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댓글로 달았다가 '인용문'이 너무 길어서 먼댓글로 다시 씁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 흔히들 느끼게 되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불편함‘을 미네 님께서 아주 자세히 피력해 주셨군요. 저도 그 소설을 읽을 때 그런 걸 느꼈는데 하물며 여성 독자들은 오죽하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었지요. 이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저는 ‘니체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져봤더랬습니다. 물론 그걸 말로 자세히 표현하기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요. 아무튼 카잔차키스는 그 자체로 ‘철저한 그리스인‘이었고, 특별하게도 ‘그리스인에 매우 정통했던 철학자 니체‘에 매우 심취했던 인물이었죠. 끝으로, 미네 님의 글을 읽는 동안에 제가 다시금 찾아 봤던 ‘니체의 말‘을 참고삼아 덧붙여 봅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여기에 있는 헤아릴 길 없는 대립과 그 영원히 적대적인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며, 여기에서 아마 평등한 권리와 교육,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이다. 이러한 위험한 장소에서 스스로 천박하다는 것을 ㅡ 본능에서의 천박함을! ㅡ 드러내는 사상가는 대체로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내고 폭로된 것으로 여겨도 될 것이다 : 아마 그는 미래의 삶을 포함한 삶의 모든 근본 문제에 너무나 ‘근시안적이며‘ 결코 어떤 심연으로도 내려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자신의 정신에서나 욕망에서도 깊이가 있고, 엄격하고 혹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것들과 쉽게 바꾸는 호의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남성은 여성을 언제나 동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여성을 소유물로서, 열쇠로 잠가둘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봉사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ㅡ 그는 이 점에서는 아시아의 거대한 이성의 편, 아시아적 본능의 탁월함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찍이 이러한 아시아를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자이며 제자였던 그리스인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여성에 대해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더욱 엄격해지고 간략히 말해 동양적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필연적이며, 논리적이고, 그 자체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었던가 : 이에 관해 우리는 스스로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8절


그리스인들 앞에 서면

"거기서 떠나지 말게, 그리스인들의 민족적 지혜가 말하는 것을 듣게나."

무엇이 디오니소스적인가?



 * * *


‘니체‘와는 또다른 측면에서 그리스를 깊이 연구했던 랄프 왈도 에머슨도 ‘그리스인의 남다른 특징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에머슨의 글을 읽는 동안에도 ‘크레테 사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금 떠올렸던 듯합니다. 인간의 본능에 가장 충실했으면서도 가장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인들이었고, 그런 삶을 ‘인류 역사상‘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인‘이었으니까 말이지요.


위로는 영웅시대 내지 호머시대로부터, 내려와서는 4,5세기 후의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의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시대에 걸치는 그리스의 역사 · 문학 · 예술 · 시가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느끼는 흥미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나가 몸소 그리스의 한 시기를 경과하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스적 상황이란 육체적 본성의 시대, 관능 완성의 시대이다. 정신적 본성이 육체와 엄밀하게 일치하여 나타난 시대이다. 거기에는 조각가에게 헤라클레스, 피버스, 조브의 모델을 제공한 것과 같은 그러한 인간의 육체가 있었다. 근대 도시의 거리에서 많이 보이는, 막연히 이목구비가 뒤섞여 있는 그런 얼굴이 아니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또렷이 윤곽이 잡힌 균형적인 용모로 이루어지고, 눈동자만 하더라도 이런 눈으론 곁눈질하거나 이쪽저쪽 흘겨서 보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머리 전체를 돌려서 보아야만 되도록 틀이 잡혀 있었다.

이 시기의 몸가짐은 솔직하고 맹렬하다. 그러나 나타난 존경은 인간적 자질에 대한 것이다. 즉 용기 · 숙달 · 자제 · 공정 · 힘 · 민첩 · 고성(高聲) ·넓은 가슴 등에 대한 것이다. 사치와 우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구가 매우 적은 데다 부유하지도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이 시종(侍從)으로도, 요리인으로도, 도살자로도, 군인으로도 된다.

그리스인은 반성적이 아니다. 그러나 관능(官能)에 있어서, 건강에 있어서 완벽하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육체 조직을 가지고 있다. 어른은 애들처럼 소박하고 아름답게 행동했다. 그들은 꽃병을 만들고, 비극을 쓰고 조상(彫像)을 만들었다. 그것도 건전한 관능으로 만들 수 있는, 즉 좋은 취미의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것은 계속하여 어느 시대에나 만들어졌고, 어디에서나 건전한 육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개괄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우수한 체격면에서 그리스인은 모든 다른 민족을 능가했었다. 그들은 어른의 활력과 어린이들의 매력 있는 천진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런 태도가 마음을 끄는 것은, 그것이 본래 인간의 것이고, 누구나 한때는 어린아이였으므로 누구에게 그것이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이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는 이런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어린이와 같은 천재와 타고난 활력을 가진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인인 셈이고, 그는 헬라스의 시신(詩神)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소생시킨다.

나는 저 필록테테스(트로이 전쟁 때의 유명한 사수.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비극을 썼다-역자 주) 극(劇)에 나타난 자연애를 찬탄한다. 그 잠과 별과 바위와 산과 파도에 대하여 호소하는 글을 읽을 때, 나는 시간이 썰물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을 느낀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신념의 철학』,〈역사란 무엇인가〉중에서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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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의서재 2017-06-17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먼댓글을 찾아 왔는데 깊은 지식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지식보다 감정이 먼저 올라와서 격하게 글을 올렸는데;;; oren님 글을 보며 그리스인에 대해, 디오니소스에 대해, 니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7-06-18 00:28   좋아요 0 | URL
저도 미네 님 덕분에 『그리스인 조르바』와 ‘그리스인‘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 보고, ‘책 속 구절들‘을 여럿 뒤적여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와는 영 딴판인 소설이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도 한 때 ‘외설‘ 시비에 휘말려 오랫동안 ‘출판 금지‘를 당한 적이 있었지요. 미국 울지 판사의 ‘명판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지만 말이죠. 그 중 한 대목을 참고삼아 인용해 봅니다.

* * *

˝만일 우리들이 조이스가 서술한 이러한 사람들과 사귀고 싶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선택의 문제다. 그들과 간접적인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율리시스』를 읽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아주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조이스와 같은 의심할 바 없이 진실한 예술가가 언어를 통해 한 유럽 도시의 중하위급 인물들의 참된 그림을 그리기를 원할 때, 아메리카의 대중들이 그러한 그림을 보는 것이 법률상으로 있을 수 없단 말인가?˝

(제 생각엔 아마도 이런 대목들이 문제가 되었던 듯합니다. ☞ http://blog.aladin.co.kr/oren/8929272)

그랜드슬램 2017-06-18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견디기 힘들 정도의 불편함이라는 말에 일부 동감합니다! 워낙 마초적인 성격이 강한 책인지라.... 카잔차키스의 필력과 내용전개야 말이 필요 없겠지만 그 불편함이라는 표현에 동감합니다, 조르바를 자유인으로 말해야 할지,무능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느껴야 할지, 가끔 혼돈이 옵니다!

oren 2017-06-18 11:22   좋아요 0 | URL
우리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 흔히 느끼는 그런 불편함 또한 작가가 일부러 의도했지 싶은 생각도 들어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그의 묘비명 자체가 그에 대한 증명이라고도 여겨지고요.
* * *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무대는 그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좁다. 그뿐인가.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마저 그에게는 너무나도 좁았다."

 - 괴테


 * * *


위의 말은 요한 페터 에커만이 지은 『괴테와의 대화』에 담긴 말이다. 물론 저 문장 속에서 말하는 '그'는 셰익스피어를 가리킨다. 니체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양서'라고 격찬한 에커만의 그 유명한 책을 내가 직접 읽고 저 문장을 여기서 인용한 건 아니다. 일본 최고의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일컬어지는 오다시마 유시의 책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다.(어쨌든 저 문장 덕분에 마침내 이번에『괴테와의 대화』를 실물로 구경할 수 있었다. 1,2권으로 나온 민음사판을 장만하고 보니 책이 장난이 아니게 두껍다. 두 권을 합하면 무려 1,140쪽이다.)


내게도 뒤늦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온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말고도 이런 저런 '셰익스피어와 관련된 책들'도 함께 읽어 보고 있는데, 마침 도쿄대학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오다시마 유시의 책 덕분에 셰익스피어를 읽는 재미가 훨씬 배가되는 느낌을 받고 있다. 그는 일본 최고의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인정받는 인물인데, 일본에서 인정받는『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어릿광대의 눈』,『어릿광대의 귀』, 『마음은 언제나 셰익스피어』등 숱한 셰익스피어 관련 책들을 썼고 국내에도 그가 쓴 책들이 적잖이 번역되어 나올 만큼 권위있는 인물이다.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셰익스피어가 얼마나 '굉장한 눈'을 지닌 인물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숱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동안에 우리가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거듭 놀라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가 쏟아내는 경이로운 문장들 때문이고, 그런 문장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의 놀랍도록 풍부한 상상력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셰익스피어 자신이 극작가이면서 동시에 무대 위에서 직접 연기를 했던 배우였기 때문에 좀 더 특별하게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세상이 있었고, 그런 세상을 볼 수 있었던 '어릿광대의 눈'과 '어릿광대의 귀'가 너무나 광대무변하면서도 초능력적인 데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가 떠올렸던 '놀라운 영상들'이 다시금 고스란히 '빛나는 문장들'로 변환되어 영롱한 보석처럼 다채로운 빛깔로 우리의 눈앞에서 반짝거리니 어찌 거듭 놀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면 때로는 밋밋하거나 단조로운 세상도 갑자기 흥미롭게 다가온다. 우리가 진짜로 겪고 있는 '실제 세계'도 마치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의 세계'처럼 정반대로 뒤집어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우리에게도 셰익스피어처럼 잠시나마 '어릿광대의 눈'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를 마치 연극 처럼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어쨌든 굉장한 경험이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반드시 연극의 연출자나 배역을 맡은 배우여야 할 필요는 없다. 연극의 관객이나 구경꾼의 입장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현실 세계'를 마음껏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또 '흥미롭게' 즐길 수도 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 세계'를 이런 방식으로 마치 '연극적 상황'인 것처럼 쉽게 뒤바꿔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줄 만한 작품들이야말로 참다운 희곡이 아닐까. 셰익스피어는 '인간 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황들을 '오래 전부터 미리 넉넉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숱한 작품들 속에 아주 풍부하게 묘사해 놓았다. 괴테가 괜히 저런 엄청난 말을 한 게 결코 아니었다.(에머슨도 셰익스피어에 관한 괴테의 특별한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셰익스피어 정신의 지평은 끝없이 펼쳐져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누구도 그 전모를 전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가 평소에 막연하게 직감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미지를 적절한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콜리지와 괴테 정도"라고 말했다.)


이쯤에서 '셰익스피어의 눈과 귀'를 '오늘날의 현실'과 연결짓는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최근에 우리가 겪고 있는 '흥미로운 현실 문제' 몇 가지에 셰익스피어를 끌어들이자는 말이다. 내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자주 떠올렸던 현실 문제는 어느날 갑자기 전세계적 뉴스로 급부상한 사드 추가 배치에 관한 '보고 누락' 문제였다. 이 문제는 결코 아무나 함부로 '떠들 만한'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국내적으로든 국제적으로든 '각자의 입장에 따라' 워낙 첨예한 이해 관계가 걸린 '극도로 예민한 이슈'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이 문제가 한창 뜨거웠을 때 이 글을 끄적거리다가 말았다. 몇 번씩이나 다시 꺼냈다가 '중도 포기'를 거듭한 끝에 이제야 겨우 다시 꺼내 어설픈 마무리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예민한 입장 차이는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기본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눈과 귀'를 빌린다는 가정 아래에서 이 문제를 바라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이토록 예민한 문제에 괜시리 존숭받는 극작가를 억지로 끌어들여 첨예한 문제를 '희화화'하자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나는 단지 그의 희곡 작품이 우리의 현실에 얼마나 예민하게 호소하는 힘을 지녔는지를 되살펴 보고 싶을 뿐이다. 문학 작품이 지닌 이런 힘을 확인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를 새삼 되돌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말이다.


이토록 예민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내가 처한 곤란한 입장에 대해 조심스러운 얘기를 몇 가지 더 늘어놓고도 싶지만 시간이 아깝다. 이쯤에서 본론으로 넘어 가자.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이자 최고의 걸작은 단연『햄릿』이다. 그 유명한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명대사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누가 뭐래도 (심지어 책과는 담을 쌓은 사람도 다 아는) 다음 대사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의 이 유명한 독백 하나가 수많은 세월에 걸쳐서 얼마나 다양한 해석을 쏟아냈는지를 여기서 따질 이유는 없다. 다만 이 짧은 대사 하나가 그토록 논란을 빚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반증하는 결정적인 증좌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다시 기본으로 살짝 되돌아 가자.『햄릿』은 과연 어떤 작품인가? 이런 물음엔 아무래도 전문가의 '깔끔하게 정리된' 대답에 기대는 게 최고다.


햄릿의 핵심 주제는 복수다. 그러나 이는 형식상의 주제이고 내용상으로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복수심과 양심의 대결이다. 그리고 양심은 복수를 지연시키는 힘으로서 무의식적인 행위로 나타나고 복수심은 살인을 실행시키는 힘으로서 의식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또한 복수심은 햄릿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힘을 대표하고 양심은 그가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을 대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극의 핵심 주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 즉 존재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 최종철 옮김,『셰익스피어 전집 4』, 『햄릿』, <역자 서문> 중에서

『햄릿』의 확장성은 놀랍다. 꼭 『햄릿』만 그런 것도 아니다. 위대한 문학작품들은 대개 '놀라운 확장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들이 하나같이 칭송받는 것도 어느 작품이든 '누구에게나 마음 속 깊이 호소하는 목소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면에 기대어 나는 여기서 '햄릿'을 과감하게 '고뇌하는 문재인 대통령'으로 치환해서 해석해 보고 싶었다. 문학 작품이 '현실'을 일찌감치 미리 내다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문학이 얼마나 놀라운 신축성을 발휘해서 현실을 사로잡는가를 고려해 보면 이 문제는 누구나 '대입해 보고 싶은 매혹적인 방정식'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런가?


우선, '사드'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처한 곤란한 입장 자체가 햄릿과 너무나 닮았다.


그런데 햄릿이 '복수'를 꿈꾸도록 도와준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당연히 '유령으로 나타난 선왕' 때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을까. 묘하게도 그에겐 친구이자 '선왕'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존재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령으로 나타난 선왕'을 여태껏 '아예'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리라는 단정을 내리기는 어렵다. 설사 유령의 모습으로 만나지는 못했더라도 늘 대통령의 마음 한 켠에 '그 분의 존재'를 자주 떠올리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한편, 햄릿의 복수심을 더욱 부추긴 요인 중엔 어머니 거트루드와 작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사이의 '근친상간적인' 빠른 결혼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문재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이명박근혜 정부'와 '미국' 사이에 진행된 너무나 빠른 '근친상간적 결합'도 마음 속으로 그리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리라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더군다나 이명박 정부는 '선왕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게다가 노 전 대통령의 수사를 맡았던 우병우는 하필이면 박근혜 정부의 핵심 수족을 맡으면서 '묘한 악연'을 계속 이어 왔다.)


더군다나 『햄릿』에서는 '선왕 햄릿'의 서거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왕' 클라우디우스의 '나쁜 인간성'도 햄릿의 복수를 부추겼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나쁜 인간성'이 '착한 문재인'에게 복수심을 자극했으리란 건 어찌 보면 추론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명약관화한 사실로 봐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햄릿 1막 5장에 나오는 재미있는 대사 하나만 인용해 보자.


"소중한 네 아버질 사랑한 적 있다면 (중략)  이 흉악무도한 살인의 원수를 갚아 다오."


이제는 이런 대사마저 그저 단순한 햄릿만의 대사로만 들리지 않는다. 되짚어 보자면,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일어났던 돌발 상황 때문에 자칫 험한 꼴을 당할 뻔한 이명박 대통령에게 도리어 먼저 다가가 사과를 한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는 점도 '착한 햄릿'이 새로운 왕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네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무척이나 닮았다.


문재인 대통령과『햄릿』과의 또다른 유사점은 '성급한 복수의 실패'에서도 찾을 수 있다.


햄릿은 유령으로부터 '진실'을 알고 난 뒤에 '즉각적인 복수'를 맹세한다. 그러나 복수는 생각만큼 빨리 이뤄지지 못하고 계속 미뤄진다. '극중극'을 통해 '클라우디우스의 반응'을 살핀다든지, 「쥐덫」상연을 통해 왕의 죄를 확인한 뒤에도 (끝내 스스로에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기도하는 왕'을 죽이지 못하고 놔주기 때문이다.("아냐. 아서라 내 칼아, 더 끔찍한 상황을 만나자.")


햄릿의 '성급한 복수'는 결국 엉뚱하게도 휘장 뒤에 숨어 있던 폴로니우스(오필리아의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휘장을 뚫고 검을 찌르면서 햄릿이 내뱉은 대사가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다시 한 번 자극한다.

"이건 뭐냐? 쥐새끼다! 죽어 싸다, 죽어라."

주저함의 대명사로 통하는 '햄릿'이 마침내 무서운 결단을 내려 실행에 옮겼는데 결국 알고 보니 '쥐새끼' 같은 클라우디우스의 신하 폴로니우스였던 것이다. 쥐새끼 하면 MB도 떠오르고, 뒤이어 속담 하나도 곧바로 더 떠오른다. 이번 '사드 보고 누락 사태'로 숱한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들먹인 말이 바로 '태산명동 서일필'이었으니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드 배치'에 대해 시종일관 '모호한 전략'을 취해 왔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갈수록 심각해 지고 있는 상황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결같이 '사드 배치'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계속 유지해 왔다. 무엇보다 '안보가 최우선'이라는 '보수 우파 진영'이나 군사 동맹국인 미국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다. 미국이 '자신들의 부담'으로 '한국'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첨단 방어 무기를 설치해 주겠다는데도 '애매한 태도'를 계속 취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문재인 대톨령이 계속 이런 태도를 취하는 데는 '복잡한 사정'이 깔려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드 배치'와 꼭 닮은 문제가 바로 노무현 정부 초기의 '해외 파병 문제'였음을 상기해 보면 의외로 문제가 간단해 보인다. 해외 파병이나 사드 배치나 '군국주의 미국'에 '맞장구치는 일'일 뿐, 오랜 지지기반인 '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에겐 결코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 문제까지 얽힌 복잡한 정치 얘기는 이쯤에서 살짝 접어두고 여기서 다시 햄릿의 독백으로 돌아와 보자.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를 쓴 오다시마 유시는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로다."

이런 '신선한 해석'을 접하면서 나는 바로 이 해석이야말로 '사드 보고 누락'에 대해 '충격과 분노'와 더불어 즉각적인 '진상 조사'를 엄명한 문재인 대통령을 떠올리게 만드는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오다시마 유시의 책 속 구절 속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을,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번역했다. (…)


나중에 나의 이 번역이 신문에 소개됐을 떄, 나카노 교수님은 "자네가 드디어 해냈구먼"이라며 전화로 칭찬을 해주셨다. …… 셰익스피어는 중요한 독백을 할 때는 모호한 말투를 쓴 다음에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을 붙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 꼭 이어서 확실한 답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이어지는 다음 행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당당한 삶인가. 이대로 마음속에서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는 것인가, 아니면 다가오는 고난의 거센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 그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인가. ……"


이처럼 상당히 중요한 내용으로 자문을 하고 있다.


분명히 to be는 '이대로 마음속에서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는 것'이며, not to be는 '다가오는 고난의 거센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 그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즉 햄릿은 '삶이냐, 죽음이냐'의 관념론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상황 속에서 고민하고 있다.(110∼111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비단 '사드 문제' 뿐만은 아니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여러 조치' 때문에 그동안 몹시도 혼란스러웠던 문재인 대통령이 '사드 배치 보고 누락'을 보고받았을 때 순간적으로 느꼈던 심정이야말로 '햄릿'의 심정을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둘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햄릿'은 끊임없이 심사숙고하면서 '복수'를 계속 미뤘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톨령이 '만약' 햄릿처럼 행동했더라면 아마도 '사드 추가 배치 보고 누락'에 대해 그토록 급작스러우면서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는 식으로' 호통을 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문제가 당초 의도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방향으로 '여러 반향'을 불러왔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에겐 햄릿이 연극의 막바지에 이르러 읊는 유명한 대사 하나를 앞으로도 계속 떠올려야 하는 '과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사드 배치 문제'는 그저 잠시 지연시켰을 뿐, 결국 언젠가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 반드시 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와야 할 것이 지금 오면 나중에는 오지 않는다. 나중에 오지 않는다면 지금 오겠지. 지금은 아니라도 반드시 올 것은 언젠가 온다."


 - 『햄릿』, <5막 2장> 중에서



이쯤에서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지어야겠다. 마침 오늘 서울국제도서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서 흘러나온 뉴스 하나가 내 눈에 번쩍 띄었다. 문재인 대톨령이 "책 선물을 많이 받는 편인데 꼭 다 읽는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문재인 대통령한테 '셰익스피어의 책'을 선물한 사람은 없었을까, 그게 갑자기 궁금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셰익스피어 마니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모처럼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맞이한 국민의 입장에서 '세익스피어 읽는 대통령'을 바라는 게 너무 무리한 욕심일까.


한 나라의 지도자가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면


판단보류, 즉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바로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바로 '만약'의 중요한 예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만약에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하면서, 안 된다고 하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어떨까. 간단히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만약 내가 해낼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상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 어떤 부모자식이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화를 내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이 '만약'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부모자식과 부부는 물론이고, 이웃, 나아가 이웃나라와의 외교문제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가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결투는 그만두고 악수를. 이것이 바로 셰익스피어다.(25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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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정치 현실'을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정치'만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야도 드물다. 그런 껄끄러운 문제에 대해서조차 셰익스피어는 놀랄만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이 글에서 좀 더 엮어보려 했던 내용들도 있었지만 부족한 능력 탓에 더 이상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미 글 밖으로 빠져 나왔지만 원래의 글 속에 포함시키고 싶었던 '책 속 내용들'을 덧붙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 * *

역사라는 톱니바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폴란드의 얀 코트라는 비평가가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그들을 한데 묶어서 바라보면 역사는 '위대한 기계장치Grand Mechanism'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군이든 폭군이든 어차피 역사라는 톱니바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헨리 5세는 프랑스를 무찌르고 프랑스의 왕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끝을 맺지만, 다음으로 왕이 된 헨리 6세는 금방 무능함이 드러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한명의 인간, 한 명의 왕은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적으로는 여러 일이 벌어져도 한 개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역사 속에서 하나의 기계처럼 움직인다.(67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지배자가 극단으로 치우칠 경우엔


민중은 지배자가 공정한 정치를 하고 있다면 그에 조용히 따른다. 그러나 지배자가 극단으로 치우칠 경우엔 그 균형을 다시 맞추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폭군이 등장하면 이래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면, <리처드 2세>에 정원사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온다. 리처드 2세는 정치능력도 없으면서 간신배 때문에 국가의 재산을 전부 써버린다. 그러다 결국 볼링브룩(뒤에 헨리 4세)에게 왕위를 뺴앗긴다. 그런 정치 상황을 서민은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정원사 스승은 제자에게 나무란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야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와 같은 민주국가에서 자기들이 잘난 줄 알고 날뛰는, 지나치게 자라버린 그런 자잘한 가지들의 머리를 싹둑 잘라버려야 하느니라. 우리들의 정치란 모두가 평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68∼69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햄릿』을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연극 전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듯하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베케트, 루이기 피란델로, 그리고 모든 부조리 작가들의 시대에서조차도 말이다. 『오델로』,『리어 왕』,『맥베스』가 모두 비극이었던 것처럼 『햄릿』또한 반드시 비극이라고 보아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비극적 결함 혹은 비극적 덕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덴마크의 햄릿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까지도 지닌 듯하다.


에머슨은 자유를 '야성의 것Wilderness'이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햄릿』이야말로 모든 연극 가운데서도 가장 야성적이며 자유로운 연극이다. 심지어『12야』의 부제인 '뜻대로 하세요'를 붙여서 '햄릿, 혹은 뜻대로 하세요'라고 불러도 좋을 법하다.


『햄릿』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실 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다. 주인공 햄릿을 포함해 여덟 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시각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긴 하다. 유령의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복수의 갈망은 여전히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81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중에서



           리처드


내게 왕관을 건네라. 자, 사촌, 왕관을 받게나.

자, 사촌, 이쪽엔 내 손, 그리고 그쪽엔 자네 손.

이제 이 황금 왕관은 깊은 우물과 같아서,

물통 둘을 번갈아 채우며 들락거리게 하지 ㅡ

빈 통은 허공에서 흔들흔들 춤추고,

다른 통은 물이 꽉 차 내려가 안 보이지.

눈물로 채워져 내려간 통은 나인데,

슬픔 마시는 중이고, 자넨 높이 오르는 중이야.


 - 『리처드 2세』, <4막 1장> 중에서


 

(나의 생각)


『리처드 2세』는 '무능한 왕이었던 '리처드 2세'가 실정을 거듭한 끝에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버림받는 내용을 다룬다. '리처드 2세'가 추락을 거듭할 때 새롭게 왕위에 오른 인물은 랭커스터 왕조를 연 '헨리 4세'였다. 비극의 주인공 '리처드 2세'가 백성들로부터 쫓겨난 끝에 폐위되고 결국 감옥에 갇혔다가 헨리 4세의 부하로부터 살해되기 까지의 과정이 눈물겹다. 아마도 박근혜 정부 시절에 벼슬깨나 했던 사람들이나 '태극기 부대' 사람들은 이 작품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지도 모르겠다. 집권하는 과정만 보면 얼핏 '반역'일지 몰라도 일단 '민심'을 얻은 이후의 헨리 4세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어쨌든 이 사극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리처드 2세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새로운 왕에게 '왕관'을 물려주는 소위 '탈관식 장면'이다. '눈물로 채워져 내려간 통'과 '허공에서 흔들흔들 춤추는 통'을 대비시킨 것도 놀랍지만, 진정한 절정은 리처드 2세가 '거울'을 바닥에 내던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거울'을 좋아했던, 지금은 감옥에서 재판을 받느라 몹시도 초췌한 박근혜를 떠올리지 못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쨌든 '셰익스피어의 눈'은 참으로 놀라운 데가 있다. '경이로움에 의해 상처입은 청자들'은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이 되었다던 헤럴드 블룸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리처드


그자들은 내가 만족시켜 주지. 내 죄상이 다 기록된

바로 그 문서를 내가 보게 되는 순간,

다 읽어 주마 ㅡ 그게 바로 나이니까.


(시종 하나 거울 들고 등장)


거울을 다오. 그걸 보고 읽으련다.

아직 주름이 덜 잡혔어? 슬픔이 이 내 얼굴 위에

그 숱한 가격(加擊)을 하였으되, 더 깊은 상흔을

남기지 못했나? 아, 거울도 아첨을 하는구나 ㅡ

나 한창 좋은 세월이었을 때 날 따르던 무리처럼,

거울도 날 속이는구나. 이 얼굴이, 날이면 날마다

왕실 지붕 아래에서 일만 명을 거느리던

바로 그 얼굴인가? 이 얼굴이, 마치 태양인 양,

보려는 사람 눈부셔 눈 감게 하던 그 얼굴인가?

이것이, 그 숱한 망동(妄動)들을 눈감아 주다가 마침내

볼링브로크가 들고일어나도록 한 그 얼굴인가?

부서지기 쉬운 영광 이 얼굴에 빛나는구나.

이 얼굴도 영광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 (거울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저것 보아, 일백 개의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걸.

말씀 없으신 임금, 잘 새겨 두시오. 이 장난의 의미를 ㅡ

내 슬픔이 내 얼굴을 얼마나 빨리 깨뜨렸는지.


『리처드 2세』, <4막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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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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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17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15일날 빨리 보고 나중에 정독해야지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읽으니, 이런 글은 오렌 님처럼 세익스피어를 탐독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인 듯합니다. 이런 글을 알라딘에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글이 이달의 당선작이 안 된다면 참으로 문제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글에 당선작이라도 안 주면 알라딘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접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암요~!

oren 2017-06-17 13:37   좋아요 0 | URL
yamoo 님 반갑습니다. yamoo 님께서 얼핏 스쳐 읽은 뒤에 나중에라도 기어코 다시 찾아와 정독해주시니 글쓴이로서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사실 글의 소재로 삼은 ‘사드 배치 보고 누락‘은 너무 예민한 문제여서 그 분야를 잘 알지도 못하는 나같은 사람이 글로 쓴다는게 여간 주저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한두번 끄적거리다 말았는데, 그 뒤로 ‘쥐새끼 한 마리‘도 자주 언급되고, 중국도 ‘꼼수 부리지 말라‘는 식으로, ‘결국 언젠가 결정할 때가 올 것‘이니 그때까지 예의주시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니 햄릿 이야기를 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더군요. 저 역시 햄릿처럼 이 글을 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to be ot not to be˝ 문제에 붙잡힌 꼴이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yamoo님의 고무적인 댓글 만으로도 글쓴 보람을 충분히 맛보았으니, 알라딘이 ‘당선작 누락 시비‘로 생존이 위협받는 일까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요^^
 


나는 셰익스피어보다 더 가슴을 찢는 비통한 작가를 알지 못한다 : 어릿광대여야 할 필요가 있었던 그 인간은 어떤 고통을 겪어야만 했단 말인가! ㅡ 햄릿을 이해하겠는가? 미치게 만드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다 ······ 하지만 그렇게 느낄 수 있으려면 깊이가 있어야만 하고, 심연이어야만 하며, 철학자여야만 한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 * *


셰익스피어에 빠져 지낸지 어느새 한 달 가까이 흐른 듯하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동안에 다른 책들을 전혀 읽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흙 속으로 돌아간지 400년이 지나는 동안에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머리 주위를 맴돌았을까를 떠올려 보면, 마침내 이토록 멀리 떨어진 나에게까지 찾아온 그토록 귀한 손님을 내가 먼저 함부로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더군다나 그를 오래 붙잡고 있는다고 해서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희귀한 천재인 그와 만날 기회가 반드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을 붙잡고 읽는 독자'에게만 열려 있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워낙 고명하고 저명한 분이어서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분을 서로 다투듯이 열심히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전세계 어디에선가는 틀림없이 '연극 무대'에 올려져 있을 것이다. 영화와 TV 드라마로도 숱하게 재방영되고 있을 것이다. 숱한 그림으로 여러 화랑의 벽면을 장식한지도 이미 오래일 것이며, 아무런 형체조차 없는 전파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며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방금 전에도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인터넷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바로 그 음악에 자극을 받아 기어이 셰익스피어와 음악을 연결짓는 이런 글쓰기에 이제 막 나선 참이다.


물론 내가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니다. 살다 보면 '세익스피어의 음악'은 절로 귀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누가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그 애틋한 주제가를 여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80년대 초반에 서울 시내 개봉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홀로' 몰래 '숨어서 보는 기분으로' 숨을 죽이며 봤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죽였던 숨이 다시금 멎는 듯한 순간들을 정말 여러 번 느꼈었다. 그토록 격한 감동을 안겨주는 러브스토리는 그 후로 영영 다시는 만나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그 영화에 그토록 심금을 울리는 주제음악이 없었더라도 그 영화가 여전히 우리에게 그토록 매혹적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A time for us>가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마치 <라라의 테마> 없는『닥터 지바고』를 떠올리는 것만큼 쉽게 상상하기도 어렵다.



A time for us Romeo and Juliet 1968


이쯤에서 한번쯤 '셰익스피어의 작품 목록'을 들춰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듯하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열 손가락을 가지고도 몇 번씩이나 오므렸다 폈다를 거듭해야만 간신히 셀 수 있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하루에 꼬박 열 시간씩' '드라마'로 본다면 과연 며칠이나 걸릴까. 이미 권위를 인정할 만한 곳에서 명백한 '견적서'를 내놓은 적이 있다. 자료들에 따르면 셰익스피어가 쓴 37편의 드라마는 러닝타임이 총 5947분(99.1시간)이다. 하루에 꼬박 열 시간씩 '중지 버튼' 한 번도 누르지 않고 쉼없이 돌려도 꼬박 열흘은 지나야 끝을 볼 수 있는 셈이다.


01. Antony and Cleopatra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 비극 170 분
02. Coriolanus (코리올라누스) - 비극 145 분
03.
Hamlet (햄릿) - 비극 212 분
04. Julius Caesar (줄리어스 시저) - 비극 150 분
05. King Lear (리어왕) - 비극 183 분
06. Macbeth (맥베스) - 비극 146 분
07.
Othello (오셀로) - 비극 205 분
08. Romeo And Juliet ( 로미오와 줄리엣) - 비극 168 분
09. Timon of Athens (아테네의 타이먼) - 비극 128 분
10. Titus Andronicus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 비극 168 분

11. Henry IV, Part 1 (헨리 4세 - 1) - 시대극 148 분
12. Henry IV, Part 2 (헨리 4세 - 2) - 시대극 150 분
13. Henry V (헨리 5세 ) - 시대극 - 166 분
14. Henry VI, Part 1 (헨리 6세 - 1) - 시대극 188 분
15. Henry VI, Part 2 (헨리 6세 - 2) - 시대극 213 분
16. Henry VI, Part 3 (헨리 6세 - 3) - 시대극 210 분
17. Henry VIII (헨리 8세) - 시대극 165 분
18. Richard II (리차드 2세) - 시대극) 158 분
19.
Richard III(2DISC) (리차드 3세 (2 DISC)) - 시대극 230 분
20. Richard III

21. The Life and Death of King John (존 왕) - 시대극 155 분
22. A Midsummer Night's Dream (한여름밤의 꿈) - 희극 115 분
23. All's Well That Ends Well (끝이 좋으면 다 좋아) - 희극 142 분
24. As You Like It (뜻대로 하세요) - 희극 150 분
25. Cymbeline (심벨린 ) - 희극 175 분
26. Love's Labour's Lost (사랑의 헛수고) - 희극 120 분
27. Measure for Measure (법에는 법으로) - 희극 145 분
28. Much Ado About Nothing (헛소동) - 희극 148 분
29. Pericles, Prince of Tyre (페리클레스) - 희극 178 분
30. The Comedy of Errors (코미디 오브 에러스) - 희극 108 분

31. The Merchant of Venice (베니스의 상인) - 희극 157 분
32. The Merry Wives of Windsor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 희극 170 분
33. The Taming of the Shrew (말괄량이 길들이기) - 희극 128 분
34. The Tempest (태풍) - 희극 125 분
35. The Two Gentlemen of Verona (베로나의 두 신사) - 희극 137 분
36. The Winter's Tale (겨울이야기) - 희극 173 분
37.
Troilus and Cressida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 희극 190 분
38. Twelfth Night (십이야) - 희극 128 분


이 많은 작품들을 오로지 '연극 대사'로만 이루어진 희극으로 읽을라치면 사정은 어떻게 달라질까. 대략 한 작품을 읽는 데 5시간씩만 잡더라도 총 185시간(37편×5시간)이 걸린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루에 다섯 시간을 꼬박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데 쏟아붓는다면 그는 대략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지날 무렵에는 틀림없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전부 다 독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으랴마는.

책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다시 음악 얘기로 얼른 되돌아 오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음악으로 재탄생시킨 음악가들을 일일이 다 헤아리는 건 물론 나의 과제가 아니다. 나는 그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음악이라는 예술 장르에도 얼마나 놀랍도록 광범위하게 스며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는 단순한 작업에만 주의를 기울일 작정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어떤 음악가에 의해 어떤 배경과 창작 과정을 거쳐 탄생했으며, 그 음악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얼마나 훌륭하게 재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쓸 겨를이 없다. 또한 그럴 능력이나 재주도 없다. 그런 주제는 내 능력을 한참이나 벗어난다. 나는 그저 내게 알맞는 정도로 이 둘을 '슬쩍 건드려 보는 데' 만족할 것이다.

이제 본론인 '셰익스피어 음악의 목록'을 잠시 나열해 보자. 거듭 말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가 아는 범위내일 뿐이다. 아마도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베토벤

<템페스트>(원작 또한『템페스트』인데, 흔히『태풍』이나 『폭풍우』로도 번역된다. 작가 말년의 대표작이다.)
<코리올란 서곡>(원작은『코리올라누스』, 코리올라누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자신의 전기'를 가진 고대 로마의 유명한 장군인데 셰익스피어가 '사극의 마지막 작품'으로 썼다. 코리올라누스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T.S.엘리엇의 『황무지』에도 등장할 정도로 여러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은 인물이다. http://blog.aladin.co.kr/oren/9121191)

베토벤의 <템페스트>를 소개하는 마당에 셰익스피어의『템페스트』한 대목조차 인용하지 않고 지나가기는 어렵다. 셰익스피어는 이처럼 많은 작품에서 스스로 '음악'을 끌어들여 자신의 작품을 더욱 매혹적으로 장식한다.

     페르디난드
이 음악은 어디 있지? 공중에? 땅속에?
더 이상 안 들린다, 틀림없이 이 섬의
어떤 신을 시중든다. 해안에 앉아서
부왕의 파선을 울면서 다시 슬퍼했을 때
이 음악이 파도 타고 내 곁으로 기어와
격랑과 내 격통을 아름다운 곡조로
가라앉혀 주었다. 그걸 따라 왔는데
(오히려 나를 끌고 왔겠지.) 사라졌다.
아냐, 또 시작한다.

『태풍』, <1막 2장>


Ludwig van Beethoven "Tempest" Piano Sonata No. 17. / Daniel Barenboim



Beethoven - Coriolan Overture, Op 62 - Muti

(지휘자인 무티의 모습이 2년 전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내한했을 때와는 너무나 달라서 깜짝 놀랐다. 한참이나 어린 그의 모습을 보니 마치 '무티의 아들' 같은 느낌도 든다. 베토벤이 살았던 빈의 '황금홀' 연주라 더욱 반갑다.)



차이코프스키

환상 서곡 <햄릿>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 <템페스트>

Tchaikovsky Hamlet Overture, London Symphony Orchestra, Valery Gergiev Proms 2007

(베르디조차『햄릿』을 표현하기가 너무나 어려워 끝내 작곡을 포기했다는데, '셰익스피어 마니아'였던 차이코프스키는 정말 멋지게 성공했다. 나는 이 음악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햄릿을 이해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음악당에서 만난 게르기에프는 두 번 모두 차이코프스키의 <비창>만 들려줬는데 이렇게 우연히 <햄릿>으로 다시 만나니 더욱 반갑다.)



Tchaikovsky: Romeo & Juliet / Gergiev · London Symphony Orchestra · BBC Proms 2007



Tchaikovsky: The Tempest / Abbado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
오페라 <오텔로>
오페라 <팔스타프>(『헨리 4세』과『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 등장하는 희극적 인물 '팔스타프'를 그린 작품)

Thomas Hampson - Perfidi!... Pietà, rispetto, amore (Verdi: Macbeth)



Verdi: Falstaff - Final Opera - Metropolitan . James Levine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그 가운데 특히 <꿈 속에 살고 싶어라>

Anna Netrebko "Je veux vivre" in Romeo and Juliet by Gounod (HD Paris 2007)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그 가운데 특히 <결혼 행진곡>

'한여름 밤의 꿈'중 '결혼행진곡' 변주곡_호로비츠_손열음



Mendelssohn A Midsummer Night's Dream Overture Op.21 by Masur, LGO (1997)



리스트

교향시 <햄릿>

Liszt - Symphonic Poem 'Hamlet'



드보르작

서곡 <오셀로>

Daniel Harding dirigerar Dvorak: Othello, ouverture



드뷔시

모음곡 <리어왕>


프로코피에프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Prokofiev Romeo & Juliet Suite



베를리오즈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극적 서곡 <리어 왕>

Berlioz: Roméo et Juliette - Radio Filharmonisch Orkest - Full concert in HD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맥베스>

Richard Strauss - Macbeth, Op. 23



쇼스타코비치


극 부수음악 <햄릿>


Shostakovich 'Hamlet' Film Music - Bernard Herrmann conducts



니콜라이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Otto Nicolai, The Merry Wives of Windsor, Overture - Gilberto Serembe, conductor

(오토 니콜라이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설립자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흔히 셰익스피어를 '뮤즈를 울린 극작가'로 표현한다. 뮤즈는 여신들이다. 호메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조차 "노래하소서, 여신이여!"라는 말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그저 여신들로부터 '시적 영감'을 빌려올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여신들이 무려 아홉이었다. 이 숫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근거는 호메로스가 제공했다.『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장례식 풍경' 속에 여신들이 딱 그만큼 등장하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oren/7137045)

…… 그리고 모두 아홉 명의
무사 여신들이 서로 화답하며 고운 목소리로 만가를 부르기 시작했소.
그곳에서 그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르고스인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오. 낭랑한 무사 여신의 노랫소리가 그만큼
힘차게 일었던 것이오. 그리하여 열흘하고도 이레 동안 밤낮으로
불사신들과 필멸의 인간들이 그대를 위해 울었지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저승 속편_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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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뮤즈 여신들은 세 명의 자매로 서로 속성이 유사했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점차 각각의 특성들이 나눠지고 구체화되어 갔으며 그 수도 아홉 명으로 늘었다. …… 뮤즈 여신들의 우두머리이자 ‘서사시’를 담당한 칼리오페(Calliope)는 서판과 펜을 든 모습으로 주로 그려졌다. ‘희극’의 여신 탈레이아(Thaleia)는 익살스러운 가면을 쓴 반면, ’비극’의 여신 멜포메네(Melpomene)는 슬픈 표정의 가면을 쓰고 그리스 비극배우들이 신는 반장화를 신고 나타났다. ‘장엄한 종교 찬가’를 담당한 폴리힘니아(Polyhymnia)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등장하거나 베일을 썼다. ‘에로틱한 시’의 여신 에라토(Erato)‘서정시’의 여신 에우테르페(Euterpe)는 각기 리라(lyre, 고대 발현악기)와 플루트를 상징으로 가졌다. 합창과 춤의 여신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는 손에 리라와 작은 채를 들고 춤을 추는 자태로 그려졌다. ‘역사’를 관장한 클레이오(Cleio)는 앉거나 기대서 긴 두루말이와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았으며, ‘천문학’을 관장한 우라니아(Urania)는 주로 막대기로 천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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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가 뮤즈를 울렸다면 그는 필시 음악도 울린 셈이다. 따지고 보면 음악을 의미하는 ‘뮤직(music)’도 결국 뮤즈 여신에게서 유래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작가가 "음악을 잘 들어봐"라고 '대사'를 통해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올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음악으로도' 듣지 않을 도리가 없다. 셰익스피어와 음악은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로렌초

그리고 악사들을 밖으로 데려오게.

언덕 위에 잠자는 달빛은 참 아름답구나!

우린 여기 앉아서 귓전으로 스며드는

음악 소리 들어 보자. 고요한 밤에는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게 제격이야.

앉아, 제시카. 저것 봐, 저 하늘 마루에

황금빛 접시들이 얼마나 촘촘히 박혔는지.

보이는 천체 중에 가장 작은 것이라도

운행할 땐 어린 눈의 케루빔들에게

언제나 합창하며 천사처럼 노래해.

불멸의 영혼에도 그런 화음 있다지만

부패하는 이 진흙 의복이 그것을

두텁게 감싸고 있는 한 우린 듣지 못하지.


 악사들 등장.


이리 오게, 찬가로 디아나를 깨워 보게,

최고 고운 가락에 마님 귀가 열리고

음악에 이끌려 집으로 오시도록.   (악사들이 연주한다.)



         제시카

고운 음악 들을 때면 난 절대 흥이 안 나.



         로렌초

네 정신이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야.

야생에서 뛰노는 짐승 떼를 보거나

여리고 길 안 든 수말의 무리를 지켜보면

그들은 몸속에서 피가 끓기 때문에

미친 듯 날뛰면서 힝힝 킹킹 울어 대지.

하지만 혹시라도 나팔 소릴 듣거나

그 어떤 곡조라도 귀에 와 닿게 되면

사나운 시선이 감미로운 음악의 힘으로

얌전한 응시로 바뀌면서 다 함께

멈춰 서는 모습을 볼 거야. 그래서 시인은

오르페우스가 나무, 돌, 강물을 움직였다 꾸몄어.

음악이 잠시 그 본성을 못 바꿔 놓을 만큼

무감각하거나 광란에 찬 것은 없으니까.

자신의 마음속에 음악이 없거나

아름다운 화음에 무감동한 사람은

역모와 계략과 약탈에나 어울려.

그자의 정신은 밤처럼 둔하게 움직이고

그자의 감정은 명부처럼 시커멓지.

못 믿을 건 그런 자야. 음악을 잘 들어 봐.


『베니스의 상인』, <5막 1장>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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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02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주제로 한 모든 곡이 앨범으로 발매된다면, 앨범 CD 하나로도 부족하겠어요.

oren 2017-06-02 18:49   좋아요 0 | URL
설사 하나의 앨범 CD에 담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막상 ‘한정된 수요‘를 생각하면 발매하기 어렵겠지요.
그나저나 <셰익스피어와 음악> 같은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 혹시나 없나 살펴보니 역시 없네요. <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라는 제목의 책은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말이지요.

그랜드슬램 2017-06-0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세한 설명과 자료,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세익스피어 작품은 넘어야 할 산이 아니고 즐겨야 할 산이군요^^

oren 2017-06-04 13:16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도 높은 산이기는 하지만 ‘즐기지 않으면‘ 그저 갈 길이 멀고 힘들고 따분하고 지치기 쉬운 산일 뿐이겠죠? 그런 면에서 랄프 왈도 에머슨의 표현만큼 셰익스피어를 적확하게 묘사한 인물도 드물다 싶습니다.

* * *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

셰익스피어도, 호메로스도, 단테도, 초서도, 눈에 보이는 세계 깊숙이 아득한 천상의 반짝임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수목조차도 단순히 사과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이상의 존귀한 역할을 맡게 되고, 곡물도 단순한 식료 이상의 것이 되고, 이 지구라는 천구도 아득히 숭고한 존재가 되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상의 온갖 것은 말하자면 더욱 섬세하고 묘한 ‘수확‘을 우리 혼에 베풀어 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 마음에 깃드는 이념을 상징하는 것이 되고, 천지자연의 다양한 영위는 모두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암시하는 ‘말없는 비밀문서‘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와 같은 대자연에 있는 일체의 것을 자신의 회화를 채색하기 위한 그림물감으로서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다만 그는 그와 같은 현실세계의 현란한 고급의 두루마리에 넋을 잃은 나머지 그만한 대천재라면 당연히 가능했을 중요한 첫걸음을 내딛는 일이 결국 안 되었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상징으로서 자연미 속에 잠재한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되어 있는 덕 그 자체의 의의를 그 이상 탐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근원적인 통찰이 결여되면 자연계가 말하는 실제의 이야기도 도대체 어느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천지만물을 자기 뜻대로 다룰 수가 있었는데 결국 그것들은 최상의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했다. 약간 짓궂게 표현한다면 그는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이 넘치는 펜으로 옮겨지면 보잘것없는 연극소극장도 하나의 드넓은 우주로 변해 온갖 계층의 신분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무대가 좁다'는 듯이 대활약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러면 순식간에 우리들 주위의 세계가 '희미한 달빛'처럼 현실감을 잃고 만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뒤늦게 만난 셰익스피어의 글을 도둑질하듯 밤마다 찾아 읽느라 정신이 없다. 뿔 달린 달님조차 눈을 감은 오밤중이나, 희뿌연 여명이 밤을 쫓아낼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도 그가 남긴 연극의 대사를 찾아 읽느라 짧은 밤이 아쉬울 지경이다. 심지어『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속삭이는 새벽 장면마저도 '글 도둑질에 빠진 사람'의 심정을 묘사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해봤다. 이 밤이 지나면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길고도 무료한 낮을 또 보내야만 해요, 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우린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니고 연인이 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줄리엣

가려고요? 날은 아직 밝지도 않았는데,

걱정하는 당신의 텅 빈 귀를 꿰뚫은 건

종달새가 아니라 밤 꾀꼬리였어요.

밤마다 저기 저 석류나무 위에서 우니까.

내 말을 믿으세요, 여보, 밤 꾀꼬리였어요.


       로미오

종달새였다니까, 아침의 전령이지

밤 꾀꼬린 아니오. 저 봐요, 저 건너 동녘에

시샘하는 빛살이 터진 구름 수놓는 걸.

밤 촛불은 다 꺼지고 유쾌한 낮의 신이

안개 낀 산마루에 발끝으로 서 있다오.

난 가서 살거나 남아서 죽어야만 한답니다.


       줄리엣

저 빛은 햇빛이 아니란 걸 알아요, 예,

저것은 태양이 내뿜은 혜성으로

오늘 밤 당신 위해 횃불잡이 노릇하며

만토바로 가는 길을 밝히려 한다고요.

그러니까 머물러요, 갈 필요 없다니까.


       로미오

잡혀가게 해 줘요, 죽임을 당하도록.

당신이 그러기를 원하면 난 만족이랍니다.

나는 저 잿빛이 아침의 눈망울이 아니라

창백한 달님 이마 반사한 것뿐이며

저 높은 곳에서 노래로 창공을 울리는 게

종달새가 아니라고 우겨 말할 테니까.

난 가려는 의지보다 머물 맘이 더 많아요.

죽음이여 어서 와라. 줄리엣의 뜻이다.


       줄리엣

밝았어요, 밝았어. 어서 여길 떠나세요.

거슬리는 불협화음 불유쾌한 올림표로

엉망진창 노래하는 저것은 종달새랍니다.

종달새는 고운 음을 분산 연결한다는데

저것은 못 하네요. 우릴 분리시키니까.

종달새와 역겨운 두꺼비가 눈을 바꿨다는데

오, 서로의 목소리도 바꿨으면 좋았을걸.

그 소리에 놀라서 우리 포옹 풀어지고

일어나라 노래하며 당신 쫓아내니까요.

아, 이제 가요, 점점 더 밝아지고 있어요.


       로미오

날은 점점 밝아지고 우리 한탄 짙어지네.


『로미오와 줄리엣』, <3막 5장>

 


『햄릿』부터 시작하여『오셀로』, 『맥베스』,『리어왕』을 차례대로 만난 뒤,『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줄리어스 시저』를 빠르게 지나쳤다. 눈물 없인 만날 수 없는『로미오와 줄리엣』을 (안타깝게도) 메마른 눈으로 만난 뒤에는 다시『한여름 밤의 꿈』을 꾸고 나서 『베니스의 상인』을 만났다. 별이 총총한 새까만 밤, 덴마크의 엘시노어 성 위의 망대에서 출발했던 여정이 어느새 데스데모나가 살았던 베네치아의 길거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셰익스피어 덕분에 내가 만나는 인물들이 갑자기 부쩍 많아졌고, 생전 못 가 본 '장소'까지도 실컷 쏘다니는 기분도 든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온갖 인물들을 아무리 실감나게 실컷 만나고 돌아다녔더라도 내가 그들을 또다른 독자들에게 실감나게 생생하게 재현할 방법이 없다는 점은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도록 만든 인물들을 어찌 나의 둔필로 다시 살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모습을 전하고자 애를 쓸수록 도리어 그들을 덧칠해서 셰익스피어가 본래 그렸던 그림을 더 망칠 뿐이라는 생각마저 고개를 든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인물들이 지닌 특색 한 가지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모습이나 생각이 '모호'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햄릿만 하더라도 그렇다. 누가 그를 두고 '이런 인물'이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극중 인물들이 명쾌하게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곧바로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물론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많은 인물들은 독자들에게 명쾌하게 '규정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게 바로 셰익스피어 희곡의 특징이자 매력인 듯하다.


거듭 말하지만 셰익스피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번만 만나서는 결코 그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다 알기 힘들다. 그들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로지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만 그들을 파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작가는 희곡을 쓸 때 '배경 설명'만 생략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대화'나 '장면'까지도 생략하기 마련이다. 그런 생략과 함축을 통해 작가는 독자들의 주의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싶어 하고, 독자들이 각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가능한 한 풍부하게 남겨주고 싶어하는 듯하다.


셰익스피어 읽기의 숱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독자들만이 겪고 있는 특별한 고충을 나 또한 절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우선 극이 쓰여졌던 시대 상황이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입하자면 임진왜란이 한창일 무렵에 머나먼 영국땅에서, 그것도 고대 영어로 쓰여진 '고색창연한 연극의 대본'인 셈이다. 그러니 그 대본이 우리 실정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거기서 연유하는 문제는 곧바로 번역상의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대사들이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숱한 뒤틀림이 생길 게 너무나 뻔하다. 우리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무려 400년 전에 다른 나라 언어로 씌여진 대사가 온전히 우리가 쓰는 지금의 우리말에 가깝게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거듭 '여러 번' 읽으라고 권유하는 듯싶다. 심지어 소설도 '여러 번' 읽을 것을 강조하는 형편인데 희곡이야 오죽하랴.


이만 각설하고, 나는 이쯤에서 내가 읽은 작품들 가운데 '명대사' 만이라도 몇 대목쯤 다시 찾아 보고 거듭 재음미하고 싶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즐거움이 반드시 그의 작품이 다루는 이야기에만 있는 건 결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숱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잊지 못할 대사 하나 하나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찬란하게 빛내는 보석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보석은 원래 자리잡고 있던 보석함에서 잠시 꺼내 놓더라도 결코 그 가치가 퇴색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셰익스피어의 반짝이는 대사들을 여기에 옮겨 적는 일은 구석진 내 서재를 잠시나마 그런 보석들로 환하게 빛내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무 많은 보석들을 여기에 한꺼번에 꺼내 놓아 '보석 구경'에 싫증을 일으킬 생각까지는 없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려진 '보석 같은 명대사'를 식상하게 다시 꺼내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이내 보석을 돌처럼 여기고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릴지 모를 테니까 말이다.


우선『햄릿』부터 시작해 보자. 그가 바로 셰익스피어를 영원토록 빛낼 대표적인 인물이니까.


나에겐 까마득한 옛날에 아동용 버전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때의 기억들은 뿔뿔이 어디론가 다 흩어지고 달아났지만 아직까지도 단 한 가지는 남겨 놓았다. 그건 바로 '암투에 휩싸인 궁궐 속 인물들이 서로 싸우다가 죽이고 죽는 이미지'다. 햄릿이나 오셀로나 맥베스나 리어 왕이나 하나같이 '궁궐'과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빠지지 않았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읽었던 아동용 작품 속에 그런 이미지들이 실제로 그림으로 실려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햄릿』의 수많은 대사 가운데 나는 다음 대목을 맨 처음으로 내세우고 싶다. 대사의 맨 끝 부분에 특히 주목하기 바란다.


       호레이쇼

보십시오, 왕자님, 왔습니다.


            햄릿

구원의 천사들은 저희를 지키소서!

네가 좋은 귀신이든 저주받은 악귀든

하늘 바람 타고 왔든 지옥 돌풍 몰아왔든

네 의도가 사악하든 자비롭든지 간에

질문하기 알맞은 모습으로 왔으니까

난 말을 걸겠다. 난 너를 햄릿, 대왕, 아버지,

덴마크 왕이라 부르겠다. 오, 대답하라.

내가 몰라 터질 것만 같으니 말을 해라,

죽었을 때 예를 갖춰 입관한 시신이 왜

수의를 찢었으며 묘지는 왜 너를

우리가 봤을 땐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도

육중한 대리석 턱을 열고 입 밖으로

다시 토해 내었는지, 이게 무슨 뜻이기에

너, 죽었던 시신이 완전 무장 다시 하고

이렇게 명멸하는 달빛 속에 되돌아와

이 밤을 무섭게 만들면서 자연의 노리개인

우리의 마음을 영혼이 못 미칠 생각들로

이토록 끔찍하게 흔드느냐? 웬일이냐?

뭣 때문에? 우리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햄릿』, <1막 4장>



비단『햄릿』만이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많은 희곡들을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뭣 때문에? 우리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이 말이야말로 우리가 『햄릿』을 읽고,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을 더 찾고, 더 나아가 숱한 문학작품을 끊임없이 찾아 읽는 궁극적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햄릿과 묘를 파는 산역꾼>, 빠스깔 다낭-부베레, 1883년



《햄릿》의 오필리아, 칼 프리드리히 빌헬름 트라우트숄트(1815∼1877), 독일



이제 『오셀로』로 넘어가 보자. 이 질투심 많은 무어 인 장군에게 우리가 너무 많은 질책을 하진 말자. 그가 데스데모나를 죽일 만큼 강력한 질투심을 일으킨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지 말이다. 그가 '자신의 행적과 인간성'을 베네치아 정부에 고할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려달라고 말한 대목만큼 인상적인 대사도 드물다.


           오셀로


무엇을 줄이거나

악의로 적지도 마시오. 그러면 당신은

분멸없이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을

질투를 쉽게 하진 않지만 하도록 만들면

극도로 혼란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자기네 부족보다 더 값진 진주를 던져 버린

비천한 인도인 같은 자를, 차분한 두 눈은

기분 따라 쉬 녹진 않지만 아라비아 나무가

약용 진액 흘리듯 눈물을 줄줄 쏟는 사람을

말해야만 할 것이오.


『오셀로』, <5막 2장>


<오셀로, 데스데모나, 이아고>, 헨리 먼로(1791∼1814)


오셀로와 가슴 아픈 사별을 나눴다면 늙은 리어 왕을 한결 가볍게 만날 수도 있다. 그는 비록 늙어 비참한 모습으로 두 딸로부터 버림까지 받아가며 방황하는 노인이지만, '아내를 죽이고 자결한 오셀로' 만큼 독자들을 울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코델리어가 자객에게 죽임을 당한 걸 알고 나서 비통하게 울부짖는 리어 왕의 다음 대사는 눈물 없이는 듣기 어려운 대사가 이닐 수 없다.


          리어 왕


불쌍한 내 바보가 죽었다. 생명이 없다 없어!

왜 개나 말이나 쥐는 살아 있는데

넌 숨조차 못 쉬느냐? 넌 다시 못 돌아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리어 왕』, <5막 3장>


<감옥에서 아버지 리어왕을 위로하는 코델리아>, 조지 윌리엄 조이(1844∼1925), 1886년


『햄릿』과 『오셀로』와 『리어 왕』의 주인공이 하나같이 독자들에게 일종의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라면, 『맥베스』는 도리어 주인공의 죽음이 독자들에게 만족을 안겨준다는 점이 다르다. 그것도 맥베스에 의해 부인과 어린 아들까지 잃은 맥더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맥베스가 맥더프의 처자식들을 죽인 뒤에 '휩싸인 불안' 때문에 겪는 고통을 노래하는 대목은 '인생 무상'을 떠올리게도 만드는 '아주 여운이 긴' 대사이다.


         맥베스

내일과 또 내일과, 내일과 또 내일이

이렇게 쩨쩨한 걸음으로, 하루, 하루,

기록된 시간의 최후까지 기어가고

우리 모든 지난날은 죽음 향한 바보들의

흙 되는 길 밝혀 줬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맥베스』, <5막 5장>


벌써 우리는 덴마크의 엘시노어 성(『햄릿』의 무대 배경)에서 출발하여 베네치아와 키프로스 섬(『오셀로』의 무대 배경)을 거쳐 브리튼의 리어 왕궁과 스코틀랜드의 덩컨 왕궁(『맥베스』의 무대 배경)을 모두 빠르게 지나왔다. 이젠 지중해에 자리잡은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를 숨가쁘게 오갈 차례다. '세기의 연인'으로 불려 마땅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활동무대가 바로 거기이기 때문이다.


이 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사는 '클레오파트라'를 몹시도 궁금해 하는 '로마 사람들'에게 '안토니우스의 부관 이노바부스'가 그녀를 묘사하는 대목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도 『안토니우스 편』에 이르면 갑자가 귓가를 세차게 때렸던 칼 부딪치는 소리와 대포소리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와 '여인의 향기'가 꼬끝을 휘감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인데, 셰익스피어는 플루타르코스보다 한술 더 뜬다.



     이노바부스

그녀가 탄 배는 물 위에서 불타는

빛의 옥좌 같았는데 선미는 금박이고

돛은 자주색으로 향수 냄새 진동하여

바람이 상사병에 걸렸죠. 피리 소리 따라서

은으로 된 노 저을 때 부딪치는 물결은

얻어맞는 애무를 받고 싶어 하는 듯

더 빨리 따라가게 되었죠. 그녀의 자태는

형용이 불가능했답니다. 천막 안에

금실로 수놓은 옷을 입고 누웠는데

실물보다 상상력이 뛰어난 그림 속의

비너스보다 더 나았지요. 그녀의 양쪽엔

귀여운 보조개 소년들이 큐피드처럼 웃으며

색색의 부채 들고 섰었는데, 그 바람은

섬세한 그녀 뺨을 식혔다가 태우는 듯

한 일을 망치는 것 같았죠.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2막 2장>


'세상의 절반을 가졌던' 남자와 '세상의 전부를 가질 수도 있었던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의 러브 스토리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안토니우스가 좀 더 팔팔했던 한 때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 자칫 도매금으로 그와 함께 휩쓸려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브루투스의 방심'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선 남자 주인공이지만『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도 남우조연상을 받을 만큼 두루 맹활약을 펼친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당에 의해 카이사르가 살해된 직후, 죽은 카이사르의 명예를 빠르게 회복시킨 건 바로 그였다. '사자후'를 토하듯 뜨겁게 쏟아낸 그의 연설이 로마 시민들을 삽시간에 흥분시키고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일당은 '안토니우스의 명연설' 때문에 졸지에 '개혁의 상징'에서 '불의의 쿠데타 세력'으로 내몰려 도망다니는 신세로 돌변한다.


『줄리어스 시저』의 주인공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브루투스이다. 이 멋지고 용감하고 고상한 로마인은 단지 자신만 훌륭한 게 아니었다. 小카토의 딸이었던 그의 아내 또한 브루투스 못지 않았다. 몽테뉴와 마키아벨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위대하다고 칭송했던 로마의 인물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小카토와 브루투스였다.『줄리어스 시저』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아마도 브루투스가 고백한 말 "내가 시저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소. 나는 로마를 시저보다 더 사랑했을 뿐이오."라는 대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브루투스의 죽음 이후에 안토니우스가 그를 기려 고별사에서 했던 말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그런 대사를 나는 이번에야 비로소 접했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이 사람이 그들 중 가장 귀한 로마인이었다.

그를 뺀 나머지 공모자들 모두는

위대한 시저에게 악심 품고 그 짓 했다.

오직 그만 공적이고 정직한 생각에서

모두의 공익을 위하여 한패가 되었다.

그의 삶은 고귀했고 인성은 완벽하여

자연의 여신조차 일어서서 온 세상에

'이게 사람이었다,'라고 했을 것이다.


『줄리어스 시저』, <5막 5장> 중에서



《줄리어스 시저》의 한 장면, 브루투스 역의 에드먼드 킨, 제임스 노스코트(1745∼1831)



연극의 무대가 아직까지도 지중해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베로나가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몬터규 家와 캐풀릿 家의 싸움이 벌어지는 베로나 거리는 서둘러 건너뛰도록 하자. 이미 로미오와 줄리엣이 날이 새도록 나눴던 대화를 앞에서 길게 인용했으니 말이다.


이젠 슬픔과 비탄과 유령과 무덤과 죽음 등이 가득했던 비극을 건너 뛰어 '유쾌한 희극'으로 넘어갈 차례다. 내가 찾은 첫 번째 무대는 테세우스가 다스리는 그리스의 아테네다. 그곳에선 세 쌍의 커플이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지만, '한여름밤의 꿈'을 꾸고 나서 한바탕 '대소동'을 치를 때까진 '아직' 아니다. 연인들끼리 서로 복잡한 사랑의 갈등을 겪기 때문인데, 그 갈등을 풀기 위해 오베론이 쓰는 '마법의 즙'이 도리어 일을 더 꼬이게 만든다.


        오베론

바로 그 순간에 (너는 못 봤지만) 나는 봤어,

차가운 달님과 땅 사이를 날아가는

중무장한 큐피드를. 서쪽에서 등극한

아름다운 정녀(貞女)를 그는 겨냥했었고

십만의 가슴을 뀌뚫을 듯 세차게

사랑의 화살을 시위를 놓으면서 날렸지.

하지만 그 어린 큐피드의 불같은 화살은

순결하고 습기 찬 달빛 속에 꺼졌으며

수녀 여왕께서는 연정에 안 빠진 채

처녀의 명상을 계속하고 계셨단다.

근데 난 그 화살이 떨어진 곳 지켜봤어.

서쪽의 작은 꽃에 떨어졌고 원래의 우윳빛이

사랑의 상처로 이제는 자주로 변했는데

처녀들은 그것을 팬지라고 부른단다.

내가 한 번 보여 줬던 그 꽃을 가져와라,

잠자는 눈꺼풀에 그 꽃 즙을 바르면

눈 뜨고 처음 보는 생물에게, 남자든 여자든

미치도록 혹하게 만들 수 있단다.

그 약초를 가져와, 그런 다음 너는 다시

큰 고래가 삼 마일을 가기 전에 여기로 와.


『한여름 밤의 꿈』, <2막 1장>



《한여름 밤의 꿈》의 허미아와 라이샌더, 존 시몬즈 作



《한여름 밤의 꿈》의 허미아와 헬레나, 조지프 세번(1793∼1879)



이제 아테네 근처 숲에서 겪은 대소동은 '한여르 밤의 꿈'처럼 지나갔다. 나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다시 한번 건너갈 필요가 생겼다. 악명높은 유대인 샤일록이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 '계약 이행'을 하라며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불쌍한 안토니오는 이미 파산지경이라 돈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처녀를 신부로 맞아들인 친구 바사니오가 원금의 몇 배를 쳐서 그 빚을 갚아주겠다고 나섰으나 샤일록은 오로지 '1파운드의 살'만 가져가겠노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특히 '삶의 교훈'으로 삼을 만한 '뛰어난 처세훈' 이 많은 게 특징이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베네치아의 신사' 그라티아노가 말한 '이 세상 모든 것은 얻었을 때보다 좇을 때가 더 좋은 법'이라는 말은 몽테뉴가 『수상록』에서 거듭 주장하는 대표적인(?) 철학 가운데 하나다. 이런 대목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몽테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렇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싯구들은 셰익스피어가 아니었다면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표현임에 틀림없다.


        살라리노

오, 비너스의 비둘기는 안 깨진 서약을

지켜 주러 갈 때보다 사랑의 새 언약을

맺어 주러 날아갈 때 열 배나 더 빠르다네.


     그라티아노

언제나 맞는 말씀. 연회석에 앉을 때의

그 왕성한 식욕 갖고 그 누가 일어서죠?

지겨운 걸음걸음 같은 길을 되밟는데

처음 뛸 때 치솟았던 열기가 살아나는

그런 말은 또 어딨죠? 이 세상 모든 것은

얻었을 때보다 좇을 때가 더 좋은 법.

깃발 덮인 범선이 고향 해안 떠나갈 때

창녀 같은 바람 품에 얼싸안긴 그 모습은

얼마나 멋들어진 막내 또는 탕아인가!

창녀 같은 바람에게 돈 뺏기고 몸을 망쳐

비바람에 찢긴 늑골, 걸레 조각 돛을 달고

돌아올 땐 또 얼마나 비참한 탕아인가!


 『베니스의 상인』, ,2막 6장>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악명높은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조연일 뿐이다. 몇 척의 배를 '모험 사업'에 몽땅 올인한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 역시 조연이다. 진짜 주인공은 '막대한 유산'과 '미모'와 '미덕'을 두루 갖춘 예비 신부감 포셔다.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신랑감을 고르기 위해 '유언'과 함께 준비해 놓은 '금궤, 은궤, 납궤 고르기 게임'과 '반지의 혼란'이 '인육 재판'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낭만적 희극의 묘미'를 만끽하게 만든다.


《베니스의 상인》의 포셔, 찰스 에드워드 페루기니(1839∼1918, 이탈리아)


또한『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음악'이 유별나게 중요한 역할을 떠맡는다. 샤일록의 현명한 딸 제시카와 그녀에게 구혼하는 로렌초가 주고 받는 '달빛 소나타' 같은 이중창은 그 어떤 오페라의 이중창도 감히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런 밤에' 이토록 멋진 가락을 제쳐 놓고 『베니스의 상인』을 서둘러 덮긴 힘들다. 게다가 '별이 빛나는 깜깜한 밤'에 이 글을 시작했으니 '달빛이 밝은 밤'이 나오는 대사로 마무리짓는 것도 나로선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닐 듯싶다. 벌써 어디선가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어서 여길 벗어나 다시 셰익스피어로 되돌아 가자. 그가 유혹하는 다음 작품이 맞춤하다.『좋으실 대로』


        로렌초

달빛이 참 밝네. 이 같은 밤이었지.

달콤한 바람이 나무에게 부드럽게 입 맞추면

나무는 소리 없이 서 있는 이런 밤에

트로일로스는 트로이 성벽에 올라가

크레시다 잠자는 그리스 편 천막을 향하여

혼 빠진 듯 한숨을 쉬었겠지.


        제시카

                                    이런 밤에

티스베는 겁을 내며 이슬 밟고 걷다가

사자의 그림자를 사자 앞서 보고는

놀라서 도망을 쳤었지.


        로렌초

                                    이런 밤에

황량한 바닷가 제방에 디도는 홀로 서서

버들가지 잡은 손을 애인에게 흔들었지,

카르타고 다시 찾아오라고.


        제시카

                                    이런 밤에

메데이아는 이아손 노인을 정말로 회춘시킨

마법의 약초를 모았었지.


        로렌초

                                    이런 밤에

제시카는 부유한 유대인에게서 도망쳐

반편이 애인과 더불어 베니스를 벗어나

저 멀리 벨몬트로 달아났지.


        제시카

                                    이런 밤에

로렌초는 확실한 사랑을 맹세하며

수많은 서약으로 그녀 혼을 훔쳤는데

진실된 건 하나도 없었지.


        로렌초

                                    이런 밤에

어여쁜 제시카는 말괄량이 소녀처럼

애인을 욕했으나 그는 용서했었지.


          제시카

아무도 안 왔으면 밤새 해도 이길 텐데.

하지만 들어 봐, 사람의 발소리야.


『베니스의 상인』, <5막 1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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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5-19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익스피어를 깊이 있게 읽지는 못했지만, 읽다보니 대화 하나하나가 ‘시‘로 구성되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대화 몇 구절만 외워도 별 의미없는 영어회화 공부하는 것보다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요즘 「맥베스」를 읽는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5-19 11:23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들이 ‘대사의 절반 이상이 운문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번역 과정‘에서 그런 운율을 충분히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더군요. 다행히 최종철 교수님이 ‘운문 형식‘으로 새로 번역한 ‘민음사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는 그런 문제점을 적잖이 해소한 중요한 시도라 보여집니다. 최종철 교수님이 번역한 똑같은 작품도 더러 비교해 봤더니 ‘과거의 산문 번역‘과 ‘새로운 운문 번역‘은 적잖은 차이가 있더군요. 겨울호랑이 님께서 지금 읽고 계신 『맥베스』의 영문판은 소위 ‘약강 오보격 무운시‘의 형식을 얼마만큼이나 느낄 수 있는지도 갑자기 궁금해 지는군요. 이쯤에서 다시 한번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에머슨이 셰익스피어의 ‘시적인 문장들‘에 대해 남겼던 참으로 인상적인 말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 * *
셰익스피어 극의 명대사는 그 모두가 마음이 황홀해질 정도의 문장이고 누구나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그 주옥같은 명문을 맛보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히는데 동시에 그 문장에는 논리학자까지도 감탄하게 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고 시종 훌륭한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작품의 피날레도 훌륭한데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조리가 또 대단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상호 양립이 안 될 것으로 보이는 모순된 요소를 절묘한 창의로 결부시키는 문장의 묘기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가 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말하자면 문학의 명마를 타고 어디까지라도 달리는 기수와도 같은 것이다. 어디로 가건 아름다운 문예의 꽃을 피울 수 있으므로 말에서 내려 수수한 산문의 대지를 걸을 필요는 전혀 없다.

겨울호랑이 2017-05-19 11:36   좋아요 1 | URL
영어 원문을 읽기는 하지만, 그 깊이를 영문화권에 사는 이들처럼 느끼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다소 아쉬움이 들지만, 자주 접하다보면 더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가져봅니다.^^:
 


인간에게 전후를 살피도록 풍부한 판별력을 부여하신 분이,
그런 능력과 존엄한 이성을 주었을 땐,
사용도 못해본 채 곰팡이가 생기도록
하시려 함은 확실히 아니렷다.


<햄릿> 4막 4장, 36-39


 * * *


셰익스피어는 거대한 사람이다. 인도와도 맞바꾸지 않겠다는 어느 영국인의 호언장담이 빈 말도 아니었다. 그는 인도보다 훨씬 더 넓은 땅을 자신의 그림자로 가릴 만큼 충분히 거인이니까 말이다. 그런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이 얼마나 다채롭고도 장엄할까. 그러나 그가 거대한 사람이니만큼 그에게 다가서려는 독자들의 발걸음을 그만큼 주춤거리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평생 독서 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은 '셰익스피어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요약했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등정의 결과가 달라진다."


참으로 멋진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젊어서 한 때는 암벽 등반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났던 등산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직접 네팔에서 사다 주신 '에베레스트 실물 사진'이 아직도 내 책상 머리맡에 걸려 있다. 한때나마 나는 꽤나 자주 그 사진을 올려다 보며 '언제쯤 저길 오를 수 있을까' 하고 꿈꾸었지만 이젠 좀처럼 그 사진을 올려다 보지 않는다. 그런 도전을 하기엔 세월이 너무 흘러버린 탓이다. 다만, 그런 사연들이 쌓인 덕분에 마침내 4년 전에 히말라야로 떠날 수 있었고, 그때 비로소 '희박한 공기'를 온 몸으로 체감하며 눈덮힌 고봉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은 안다.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사실대로 말하자면, 숱한 전문 산악인 조차도 에베레스트 정복은 힘들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내가 경험했던 체르코리(해발 4,950m) 등정만 하더라도 돌아보면 몹시 힘겨웠다. 평소 풍부한 등산 경험과 막강한 체력을 갖춘 등반 애호가들 12명이 함께 도전에 나섰으나 상당수는 4,500m를 쉽게 넘어서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으니 말이다. 나를 포함해 겨우 셋만 고지를 정복했는데 4,500m 이상에서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덮인 너덜지대를 통과할 땐 털썩 주저앉고 싶은 때가 정말 여러 번이었다. 불과 두세 걸음을 옮긴 후에도 극심한 메스꺼움을 느끼면서 가쁜 숨을 연신 몰아쉬어야 했다. 거기엔 산소가 평지의 1/3에 불과했다. 그토록 희박한 공기 속에서 중력과 사투를 벌이는 일이 얼마만큼 고역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체험이었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들었던 얘기 하나도 문득 떠오른다. 한국 사람들은 성미가 급해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거꾸로' 다녀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방법은 이렇다. 해발 4,000m든 5,000m든 최종 목적지를 헬기로 먼저 이동한 다음 거기서부터 도보로 천천히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시도되는 그런 방식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 진짜로 문제다. 대략 해발 2,800m 이상에서는 으레 '고산병 증세'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고소 적응 과정'도 없이 갑자기 4,000∼5,000m 고지에 오르면 '고산병'이 아주 극심해진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 가운데 이런 식으로 트레킹에 나섰다가 하산 도중에 고산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다시 셰익스피어로 돌아오자.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싶은 욕망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단번에 그 높은 봉우리를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와 같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를 수만 있다면 그와 함께 절경을 내려다볼 수도 있겠지만 도리어 섣불리 뛰어들었다가는 '참패'를 맛볼 가능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셰익스피어가 거인이라고 하더라도 에베레스트에 비유한 건 과장이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를 악물고 도전한다면 누구라도 셰익스피어를 읽어낼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등정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패디먼의 말에는 고도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고소 적응 훈련'도 생략한 채 너무 무리해서 셰익스피어에 다가가다가는 자칫 '고산병 증세'를 견디지 못하고 너무 일찍 하산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셰익스피어에 다가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보여주는 멋진 절경들'을 즐겁게 보며 만끽하고 싶은 것이지 온갖 고통을 겪더라도 단지 오르는 데만 최종 목표를 둔 게 결코 아니다.


이쯤에서 패디먼의 말을 조금만 더 들어보자. 그의 말엔 조금 더 효율적인 등반 안내 지침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인간이었지 반신半神이 아니었다. 그는 콜리지가 말한 것처럼 "일천 가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매슈 아놀드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무오류의 인간도 아니었다. 인류가 낳은 많은 천재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극단에 소속된 장인이었고, 바쁜 배우였으며, 영리하여 점점 번영을 구가한 사업가였다. 천재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고, 셰익스피어가 그 좋은 사례이다.

셰익스피어의 전집을 읽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사람이 평균적으로 70세를 산다고 보고 그 중에서 반년 정도의 시간을 투입하여 전집을 읽는다면 충분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하겠지만,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37편 중에서 다음 12편을 필독서로 권한다. 한꺼번에 다 읽을 생각을 하지 말고 평생에 걸쳐 한 권씩 한 권씩 읽는 방법이 더 좋다. 『베니스의 상인』, 『로미오와 줄리엣』, 『헨리 4세』1부와 2부, 『햄릿』,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 『되에는 되로』, 『리어왕』, 『맥베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오셀로』, 『태풍』.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


이쯤 되면 패디먼의 이야기는 '에베레스트 정복'보다 한결 수월해 보이고, 한껏 고무적인 이야기로 변한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저런 이야기를 가슴에 꼭꼭 담아 두고서 '세익스피어는 최대한 천천히 만나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더랬다. 내가 앞에서 인용한『평생 독서 계획』속 문장들을 알라딘 페이퍼로 옮겨 놓은 게 어언 7년 전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셰익스피어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http://blog.aladin.co.kr/oren/4369861)


셰익스피어를 억지로 외면한다고 해서 그가 영영 우리들 눈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우리가 네팔이나 히말라야까지 가지 않더라도 평소에 영화나 TV 프로그램 등을 통해 '에베레스트'를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꾸준히 책을 읽다 보면 언젠가는 아무런 예고조차 없이 불쑥 나타나는 셰익스피어를 가끔씩이라도 만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랬다. 사실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한『햄릿』의 대사 또한 내가 13년 전에 어느 책의 리뷰를 쓸 때 인용했던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서 이번에 재인용하게 된 터이니 말이다.(http://blog.aladin.co.kr/oren/521441) 우리는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가끔씩이나마 셰익스피어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록 그 유명한 『햄릿』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한 독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작품 속의 대사 몇 가지는 충분히 외울 정도로 셰익스피어에게 이미 익숙하기도 하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혹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은 그 유명한 대사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여기저기서 거듭 만나게 되는 셰익스피어를 보면서도 한사코 그를 계속 외면하는 일은 '지금 당장' 작심하고 그를 만나러 가는 것만큼이나 고역일 때도 있다. 셰익스피어를 만나러 가자니 그를 너무나 몰라볼 내가 두렵고, 그를 계속 피하자니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을 내가 너무나 몰라볼까 두렵다고나 할까. 혹시라도 누가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나『오셀로』에 나오는 그 나쁜 이아고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올 가능성은 이제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결코 없다고 누가 과연 보장할 수 있을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말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다면서 끝끝내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은 『리어 왕』의 막내딸 코델리어에 대해서라면? 『헨리 4세』의 1부와 2부에 계속 연이어 등장하는 폴스태프는? 헨리 4세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폴스태프를 알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알라디너 Falstaff라면 또 몰라도... 차라리『로미오와 줄리엣』에 관한 이야기라면 뭔가 조금이라도 아는 체를 할 수도 있으련만...


내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몰라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을 때였다. 그 작품 또한 '침투하기가 불가능한 소설처럼 보인다'는 말을 진작부터 들은 터였지만, 나는 사생결단 작정을 하고 그 소설을 읽어 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장담한다고 약속했던 '기기묘묘한 풍경들'을 충분히 엿볼 수도 있었다. 그 소설은 인상적이지 않은 장들이 하나도 없었지만 내겐 특히 마지막 장이 백미였다. 쉼표 하나 없이 끝없이 펼쳐진 '몰리의 독백'을 읽는 기쁨은 정말 숨이 가쁠 정도로 짜릿했다! 물론 그런 기쁨은 내가 사투 끝에 최초로 올랐던 '해발 716m의 암봉'을 완등했던 경험과도 사뭇 닮은 데가 있었다. 가슴 한가득 터질듯 밀려오는 '완등의 기쁨'은 『율리시스』의 마지막 장에 담긴 '몰리의 독백'이 끝난 이후에 곧바로 찾아올 '완독의 기쁨'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게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에 나는 또한 몇 번씩이나 '햄릿처럼' 망설임에 휩싸였던 순간들이 있었음도 고백해야겠다. 내가 겪었던 그 망설임을 '햄릿'처럼 표현해야 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비슷하리라. '이대로 아일랜드 더블린에 계속 남을 것인가, 아니면 영국 런던으로 훌쩍 건너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왜냐하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속 공간인 '아일랜드 더블린'에 계속 남아서 그의 작품 속 인물들과 계속 대화를 나누기에는 '아일랜드 국립 도서관'이 너무나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다시 풀어서 말하자면, 『율리시스』 의 <제9장 국립도서관>에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관한 이론'이 내겐 너무나 혼란스러웠다는 말이다. 그 대목들은 마치 사나운 파도처럼, 혹은 무서운 폭풍처럼 격랑을 일으키며 나를 금방이라도 쓰러뜨릴 것처럼 엄습해 왔다. 그래서 나는 당장이라도 그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시바삐 '제임스 조이스'에서 벗어나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서 '셰익스피어'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율리시스』의 제9장은 특히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가운데 '스퀼라와 카륍디스'에 대응하는 장이어서 '격랑'이 특별히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듯하다. ☞ http://blog.aladin.co.kr/oren/7136986)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에 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인용된 부분을 따로 기록해 놓았다. 나중에 언젠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게 되면 '해당 부분'을 찾아서 다시 읽어볼 셈이었다. 이 기록만 보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율리시스』에 깊게 녹아들었는지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비극, 희극, 사극, 로맨스, 소네트 등 온갖 분야를 마음먹은 대로 표현하고 다룰 줄 알았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조이스 역시 천재성이 남달랐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을 율리시스에 자유자재로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단연 걸작인 만큼 조이스도 쉴 새 없이 『햄릿』을 인용했다. 나는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인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줄리어스 시저』등이 인용된 부분을 일일이 '다시 찾아서' 읽어봤다. 제임스 조이스가 셰익스피어를 어떤 식으로 인용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작품들도 읽는 대로 다 확인해볼 참이다. 저런 기록을 남겨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셰익스피어를 좀 더 빨리 만나도록 나에게 자극을 준 또다른 인물은 엉뚱하게도 에머슨이었다. 그는 이미 “만일 전 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뛰어 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라는 말로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바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온통『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만 관심이 있었다. 셰익스피어보다는 플루타르코스를 먼저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셰익스피어는 플루타르코스 때문에 또다시 뒷전으로 밀려났다. 나는『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두 번이나 거듭 읽고 난 뒤에 에머슨의 『위인이란 무엇인가』를 찾아 읽었다. 내가 그 책으로 건너간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영웅들에 대한 '에머슨의 평가'가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는 그 책 속에 몽테뉴가 등장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본 듯했기 때문이었다. 몽테뉴가 가장 좋아한 작가가 플루타르코스였으니 에머슨이 들려주는 '몽테뉴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에머슨의 『위인이란 무엇인가』에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영웅'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기대했던 몽테뉴도 없었다!


사정을 좀 더 살펴 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 책은 원제목이 《대표적 인물 Representative Men》(1849)이라는 책이었고, 거기엔 원래 나폴레옹, 괴테, 셰익스피어, 스베덴보리, 몽테뉴, 플라톤이 담겨 있는데, 우리나라로 건너 오면서 하필 '몽테뉴'만 쏙 빠트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뭐 어떠랴 싶었다. 그 책엔 뜻밖에도 '셰익스피어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가득 들어 있어서 당초에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예상 밖의 소득을 얻은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몽테뉴를 갑자기 잃어버린 느낌은 도대체 어디에다 하소연을 해야 좋을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몽테뉴의 글이 너무 살아 있어서 단어들을 자르면 피가 나올 것 같다."는 식의 에머슨의 놀라운 표현들을 잔뜩 기대했던 나로서는 몽테뉴가 통째로 잘려 나간 번역본을 보면 아직도 몽테뉴가 진짜로 피를 흘리며 잘려나간 듯해서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나중에 언젠가는 에머슨의 글로 쓰여진 몽테뉴가 보란 듯이 이 땅에 버젓이 나타날 날도 있으리라.


'여태껏 셰익스피어를 만나지 않고 아주 잘도 지내 왔군.' 하고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을 내게 안겨준 또다른 인물은 예일대에서 오랫동안 문학을 강의해온 헤럴드 블룸 교수였다. 그가 쓴 『교양인의 책읽기』는 여러 명의 소설가와 시인과 극작가를 다루고 있는데 셰익스피어는 특별히 <시인편>과 <극작가편>에 거듭 얼굴을 내민 유일한 인물이었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를 다룬 부분에서는 특별히『햄릿』을 매우 깊이있게 다루고 있어서, 그 작품을 미처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 편도 제대로 읽지 못한 학생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특강'을 다루는 예일대 강의실에 불쑥 끼어든 꼴이라고나 할까. 그런 당혹감이야말로 더 이상 셰익스피어와 햄릿을 외면할 수 없는 더없이 강력한 자극제였다.


더군다나 헤럴드 블룸은 그 책에서 '셰익스피어'를 '문학 일반'을 다룰 때에도 너무나 자주 언급하고 있어서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심지어 셰익스피어를 모르면 숱한 다른 문학작품들 속에 셰익스피어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치거나 몰래 숨어들어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조차 없다는 식의 설명들도 많았다. 그러니 내가 받은 압박감이 어느 정도로까지 치솟았을지는 더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남들이 너무나 빤히 아는 인물들에 대해서 실컷 얘기하며 웃고 떠들고 있을 때를 가정한 뒤에, 그런 대화에 낀 참석자들 가운데 유독 나만이 대화에 오른 화제의 인물들에 대해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 당혹감이야말로 사람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게 굴복시키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 알게 되었다.


나는 마침내 셰익스피어의 책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부터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나는 '햄릿'의 대사에 화들짝 놀랐다. 거기엔 놀랍게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숨어 있었고, 심지어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헤카베』까지도 숨어 있었다. 『햄릿』2막 2장에 나오는 '극중극'에서 햄릿은 배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은연중에 그 자신이 '배우'이자 '시인'이 되어 '극중극'의 대사를 배우에게 들려준다. 다음과 같이.


                 햄릿

그 극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대목이 있는데 그건 아이네이아스가 디도에게 해 준 얘기로, 특히 그가 프리아모스의 도륙을 말하는 부근이야. 기억할 수 있거든 이 줄에서 시작해 보게 ㅡ 어디 보자, 어디 보자 ㅡ


'험상궂은 퓌로스가 히르카니아의 야수처럼' ㅡ

이게 아냐. 퓌로스로 시작하는데 ㅡ

'험상궂은 퓌로스가 불길한 목마 속에

쭈그리고 앉았을 땐 칠흑 같은 갑옷이

자신의 의도처럼 검은 밤을 닮았더니

지금은 그 무섭고 검은 모습 더욱더

불길한 색깔로 물들었소. 그는 지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시뻘겋게

아비, 어미, 딸들과 아들들의 핏물로

끔찍이 채색되어 그들 왕의 살해에

포악과 저주를 더하면서 불타는 거리에서

바짝 말라 구워졌소. 분노와 불길에

딱딱해진 피껍질을 온몸에 덮어쓰고

석류석 붉은 눈빛, 지옥 같은 퓌로스가

프리아모스 노친을 찾는다오.'

이어서 자네가 계속하게


      폴로니우스

            맹세코, 왕자님, 잘 읊으셨습니다. 억양도 좋으시고 분별력도 좋습니다.


                                                                                  

                                                                                    - 『햄릿』, <2막 2잘> 중에서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극중극'으로 '퓌로스'를 등장시킨 건 뚜렷한 의도가 있었다. '친부 살해'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햄릿의 롤모델이 바로 퓌로스였기 때문이다. 사실 『햄릿』에서 '햄릿'과 똑같은 처지(자신의 부친이 살해당한 데 대해 복수를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아들)에 있는 인물은 햄릿 말고도 포틴브래스와 레어티스까지 셋이나 된다. 거기에 더해 셰익스피어는 '극중극'을 통해 '퓌로스'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퓌로스는 일명 네옵톨레모스라고도 불리는데,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이면서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스』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이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주제이다. 그의 분노가 전쟁을 멈추게도 하고 원정군을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게도 만들지만, 그의 분노가 가라앉을 땐 적국의 대왕인 프리아모스를 감동시킬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아킬레우스는 전쟁 중에 파리스의 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맞아 죽고, 그의 아들 '퓌로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쟁에서 놀라운 맹활약을 펼친다. 그는 10년 동안이나 함락되지 않는 트로이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헤라클레스의 활'을 구하기 위해 필록테테스를 만나러 갈 때에도 중요한 임무를 띠고 오뒷세우스와 함께 렘노스 섬으로 파견된다. 결국 오뒷세우스는 가엾은 필록테테스와 그가 지닌 '헤라클레스의 활'을 동시에 얻게 되지만, 필록테테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꾀고 설득하는 임무를 띤 건 '착한 퓌로스'였다. 그는 필록테테스가 잠든 사이에 활을 훔쳐내지만 '활도 없이 섬에 홀로 남아 지낼' 그를 너무나 가엾게 여겨 그에게 되돌아간다. 그리고 훔친 활을 도로 돌려준다. 그토록 착한 퓌로스였지만 그가 트로이아를 함락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분노'는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와 왕비 헤카베에겐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광경의 연속일 정도로 가혹했다.


나는 『햄릿』을 읽다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다시 펼칠 수밖에 없었다. 아킬레우스의 아들 퓌로스가 정말 그토록 '분노와 불길에 딱딱해진 피껍질을 온몸에 덮어쓰고' 맹렬하게 날뛰었는지를 새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그리스와 로마 신화'가 곳곳에 숨어 있다. 이런 이야기를 미리부터 알고 있던 댱대의 관객들이나 후대의 독자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다 까닭이 있었던 셈이다. 이에 관해서는 오래 전에 셰익스피어의 로맨스극 『겨울 이야기』를 번역했던 이윤기 선생님의 설명도 참고할 만하다.


종교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종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신비 참여 체험' 때문이다. 이 '신비 참여 체험'은 오로지 종교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독서는 어떨까? 나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은 책을 탐독하는 것이 '문맥에 참여하는 재미의 체험' 때문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면서 혹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오비디우스의 텍스트를 떠올리는 재미는 참으로 별난 경험이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서 자주 신화의 편린을 찾아내고는 한다.


 -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이다희 옮김,『겨울 이야기』, <『겨울 이야기』재미나게 읽기> 중에서



(내가 가진 셰익스피어 책은 이게 전부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셰익스피어 읽기'를 한사코 미루어 왔는지는 이 사진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최종철 교수가 '운문'으로 번역한 '셰익스피어 전집'은 <전10권>으로 나올 예정인데 지금까지는 다섯 권이 나와 있다. 이 가운데 전집 1,4,5,7권에 담긴 작품은 총 16편이며, 나는 이 가운데 전집 4권과 5권에 담긴 비극 작품들부터 읽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클리프턴 패디먼이 말한 '37편의 드라마 중에서 필독서 12편'이 전집 1,4,5,7권에 무려 11편이나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 네 권만 읽어도 대충 패디먼의 권유는 따르는 셈이다.)


나는 이제야 겨우 셰익스피어의 작품 여섯 편을 읽었지만 그 속에서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오비디우스, 플루타르코스의 영향들을 심심찮게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줄리어스 시저』등을 읽을 땐 플루타르코스를 통해 읽었던 '영웅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붓끝에 의해 얼마나 훌륭하게 '연극'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인 대사건을 두고도 천재 시인은 몇몇 제한된 배우들의 극적인 대사 만으로도 더없이 훌륭하게 되살리는 비상한 재주를 맘껏 뽐내고 있었다. 복잡한 배경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도 셰익스피어는 단지 배우들의 아주 짧은 방백만 가지고도 더없이 날렵하게 다른 장면들로 사뿐히 건너뛰고 내달렸다. 그런 재미까지 두루 맛볼 수 있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선행 독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윤기 선생님의 다음 말은 셰익스피어를 읽기 위한 예비 독자들에겐 더없이 훌륭한 조언일 수도 있다. 비록 뒤늦게 셰익스피어를 만났지만 나는 그의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


셰익스피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작가가 아니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호메로스로부터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신화 작가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뤼피데스 같은 그리스 비극 작가들, 헤로도토스, 플루타르코스 같은 역사가들로부터 흘러온 길고 깊은 강이라고 생각한다. 도도하게 흐르는 서양 문학의 강이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일은 그 강으로 풍덩 뛰어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이다희 옮김,『겨울 이야기』, <셰익스피어, '압축 파일' 풀기> 중에서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사람들은 예로부터 아주 많았다. 그만큼 높이 솟은 문학의 봉우리를 우리는 앞으로도 영영 다시는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겨우 셰익스피어의 작품 대여섯 편을 읽은 읽은 독자 주제에 내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먼 발치에서라도 에베레스트를 힐끗 올려다본 사람은 그 아득한 봉우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떠들기 마련이다. 이미 이십 년쯤 전에 히말라야를 훌쩍 다녀온 친구 녀석으로부터 내가 들었던 가장 강력한 말은 이랬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 히말라야에 가 본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음하하하." 수많은 작가들을 높은 산들에 비유한다면, 셰익스피어에게도 누군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엔 셰익스피어를 읽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이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행위를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데 비유한 클리프턴 패디먼의 설명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 산악인만이 도전할 수 있는 에베레스트처럼 그렇게 난공불락의 봉우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패디먼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고전"이라고 생각하며 접근하는 것보다, 새로운 드라마의 첫 공연에 참석하는 것 같은 기대감으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처럼 '희박한 공기' 때문에 숨을 헐떡거리거나 메스꺼움을 느낄 리도 없다. 든든한 장비를 두루 갖추고 아주 유능한 셀파와 함께 목숨을 걸고 도전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히말라야를 다녀온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했느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가끔씩 전혀 예상밖의 엉뚱한 대답을 하곤 한다. 거기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내가 보기엔 셰익스피어도 아마 그와 비슷한 작가인지 모르겠다. 끝까지 다 오르기는 몹시 힘들어도 그의 작품을 꾸준히 읽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걸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거대한 산 같은 작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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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1) 이왕 여기까지 내달린 김에 『위인이란 무엇인가』에 담긴 에머슨의 글도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진작에 베껴 놓은 글이고, 내가 이 글을 쓴 주목적이 독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셰익스피어에게로 끌어들이는 데 있는 바에야, 굳이 너무 아껴둘 필요도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분량이 많은 게 좀 흠이긴 하다.


셰익스피어의 창작사정

 

사실 셰익스피어는 모든 방면에서 자기작품의 소재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것은 닥치는 대로 활용할 수가 있었다.


그가 기성의 작품을 어느 정도까지 활용하고 있었는지는 말론이라는 역국 문학의 연구자가 셰익스피어의 처녀작 《헨리 6세》에 관해서 고심을 거듭해 얻은 다음의 결과로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연구성과에 따르면 '이 작품 전체의 6043행 가운데 1771행이 고스란히 선배작가로부터의 인용이고 2373행이 과거작가의 문장을 바탕으로 해서 그가 손질을 한 문장이어서 완전히 셰익스피어 자신이 하나에서부터 모두 창작한 문장은 불과 1899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 작품을 차례로 조사해나가면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하나에서부터 써낸 극작품은 한 작품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성과에서 셰익스피어의 외면적인 창작사정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69∼70쪽)



언어의 출처가 어딘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시인은 일상의 흔해빠진 거래를 소재로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시인 못지않은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아마추어도 있다. 그들은 평소에 당치도 않은 말을 내뱉다가도 극히 드물게 정신이 번쩍 드는 대사를 토해 내거나 하는데 스스로는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와 달리 시인은 언어의 반짝임에서 그 가치를 자각해 작품 속에서 자유자재로 살릴 수가 있다. 그때 그들은 그 주옥과 같은 언어의 출처가 어딘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와 같은 행복한 경지에 도달해 있던 시인으로서 대서사시 《오뒷세이아》를 쓴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있고 또 《캔터베리 이야기》로 유명한 영국의 초서나 이슬람의 명시인 사디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71쪽)



어떤 크나큰 산도 가까이에서 보았을 경우, 그 크기는 결코 모르는 것

 

우리의 천재시인은 누구의 눈에도 간파되지 않는 '가면'을 쓰고 그 본래의 위대함을 숨기고 있었다. 어떤 크나큰 산도 가까이에서 보았을 경우, 그 크기는 결코 모르는 것이다. 그의 진가가 세상 사람에게 이해되기까지에는 1세기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2세기가 지난 무렵에 겨우 그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제대로 된 비평이 나타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전기가 씌어지게 된 것은 현대로 접어든 뒤부터의 일이다.(71쪽)



누구도 그 전모를 전망할 수 없을 정도

 

셰익스피어 정신의 지평은 끝없이 펼쳐져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누구도 그 전모를 전망할 수 없을 정도이다. 훌륭한 언어의 명가락을 들으면 누구나 '셰익스피어 같다'고 연상할 정도로 우리의 음악적인 어감은 어느 초월적인 언어의 리듬에 의해서 모르는 사이에 갈고 닦아져 온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평소에 막연하게 직감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미지를 적절한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콜리지와 괴테 정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교묘한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조금이라도 문학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셰익스피어 언어의 대단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은밀하게 음미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만큼 많은 영향을 온 세계 사람들에게 준 것은 성서 말고는 생각할 수 없다.(72쪽)

 


아무리 겹쳐 쌓아도 그 '뮤즈(詩神)가 점지한 아이'를 비추는 빛은 전혀 비쳐오지 않는 것

 

역사의 표면에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혈통, 탄생, 출생지, 학력, 교우, 수입, 결혼, 출판, 명성, 죽음과 같은 자잘한 연대기를 죽 써서 늘어놓는데 그와 같은 신변잡기는 아무리 겹쳐 쌓아도 그 '뮤즈(詩神)가 점지한 아이'를 비추는 빛은 전혀 비쳐오지 않는 것이다.(73쪽)



순식간에 우리들 주위의 세계가 '희미한 달빛'처럼 현실감을 잃고 마는 것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한 당신께서

다시 온몸에 단단히 무장을 하시고

이렇게 희미한 달빛 아래

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시다니

도대체 어인 일이십니까 (제1막 4장)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이 넘치는 펜으로 옮겨지면 보잘것없는 연극소극장도 하나의 드넓은 우주로 변해 온갖 계층의 신분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무대가 좁다'는 듯이 대활약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러면 순식간에 우리들 주위의 세계가 '희미한 달빛'처럼 현실감을 잃고 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이와 같은 놀라운 마법에 걸리면 무대 뒤에서 '시대고증은 어떤가, 무대장치는 어떤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던 일은 전혀 사소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73∼74쪽)



온갖 뛰어난 예술작품에 발생한 일이 걸출한 희곡에서도 발생할 수 있었다는 말

 

요컨대 이집트나 인도에서의 위대한 석조건축, 그리스 균형미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조각, 웅장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고딕의 대성당, 이탈리아의 회화,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의 사랑스런 민요, 그 밖에 온갖 뛰어난 예술작품에 발생한 일이 걸출한 희곡에서도 발생할 수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 작품을 낳은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자 작품의 창조에서 사용된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가 제거되고 말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 위대한 작품을 보고도 그것이 <어떻게 태어냤느냐> 하는 창작의 비밀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전기를 쓸 수 잇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셰익스피어 그 사람 말고는 없다. 그리고 설사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혼과 접촉을 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심경에 도달해 있지 않으면 무엇 하나 중요한 것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74∼75쪽)



곰팡이가 낀 역사자료가 아니고 살아 있는 작품 그 자체인 것

 

고문서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셰익스피어의 창작비밀을 엿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정말로 이 인물의 역사적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것은 곰팡이가 낀 역사자료가 아니고 살아 있는 작품 그 자체인 것이다.(75쪽)



셰익스피어 자신이 간직한 마음의 흔적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삶과 죽음, 사랑, 빈부의 차, 인생의 목적과 그에 이르는 길, 인간의 성격, 또는 운명을 좌우하는 유형무형의 영향, 또 우리 인생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가져오는 것과 같은 과학의 힘을 초월한 신비적인 영의 작용 따위는 모든 사람의 혼을 뒤흔들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의 근본문제이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야말로 확실한 증언을 많이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시집》을 펼쳐서 직감이 좋은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시의 양식이고 우정이나 사랑에 관한 비결이나 다감한 정념과 냉정한 이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심리의 기미를 살며시 속삭여 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또 여러 가지 희곡 가운데에는 셰익스피어 자신이 간직한 마음의 흔적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75쪽)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해서 세익스피어가 명쾌한 지침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이렇게 보면 '셰익스피어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는 흔히 말하는 평가가 전혀 빗나간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오히려 근대사를 통해서 그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달리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도덕, 매너, 경제, 철학, 종교, 취미, 처세술과 같은 우리의 관심이 깊은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해서 세익스피어가 명쾌한 지침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판편 셰익스피어는 세상의 신비적인 일에 관해서도 의의깊은 통찰을 보여 주고 있고 모든 계층의 직업 특징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76쪽)



그는 단순한 희곡작가의 테두리를 훨씬 초월한 종합적인 거인

 

약간 세련된 실펵파 비평가 중에는 '셰익스피어를 논할 바에는 우선 무엇보다도 그 희곡을 문제로 삼는 것이 정도이고 그를 함부로 시인이나 철학자 취급을 하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만 해도 그의 희곡을 높이 평가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은 않다. 그러나 '희곡만이 그의 본래의 가치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은 바꿀 생각이 없다. 그는 단순한 희곡작가의 테두리를 훨씬 초월한 종합적인 거인이고 언제나 의미가 있는 강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 두뇌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념이나 비전을 구현하는 분출구로서 가장 편한 적합한 형식인 희곡을 채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말한 내용은 희곡이라는 틀에는 도저히 거둬들일 수 없을 정도의 보편성과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어느 성자의 전기가 운문이나 산문을 불문하고 전 세계의 모든 국어로 번역되어 노래나 그림이야기로 묘사되고 때로는 속감이 되어 민중 사이에 친숙해지고 있는 경우에 이제는 그 성자전의 내용이 얼마나 보편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고 그것이 대화체인가, 기도문인가, 또는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는 2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와 똑같은 일이 셰익스피어의 경우에도 들어맞는 것이다. 그는 근대 음악극의 '기조음계'(기조음계)'를 연주해 근대 생활이나 급관의 전형을 묘사하고 영국인이나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조인 미국인들의 모습까지도 생생하게 묘사했다. 남녀의 기미, 그 성실함, 망설임, 그리고 악덕으로 생각한 것이 미덕이고 또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인간세계의 불가사의한 역설까지 절묘하게 표현했다. 또 아이의 얼굴을 묘사해도 어디가 부친을 닮고 어디가 모친을 닮았는지와 같은 것까지 정확하게 묘사해 냈고 자유와 운명의 미묘한 경계선도 확실하게 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자연의 질서를 유지하는 억제의 감각에 통해 있었고 부침에 만만치 않은 인간 세상의 운명까지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처럼 생생하게 차분한 필치로 묘사할 수가 었었다. 셰익스피어에게 있어서는 이와 같은 인생의 지혜야말로 존귀한 것이고 그것이 씌어지는 형식이 희곡이냐 서사시냐는 2차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국왕의 칙명을 기록한 종이가 어떤 종류인가를 탐색해도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76∼77쪽)



셰익스피어의 현명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현자는 아무리 현명하다고 해도 이럭저럭 어림짐작 내에 들 정도인데 셰익스피어의 현명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인류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열심히 읽으면 그의 사고회로를 뒤쫓는 것은 어떻게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손을 들게 된다. 어떻게 그와 같은 작품이 완성되었을까 하는 것조차 상상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그 걸출한 묘사력, 창조력에서 그와 견줄 수 있는 자는 없다. 셰익스피어처럼 쓴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다. 그는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의 문학적인 세련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적 자질로도 최고봉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의 재능은 좁은 뜻에서의 작가라는 틀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디.


또 인생에 대한 풍부한 지식뿐만 아니라 멋진 서정적 묘사력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모습이나 희로애락을 마치 '같은 지붕 밑에 사는 가족'과 같은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묘사해 낼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은 등장인물의 대사는 박진감이 있고 또 실로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설사 현실의 인간이라도 그가 묘사한 인물 정도로 생생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할 것이다.(77∼78쪽)



'이토록 펜의 기적이 재현되고 있을까'라고 무심코 자기 눈을 의심하고 말 정도

 

셰익스피어는 강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작가는 아니고 위대한 것은 대범하게, 사소한 것은 세밀하게 제각기 최선을 다해 적확하게 가려서 묘사할 수가 있었다. 자신의 장기를 과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보편적인 현자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대자연에 있어서는 수증기를 공중에 떠돌게 하는 것과 똑같은 자연 법칙을 이용해 평지를 들어 올려 산의 비탈면을 만들어 내는 것쯤은 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것이다. 자연은 그 어느 일에나 차별 없이 고르게 똑같은 힘을 작용하게 한다.


셰익스피어도 또 그 자연의 조형력에 비할 만한 보편적이고 치우치지 않은 창조의 재능이 풍부했다. 그 때문에 희극, 비극, 이야기, 연가, 그런 모든 것에도 고르게 그 두드러진 재능이 발휘되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나도 뛰어나므로 우리 독자는 '자기 이외의 독자의 눈에도 이토록 펜의 기적이 재현되고 있을까'라고 무심코 자기 눈을 의심하고 말 정도이다.(78∼79쪽)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그 자체가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

 

사물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아름다운 운율에 의해서 표현할 수 있는 대단한 재능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시인 중의 시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이상학의 한 분야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능력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그 자체가 이 지구가 낳은 주요한 산물의 하나, 또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큰 징조로서 이른바 박물학이나 미래학의 연구대상이 되고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이 된 것이다.


그때에는 투명한 거울로서 온갖 것을 그 모습 그대로 비추기 시작한다. 세밀한 것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묘사하고, 위대한 것의 위대함을 남김없이 묘사하고, 희극적인 것도 비극적인 것도 모두 빠뜨리지 않고, 또 치우치는 일 없이 마음껏 묘사해 낼 수가 있었다.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머리털 한 올, 눈썹 한 귀얄, 한 점의 보조개에 이르기까지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그 탁월한 묘사력을 다해 그려낸 것이다. 이 '창조주'의 손으로 된 작품은 마치 자연계의 창조물이 그렇듯이 아무리 고성능의 현미경에 의한 자세한 조사에도 견뎌낼 정도로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져 있다.(79쪽)



셰익스피어는 말하자면 문학의 명마를 타고 어디까지라도 달리는 기수와도 같은 것

 

셰익스피어 극의 명대사는 그 모두가 마음이 황홀해질 정도의 문장이고 누구나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그 주옥같은 명문을 맛보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히는데 동시에 그 문장에는 논리학자까지도 감탄하게 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고 시종 훌륭한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작품의 피날레도 훌륭한데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조리가 또 대단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상호 양립이 안 될 것으로 보이는 모순된 요소를 절묘한 창의로 결부시키는 문장의 묘기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가 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말하자면 문학의 명마를 타고 어디까지라도 달리는 기수와도 같은 것이다. 어디로 가건 아름다운 문예의 꽃을 피울 수 있으므로 말에서 내려 수수한 산문의 대지를 걸을 필요는 전혀 없다.(80∼81쪽)



이제 경험이란 껍질은 깨끗이 벗어 버려 그 흔적을 남기는 일조차 없다.

 

보통의 시인이 쓴 시라면 가장 세련된 것처럼 보이는 시라도 최초의 계기는 일상의 경험에 있는 것이다. 그 시상은 경험으로 짜이고 서서히 변화를 거쳐 세련되어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해서 교양 있는 시인은 운문의 수준을 상당히 높은 곳까지 높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는 사람이 보면 그 세련된 시문을 통해서 그것을 쓴 사람의 개인적인 생활상이 어느 정도까지는 뻔히 보이는 것이다. 누구건 그 등장인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보면 '아아, 이 인물은 앤드류다, 그 사람은 레이첼이 틀림없다'고 모두 맞힐 수가 있다.


결국 대부분의 시인이 쓴 시는 실제로는 아직 산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충(毛蟲)에 날개가 자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히 나비가 되어 우화등선(羽化登仙) 하기까지에는 이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현실은 원형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변모해 있고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승화되어 있다. 이제 경험이란 껍질은 깨끗이 벗어 버려 그 흔적을 남기는 일조차 없다.


따라서 셰익스피어는 보편적인 문학의 정신 그 자체를 구현하고 있고 개인적인 얽매임을 일찌감치 초월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이 시인은 시인의 왕에 걸맞은 자질을 몸에 갖추고 있다.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천성의 쾌활함이다. 왜냐하면 시의 목적이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는 미와 환희와 쾌활함을 전 우주를 향해 소리 높이 노래했다.

 

확실히 그는 덕을 사랑했는데 덕 그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이나 우아함 때문에 그것을 사랑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의 생업이나 남녀의 여러 가지 관계를 진정으로 기쁜 일로 묘사했는데 그것은 그와 같은 인간의 삶에서 넘쳐나는 생명의 빛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와 환희와 쾌활함을 전 우주를 향해 소리 높이 노래했다.


일찍이 에피쿠로스는 '시는 그것을 위해 연인이 사랑하는 상대를 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정도의 마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진정한 시인이란 정말로 쾌활한 기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누워 있고 초서는 희희낙락 가슴을 펴고 있다. 또 사디에 이르러서는 '세상 사람은 내가 과거를 후회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후회 따위에는 이제까지 무관한 인간이다'라고 단언했다.


그와 같은 역대의 대시인들보다도 더욱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언제나 쾌활한 태토를 유지한 사람이야말로 우리의 셰익스피어인 것이다.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무언가 쾌활하게 가슴이 설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익스피어가 맨 앞에 나서 진군나팔을 분다면 순식간에 군중은 줄지어 과감하고 용맹하게 진군을 개시할 것이다. 그의 기쁨에 넘친 펜으로 묘사되면 어떤 것이라도 싱싱한 생명력을 띠고 순긱간에 뛰쳐나갈 것이다.(81∼82쪽)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


셰익스피어도, 호메로스도, 단테도, 초서도, 눈에 보이는 세계 깊숙이 아득한 천상의 반짝임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수목조차도 단순히 사과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이상의 존귀한 역할을 맡게 되고, 곡물도 단순한 식료 이상의 것이 되고, 이 지구라는 천구도 아득히 숭고한 존재가 되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상의 온갖 것은 말하자면 더욱 섬세하고 묘한 '수확'을 우리 혼에 베풀어 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 마음에 깃드는 이념을 상징하는 것이 되고, 천지자연의 다양한 영위는 모두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암시하는 '말없는 비밀문서'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와 같은 대자연에 있는 일체의 것을 자신의 회화를 채색하기 위한 그림물감으로서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다만 그는 그와 같은 현실세계의 현란한 고급의 두루마리에 넋을 잃은 나머지 그만한 대천재라면 당연히 가능했을 중요한 첫걸음을 내딛는 일이 결국 안 되었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상징으로서 자연미 속에 잠재한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되어 있는 덕 그 자체의 의의를 그 이상 탐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근원적인 통찰이 결여되면 자연계가 말하는 실제의 이야기도 도대체 어느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천지만물을 자기 뜻대로 다룰 수가 있었는데 결국 그것들은 최상의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했다. 약간 짓궂게 표현한다면 그는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이다.(82∼83쪽)



셰익스피어는 인생의 의미에 관해서 명확한 지침을 주었을까.

 

특별히 인간에게 허용된 천성과 재주란 점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셰익스피어에게 맞서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은 이제까지 나타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지한 인생론, 생사에 관한 중대사나 그것에 뒤따르는 여러 가지 관련 주제가 문제가 될 경우에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도대체 얼마나 우리를 이끌어 줄까.


셰익스피어는 인생의 의미에 관해서 명확한 지침을 주었을까. 인생이란 『12야』『한여름 밤의 꿈』『겨울 이야기』와 같은 한 때의 몽환극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아니다. 현실의 인생은 그처럼 덧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설사 셰익스피어의 인생극이 하나 늘거나 줄었다고 해서 크게 떠들썩할 필요가 있을까.



셰익스피어에 관해서는 '언행일치의 생활을 보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

 

다른 뛰어난 대작가들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사상과 일치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셰익스피어에 관해서는 '언행일치의 생활을 보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그가 '이제껏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최고봉'까지는 가지 않고 '일단 베이컨이나 밀턴, 타소, 세르반테스와 같은 쟁쟁한 대작가들 틈에 낄' 정도의 수준이었다면 나로서도 그다지 이와 같은 사실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의 운명에는 우리에게는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둠이 있다'고 말해 지나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인간 중의 인간', 우리의 정신, 마음의 영역에 일찍이 없는 드넓은 대지의 옥토를 개척하고 '카오스'라는 이름의 미개의 땅에 용감하게 발을 내딛고 인간승리의 금자탑을 세운 인물이 자신으로서는 조금은 부족한, 현명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을 산 것에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세계 최고의 시인이 그 남아도는 천성을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바치면서 스스로는 남모르게 세속의 향락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은 세계의 역사에서도 드문 일로서 특기되어야 할지도 모른다.(8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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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2) 앞에서와 마찬가지 이유로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에서 베껴 놓은 '셰익스피어 관련 글'도 덧붙인다. 이 인용도 상당히 길다. 여길 건너뛰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펼친 부분 접기'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다른 의무는 있을 수 없다. 참고로, 『교양인의 책읽기』는 이미 절판된지 오래된 책이지만 '중고'로 구할 수는 있다.



왜 최고의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가


나는 내면적 삶의 기록이 알려진 모든 작가 가운데 체호프와 베케트가 가장 친절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내면적 삶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희곡을 읽으면 셰익스피어가 체호프, 베케트와 더불어 세 번째 친절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폴스타프, 햄릿, 로잘린드(셰익스피어의 『좋으실 대로』에 등장하는 인물)라는 인물들을 창조한 셰익스피어는 더욱 본연의 나 자신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게 한다. 이것이 우리가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며, 왜 최고의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가를 말해 준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자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날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는 분명히 『돈 키호테』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단테와 밀턴, 블레이크는 작품을 통해 숭고한 정신을 그려 내려는 야심을 가진 위대한 작가들이었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초서나 세르반테스와는 관심의 영역이 달랐다. 즉 근본적인 인간의 모습만을 재현하고자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우리 삶에 성서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더라도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신약, 코란 등에서 표현된 인간의 본석와 운명에 대해 셰익스피어만큼 미묘하고 멋진 대안과 비전을 제시한 작가는 없었다. 야훼와 예수, 알라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어떤 면에서 햄릿이나 이아고, 리어 왕, 클레오파트라의 말도 같은 권위를 지닌다. 설득에서는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풍부함이 더욱 커 보인다. 그의 수사적이고 창조적인 재능들이 야훼와 예수, 알라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성 모독이 될 수 있으리라.(367쪽)



호레이쇼가 관객과 대체되었다는 것


햄릿은 호레이쇼를 찬양하는 데 있어 철저하리만큼 진지하다. 호레이쇼는 엘지노어의 법정에서 클라우디우스(햄릿의 숙부로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인물)가 조종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햄릿은 호레이쇼에 대해 "진정 허다한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마음의 동요가 조금도 없어"라고 말했는데, 이는 호레이쇼가 관객과 대체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관객으로서 작가가 주는 모든 고통을 받아야 하지만, 또한 그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에 아무런 동요 없이 받아들인가. 한 인간으로서의 호레이쇼에 대해 셰익스피어가 "격정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 데에는 관객 역시 보다 금욕적이고 현명해지길 원하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370쪽)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나는 셰익스피어가 "인간을 발명했다"고 말한 후로 다른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다. 존슨 박사는 "시의 본질은 발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따라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실용적으로 인간을 개조하고 재발견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초연함은 『소네트』와 『햄릿』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원형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370쪽)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일곱 번에 걸친 햄릿의 독백이 나온다. 관객은 우리와 햄릿, 두 부류다. 따라서 우리는 엿듣고 그를 흉내낸다. 햄릿이든 누구든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인식과는 반대로, 의도와 어긋나게 그의 말을 엿듣는다. 야훼나 예수, 알라에 대해서 엿듣는 일은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품에 드러나는 기법이다.(371쪽)



시인으로서의 성취되지 못한 명성에 관한 연구


일반적으로 우리는 '천재성'을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정의한다. 때론 거기에 '창조적인 능력'이라는 은유를 덧붙이기도 한다. 햄릿은 작품에 등장하는 허구적 인물 가운데 단연 천재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지적인 힘에 대해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다. 반면 창조의 힘은 대부분 모호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극중 극에 등장하는 왕의 연설이나 무덤에서 햄릿이 부르는 광적인 노래의 경우는 예외로 볼 수 있다.


희곡 『햄릿』은 주인공의 좌절된 창의성, 즉 햄릿 왕자의 시인으로서의 성취되지 못한 명성에 관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이는 결코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 다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사실은 햄릿은 실패한 시인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371∼372쪽)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 가운데 가장 개방적인 셰익스피어는 또한 가장 생략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작품에 지나치게 무언가 첨가했다가 그것들을 다시 삭제함으로써 교묘하게 우리를 가르친다. 『햄릿』은 대작이지만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372쪽)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최초의 다문화적 작가


『햄릿』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4막과 5막 사이의 전환에서 하나의 정점을 건드리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햄릿』을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전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란 지극히 포괄적인 개념을 말한다.


햄릿은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다. 그는 서구 의식의 고귀성과 파멸을 동시에 내포한 존재다. 또한 동서양, 남녀, 흑인과 백인을 막론하고 인류 전체의 지성을 대변하는 대표성을 지녔다.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최초의 다문화적 작가였던 것이다.(372쪽)



몽테뉴와 비교할 때 햄릿은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야만적이다.


『햄릿』을 다른 문학 작품과 비교하는 일은 어렵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이나 혹은 단테, 초서, 세르반테스, 몰리에르, 괴테, 톨스토이, 체호프, 입센, 조이스, 프루스트 등이 쓴 뛰어난 작품과의 비교도 또한 어렵다. 『햄릿』은 그 자체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햄릿은 끝부분에 이르러서 실제로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말한다. 햄릿이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몽테뉴가 아마 유일하게 유용한 비유가 될 것이다. 몽테뉴와 비교할 때 햄릿은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야만적이다.


위대한 수필 「경험에 대하여」를 쓴 몽테뉴가 5막에 나오는 햄릿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햄릿보다 자신의 지혜에 더욱 관대하다. 5막에서 햄릿이 제 아무리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다 해도 결국 '은총'이 그를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성서에서 은총이라는 말을 쓰는데, 내가 말하는 의미는 "무한의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더 많은 삶"이다.(373∼374쪽)



5막 전체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후적이다.


햄릿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가 바다에 있을 동안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덴마크로 돌아오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5막 전체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후적이다. 이는 햄릿이 후손에게 전해질 자기 '오명'을 견디지 못하리라는 강박관념을 보여 준다. 『햄릿』의 독자나 관객은 햄릿이 자신의 추종자 호레이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 끊는 일을 말리고 그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서 오명을 회복하도록 하는 모습에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우리가 햄릿의 모호한 광증의 일시적인 현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햄릿에게는 엄청난 긴장이 가해진다. 햄릿이 오필리아에게 가학적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미치고 자살에까지 이르게 된다. 햄릿은 자기가 누구를 죽이는가도 모르는 채 커튼 사이로 검을 찔러 넣어 폴로니어스를 살해했다. 이후에 그는 환희만을 표명한다. 로젠크란츠와 길텐스턴은 기회주의자들이기는 하지만 햄릿이 이유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햄릿은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374쪽)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


'경이로움에 의해 상처입은 청자들'은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이 되었다. 우리는 "자, 나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다." 라는 햄릿의 자긍심에 가득 찬 적대감에 전율한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자제된 위험은 전적으로 아이러니칼하진 않지만 우리들에게 다음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즉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가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밝히면서 냉정하게 말한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영국으로 향하고 있네."


햄릿은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모습을 본 호레이쇼는 충격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길덴스턴과 로젠크란츠가 그곳으로 가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햄릿이 그들이 죽음에 대해 "그건 그들이 좋아서 한 짓이니까" 라고 말하며 냉담한 태도를 보일 때, 그들이 햄릿의 예일 대학 동창생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햄릿이 아니며, 따라서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377∼378쪽)



햄릿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아고처럼 햄릿은 다른 등장 인물들의 삶에 대해 글을 쓴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 우리는 이아고에게서는 이런 능력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왜 힘릿에게는 매료되는가? 모든 허구적 인물 중에서 가장 지적으로 복잡한 이 인물의 여러 가지 신비 중 하나는 그가 우리에 대해 카리스마적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점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념가나 청교도적 도덕주의자가 아니라면 지난 200여 년 이상 동안 보편적 병폐였던 햄릿과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햄릿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378쪽)



어떤 허구적 인물도 햄릿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능숙한 인물은 없었다


햄릿이 자신의 '오명'을 남기는 고통을 묘사했을 때 무대 위는 그의 어머니, 클라우디우스, 레어티즈 등의 시체들이 널려 있고, 햄릿 역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폴로니어스를 살해했고, 오필리아를 미치게 해 자살로 몰아갔으며, 불쌍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에 이르게 했으므로 그의 이름에 흠집이 날 만했다. 그러나 햄릿은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여덟 명의 죽음에 대해서 별로 슬퍼하지 않는다. '덴마크의 햄릿'은 그의 이름으로 우리를 경이로움에 빠지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성취는 과연 무엇일까? 그의 놀라운 재능에 비례해 어떤 허구적 인물도 햄릿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능숙한 인물은 없었다.(378∼379쪽)



글로브 극장 관객들은 한 번에 네 편의 연극을 보았던 셈


셰익스피어는 『햄릿』이후에는 복수극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그 장르를 작가가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햄릿』은 복수극이 아니라 극장성Theartricalty에 대한 극이다. 햄릿 이전의 그 어떤 서구의 희곡에서도 그토록 '극장성'에 사로잡힌 작품은 없었다. 한마디로 글로브 극장 관객들은 한 번에 네 편의 연극을 보았던 셈이다.


1막에서 2막 1장은 일종의 복수극이다. 그리고 극 중 극의 배우들이 도착하는 2막 2장에서부터 클라우디우스가 '거짓 불에 놀라서' 「쥐덫The Mouse Trap」에서 도망치는 3막 2장까지는 극장성에 관한 막간극으로 이어진다. 4막까지 계속되는 세 번째 극은 모든 이들에게 각자 의미 있는 만화경 같은 것으로 한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마지막 5막은 불과 몇 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햄릿이 10년이나 나이 들어 보이고, 부왕의 유령은 기억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부왕도 단지 오랜 기억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햄릿』은 복수의 비극으로 시작해 어느 순간 연극과 배우들에 대한 거친 사색으로 이어지고, 셰익스피어의 창조적 정신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초월적 비극 안으로 빠져든다. 이 순간 새로 탄생한 인간은 죽음이란 스스로를 조롱하고 또한 조롱당하는 것이라는 절대적 자기 인식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연극 『햄릿』이 가장 강력하면서도 또한 당혹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것인데,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그러한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379∼380쪽)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햄릿』을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연극 전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듯하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베케트, 루이기 피란델로, 그리고 모든 부조리 작가들의 시대에서조차도 말이다. 『오델로』,『리어 왕』,『맥베스』가 모두 비극이었던 것처럼 『햄릿』또한 반드시 비극이라고 보아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비극적 결함 혹은 비극적 덕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덴마크의 햄릿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까지도 지닌 듯하다.


에머슨은 자유를 '야성의 것Wilderness'이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햄릿』이야말로 모든 연극 가운데서도 가장 야성적이며 자유로운 연극이다. 심지어『12야』의 부제인 '뜻대로 하세요'를 붙여서 '햄릿, 혹은 뜻대로 하세요'라고 불러도 좋을 법하다.


『햄릿』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실 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다. 주인공 햄릿을 포함해 여덟 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시각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긴 하다. 유령의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복수의 갈망은 여전히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81쪽)



『햄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독자로서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햄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382쪽)



햄릿 왕을 제외하고 무대 위에서 다른 관심의 중심은 없다.


『햄릿』이라는 극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주인공 자체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도 변화무쌍하다. 모호한 전사-연인-아버지 없는 존재, 햄릿 왕을 제외하고 무대 위에서 다른 관심의 중심은 없다.(383쪽)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아이러니를 구사한 작가로, 미묘하고 변덕스러우며 극도로 지성적인 햄릿만이 존재하는 극을 남겼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이 희곡을 읽는다면 틀림없이 스스로 햄릿이 되고, 그래서 간혹 당혹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확대시켜 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햄릿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햄릿은 우리를 그의 의식의 심연 속으로 이끌 것이다. 그곳에는 이아고나 『리어 왕』의 에드문드 혹은 『겨울 이야기』의 레온테스를 초월하는 허무주의가 존재한다.


정의를 내리자면, 셰익스피어는 햄릿보다 포괄적이며 다양하다. 하지만 단일한 인물로서 셰익스피어 안에 있는 허무주의적 시심을 의인화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햄릿이다. 이아고는 다른 등장 인물이나 그들의 삶으로 '글을 쓰지만', 햄릿은 배우들을 위해 새로운 글을 쓰고 불가사의한 짧은 노래들을 즉흥적으로 지어 내기 때문이다. 햄릿은 '주제'와 '자세'라는 이중적 면에서 허무주의 시인이다. 독백의 언어에서, 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극들에서, 언어와 자아를 포함해 햄릿은 그 어느 것도 믿지 않는다.383∼384쪽)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모든 비극이 끝난 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멋지게, 그러나 슬프게 시인이 아닌 배우로 만들었다. 독자들도 햄릿의 시에 매료되면서 그의 연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385쪽)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


200여 년 이상이나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은 끊임없이 인용되어 왔고, 때문에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낭만주의 시대의 비평가 찰스 램을 대단히 존경하는데, 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는 일은 제대로 만들지 못한 연극을 관람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창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햄릿의 멋진 독백과 다시금 마주친다면, 절망적인 찰스 램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독자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유명한 구절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아니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 구절은 사내아이나 남자들에 의해 연설 투로 너무 거칠게 함부로 다루어지고, 그 살아 있는 장소와 극의 계속성이란 원리에서 그렇듯 비인간적으로 괴리되어 있어서 내게는 완전히 죽은 대사가 되고 말았다.


일곱 개 중 세 번째인 '사느냐 죽느냐' 독백은 지식과 행위 사이의 부정적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 이 부분은 햄릿이 극에서 왕 역할을 하는 배우를 위해 쓴 대사의 절정을 이루며, 또한 다음 위대한 시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야기의 매듭을 지으려 하오.

인간의 의지와 운명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므로

계획은 언제나 무너지게 마련이지.

생각은 우리 자신이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이오.    ㅡ 3막 2장 (386쪽)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


셰익스피어가 소네트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햄릿은 의지에 대해서 숙고한다. 우리는 행동할 의지가 있는가?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인가? 의지의 한계는 무엇인가? 햄릿의 광대한 의식은 사고의 끝이 무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종말을 의도한 모든 관련된 불확실성에 대해 어떻게 충분히 인식하는가?


니체가 인식하듯이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이다. 햄릿은 예술을 향하지 않으면 진실에 의해 죽을 것이다. 햄릿은 귀족 중에서도 왕족이므로 지성적인 행위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양심이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결단의 선명한 색채가

망설임으로 창백해지고 침울해짐으로 녹슬고 만다.

지극히 중요한 거대한 과업도

이 때문에 그 흐름이 틀어지고

실천의 힘을 잃고 마는구나.                                         ㅡ 3막 1장 (387∼388쪽)

 


그래서 햄릿은 마지막에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햄릿은 극의 결말 부분에서 살육이 있기 전에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길 승산이 있어. 그러나 자네는 내 마음에 얼마나 악이 들끓고 있는지 모를 거야." 이는 자신의 훼손된 이름을 남기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암시한다. 그래서 햄릿은 마지막에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지금 와 버리면 장차 오지 않고, 장차 오지 않으려면 지금 올 것일세.

만일 지금 와 있지 않다면, 결국엔 올 것이라니까. 모든 것은 각오일세.       (389쪽)



그 안에는 "왜『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


햄릿의 영혼은 의지에 차 있으며 육신도 약하지 않다. 그는 자기의 음악에 맞춰 특이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냥 내버려 둬." 세속적인 문학에서도 이것만큼 독자를 사로잡지는 못할 것이다. 왜? 햄릿이 마지막으로 "이젠 침묵이야"라고 한 말은 정신적으로 매우 모호하지만 나는 그 말은 부활이 아닌 몰락을 예견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왜『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햄릿은 우리를 위한 대리적 속죄양으로 죽는 게 아니라 훼손된 이름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닌 채 죽는다. 몰락과 부활, 어느 쪽을 기대하든 간에 우리는 각자의 이름이나 명예에 대해 걱정하는 것으로 독서를 끝낼 가능성이 높다. 모든 허구적 인물 가운데 가장 카리스마 넘치고 지적인 햄릿은 누구나 겪게 될 종국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보여 주었다.(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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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5-14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과 죽음, 사랑, 빈부의 차, 인생의 목적과 그에 이르는 길, 인간의 성격, 또는 운명을 좌우하는 유형무형의 영향, 또 우리 인생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가져오는 것과 같은 과학의 힘을 초월한 신비적인 영의 작용 따위는 모든 사람의 혼을 뒤흔들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의 근본문제이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야말로 확실한 증언을 많이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시집》을 펼쳐서 직감이 좋은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시의 양식이고 우정이나 사랑에 관한 비결이나 다감한 정념과 냉정한 이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심리의 기미를 살며시 속삭여 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또 여러 가지 희곡 가운데에는 셰익스피어 자신이 간직한 마음의 흔적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75쪽)

→ 저는 oren 님의 윗글을 읽으면서, 특히 위와 같은 인용문들을 만나게 되면, 우리 인간의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은 결코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단순히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실체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는 인간의 사유와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궁극적으로 비물질적인 것일지도 모를 어떤 심적(mental) 요소가 우주의 근본적 구성 요소로서 반드시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즉 단순히 인간의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은 뇌신경세포들의 작용, 물리화학적인 신경전달물질의 분비, 뇌내 전자기 장의 움직임 등등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고 본다는 것이죠. 또한 요즘 인공지능이 최대의 화두입니다만, 인공지능으로도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을 완전히 설명하거나 구현하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거의 모든 인간의 일과 직업을 대체해간다고 해도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만은 대체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고 봅니다.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이 위대한 셰익스피어(쉐익스피어) 문학에서 우리 인간이 느끼는 《과학의 힘을 초월한 신비적인 영의 작용》을 미래의 인공지능/로봇이 느끼고 향유할 수 있을까요? 즉 저런 신비로운 영의 작용 같은 것을 디지털 신호(부호, 기호, code 따위)인 0과 1의 무수한 나열로 환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신경세포와 그들의 방대한 연결망인 스냅스들의 작용으로 인간의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의 정체가 밝혀질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이런 물리주의 혹은 자연주의, 인공지능의 배경인 기계 기능주의적 주장에 직간접 동의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요즘 인간 고유의 의식에 대한 실체적 주장을 하면 강력한 반대에 부닥치곤 하죠. 그러나 저는 oren 님의 유장한 윗글을 읽으면서 거듭거듭 확신하게 됩니다. 결코 인공지능만으로는 인간 의식을 설명할 수도 구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요. 요컨대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문학적 감동도 완전히 사라진다고 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야말로 확실한 증언》이 되리라는 것이 oren 님의 장려한 윗글을 읽은 제 소감의 하나입니다. ^^

oren 2017-05-14 15:04   좋아요 0 | URL
qualia 님께서 몹시도 심오한 댓글을 달아주셔서 답글을 달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제가 인용한 에머슨의 글을 콕 찝어 재인용 하신 후에 qualia 님의 견해를 밝혀놓으신 게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에머슨은 셰익스피어를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했던 사람이었죠. 그 자신이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던 토머스 칼라일, 셰익스피어에 정통했던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등과도 아주 깊은 교제를 쌓은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에머슨이야말로 초령(超靈,Over-Soul)을 주창했던 초월주의자였으니, 어쩌면 Qualia 님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Qualia 님 덕분에 제가 다시 찾아 읽어본 에머슨의 에세이 가운데 <초령(超靈)>의 일부분을 덧붙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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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많은 지혜는 지혜가 아니다. 가장 많은 광명을 받은 부류의 사람들은 물론 문학적 명성을 초월하여 있다. 그들은 작가가 아니다. 많은 학자와 작가들에게서 우리는 신성한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영감보다는 요령과 잔재주만을 감지한다. 그들은 광명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모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칭한다. 그들의 재주란 어떤 한 능력의 과장이어서, 마치 불균형하게 발달한 손발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재주의 힘이란 일종의 병이다. 이런 경우에 지적 재능은 미적의 감명을 주는 일이 없고, 거의 악덕의 느낌을 준다. 재주가 진리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는 종교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심성을 보통 이상으로 많이 흡수한다. 그것은 결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사람과 유사한 점이 많고, 다른 점이 적다. 모든 위대한 시인들에게는 그들이 발휘하는 어떤 재주보다도 우월한 인간성의 지혜가 있다. 작가, 재사, 당인, 세련된 신사가 인간 그 자체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성은 호머, 초서, 스펜서, 셰익스피어, 밀턴에게서 빛난다. 그들은 진리에 만족한다. 그들은 인간성을 적절히 이용한다. 저급한 대중적인 작가의 광적인 열정과 격렬한 색채에 맛들인 사람들에게 그들은 경직되고 냉랭하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활기를 불어넣은 심령에게 자유로운 길을 허용함으로써 시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심령은 그들의 눈을 통하여 보고 그 자신이 창조한 사물을 축복한다. 심령은 그 지식보다 우월한 것이고 그것이 만든 어떤 결과물보다도 현명하다. 위대한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풍성함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별로 의식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의 정신에 시인이 전하는 최상의 가르침은 그가 이룩해놓은 모든 것을 무시하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우리를 최고조의 지적 활동으로 이끌어 그 자신의 것을 아주 초라한 것으로 만드는 부를 암시한다. 우리는 그가 창조한 찬연한 작품들, 우리가 지금까지 일종의 독보적인 시가로 찬양해온 작품들이 이제 우리의 참된 본성을 강하게 사로잡지 못하고, 단지 바위 위에 어른거리는 지나가는 여행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햄릿이나 리어 왕 속에서 표출되는 영감은 사물들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것으로 영원히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진대, 왜 나는 햄릿과 리어 왕만을 중히 여기고 말이 혀끝에서 떨어져나오듯이 그들이 떨어져나온 그 원천인 심령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인가?

이 에너지가 개개의 생명 속으로 내리는 것은 반드시 그 전체를 소유하는 조건에서이다. 그것은 비천하고 단순한 자에게 온다. 그것은 자기의 것이 아닌 것과 거만한 것을 벗어던지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온다. 그것은 통찰력이 되어 오고 정온함과 장엄함으로도 온다. 그것이 깃들여 있는 온사람을 보면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 그러한 영감을 받고서 사람은 바뀐 목소리로 돌아온다. 그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구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가 그들을 시험한다. 그것은 우리가 소박하고 진실할 것을 요구한다. 허영심에 들뜬 여행자는 왕, 왕후, 귀족 부인이 자신에게 한 말과 자신에게 해준 일을 떠벌림으로써 그들의 인생을 장식하려고 한다. 야심찬 속물은 그들의 수저와 브로치와 반지를 자랑하고, 그들이 보낸 명함과 찬사를 잘 간직해둔다. 좀더 교양이 있는 사람이면 그들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듣기 좋은 시적 정황을 골라낸다 ㅡ 로마의 방문담, 그들이 만난 천재, 그들이 알게 된 총명한 친구, 더 나아가서 그들이 즐겼던 화려한 풍경, 산악의 빛, 산에서 얻은 생각 등을 언급한다 ㅡ 그렇게 그들의 생활을 낭만적 색채로 덧칠하려고 한다. 그러나 위대한 신을 경배하고자 높이 오르는 정령은 평명하고 진실하고, 장밋빛으로 치장하지 않고, 멋진 친구도, 기사도 정신도, 모험적 사건도 없으며, 남의 찬탄을 원하지 않고, 평범한 날을 진지하게 체험하며 현재의 시간에 안주한다 ㅡ 이 현재의 순간과 아주 사소한 일들이 사상에 스며들고 광명의 바다를 흡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엄할 정도로 마음이 소박한 정신과 대화를 나누어보라. 문학은 말놀음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가장 간소한 말이 글로 씌어질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값싼 것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모든 대지와 모든 대기가 우리의 것일 때, 이런 심령의 무한한 풍요 속에서, 땅에서 단지 몇 개의 조약돌을 줍고 소량의 공기를 병에 담는 것이나 다름없다. 허황된 장식을 벗어던지고, 적나라한 진실, 솔직한 고백과 전지적인 긍정 속에서 사람과 사람을 대하지 않고서는 거기에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고 그대들은 그 풍요의 원환(圓環)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 에머슨, 신문수 옮김, 『자연』, <초령(超靈)> 중에서

qualia 2017-05-14 21:53   좋아요 0 | URL
oren 님의 답글과 인용글에 위안을 느낍니다. 물론 oren 님의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에 대한 견해는 아직 잘 모릅니다. oren 님 영혼관은 제 영혼관과 많이 다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인용해주신 에머슨의 글에서 든든한 격려의 말씀을 듣는 듯합니다. 지금 인공지능에 관한 책과 기사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유발 노아 하라리를 비롯한 세계적인 학자, 저술가들이 앞다투어 인공지능 대세론으로 독자들의 정신 세계를 점령해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과연 에머슨과 소로우가 지금 21세기에 환생한다면 이런 인공지능의 질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나 저는 반대로 21세기 뇌신경과학과 인지과학적 시각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에머슨과 소로우의 생각과 글들을 재조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오히려 과학이나 인공지능으로써 그들의 일종의 영적 세계관, 혹은 초령(Over-Soul) 등등을 물리적인 것이나 디지털적 단위, 혹은 뇌의 착각이나 환영으로 환원하지 않고 독자적인 인간의 고유 속성이나 실체적 요소로 규명해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소리는 인공지능 대세론자 혹은 명확한 증거와 증명을 원하는 과학(주의)자들 시각에서 보면 헛소리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러나 저는 누가 뭐래도 oren 님의 셰익스피어 관련 윗글과 인용해주신 에머슨의 글, 해럴드 블룸의 글들은 명백히 《과학의 힘을 초월한 신비적인 영의 작용》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언》의 사례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이런 사유는 시작점에 섰다고 할 수 있죠. 앞으로 갈 길이 멀고도 먼데요. 든든한 연료 혹은 에너지를 충전받은 듯한 느낌입니다. oren 님께서 정성스럽게 인용해주신 영감 넘치는 에머슨의 윗글로 말이죠~^^

qualia 2017-05-14 22:10   좋아요 0 | URL
제 첫 댓글 가운데 끝 부분에 《결코 인공지능만으로는 인간 의식을 설명할 수도 구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요.》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구현할 수” 부분에 보조사 “-도”를 빠뜨려 문장이 약간 이상하게 읽힙니다. “구현할 수도”로 고칩니다.

oren 2017-05-15 00:03   좋아요 0 | URL
‘인간의 마음‘을 역설계할 수 있다는 건 아직까지는 ‘인간의 망상‘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런 쪽으로 맹렬히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비물질적인 영역‘ 또는 ‘과학으로는 결코 해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 있다고 저도 생각하거든요. 그런 판단은 고대 철학자들의 생각 속에서도 가끔씩 발견할 수 있고, 심지어 ‘생명의 진화와 종의 기원‘까지 밝혀냈던 찰스 다윈이나 『창조적 진화』등을 쓴 베르그송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던 듯합니다. 특히 철학자 가운데 (제 생각으로는) ‘우주의 비밀‘을 가장 많이 엿본 듯한 쇼펜하우어에 의해서도 ‘과학의 한계‘가 상당히 예리하게 지적되었던 듯하고요. 셰익스피어가 그토록 자주 시(詩)로 노래했던 ‘사랑‘ 하나만 하더라도 ‘과학‘이 언젠가 ‘역설계‘할 수 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쇼펜하우어도 지적했듯이, 천재적인 시인들이 쓴 놀라운 시(詩)들이 ‘무사(뮤즈) 여신‘의 아무런 개입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만 쓰였다고도 믿기 힘들고요.

페크pek0501 2017-05-18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전 오래된 책 전집으로 셰익스피어를 읽었고 그 뒤에 책 하나 갖고 싶어서 4대 비극이 함께 묶여져 있는 책을 구입해 놨어요. 4대 비극 말고도 몇 작품 더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멋진 구절이 많았던 것도 기억합니다.

님의 노트를 보니 대단히 열공하시는 분이군요, 알고 있었지만 새삼 느낍니다.
저도 그런 노트 몇 권이 있는데(그땐 필기하면서 책을 읽는 게 취미였기에.) 님처럼 글씨를 잘 쓰지 못해서 공개를 못합니다.
공개를 염두에 뒀다면 글씨를 잘 썼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ㅋ

oren 2017-05-19 00:52   좋아요 0 | URL
페크 님께서는 벌써 오래 전에 ‘오래된 책‘으로 셰익스피어를 읽으셨군요. 저는 이제서야 ‘새 책‘으로 셰익스피어를 읽고 있는데 말이지요. 아무튼 셰익스피어는 너무 놀라운 시인이자 극작가에요. 진작에 만나봤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늦었지요..

페크 님께서도 독서 노트를 열심히 써오셨다면 그걸 살짝 공개해 주실 순 없을까요? 남의 글씨를 엿본다는 게 실례인 줄은 알지만, 몹시 궁금한 것도 사실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