직접 찾아가게 된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부인?" 페거티 씨는 조용한 투로 천천히 반박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부인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애가 지금의 백배쯤 더 귀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제가 이보다 더 그애를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부인께선 모르십니다. 이 세상의 온갖 재물도(비록 저한테는 그런 것이 없지만) 그 애를 다시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 불명예스러운 일에서 그 애를 구해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다시는 그 애를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애를 고이고이 길러 왔습니다. 십몇 년 동안 함께 살면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보듬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애의 아름다운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대로 헤어져서, 머나면 다른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기꺼이 그 애를 남편에게ㅡ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ㅡ맡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하느님 앞에서 위아래 구분 없이 살 수 있는 날을 꾹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세련됐다고는 할 수 없는 그의 능변이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인은 여전히 거만한 태도를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한 가닥의 부드러움이 엿보였던 것이다.

 

"나는 둘러댈 이유도 없거니와, 당신의 말을 반박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절대 안 된다고 거듭 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결혼은 우리 아이의 일생을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쳐 놓을 것이며, 그 애의 앞길을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달리 보상할 방법이 있다면 하겠습니다만ㅡ"

 

"아아,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군요." 페거티 씨는 불꽃이 이는 눈으로 뚫어지게 부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 집 난롯가에서, 그리고 내 배에서 곧잘 보았던 그 얼굴과 똑같군요. 끔찍한 배신을 꾸미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미소 지으며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 얼굴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남의 집 처녀를 타락시켜 망쳐놓고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얼굴만 똑같은 게 아니라 성격도 똑같군요. 아니지, 여자이니만큼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겠군요."

 

부인의 태도는 갑자기 변했다. 그녀의 온 얼굴이 노기로 가득 차면서,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두 손으로 안락의자를 꽉 붙잡으며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나와 내 아들 사이에 이토록 깊은 수렁을 파놓고, 내게 어떻게 보상하실 생각입니까? 당신의 사랑 따위가 내 사랑에 비교나 될 줄 아십니까? 당신이 그 애와 헤어진 것이, 내가 우리 아이와 헤어진 것에 비교해 무엇이 대수라는 겁니까?"

 

미스 다틀이 뒤에서 부인의 몸에 살며시 손을 대고 머리를 숙여 소곤거렸으나 부인인 한 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로사.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이 사람에게 내 뜻을 알려 줘야 해요! 잘 들어요. 내 아들로 말하자면 내 삶의 전부예요. 나는 그 아이만 바라보고 살아왔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 애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으며, 그 애가 태어난 뒤로는, 말하자면 일심동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그 애가 순간이나마 보잘것없는 계집애와 눈이 맞아서 이 어미를 버리다니! 그깟 계집애 때문에 이토록 굳건한 어미의 믿음을 거역하고, 내 곁을 떠나다니! 나는 내 아들에게 어미에 대한 의무와 사랑, 감사하는 마음을 갖길 기대했었어요. 그 아이와는 소원해지기는커녕 날로 돈독해져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끊어지지 않을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고요! 그런데 그것이 이런 볼썽사나온 연애문제로 단박에 파탄나다니! 그런데도 내가 피해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다시금 로사 다틀이 부인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안 돼, 로사. 한 마디도 하지 마! 그 하찮은 계집애 때문에 그 애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자 한다면, 나도 더 큰 목적을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 수 있어. 내가 사랑하므로 물려준 재산을 가지고 그 애가 어디론가 가겠다면 멋대로 해도 좋아!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꺾일 줄 알고? 천만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애는 이 어미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그 애가 마음을 바꾼다면 내 기꺼이 그 애를 맞아주겠어. 그러나 그게 싫다면 그 녀석이 살아서 돌아오든 죽어서 돌아오든 이 집에는 절대로 들이지 않을 거야. 그 천한 계집애와 영원히 헤어져서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못 돌아오는 거야. 이것은 어미의 권리이니 절대 양보할 수 없어.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도 이것만은 분명히 해 두겠어!" 처음 만났을 때의 거만하고 단호한 태도로 우리를 쏘아보며 덧붙였다. "이래도 내가 피해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부인의 이러한 말을 들으며 그 태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어쩐지 그 어머니에게 대드는 아들의 말과 표정이 선하게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스티어포스에게서 보아온 고집 세고 방자한 모습이 부인에게도 그대로 있었다. 이상하게 비뚤어진 그의 정열을, 이제는 모두 이해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고스란히 그의 어머니의 성격이었다. 그 둘이 근본적으로는 하나라는 것도 알았다.

 

부인은 전과 같은 자제력을 되찾아, 더 들어도 소용없고 말해도 소용없으니 이것으로 면담을 끝내자고 말했다. 부인은 방에서 나가려고 위엄 있는 태도로 일어섰다.

 

그때 페거티 씨가 일어설 필요 없다고 말했다.

 

"더 이상 막지 않겠습니다. 저도 더 이야기할 것은 없습니다, 부인." 그는 문께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차피 희망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다만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집은 저나 제 조카딸에게는 몹시 유해하며, 제정신으로 무슨 부탁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나왔다. 스티어포스 부인은 안락의자 옆에 서 있었다. 과연 고귀해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돌바닥으로 된 홀을 가로질러 나갔다. 양쪽 벽과 지붕 모두 유리로 되어 있고, 지붕에는 포도송이가 매달려 있었다. 잎도 새싹도 푸르렀고, 마침 아주 맑은 날이었으므로 정원으로 이어진 유리문도 양쪽으로 활짝 젖혀져 있었다. 우리가 문 가까이 갔을 떄 로사 다틀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는 내게 말했다.

 

"저런 사람을 이곳에 잘도 데려왔군요!"

 

그녀의 얼굴빛을 흐리게 하고 그 검은 눈 속에서 반짝거리며 빛나는 분노와 비웃음으로 인해, 쇠망치에 맞아서 생긴 상처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전에도 보았듯이 상처가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느닷없이 손을 들어 그곳을 때렸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옹호하면서 이곳까지 데려올 수 있죠, 네? 정말 친절한 분이시군요!"

 

"미스 다틀," 나는 대꾸했다. "당신이 설마 나를 꾸짖는 건 아니겠죠?"

 

"그렇지만 당신은 어째서 그 광적인 모자 사이를 일부러 갈라놓으려고 하는 거죠? 그들은 둘 다 자기 고집과 자존심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세요?"

 

"그게 내 탓이란 말입니까?"

 

나는 대꾸했다.

 

"그렇고말고요! 왜 저 사람을 이리로 데려오셨습니까?"

 

"저분은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입은 사람입니다. 미스 다틀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물론 알고 있어요. 제임스 스티어포스는," 그녀는 손을 올려 가슴을 눌렀다. 마침 그곳에서 미쳐 날뛰는 폭풍우가 고스란히 목소리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마음보가 뒤틀린 잔인한 사람이에요. 성실치 못하고 퇴폐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배신자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저 사람이나 그 조카딸인가를 제가 염려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미스 다틀, 당신은 저분을 또 한 번 모욕하는군요. 상처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넉넉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 당신은 저분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두 사람 모두 타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인걸요. 그 계집을 흠씬 매질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페거티 씨는 아무 말도 없이 우리 곁을 지나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미스 다틀! 정말 너무 하십니다! 아무죄도 없이 지독한 일을 당한 저분을 당신은 어찌 그렇게 마구 짓밟을 수 있습니까!"(534∼538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이런 스토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TV 드라마에서 너무나 자주 봐왔기 때문에 새로울 게 별로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스토리에서 언제나 발견되는 변치 않는 '익숙한 구도' 하나가 새삼 눈에 밟힌다. 사건의 발단이자 원인 제공자는 언제나 남자 쪽에서 시작되고, 피해자 역할은 대체로 여자가 떠맡는 반면에, 정작 연애 사건이 문제가 되고 나서는 거의 언제나 남자 쪽에서 도리어 '하찮은 계집애 때문에' 피해를 보게 생겼다고 '남 탓'을 한다는 구도 말이다. 물론 가끔씩 여자가 남자를 꼬드기는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건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이런 구도에 놓인 남녀가 겪게 되는 갈등은 스토리 전개 과정이 너무나 뻔하다. 많은 걸 갖춘 쪽에서는 '남자의 앞길을 망치게 생겼다'느니 '크나큰 손해를 보게 생겼다'면서 길길이 날뛰고, 여자 쪽에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데도 도리어 무슨 '크나큰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이내 수세에 몰리거나 괜한 오해와 함께 턱도 없는 비난을 받기 쉽다.

 

따지고 보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잘못된 만남' 만큼 인간사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경우도 드물다. 저 까마득한 옛날에 벌어졌던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도 따지고 보면 트로이의 얼빠진 총각이 헬라스의 아름답기로 소문난 유부녀였던 헬레네를 납치했기 때문에 벌어진 대소동이었고, 셰익스피어의 비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상세히 다룬 '악티움 해전' 또한 로마의 유부남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돌싱녀 클레오파트라와의 '잘못된 만남' 때문이었다. 비록 남녀의 입장이 뒤바뀐 경우이긴 하지만 『오셀로』의 비극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나이도 많고 피부까지 검었던 용병대장 오셀로 보다는 베네치아에서 손꼽힐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녔던 데스데모나가 훨씬 더 갖춘 게 많았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때 무척이나 인기를 끌었던 불륜 소재 드라마인 《사랑과 전쟁》은 제목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자연스레 싹트는 진실된 사랑이 아닌, 언제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건 불륜이거나 가짜 사랑일 테니 말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잘못된 만남'이 세상을 얼마나 어지럽히는가를 이번 미투 사례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경우도 드물지 싶다. 미투 덕분에 하루 아침에 흉칙한 괴물로 둔갑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을 두고 시비곡직을 가려줄 사람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다만 '가짜 사랑'임이 이미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한사코 거기에 일말의 진실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온갖 가식과 허위를 거듭 덧보태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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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덤터기 인간

 

나는 흐린 겨울 날씨에도 혼자 좁은 진흙길을 따라 산책했다. 그런데 그때에도 머드스톤 남매가 있는 응접실의 무거운 분위기가 나를 짓누르며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딜 가든 지고 다녀야 할 커다란 짐이었으며, 깨어날 수 없는 한낮의 악몽이었고, 나의 슬기를 덮어버려서 둔하게 하는 무거운 굴레였다.

 

내가 얼마나 난처한 분위기에서 묵묵히 식사만 했던지! 나는, 식탁에 덤터기로 놓인 나이프와 포크가 있는데 그것이 내 것이고, 덤터기 의자와 접시가 내 것이고, 덤터기 음식이 내 것이고, 덤터기 인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라는 생각에 계속 시달렸다.(147쪽)

 

 

 

시계와 초조

 

시계를 제외하고는 그만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이 집 안에서 유일하게 초조한 존재로 보였다.(157쪽)

 

 

 

돌을 짠다고

 

"만약 채권자들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면, 멋대로 하라지. 뒷일은 나도 몰라. 소송을 걸 셈이라면, 그것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돌을 짠다고 피가 나오진 않거든.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남편에게는 재판 비용은 물론 한 푼도 나올 것이 없으니까."(189쪽)

 

 

 

미코버 씨의 경제 철학

 

미코버 씨는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거울삼아서, 절대로 자기 같은 신세가 되지 말라고 근엄한 얼굴로 충고해 주었다. 만약 1년 수입이 20파운드인 사람이 19파운드 19실링 6펜스를 쓴다면 행복할 테지만, 21파운드를 쓴다면 비참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 뒤에 그는 나에게서 흑맥주 값으로 1실링을 빌렸다.(197쪽)

 

 * *

 

"코퍼필드, 하나 더 충고할 것이 있어." 미코버 씨가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한 해 수입이 20파운드인데, 지출이 19파운드 19실링 6펜스면 결과는 행복이고, 한 해 수입이 20파운드인데, 지출이 20파운드 6실링이면 결과는 비참하지. 꽃은 시들고, 잎은 마르고, 태양은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ㅡ 넌 꼼짝 못하게 된단 말이야. 지금의 나처럼!"(207쪽)

 

 

빚 중독증

[강원포럼]경제 위기와 가계부채

 

 

 

 

 

 

연약한 젖니가 치과의사 앞에서

 

그러나 나는 우라이아와 힙 부인에게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치 코르크 뚜껑이 코르크 마개뽑이에 대해, 연약한 젖니가 치과의사 앞에서, 또 베드민턴공이 배드민턴 채에는 아주 무력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렸다. (297쪽)

 

 

 

숫돌에 대고 뾰족하게 갈아야

 

"대단히 영리한 여자 같은데?" 나는 오히려 되물으며 말했다.

 

"영리하다고? 그 여자는 무엇이든 숫돌에 대고 뾰족하게 갈아야 직성이 풀리거든. 요 몇 년 동안 자기의 얼굴을 뾰족하게 갈아온 것처럼 자기 자신을 날카롭게 갈아버렸지. 온몸이 칼날 같은 여자야."(339쪽)

 

 

 

삶은 조개

 

"만약 이 밤이, 내 평생의 가장 즐거운 밤이 아니라면, 나는 조개나 마찬가지예요. 그것도 삶은 조개. 더 말하지 않겠어요." 페거티 씨는 우리와 함께 난롯가에 앉으면서 스티어포스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무튼 저 꼬마 에밀리는 보시다시피 부끄럼쟁이라서요."(359쪽)

 

 

 

가족적인 나약함과 다감함

 

아침에 눈을 뜨자 나는 꼬마 에밀리가 어제 저녁 마사가 떠난 뒤 슬퍼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어떤 성스럽고, 서로 마음을 허락한 사이에 나타나는 이른바 가족적인 나약함과 다감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그것을 남에게 얘기하면 상대가 스티어포스라고 해도 안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나는 에밀리에게 쏟았던 다정한 마음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품은 적이 없었다. 한때는 소꿉친구요, 또 그때는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으며, 죽는 날까지도 그러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392쪽)

 

 

 

아늑하고, 나른하고, 구식이고,

 

이곳의 고요한 적막을 깨는 것은, 난롯불 타는 소리와 증거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사이를 박사들이 느릿느릿 누비다가, 여행길에 오른 바쁠 것 없는 나그네가 길가 술집에서 쉬어가듯이, 걸음을 멈추고 서로 뭐라곤가 말하는 소리뿐이었다. 요컨대 내 평생에,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어느 조그마한 가족 파티에서도 이처럼 아늑하고, 나른하고, 구식이고, 시간관념을 저버린 졸음 쏟아지는 분위기에 젖어 본 적은 없었다. 당사자인 원고만 아니라면, 어떤 역할로든 이런 사람들의 동료가 된다면 참 좋을 것이며, 마치 아편에 취한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다.(404쪽)

 

 

 

은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툭하면 매우 자랑스럽게 "그럼, 그럼" 하고 말하면서 만족스러워하는 워터브룩 씨의 태도가 나한테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정말 의미 있는 '그럼, 그럼'이었다. 곧 은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생의 성공 사다리는 가지고 태어나서, 한 걸음씩 밟고 올라가 마침내 성벽 꼭대기에 서서 까마득한 아래, 여전히 참호 속에서 밀치락달치락하는 사람들을 마치 철학자나 보호자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는, 그런 사람의 사고를 유감없이 드러낸 '그럼, 그럼'이었던 것이다.(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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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 아내와 함께 TV 뉴스를 보다가 '참으로 이상한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발단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TV 앞에서 잠깐 나눈 대화의 촛점만은 아주 간단했다.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TV 뉴스를 보면서 이런 얄궂은 질문을 떠올린 건 물론 '미투 열기' 때문이었다.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양상'이 너무나 비슷했다. 미투에 엮인 사건들마다 '가해자의 주장'과 '피해자의 주장'이 정반대로 달랐다. 심지어는 미투와 아무런 관련조차 없는 '미투 가해자의 절친'마저 엉뚱한 문제로 뉴스에 뒤섞여 등장했다. 그 사람이 하필이면 미투 가해자가 오랫동안 도지사로 근무했던 바로 그 지역의 '도지사 후보'로 출마하는 바람에, 애먼 가해자(?) 측과 엉뚱한 문제로 연일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피해자의 주장과 가해자의 주장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 중인 사건은 물론 2011년 12월 '어느 날' 여의도의 모 호텔에서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성추행 피해 사건'이었다. 마침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서울시장 예비 후보 출마 선언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사건'이 폭로됐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느닷없이 터져나온 '7년 전 성추행 사건'을 두고 양 쪽은 연일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 낮에 발표된 가해자의 '최신판 반박 회견'에는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데 충분해 보일 만한 '사진 증거물'까지 제시했다. 그 바람에 이제는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훨씬 더 명백해졌다. 어쨌든 가해자는 23일이든 24일이든 '여의도의 모 호텔'엔 아예 가지도 않았다고 딱 잡아떼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녁 뉴스를 보는 와중에도 어느새 '새로운 증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자막'으로 지나갔다. 자신이 직접 가해자와 함께 23일 오후에 그 호텔에 갔었다는 내용이었다. 새로 등장한 증인의 주장도 꽤나 놀라웠지만 저녁 늦게 등장한 '피해자의 새로운 반박문'은 더욱 놀라웠다. 그 두 사람의 주장만 들어보면 가해자가 주장하는 '피해자가 꾸민 대국민 사기극'이야말로 진짜로 '대국민 사기극'이 틀림없어 보일 정도였다.

 

어쨌든 '진실은 하나'일 수밖에 없고, 결국 저 '위대한 판관'인 시간이 다 해결해 줄 테니, 관전하는 사람들로서는 그저 조금 더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겠다 싶다.(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이 사안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처음부터 오늘까지 한시도 '피해자의 주장'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의 확신은 오늘 가해자가 내세운 '이상하리만치 정확한 사진 증거물' 때문에 도리어 더 단단해졌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가해'한 사실이 아예 없었다면 굳이 저런 구차한 증거물까지 내세울 필요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튼 두고 볼 일이다.)

 

어쨌든 좋다. 여기서 다시 내가 내세운 나의 화두로 얼른 되돌아 오자.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TV 뉴스를 보다가 이 화두를 맨 처음 던진 사람이 나였는지 아내였는지조차 어느새 헷갈린다. 최근 며칠 동안에 보도된 여러 사건들이 우리 두 사람의 머리를 너무 뒤죽박죽으로 만든 탓일까. 아무튼 이런 화두가 아내와 나, 두 사람 가운데 한 쪽의 입에서 틀림없이 나왔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하다.

 

내가 '피해자의 주장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다음과 같은 가해자의 이상한 해명 때문이었다. 이런 해명이야말로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은 7년 전이고, 이 기억을 다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해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사건 당일을 전후한 여러가지 다른 일들은 아주 상세히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피해자와의 만남 여부'에 대해서만은 한사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투였다. 나에겐 이보다 더 강한 '거부 신호'를 보내는 해명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중요한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는 말일까.

 

과연 그럴까. 아무리 7년 전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하루 온종일 연속해서 일어났다면 그 기억이 결코 흐릿해질 리는 없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무심코 나의 옛 추억들을 무수히 다시 떠올리게 만든 '어느 소설가의 경우'가 생각이 나서, 그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불쑥 꺼내고 말았다.(마침 그 사람이 쓴 자서전 같은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도 열심히 읽는 중이었고, '기억의 메카니즘'이 사람마다 다른지 어떤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알랑가 모르겠는데... 영국의 어느 필담 좋은 소설가의 경우는 말이지...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자신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겪은 온갖 일들을 어찌나 생생하게 그려내는지, 까마득한 옛날 일들도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너무나 잘 그려놓았더라구. 표현들도 어찌나 놀랍던지, 읽는 내내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더라구..."

 

"그래?"

 

"그 작품을 읽는 동안에 나도 덩달아 무수히 많은 까마득한 옛날 일들을 아주 생생하게 다시 떠올릴 수 있었지.. 어느 겨울날, 양지 바른 햇살이 내리 쬐는 창고 같은 건물 벽면에 잔뜩 쌓아 놓은 짚더미 사이에 몸을 눕히고 볕을 쬐다가, 그만 꼬박꼬박 졸던 추억들 까지도.. 아무튼.. 온갖 등장인물들이 다들 어찌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지.... 문장들은 또 어찌나 기가 막히고 물 흐르듯 청산유수인지, 셰익스피어를 쏙 빼닮은 느낌이더라구......"

 

"그래? 그게 누군데?"

 

"혹시... 알랑가 모르겠는데... 찰스 디킨스라고 들어 봤어?"

 

"그 사람 알지.. 들어는 봤어.. 마침 어제 TV에도 나오던데? <서프라이즈>에서 말이야..."

 

"아니, 그 사람이 <서프라이즈>에 나왔단 말이야? 어떻게?"

 

"그렇다니까.. 무슨 무슨 드루드의 미스테리인가 하는 소설을 썼다고 하던데, 아직까지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하더라구... 그게 아마도 미완성인 추리소설이었다나 뭐라나... 작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는 통에 그랬다나 봐..."

 

햐~ 세상에 이런 기막힌 우연도 있구나 싶었다. 내가 요즘 한창 빠져서 읽고 있는 책이 바로 찰스 디킨스의 작품이었고, 그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서까지 '해설'까지 찾아 읽다 보니 어느새 그 작품의 '이름'을 나도 들어봤던 것이다. 아니다.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이라는 책을 어느새 실제로 구경했던 것이다. 그것도 바로 어제 말이다. 결국 어제 하루 동안에 아내는 집에서 TV를 통해 그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보았고, 나는 같은 날 동네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의 '실물'을 뒤적거리며 구경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우연도 있구나 싶었다.

 

"나도 사실은『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이라는 책을 알고는 있지... 그런데 그게 미완성인 추리소설이라는 정도만 알았지, 그 책이 국내에서 이미 번역까지 되어 나와 있을 줄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지. 마침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그 책을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왔었는데, 바로 그 책이 TV에 소개되었다니 정말 놀랍군...."

 

"그랬구나.."

 

아무튼 찰스 디킨스가 미완성으로 남긴 그 작품이 아직도 그토록 화제일 줄은 몰랐다. 뒤늦게 알고 보니, 그 작품을 두고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아직도 무슨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범인이 누군지만큼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도 드문데, 천재 작가인 찰스 디킨스가 바로 그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 놓았으니, 어찌 사람들이 스스로 '작가'가 되는 일조차 마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쨌든 '범인'은 기어코 찾아내야 할 테니.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시선강탈] ‘서프라이즈’ 지금까지 논란 중인 찰스 디킨스의 애드윈 드루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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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3-13 0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 책인데요, 일단 제목에 미스테리라는 말이 들어가면 관심이 증폭되어요. 더구나 oren님께서 이렇게 호기심이 가게 페이퍼를 올리셨으니...^^
저도 오늘 뉴스 기사 보면서, 고개를 갸웃갸웃했어요.

oren 2018-03-13 09:37   좋아요 0 | URL
최초에 폭로가 나올 때만 해도 ‘사건의 양상‘이 이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크게 변할 줄은 몰랐어요.

정의원의 주장대로, 애초에 ‘그 날‘ 여의도의 호텔에 가지도 않았다면, 왜 굳이 여러 사람들을 불러 놓은 ‘서울시장 예비 후보 출마 기자회견‘까지 부랴부랴 취소했을까 싶은 의문도 드네요.
 

 

나 오랜 세월을 귀가 먹고 눈이 먼, 그리고 벙어리가 된 불구자처럼 살아왔다. 권력을 추구하는 잡것, 글이나 갈겨 쓰는 잡것 그리고 쾌락이나 쫓는 잡것과 함께 살지 않기 위해서였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

 

틈날 때마다 들여다본 '뉴스'를 통해 알게 된 '미투 가해자'는 오늘까지 대략 얼마나 될까.

어디 한번 적어나 보자.

 

전 검사장 안태근, 고양지청 김某 부장검사,

수원교구 신부 한만삼, 성락교회 목사 김기동,

시인 고은, 연극연출가 이윤택, 극작가 오태석, 인간문화재 하용부, 극단대표 조증윤,

음악감독 변희석, 전 한예종 교수 김석만, 교수 겸 배우 故 조민기, 배우 조재현, 배우 오달수,

배우 최일화, 배우 한재영, 배우 최용민, 영화감독 김기덕, 만화가 박재동, 드러머 남궁연,

도지사 안희정, 국회의원 정봉주, 함평군수 안병호 등등등...

 

미투라는 이름으로 '나도 당했다'는 처절한 고백들이 터져 나온 이후로 아마도 오늘이 (잠정적으로는) '피크'가 아니었을까 싶다. 뉴스 시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미투 가해자들'로만 이어질 지경이었으니까. 오늘 아침에 나온 세계적인 뉴스조차 미투 관련 뉴스에 파묻힐 정도였고, 시덥잖은 뉴스들은 뉴스처럼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가증스런 인간들이 저지른 만행의 정도가 너무나 광범위하고 지속적이어서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미투 덕분에 평소에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인간들에 대해서 무수히 새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드러난 인물들만 해도 일일이 나열하기 벅찰 지경인데, 이 정도는 어찌 보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듯하다.(여의도에서는 조만간 메가톤급 미투 폭탄이 두엇 더 터져나올 조짐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추악한 악행들이 어찌 한꺼번에 수면 위로 다 드러날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여태까지 드러난 것만 해도 참으로 경악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피해자들이 절규하듯이 몸부림을 치며 한사코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데도 끝끝내 거짓말만 앞세우는 인간들을 보면 치미는 분노를 좀체로 억누르기 힘들다. 저들도 인간일까 싶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 부르기조차 싫다. 인간 쓰레기라 불려 마땅하지 싶다. 도대체 이 세상에 왜 태어났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신의 잘못조차 뉘우치지 못한다면 그런 인간들을 어찌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들도 분명 알고 있으리라. 비록 잠시나마 일부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자기 자신마저 속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기꾼에 비하면 이 세상의 다른 사기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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