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조르바를 읽다가 포기한 건 조르바가 여성을 대하는 자세 때문이었다. 여자를 동급의 사람이 아닌 한 단계 낮은 존재로 놓고 끊임없이 헤쳐먹으려는(?) 그의 태도가, 시대적 한계임을 감안하고서라도 책을 넘어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 부분이 많이 거슬렸는데, 이를테면 이런 부분



그래서가 어디 있어요! 두목도 어지간히 밝히시는군. <그래서> 아니며 <왜> 그 다음 이야기는 안 하는 법이에요. 여자는 맑은 샘물과 같습니다. 거기 들여다보면 모습이 비칩니다. 마시면 되는 겁니다. 뼈마디가 녹신녹신할 때까지 마시면 되는 겁니다. 이윽고 목이 마른, 다음 사람이 옵니다. 그 사람도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며 마시면 되는 겁니다. 세 번재 사내가 오겠지요. 맑은 샘물. (p. 124)



"두목, 당신은 여자가 별것인줄 아는데.. 하기야 별것은 별것이지. 여자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런데 뭣하러 감정을 품어? 여자는 불가사의한 거예요. 법률과 종교가 들고 나서 봐야 여자에겐 해당 사항이 없어요. 여자에 대해서는 그런 걸 스면 안 됩니다. 두목, 그건 너무 가혹한 짓이에요. 공정하지 못해요. 내가 법을 만든다면 남자와 여자에게 같은 법을 만들어 적용하지는 않겠어요... 남자는 십 계명, 백 계명, 천 계명이 필요합니다. 결국 사내는 사내니까. 계명이 아무리 많아도 지킬 능력이 있어요. 그러나 여자에겐 필요한 율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p.131)



제우스, 아 그 양반. 그 양반의 고민을 알아주는 건 나밖에 없습니다. 그 양반 물론 여자 여자 좋아했지요. 그러나 당신네 펜대잡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다르고말고, 그 양반은 여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겁니다. 언젠가 시골 구석을 다니다 이 양반은 욕망과 회한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노처녀, 혹은 아리따운 유부녀를 보았습니다. (꼭 아리다운 여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괴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남편은 멀리 떠나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양반은 성호를 척 긋고 변장합니다. 여자가 좋아할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러고는 그 여자 방으로 들어갑니다. .. 이 얌양들을 어떻게 일일이 다 만족시켜요? 오, 제우스. 저 가엾은 숫양, 귀찮은 내색 한 번 하는 법이 없었어요. 좋아서 그 짓 한 것도 아닐 겁니다. (p. 315)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나는 이 글을 계속 읽어야 할까? 여자를 맑은 샘물과 같다고 말하며 뼈가 녹신녹신할 때까지 마셔버리면 된다는 글은, 전형적인 타자화 담론이다. 위키백과에서 '타자화'를 치면 이렇게 나온다. 


"타자화(他者化)는 특정 대상을 말 그대로 다른 존재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분리된 존재로 부각시키는 말과 행동, 사상, 결정 등의 총집합이다. 이는 사회학의 용어에서 출발하였으며 철학, 역사, 정치학 등에서의 적용도 가능하다. 타자화가 문제시되는 이유는 대상의 이질적인 면을 부각시켜 공동체에서 소외되게끔 만들고 대상을 하나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잃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비춰주기 위해, 심지어 그에게 마셔주기 위해, (마셔줌을 당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도 아니다. 정희진의 표현대로라면, 동양남자가 서양남자의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남자는 십계명, 백계명, 천계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기주체성을 가지고 자기뜻대로 하려고 하는)사내니까, 그럼에도 그 계명들을 모두 지킬 수 있는, 남자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계명이 필요없다. 한 사람의 자기주체성을 가진 독립적 인간이 아니니까. 더해서 제우스의 이야기까지 나오면, 이거야말로 포르노담론과 성폭력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가. 남자를 유혹한 것은 여자다. 남자는 그 유혹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 그들에게 봉사한 것 뿐이다, 결국 그들도 재미보지 않았느냐. 귀찮은 내색 한번 없이 좋아서 그 짓 한 게 아니라는 글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 이 책을 계속 읽을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거야. 지엽적인 것에 너무 의미부여하지 말자. 이렇게 다짐에 다짐을 하며 읽었다. 그리고 읽으면서 깨달은 놀라운 사실은, 조르바의 여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결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조르바는 모든 면에서 자유롭다. 그의 모든 면은 책의 두목과 대조를 이루는데, 두목이 지식, 언어, 문자, 계획, 문명의 세계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조르바는 예술과 자유, 춤과 술, 디오니소스의 의미를 체내화한 인물로 보여진다. 그는 물레를 돌리는 데 거추장스럽다고 손가락을 잘라'버리는가 하면,'여성의 치모를 모아 베개를 만들고, 타락한 수도원에 불을 지르라고 수도승을 꾀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르바는, 삶의 지혜를 깨달아버린 듯한 자, 지금 여기의 삶의 가치를 알고 있는 자이다. 그는 이렇게 사는 자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자네 지금 뭐 하는가?''잠자고 있네''그럼 잘 자게''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지금 뭐 하는가?''일하고 있네' '잘해보게''조르바, 자네 뭐하는가?'"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나는 세상의 남자는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두목이거나 조르바거나. 거기에 몇 개의 숨겨진 부류가 있을수도 있다. 두목인 척 하는 조르바거나, 조르바인척 하는 두목이거나. 조르바는 세상에 어떤 현실이라는 쇠사슬에도 구속받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고 두목을 그런 조르바를 위대하다고 경탄한다. 조르바는 가진 것이 없기에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노동 말고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과거가 없기에 내면의 억압이 없고, 미래가 없기에 순간에 충실하다. 

이 모든 것이 철부지의 방종이 아닌, 세상만사 모두 겪어본 자의 깊은 지혜로서 보여진다.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 이 이야기면 설명이 되겠군. 어렸을 때 말입니다. 나는 버지에 미쳐 있었어요. 하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돈이 없어서 한꺼번에 많이는 살 수 없고, 조금 사서 먹으면 점점 더 먹고 싶어지고 그러는 거예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버찌 생각만 했지요. 입에 군침이 도는 게, 아, 미치겠습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화가 났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버찌가 날 데리고 논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한 줄 아시오? 나는 밤중에 일어나 아버지 주머니를 뒤졌지요. 은화가 한 닢 있습디다. 꼬불쳤지요.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 한 소쿠리를 샀지요. 도랑에 숨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올 때까지 처넣었어요. 배가 아파 오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렇습니다. 두목, 나는 몽땅 토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보김나 해도 견딜 수 없었어요. 나는 구원을 받은 겁니다. 언제 어디서 버지를 보건 내겐 할 말이 있습니다. 이제 너하고는 별 볼일이 없구나 하고요. 훗날 담배나 술을 놓고도 이런 짓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마시고 피우지만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끊어 버립니다. 나는 내 정열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고향도 마찬가지예요. 한때 몹시 그리워하던 적이 있어서 그것도 목젖까지 퍼 넣고 토해 버렸지요. 그때부터 고향 생각이 날 괴롭히는 일이 없어요. 

'여자는 어떻습니까?'

'여자 차례도 올 겁니다. 에이, 빌어먹을 것들. 

올 겁니다. 와요.

내 나이 일흔이 되면. ..

여든으로 합시다. 두목. 

p. 284



나의 의문은 이런거였다. 그렇게나 자유로운 조르바라면, 왜 그는 여자에게서는 자유롭지 못하지? 아니 오히려 여자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그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인가? 매 장마다 여성을 비하하고 낮게 보는 장면이 있고, 그럼에도 여자를꼭 취해야 하는 것이 그의 자유라면 그것이 '여성으로부터의 자유, 여성으로의 자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아닌가? 여자는 단지 조르바의 자유를 위한 도구로서 소비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조르바에게 여자란, 소재가 아닌 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르바는 삶의 의지와 죽음의 의지,즉 리비도와 타나토스 양면 중에서 리비도에 집중하는 사람인데, 리비도의 에너지는 결국 삶에 대한 사랑이고, 그것의 원초적인 이미지가 여자와의 섹스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싶은 거다. 



더해서 두목과 조르바의 관계를 보면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가부장제가 가능하도록 작용하는 이브 세즈윅의 호모 소셜, 호모 포비아, 여성 혐오라는 개념 3종 세트를 실감하게 한다. 두목과 조르바는 호모 소셜로 이루어져 있고, 자신들보다 급이 낮은 여성에 대한 혐오로 이 책은 점철되어 있다. 한없이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결국 여성에게서 헤어나조이 못하는 조르바의 정체성은 여성에 대한 남성성의 증명에서만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아닌가 싶고, 그가 결국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은 호모소셜한 사회에서의 두목의 인정이라는 점에서 이중적인 면이 드러난다. 



어쩌면 수많은 남성들이 조르바를 보며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조르바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도 그러고 싶으니까! 나도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서! 조르바처럼 살고 싶다! 책임지지 않고, 자기 먹을 일용할 양식만 먹으며, 마음에 드는 여자와는 자고, 마음껏 자유롭게 세상을 산다! 어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현재 여자라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그래 좋다. 다음 세상에서 내가 남자로 태어나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산다 치자.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여자가 나타나면 샘물이다 생각하고 마시고, 제우스처럼 귀찮지만 짐짓 여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하룻밤 자주고, 여성의 치모를 모아 베개를 만드는 것인가? 과연 그게 다인가? 다르게 생각해보았다. 여자로 태어나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산다면? 단박에 드는 생각은, (이것이 남성의 언어임을 알지만 나는 다른 언어를 알지 못한다 ㅠ.ㅠ) 창녀 혹은 걸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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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스인 조르바』와 그리스인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7-06-16 19:58 
    (댓글로 달았다가 '인용문'이 너무 길어서 먼댓글로 다시 씁니다...)『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 흔히들 느끼게 되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불편함‘을 미네 님께서 아주 자세히 피력해 주셨군요. 저도 그 소설을 읽을 때 그런 걸 느꼈는데 하물며 여성 독자들은 오죽하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었지요. 이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저는 ‘니체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져봤더랬습니다. 물론 그걸 말로 자세히 표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