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댓글로 달았다가 '인용문'이 너무 길어서 먼댓글로 다시 씁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 흔히들 느끼게 되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불편함‘을 미네 님께서 아주 자세히 피력해 주셨군요. 저도 그 소설을 읽을 때 그런 걸 느꼈는데 하물며 여성 독자들은 오죽하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었지요. 이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저는 ‘니체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져봤더랬습니다. 물론 그걸 말로 자세히 표현하기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요. 아무튼 카잔차키스는 그 자체로 ‘철저한 그리스인‘이었고, 특별하게도 ‘그리스인에 매우 정통했던 철학자 니체‘에 매우 심취했던 인물이었죠. 끝으로, 미네 님의 글을 읽는 동안에 제가 다시금 찾아 봤던 ‘니체의 말‘을 참고삼아 덧붙여 봅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여기에 있는 헤아릴 길 없는 대립과 그 영원히 적대적인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며, 여기에서 아마 평등한 권리와 교육,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이다. 이러한 위험한 장소에서 스스로 천박하다는 것을 ㅡ 본능에서의 천박함을! ㅡ 드러내는 사상가는 대체로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내고 폭로된 것으로 여겨도 될 것이다 : 아마 그는 미래의 삶을 포함한 삶의 모든 근본 문제에 너무나 ‘근시안적이며‘ 결코 어떤 심연으로도 내려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자신의 정신에서나 욕망에서도 깊이가 있고, 엄격하고 혹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것들과 쉽게 바꾸는 호의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남성은 여성을 언제나 동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여성을 소유물로서, 열쇠로 잠가둘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봉사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ㅡ 그는 이 점에서는 아시아의 거대한 이성의 편, 아시아적 본능의 탁월함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찍이 이러한 아시아를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자이며 제자였던 그리스인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여성에 대해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더욱 엄격해지고 간략히 말해 동양적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필연적이며, 논리적이고, 그 자체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었던가 : 이에 관해 우리는 스스로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8절


그리스인들 앞에 서면

"거기서 떠나지 말게, 그리스인들의 민족적 지혜가 말하는 것을 듣게나."

무엇이 디오니소스적인가?



 * * *


‘니체‘와는 또다른 측면에서 그리스를 깊이 연구했던 랄프 왈도 에머슨도 ‘그리스인의 남다른 특징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에머슨의 글을 읽는 동안에도 ‘크레테 사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금 떠올렸던 듯합니다. 인간의 본능에 가장 충실했으면서도 가장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인들이었고, 그런 삶을 ‘인류 역사상‘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인‘이었으니까 말이지요.


위로는 영웅시대 내지 호머시대로부터, 내려와서는 4,5세기 후의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의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시대에 걸치는 그리스의 역사 · 문학 · 예술 · 시가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느끼는 흥미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나가 몸소 그리스의 한 시기를 경과하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스적 상황이란 육체적 본성의 시대, 관능 완성의 시대이다. 정신적 본성이 육체와 엄밀하게 일치하여 나타난 시대이다. 거기에는 조각가에게 헤라클레스, 피버스, 조브의 모델을 제공한 것과 같은 그러한 인간의 육체가 있었다. 근대 도시의 거리에서 많이 보이는, 막연히 이목구비가 뒤섞여 있는 그런 얼굴이 아니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또렷이 윤곽이 잡힌 균형적인 용모로 이루어지고, 눈동자만 하더라도 이런 눈으론 곁눈질하거나 이쪽저쪽 흘겨서 보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머리 전체를 돌려서 보아야만 되도록 틀이 잡혀 있었다.

이 시기의 몸가짐은 솔직하고 맹렬하다. 그러나 나타난 존경은 인간적 자질에 대한 것이다. 즉 용기 · 숙달 · 자제 · 공정 · 힘 · 민첩 · 고성(高聲) ·넓은 가슴 등에 대한 것이다. 사치와 우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구가 매우 적은 데다 부유하지도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이 시종(侍從)으로도, 요리인으로도, 도살자로도, 군인으로도 된다.

그리스인은 반성적이 아니다. 그러나 관능(官能)에 있어서, 건강에 있어서 완벽하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육체 조직을 가지고 있다. 어른은 애들처럼 소박하고 아름답게 행동했다. 그들은 꽃병을 만들고, 비극을 쓰고 조상(彫像)을 만들었다. 그것도 건전한 관능으로 만들 수 있는, 즉 좋은 취미의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것은 계속하여 어느 시대에나 만들어졌고, 어디에서나 건전한 육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개괄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우수한 체격면에서 그리스인은 모든 다른 민족을 능가했었다. 그들은 어른의 활력과 어린이들의 매력 있는 천진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런 태도가 마음을 끄는 것은, 그것이 본래 인간의 것이고, 누구나 한때는 어린아이였으므로 누구에게 그것이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이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는 이런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어린이와 같은 천재와 타고난 활력을 가진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인인 셈이고, 그는 헬라스의 시신(詩神)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소생시킨다.

나는 저 필록테테스(트로이 전쟁 때의 유명한 사수.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비극을 썼다-역자 주) 극(劇)에 나타난 자연애를 찬탄한다. 그 잠과 별과 바위와 산과 파도에 대하여 호소하는 글을 읽을 때, 나는 시간이 썰물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을 느낀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신념의 철학』,〈역사란 무엇인가〉중에서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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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의서재 2017-06-17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먼댓글을 찾아 왔는데 깊은 지식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지식보다 감정이 먼저 올라와서 격하게 글을 올렸는데;;; oren님 글을 보며 그리스인에 대해, 디오니소스에 대해, 니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7-06-18 00:28   좋아요 0 | URL
저도 미네 님 덕분에 『그리스인 조르바』와 ‘그리스인‘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 보고, ‘책 속 구절들‘을 여럿 뒤적여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와는 영 딴판인 소설이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도 한 때 ‘외설‘ 시비에 휘말려 오랫동안 ‘출판 금지‘를 당한 적이 있었지요. 미국 울지 판사의 ‘명판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지만 말이죠. 그 중 한 대목을 참고삼아 인용해 봅니다.

* * *

˝만일 우리들이 조이스가 서술한 이러한 사람들과 사귀고 싶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선택의 문제다. 그들과 간접적인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율리시스』를 읽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아주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조이스와 같은 의심할 바 없이 진실한 예술가가 언어를 통해 한 유럽 도시의 중하위급 인물들의 참된 그림을 그리기를 원할 때, 아메리카의 대중들이 그러한 그림을 보는 것이 법률상으로 있을 수 없단 말인가?˝

(제 생각엔 아마도 이런 대목들이 문제가 되었던 듯합니다. ☞ http://blog.aladin.co.kr/oren/8929272)

그랜드슬램 2017-06-18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견디기 힘들 정도의 불편함이라는 말에 일부 동감합니다! 워낙 마초적인 성격이 강한 책인지라.... 카잔차키스의 필력과 내용전개야 말이 필요 없겠지만 그 불편함이라는 표현에 동감합니다, 조르바를 자유인으로 말해야 할지,무능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느껴야 할지, 가끔 혼돈이 옵니다!

oren 2017-06-18 11:22   좋아요 0 | URL
우리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 흔히 느끼는 그런 불편함 또한 작가가 일부러 의도했지 싶은 생각도 들어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그의 묘비명 자체가 그에 대한 증명이라고도 여겨지고요.
* * *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