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투어 로드맵
내일이면 동유럽으로...

 

 

내게는 여행이 유익한 수양으로 보인다. 심령은 여행을 하는 동안 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물들을 주목하느라고 계속적으로 훈련 받는다. 그리고 내가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사람에게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색다른 생활과 사상과 습관 등을 제시해 주며, 우리들의 천성인 끊임없이 변해 가는 형태를 음미시키는 것보다 인생을 형성하는 데 더 효과적인 학문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 몽테뉴

 

 * * *

 

뒤늦게(?) 토마스 만의 소설『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 작품은 꽤나 긴 소설이지만 독일 사람들은 이 소설을 여전히(?) 아주 즐겨 읽는다고 한다. 토마스 만은 1897년 10월 말부터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00년 7월 18일에 끝냈다고 하는데, 그가 태어난 해가 1875년이었으니 불과 스물 다섯에 이 거대한 장편을 완성한 셈이다. 그의 생각의 깊이가 놀랍다. 하긴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전부터 이미 니체의 철학을 접했고 1899년에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도 바짝 다가섰다. 그런 철학을 소설로 구현한 작품이 바로『마의 산』인데, 나는 아직 그 작품은 구경조차 못 했다. 그는 단편 『토니오 크뢰거』, 『베니스에서의 죽음』, 장편『파우스트 박사』등 여러 유명한 작품들을 많이 썼지만 어쨌든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은 초년의 작품인『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3분의 1쯤 읽는 동안에 끊임없이 나를 괴롭하는 '한 가지 절박한 아쉬움'이 잦아들 줄을 모르고 있다. 그건 바로 소설의 주된 배경인 '뤼벡'을 가 볼 기회가 분명히 있었는데도 그 도시를 그만 쏙 빼먹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3년 전 이맘때 작심하고 날짜를 넉넉히 잡고 '독일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분명 '뤼벡'은 여행 예정지에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뤼벡이 토마스 만의 고향이자 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주요 배경이라는 사실은 새까맣게 몰랐지만 말이다. 어쨌든 뤼벡은 한자동맹으로도 이미 '오랫동안' 세계사에서 너무 유명한 도시였다! 그 땐 마침 직접 차를 몰고 우리가 내키는 대로 여행을 다녔으므로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었더라면 함부르크에 도착하기 전에 분명히 뤼벡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빼먹은 '뤼벡'이 이렇게 뒤늦게 안타까울 줄이야.

 

 

■ 알록달록한 유럽 지도

 

 

 

■ 구글 지도로 살펴본 '여행 예정 경로'(3년 전 여행 출발 전에 만들어본 지도)
  

 

 

뒤늦게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뤼벡'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가 너무나 궁금하여 자꾸만 인터넷을 뒤지게 된다. 그러다가 오늘 마침내 이 소설과도 직접 관계 있는 좋은 글을 발견했다. 마침 글쓴이가『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난 뒤에 직접 뤼벡을 찾아 찍은 사진과 글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여기에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글쓴이의 허락을 구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저 출처만 밝히고 인용해도 좋은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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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바로 <토마스만>이 태어나서 자란 집.

이 집은 <현실>과 <소설>이 구분되지 않는 

노벨문학상의 장소...*)(*

 

토마스만은 어린 시절,

이 창문밖으로 <문학 세계>를 내다봤다...**

 

 

<부덴브로크>의 집안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이것이 부덴브로크가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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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무대인 '뤼벡'을 이런 식으로 뒤늦게나마 인터넷으로라도 실컷 구경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흡족하다. 사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속에는 뤼벡 뿐만 아니라 인근 도시인 함부르크나 암스테르담도 자주 나오고 심지어 벨기에 북부 도시인 안트베르펜도 등장한다. 비록 뤼벡은 못 가 봤지만 이들 나머지 도시들은 가 봤으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냐 싶기도 하다.

 

그런데 마침 오늘은 '뤼벡' 말고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여러 도시들을 적잖이 가 봤다는 사실을 새삼 알고 나서 적잖이 놀랐다.(뒤늦게 소설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뜻밖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3년 전에 그토록 무리해서 장기간에 걸쳐 독일을 여행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이 멋진 도시들을 그저 막연하게만 머리 속에 그리고 있을 게 틀림없다. 몽테뉴가 말한 '여행은 오로지 비용 때문에만 힘이 든다'는 말은 정말 정곡을 찌른 말이다. 비용 걱정만 없다면 '여행'은 아무리 힘이 들더라고 일단 많이 다녀볼 일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여행지 근처에 또다른 '중요한 도시'가 있다면 거기도 꼭 빼놓지 말 일이다.

 

 

그들은 오버잘츠브룬이나 엠스나 바덴바덴이나 키싱엔으로 갔다. 그들은 쉴 목적에서뿐만 아니라 교양을 얻기 위해, 거기서 뉘른베르크를 거쳐 뮌헨으로, 잘츠부르크를 통과하고 이슐을 거쳐 으로,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317쪽)

 

(나의 생각)

오버잘츠브룬, 엠스, 바덴바덴, 키싱엔은 가 볼 생각조차 못 했던 도시들이다. 그라나 바로 그 다음 줄에 나오는 도시들은 운 좋게도 모조리 다 가 봤던 도시들이다. 유럽을 꼴랑 세 번 여행 간 셈치고는 내가 가 봤던 도시들이 이 소설 속에 이렇게 한꺼번에 좌르륵 나열되어 나온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 2년 전에 다녀온 동유럽 여행 코스(뮌헨 in, 프랑크푸르트 out)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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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7-07-28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 덕분에 도시하나를 추가했네요.~^^오늘 함부르크에 가요. 기대됩니다!

oren 2017-07-28 13:55   좋아요 0 | URL
함부르크 좋지요. 항구도시라 다소 지저분할 줄 알았는데,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곳엔 해산물 요리가 아주 유명하죠. 바닷가에 자리 잡은 좋은 식당 찾아서 꼭 드시길요. 아는 정보가 별로 없으면 ‘택시‘ 타고 ‘기사님‘한테 물어봐도 되고요. 우린 그렇게 찾아갔는데 아주 만족스럽더군요.

gemahh 2017-09-30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글을 인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고세 올림

oren 2017-11-18 18:32   좋아요 0 | URL
고고세 님 안녕하세요?
주인 님의 사전 허락도 없이 제 글에 인용했는데, 너그럽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뒷방은 어디에......

 

 

알라딘 마을에 오래 터를 잡고 지내다 보면 '여기'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을 글로 한참이나 끄적거리다가 관 둔 적도 있다. 이제 와서 그 글을 다시 끄집어 내어 마무리지을 생각은 별로 없다. 글을 쓰는 것도 '때'가 맞아야 계속 이어서 쓸 수 있는데, 그 글은 어느새 '철'이 너무 지나면서 시들해져 버렸다.

 

그 글을 쓰면서 내가 그 속에 담고 싶었던 주된 감정은 '옛날 옛적에 알라딘 마을은 이래서 좋았었지' 하는 느낌이었다. '고향 마을' 같은 안온함이 넘치는 그런 곳이 아직도 사이버 공간 어느 한 켠에 여전히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언제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누구든지 '옛날'을 그리워 하며 '그때가 좋았지' 하는 탄식 밖에 내놓지 못한다. 그게 세상 이치이기도 하고.

 

오래 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알라딘 마을 사람들'이 어느새 홀연히 자취를 감춘 채 좀처럼 다시 나타나지 않거나, 어쩌다 한 번씩 '희미한 발자국'만 남긴 채 알라딘 마을을 다녀간 흔적만 겨우 알아볼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오래 전에 떠난 분들 가운데는 아마 '알라딘 마을'보다 훨씬 더 새롭고 즐거운 '새 동네'에 가서 잘 살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그 분들이 새로운 동네로 가서 잘 살고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하다. 혹은 '알라딘 마을'보다 훨씬 더 한적한 곳으로 떠나 여기보다 훨씬 더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 분들도 계시리라. 그 또한 좋은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알라딘 마을'에서 여러 모로 신망을 받으며 꽤 열심히 '마을'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면서도 '알라딘 마을 생활'을 즐기시던 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말 못할 사정 때문에 다시는 '고향 마을'을 찾지 않는 경우다. 설사 그런 분들이 다른 마을에 가서 살더라도 '알라딘 마을'을 잠깐씩이나마 '고향에 다녀 오듯이' 들를 수도 있을 텐데, 그러기조차 마땅찮은 사정에 처해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그런데 가끔씩은 전혀 뜻밖에 '환향'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런 분들의 건강한 모습을 '알라딘 마을'에서 어느날 갑자기 다시 발견하는 일은 몹시 즐겁다. 정든 고향도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한 번 떠나면 영영 되돌아가기가 힘든 경우가 참 많다. 언짢은 일 때문에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야 더 말해 뭐하랴. 그래도 고향의 안온함은 늘 그리운 법이다. 옛날의 불편한 기억들을 잊고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오는 분들을 보면 가끔 늘그막에 안간힘을 다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암튼 어렵사리 마음 먹은 '귀향'은 늘 따뜻하게 받아줄 일이다. 사는 게 참 별 게 아닌 것 같아도, 늘 마음 같지가 않으니 말이다.

 

 * * *

 

 

삶의 온기

 

이처럼 내용 없는 '우리라는 느낌(we-feeling)'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것이 바람직한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수단의 소설가 타옙 살리(Tayeb Salih)는 7년 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와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치 내 안에서 한 덩이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기분, 마치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있는 꽁꽁 언 물체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되찾은 것은 "부족이 주는 삶의 온기"라고 남자는 말한다.

 

삶의 온기, 우리라는 느낌은 음식이나 거리의 소음, 어린 시절 창 밖으로 보이던 불빛들이 주는 친숙함과 쉽게 결부된다. 그러나 냄새와 광경은 느낌의 '표현'일 뿐,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지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이 적절하며, 따라서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고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며 당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우리 부류 속에 있다는 느낌이며, 버지니아 울프의 묘사에 따르면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고, 함께한다는 편안한 느낌이며, 친밀함과 온전함과 신속한 상호협력을 지향하는 공통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 데이비드 베레비,『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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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한 달쯤 전에 끄적거렸던 '미완성 글'을 기어이 덧붙여 본다. 다시 이어 쓸 힘도 딸리니 마침 잘 됐다 싶다.

오래 살다 보니 내가 내 자신의 글을 인용할 날도 다 있구나 싶다.

 

아, 옛날이여~

 

 

까마득한 옛날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을까. 그들에겐 라디오도 TV도 없었고, 그 흔한 컴퓨터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었는데 말이다. 까페니 블로그니 카톡방이니 밴드니 하는 온갖 SNS 서비스도 하나 없었는데 말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순수의 시대'를 잠깐이나마 살았다. 아니 적잖이 살았던 듯하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시골에선 '전기'가 중학교 2학년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들어왔다. 그 전까지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라고 해봐야 라디오가 유일했다. 숱하게 뜯어 보기도 하고 쥐어박기도 했던 그 라디오는 늘 등어리에 큼지막한 건전지를 동여매고 있었다. 그래도 그 라디오는 무려 '휴대용'이었다.

 

그 라디오는 사람들 손에 이리 저리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끌려 다니면서도 온갖 세상일을 시시콜콜 다 들려줬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으로 시작되는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와 함께 스포츠 선수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은 '눈부신' 활약상을 생생하게 전해 줄 때도 있었고, 독서만담보다 백 배는 더 재미있는 '장소팔과 고춘자의 만담'도 들려줬다. 당대 최고의 여가수라 불리웠지만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가수 문주란이 불렀던 '백치 아다다' '동숙의 노래' '공항의 이별' 같은 노래들을 오로지 라디오로만 들으며 즐거워 했다. 생전 '공항' 한 번 구경도 못했고, '동숙'이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전기가 들어오니 TV도 잽싸게 따라 들어왔다. 백여 호 남짓한 조용한 시골 마을에 테레비가 들어 오니 세상이 너무 빠른 속도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긴긴 여름 낮을 달구던 뜨거운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나면 전봇대조차 없는 으슥한 골목길이 무서워 고작 방에서 호롱불이나 켜 놓고 하릴없이 먹이나 갈아 대며 신문지에 붓글씨나 써내리던 낭만적인 '초여름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라시찬 주연의 '전우'도 봐야 했고, 최불암 주연의 '수사반장'도 꼭 봐야 했다. 몇 대 밖에 없는 TV 앞자리는 조금만 늦어도 완전한 사각지대까지 밀려나기 일쑤여서 방영시간이 가까워 오면 늘 마음이 조급했다. 이따금씩 열리는 WBA나 WBC 타이틀전 권투 시합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지상 최고의 스포츠 중계방송이었다. 주말마다 밤늦게나 볼 수 있는 '주말의 명화'와 '명화 극장'은 촌동네 중학생에겐 멋진 별천지로 들어갈 수 있는 마술같은 '연결통로'였다. 그토록 멋진 배우들이 주말마다 나와서 씽긋 웃으며 멋지게 총을 한 방에 명중시켜 악당을 쓰러뜨리거나, 평생에 구경조차 하기 힘들 것 같은 절세의 미녀 여배우와 키스씬을 보여 주면 어느새 촌동네 중딩의 가슴도 덩달아 벌렁거렸다.

 

내가 어렸을 땐 <전국노래자랑>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 대신에 일 년에 한 번씩 분교에 다들 모여서 거창한 '음악 콩쿠르'가 열렸다. 거기서 입상하면 부상으로 커다란 '양은솥'이나 '양은남비'를 받았다. 멋진 유행가를 뽐낸 끝에 수상자로 호명된 동네의 젊은 처녀 총각들은 그 솥이나 남비가 진심으로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으로 기뻐했다. 솥이나 남비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앵콜송을 부르던 그 때 그 감격에 겨운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던 마을 분교에 어쩌다 총각 선생님이라도 새로 부임할라치면 동네에서 힘깨나 쓰는 어른들은 남보다 서로 먼저 선생님을 농가로 초대해서 '시골 밥상' 앞에 모시기 위해 야단 법석을 떨었다. 마침내 선생님께서 '저녁 식사'를 위해 홀로 조심스럽게 돌담장을 돌아 우리 집 안마당으로 들어서던 순간의 그 짜릿한 흥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차려낼 것도 별로 없는 변변찮은 시골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온갖 재료들로 갖은 반찬들을 기가 막힌 솜씨로 만들어 내셨던 어머니의 요리 솜씨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어디서 그런 레시피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종가집 할매한테 몇 차례나 걸음을 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원시적이고 사뭇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생활을 지극히 당연시했던 까마득한 옛 시절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족히 몇십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니 옛날이 맞긴 맞다. 


돌이켜 보면 알라딘 마을도 한 때는 그런 '시골 마을 풍경'을 닮은 때가 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알라딘이라는 마을 밖에선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조차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듯한 분위기마저 느껴졌었다. 누군가 바깥 세상의 일들을 뉴미디어로 소개하는 일조차 드물었다. 알라딘 마을 사람들은 오로지 책만 일고 글만 쓰는 사람들로만 보였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글과 함께 올리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저 해가 뜨나 해가 저무나 '책 이야기'만 가득했다. 알라딘에 글을 쓰는 건 곧바로 리뷰를 쓰는 일과 거의 동일시될 정도였다. 페이퍼에 신변잡기를 올리는 일 자체가 이단시될 정도였으니까. 

 
조용하던 알라딘 마을에 거센 변화가 밀어닥친 때는 아마도 블로그와 카페가 활성화된 이후였던 듯하다. 마치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구석구석 빠르게 연결해 주는 동시에 밤낮없이 여기저기를 환하게 밝히는 '전기'가 들어온 셈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빠르게 전파하는 일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온갖 신기한 뉴스들을 빠르게 퍼나르는 일로 바쁜 사람들조차 적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사진과 동영상이 '글' 사이로 빠르게 파고 들기 시작했다. 놀랄만큼 새로운 이야기 전달 방식이 등장했는데 어느 누가 케케묵은 옛날 방식만 고집하겠는가.

그와 동시에 알라딘 마을을 오랫동안 지켜왔던 느티나무와 같은 존재들도 말라 죽기 시작했다. 동네 터줏대감 같은 분도, 학식이 늘 남달랐던 마을 훈장어른 같은 분도 차츰 시야에서 멀어졌다. 새로 부임하신 총각 선생님을 차마 마주칠까 두려워 몰래 사립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앙가슴을 떨던 짜릿한 흥분들도 차츰 사라졌다. 동네 콩쿠르에서 온 마을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에 빠트렸던 나이찬 처녀총각들의 기막힌 노래솜씨도 더이상 보기 어렵게 되었다. 온갖 궂은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두루 다 찾아다니며 언제나 정다운 말을 건네고 등을 토닥여 주던 정다운 고모님 같은 분들도 더는 찾기 힘들어졌다. 언제나 쭈삣거리기만 하던 수줍은 떠꺼머리 총각도, 걸핏하면 뺨부터 붉히던 곱디 고운 새악시 같던 분들도 어느새 다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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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동안에 문득 니체가 말한 '잊을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글이 떠올랐다. 물론 여기서 '잊어야 할 대상'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 가운데 우리의 행복을 여전히 방해하는 나쁜 기억들'이다. 알라딘 마을에서 과거에 있었던 언짢았던 일들도 가급적이면 빨리 잊는 게 좋겠다 싶다. 니체의 말대로,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행복을 방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가장 작은 행복이라도 항상 거기 있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불쾌함과 욕망과 결핍이 가득한 가운데에서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기발한 착상처럼 단지 에피소드로 잠깐 등장하는 가장 큰 행복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행복이다.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순간의 문턱에서 모든 과거를 잊으면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은, 또 승리의 여신처럼 현기증이나 두려움 없이 한 지점에 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그가 결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보라. 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서나 생성만을 봐야 할 형벌을 받았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할 것이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점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을 볼 것이며 이 생성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제자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망각이 내재한다. 모든 유기체의 생명에는 빛뿐만 아니라 어두움도 속하듯이.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느끼려는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이나 되새김질로만, 반복되는 되새김질로만 살아가야 하는 동물과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동물이 보여주듯이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또는 좀더 단순하게 내 주제를 설명한다면,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상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중략)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단지 지평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ㅡ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민족에게서,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것과 밝은 것을 밝힐 수 없는 것과 어두운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바로 이것이 독자들에게 한번 고찰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제다. 즉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에 똑같이 필요하다.(292∼294쪽)

 

 - 니체, 『비극의 탄생 · 반시대적 고찰』, <반시대적 고찰 Ⅱ_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 강조한 부분은 원문 그대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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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7-07-2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때 네이버 블로그 할때 그런 느낌 받았었는데요, 가끔 그들과 덧글 우정 쌓을때가 그리울때도 있더라구요.

oren 2017-07-25 14:08   좋아요 1 | URL
사이버 공간에서 ‘마을‘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란 이제는 쉽지 않은 듯해요. 알라딘 마을도 예전에 비해서는 정말 많이 변했고요. 예전엔 시골 마을 같았는데 요즘은 도시에서 아파트 생활 하는 기분이랄까요?

오후즈음 2017-07-25 1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네이버 베타블로그부터 했는데 점점 상업적으로 변하는 블로거들 보면서 네이버를 떠나게 되더라구요. 진짜 소통했던 글들은 없어지고 체험담 리뷰 뿐이니 ㅠㅠ. 대신 저는 알라딘에 온지 얼마 안되서 아직은 마을같은 기분입니다.
oren님같은 이웃도 만나구요~^^

oren 2017-07-25 17:57   좋아요 1 | URL
알라딘이 아직은 마을 같은 분위기는 맞습니다, 맞고요. 다만, 분위기가 옛날 옛적의 그 마을 보단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지요. 뭐, 앞으로도 또 지금보다 훨씬 더 변할 테니, 변하는 걸 너무 탓할 이유는 없겠지만요.

겨울호랑이 2017-07-25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예전 알라딘은 그랬군요..
저도 이사온지 얼마 안되어 oren님 말씀으로만 예전을 느끼게 됩니다^^: 나름 지금 아파트 생활도 즐겁게 하는 요즘 입니다^^:

oren 2017-07-25 18:01   좋아요 2 | URL
알라딘 마을 자체가 변한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마을에 사는 이웃들의 모습이 가장 많이 변했다고 봐야겠죠. 많이 떠나가기도 했고, 이사는 가지 않았지만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 분들도 많고요. 변화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아무래도 새로 이사온 좋은 이웃분들이겠지요. 겨울호랑이 님처럼요^^

얄라알라 2017-07-27 0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사실 댓글을 거의 안 다는 부류여서 예전 알라딘이 어땠을까 고양이의 호기심만 올라오는 군요. 이렇게 찬찬히 서재순례하며 글 읽고 댓글다는 즐거움이 큰데, 알라딘 마을의 정겨움이 이런데서 오는 걸까요?

oren 2017-07-27 11:14   좋아요 1 | URL
옛날엔 댓글이 달렸다는 사실을 ‘이메일‘로 확인었었죠. 스마트폰도 나오기 전이었으니까요.

댓글이 수십 개씩 달리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죠. 서재 이웃들의 소소한 일상을 ‘확인‘하는 일에 너도나도 뜨거운 관심들을 보이기도 했고요.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웃집에 새로운 책이 몇 권 더 늘어났는지도 훤히 알 정도였다고 할까요? 책 이야기 뿐만 아니라 기족들의 소소한 일상에 대해서도 거리낌없이 소식을 주고 받는 풍경도 흔했고요. 인생의 중대사들을 두고도 서로 다함께 기쁨과 아픔을 나누기도 했고, 서재 이웃들과의 오프라인 모임들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고요. 암튼 그때는 ‘시골 마을‘ 같은 분위기였었답니다. 요즘은 어쨌든 이웃이 뭘 하고 지내든 별로 신경 안 쓰고 지내는 ‘아파트 생활‘ 같은 분위기로 많이 바뀐 듯해요.

cyrus 2017-07-31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플에 접속하면 항상 하는 일이 다른 분이 쓴 글을 보는 것입니다. 뉴스피드에 열다섯편 넘는 글이 뜹니다. 다 못 읽습니다. ‘좋아요‘만 누르는 글도 있어요. 정독하지 않더라도 글쓴이의 노력이 보이는 글에는 무조건 ‘좋아요‘를 누릅니다.

요즘 친구 수가 많은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다가가서 친해지려고 노력했지만,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뉴스피드 목록이 포화 상태라서 좋은 글을 못 읽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도 며칠 전에 남긴 이웃들의 글을 보고 있는데요, 이웃들이 남긴 ‘읽었습니다‘, ‘읽고 있습니다‘ 도 같이 보게 되니까 불편했어요. 그래서 교류가 뜸한 분들이 있으면 친구 관계를 끊어요. 이런 분들을 끝까지 안고 갈 자신감이 없어요.

아무튼 북플 이용에 익숙해지면서 알라딘 서재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점은 사실입니다.

oren 2017-07-31 14:34   좋아요 1 | URL
저는 북플이 너무 불편해서 ‘PC‘에서 벗어났을 때만 주로 이용하는 편이고, 알라디너 분들의 글을 읽기 위해 북플을 이용하는 경우는 드문 편입니다. 그리고 ‘친구 신청‘은 저도 꾸준히(?) 받는 편입니디만, 제가 거기에 일일이 맞장구(‘친구 수락‘)를 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답니다. 굳이 그럴 필요를 별로 못 느끼겠더라구요.(그래서 뉴스피드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는 드물고요.) 혹여 제게 친구 신청하신 분들은 서운해 하실 지 몰라도,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친구 신청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워낙 많은 듯하여, 저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패쓰~ 한답니다.
 
간통 같은 독서

 

 

자신만만하고 못하고는 스스로가 처한 환경 나름인 것이다.

 - 구스타프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중에서

 

 * * *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가 같은 날 죽었다는 건 흥미로운 문학적 우연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와 생몰연대가 가장 가까운 작가가 도스토예프스끼(1821∼1881)라는 사실도 '흥미'를 가지고 살피면 약간은 흥미롭다. 그러면 이 두 사람과 생몰연대가 가장 가까운 대문호는 누구였을까? 아마도 톨스토이(1828∼1910)?

 

플로베르와 톨스토이는 '간통 문학'의 대표작을 쓴 작가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문학적 연관성을 갖는 듯하다. 비록 잘은 모르겠지만 숱한 문학 전공자들이『마담 보바리』(1857년)와 『안나 까레니나』(1873년)를 두고 숱한 비교 분석을 쏟아냈으리라는 점은 누구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싶다.(『안나 까레니나』를 '영화'로만 봤지 여태까지 '책'으로는 읽지 않은 나도 태연스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혹시 톨스토이가 쓴『전쟁과 평화』(1869년) 속에서도『마담 보바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톨스토이가 워낙 플로베르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하니 그런 궁금증을 품는 사람도 아예 없지는 않으리라. 작가들 사이에 일어났던 '내밀한 교감'을 어찌 일반 독자가 시시콜콜 다 알아챌 수 있으랴만 그래도 『마담 보바리』의 다음 대목을 읽은 나로서는 두 사람 사이의 '간통 현장'을 목격한 듯한 짜릿한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과연 톨스토이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마차 장면'에 영향을 받아서 『전쟁과 평화』의 일부를 썼을까.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구상한 것은 1856년이었다. 플로베르가 무려 5년 동안에 걸쳐 '납덩이같은 펜과의 처절한 싸움' 끝에 마침내 『마담 보바리』의 탈고를 끝낸 게 그해 봄이었다. 톨스토이는『전쟁과 평화』의 <제1부>를 완성하는 데만 무려 6년이 걸렸다. 그 작품을 쓰기 위해 그가 모은 자료들만 하더라도 '도서관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 일단을 보여주는 편지가 그 사정을 엿보게 해 준다.

 

"나는 우수(憂愁)에 휩싸여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오직 괴로움만을 거듭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 거친 땅을 깊이 갈아엎는 이 예비적 노작이 얼마나 고된 작업인지 당신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이제부터 착수하려는 훌륭한 대작 가운데 나오는 여러 사람들에게 일어날 모든 사건을 구상하고 고쳐 생각하고, 그러한 여러 인물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몇백만의 관계를 고려하고, 그 가운데서 백만분의 일을 골라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런 일에 착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 A.A. 페뜨에게 보낸 편지(1864.011.1) 중에서

 

톨스토이가 『전쟁의 평화』를 쓰기 위해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책들 가운데 『마담 보바리』도 끼어 있었으리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그가 골라낸 '백만분의 일' 가운데 하나가 과연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아니었을까 싶은 나의 합리적인 의문까지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어차피 최종 판단은 언제나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 * *

 

 

파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인 걸요

 

성당 앞 광장에는 어린애가 하나 놀고 있었다.

 

「마차 한 대만 불러다오!」

 

어린애는 카트르 방 거리로 총알처럼 뛰어갔다. 그러자 그들은 한동안 얼굴을 마주한 채 어색한 기분이 되어 서 있었다.

 

「아, ……레옹! ……. 정말 …… 몰라요 …… 어쩌면 좋아요 ……!」

 

그녀는 선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건 아주 못할 짓이에요, 알아요?」

 

「뭐가 어때서요?」하고 서기는 되물었다. 「파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인 걸요!」

 

그러자 이 한마디 말이 거역할 수 없는 논거인 양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353∼354쪽)

 

 

뒤이어 마차가 나타나고, 레옹과 엠마는 그 유명한 '마차 안에서의 한낮의 질주'를 벌인다. 사실 방금 인용한 문장 보다는 곧이어 이어지는 장면이 훨씬 더 압권이다. 이왕에 내친 김이니 나도 그 유명한 대목까지 인용함으로써 내 글을 조금이라도 더 내달리게 만들고 싶다.

 

 

「가시더라도 북쪽 문으로 나가주세요!」하고 아직도 문간에 서 있던 성당지기가 그들에게 소리쳤다. 「부활, 최후의 심판, 낙원, 다윗왕, 그리고 지옥불 속의 저주받은 자들을 보실 수 있으니까요」

 

「나리, 어디로 모실깝쇼?」하고 마부가 물었다.

 

「아무데라도 좋아!」하고 레옹은 엠마를 마차 안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355쪽)

 

 * 강조한 부분은 번역문을 따랐다. 곧 있을 '엠마와 레옹의 마차 안에서의 정사(情事)'를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계속 달렸다. 마부가 멈출 때마다, 마차 안에서는 "계속 가요!" 라는 대답만 들려왔다. 마차가 세 번째로 멈추었을 때도 마부는 "그냥 가라니까! 라는 더 거센 목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마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목마름과 피로와 근심으로 거의 울상이 되어' 마차를 몰았다. 이제 마차는 이쯤에서 세우자.

 

마지막으로 남은 건 내가 '두 작가와의 교감'을 의심하는 『전쟁과 평화』속 대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니꼴라이는 '로스토프 노백작 집안'의 맏아들이자 순박한 다혈질의 청년이다. 그는 어릴 땐 집에서 함께 자란 사촌 누이동생 쏘냐를 좋아했지만, 군대에 입대하고 '도시 생활'을 겪고 나서는 차츰 '도회지 사람'으로 변모한다. 심지어 '유부녀'를 능란하게 유혹할 정도로 점점 더 까진(?) 모습을 보여준다. 이 점이 바로 '파리 물을 먹은 레옹'과 너무나도 닮았다. 레옹 또한 엠마를 처음 만났을 땐 순진하기 그지 없었으나 '파리 생활'을 겪은 뒤 3년 만에 나타난 모습에선 어느새 '선수'가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골마을 용빌로 돌아가야 할 유부녀인 엠마를 한낮에 '마차'에 태울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이쯤에서 톨스토이의 펜으로 그려진 '유부녀 유혹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내가 '파리와 서울 사이'에서 뭔가 유사한 낌새를 발견했다면 그게 오로지 나만의 느낌일까, 나는 그게 너무나 궁금하다.

 

서울에서는 보통인데...

 

까쩨리나 뻬뜨로브나가 왈츠와 에꼬쎄즈를 타기 시작하고 댄스가 시작되자 니꼴라이는 그의 민첩한 동작으로 더욱더 이곳의 상류 사회를 매료시키고 말았다. 그는 독특하고 분방한 댄스로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니꼴라이 자신도 이날 밤의 자기 춤솜씨에 약간 놀랐다. 그는 모스크바에서는 이렇게 추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이와 같이 너무나 분방한 춤 태도는 버릇없는 악취미라고까지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든 사람을 무엇인가 기발한 것으로, 서울에서는 보통인데 시골에 사는 자기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밤새도록 니꼴라이는 현의 어느 관리의 아내이자 파란 눈의 살이 찐 귀여운 금발 미인에게 가장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남의 아내는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져 있다는 신멋이 든 젊은이들의 순진한 신념으로, 니꼴라이는 이 부인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남편에 대해서도 마음을 터놓고, 그러면서도 속에 무엇인가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 즉 니꼴라이와 그 남편의 아내는 서로 마음이 잘 맞을 것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말로는 하지 않지만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남편 쪽은 그러한 신념에는 동감이 가지 않는 듯, 애써 니꼴라이에게 언짢은 태도를 취하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니꼴라이의 사람이 좋은 순진성에는 끝이 없었기 때문에, 때로는 남편은 저도 모르게 니꼴라이의 매우 들뜬 기분에 끌려들 뻔 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티가 끝날 무렵에 아내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상기되어 생기를 띠어 가자 남편의 얼굴은 더욱더 침울하고 창백해졌다. 그것은 마치 활기의 분량이 두 사람에게는 일정하고, 그것이 아내 쪽에서 증가함에 따라서 남편 쪽에서는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니꼴라이는 얼굴에 미소를 계속 띠고 안락의자에 약간 몸을 숙이고 앉아, 금발의 여인에게 몸을 가까이 하고 그녀에게 뮤즈네 비너스네 하며 겉치레의 말을 하고 있었다.

 

다리의 위치를 힘차게 바꾸기도 하고 향수 냄새를 사방에 풍기며 상대방 부인과, 자기 자신에게 꼭 맞는 승마 바지에 싸인 자기의 아름다운 다리 모양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니꼴라이는 금발의 여성에게, 자기는 이 보로네시에 있는 어느 여성을 유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분은 어떤 분이에요?"

 

"매력적이며 여신 같은 분입니다. 그분의 눈은(하고 니꼴라이는 상대 여성을 바라보았다) 파랗고, 입은 산호 같으며, 하얀 살결 ……" 그는 어깨를 보았다. "어깨나 가슴은 다이애나 여신입니다 ……."

 

남편이 두 사람한테로 다가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어두운 얼굴로 아내에게 물었다.

 

"아! 니끼따 이바노이치." 니꼴라이는 예의 바르게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리고 니끼따 이바노이치도 자기의 농담에 참가해 주기를 바라는 듯이, 그에게도 어떤 금발 미인을 납치하려는 계획을 들려주었다.(1293-1294쪽)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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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20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게네프(1818~1883)는 플로베르보다 3년 일찍 태어나서 3년 늦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19세기 유럽 문단은 정말 ‘별들의 전쟁‘이었습니다. ^^

oren 2017-07-22 09:1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투르게네프는 플로베르보다 앞뒤로 3년씩 늘려 살았군요.^^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고전을 읽어라. 그전에 패디먼을 먼저 만나보라.
내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내가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 *

 

 

때로는 간단한 대사 한 구절이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가령 "이 한심한 화상아!(Alas, poor caitiff)"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의 4막 1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나는 이 대사로부터 위안을 얻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 후 고부 갈등으로 중간에 끼어 힘들었을 때, 첫 직장에서 타의로 퇴직하게 되었을 떄,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돈마저 떼었을 때, 나는 이 대사를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나 자신이 불쌍해지면서 그런 나 자신을 격려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평생 독서 계획』은 소포클레스 항목에서, 연극은 운명 앞의 절망과 가능성 앞의 희망이 충돌하는 긴장이며 그 긴장의 해소에서 커다란 즐거움이 온다고 말한다. 그런 연극적 상황 속에 나 자신을 설정하면 기이하게도 긴장이 이완되면서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런 간단한 대사에서 삶의 활력을 얻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가령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Egom mihi placui(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 나는 대학에서 셰익스피어 드라마를 배울 때에는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대사의 심오함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젊은 대학생에게 셰익스피어 드라마는 벅찬 독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읽고 또 배울까? 어릴 때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 나이 들어 그 가르침의 선견지명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성숙을 촉진하는 교육의 본령이고, 『평생 독서 계획』의 원대한 취지이며, 텍스트와 주석의 관계인 것이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 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475∼476쪽)

 

 - 『평생 독서 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카시오(오셀로가 '연적'이라고 오해한 자신의 부관)가 말한 대사 "Alas, poor caitiff"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평생 독서 계획』을 번역한 분(이종인)은 그 대사를 "이 한심한 화상아!"라고 해석했지만, 민음사판 전집 시리즈(최종철 번역)에서는 "아, 딱한 천것!"이라고 번역했다. 두 번역 사이의 뉘앙스의 차이가 매우 크다. 내가 가진 또다른 오래된 책(『학원 세계문학전집』(전30권), 김재남 번역, 1993년 1월)에서는 "흥, 그까짓 게!" 라고 번역해 놓았다. 도대체 저 대사의 속뜻은 무엇일까.

 

이걸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고 조금 복잡하다. 간략하게 줄여서 말하자면 이렇다.

 

온갖 수작을 다 부려서 오셀로를 '질투심으로 미치게 만드는 공작'을 꾸미던 이아고는 4막 1장에 이르러 마침내 비앙카(매춘부, 카시오의 연인)를 끌어들여 '오셀로의 질투심'을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이아고는 오셀로를 잠시 물러나게 하고 '카시오의 행동'을 관찰하도록 만든다. 이아고는 카시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비앙카'를 화제에 끌어들여 오셀로가 오해하기 딱 좋은 '카시오의 행동'을 유발시키는데,  오셀로는 그런 카시오의 행동을 자신의 아내인 데스데모나에 대한 카시오의 반응으로 완전히 오해한다. 이아고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둘(카시오와 오셀로) 사이에 끼어들어 '질투심'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아고가 카시오한테 말하기를, '비앙카의 능력'을 이용하여 데스데모나에게 '복직 문제'를 부탁하면 어떻겠냐고 하자, 카시오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Alas, poor caitiff"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비앙카를 "딱한 천것" 혹은 "그까짓 게"로 여긴다는 투다. 그러면서도 카시오의 입가엔 웃음이 걸린다. 오셀로는 카시오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질투심을 더욱 활활 태우는' 연료로 쓰는 데 여념이 없다.

 

극중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의 내용이나 극의 흐름으로 판단해 볼 때 "Alas, poor caitiff"에 대한 해석으로는 까마득한 옛날에 나온 책에서 오늘 우연히 발견한 번역인 "흥, 그까짓 게!"라는 표현이 가장 이해하기 쉬워 보인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면 『평생 독서 계획』의 번역자가 말한 내용이 조금 이상해진다. "흥, 그까짓 게!"라는 뜻의 대사를 "이 한심한 화상아!" 라고, 다시 말하자면 '자책하는 뜻을 강하게 내포하는' 대사로 잘못 받아들인 셈이 되고, 결국 번역하신 분이 오랫동안 그 대사 덕분에 여러 차례 위안을 얻게 되었다는 말도 우습게 변하기 때문이다. 기껏 글을 쓰고 나니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굳이 이런 점까지 말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는데 말이다.

 

"흥, 그까짓 게!"

 

그까짓 대사 한 줄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만든다.

 

 

오셀로

알겠나, 이아고?

난 아주 교묘하게 참겠지만 ㅡ 알겠지? ㅡ

아주 잔인할 테야.

 

 

이아고

빗나간 건 아니지만

다 때를 맞추세요. 물러나시겠어요? (오셀로 물러난다.)

난 이제 카시오에게 비앙카 얘기를 물어야지.

그 계집은 자신의 욕망을 팔아서

먹을 빵과 입을 옷을 사는데 고것이

카시오에게 혹했다. ㅡ 많은 사람 속이고

하나에게 속는 것이 그 갈보의 저주니까.

카시오는 그녀 얘길 들으면 넘치는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여기 그가 오는군.

 

카시오 등장.

 

그가 지을 미소에 오셀로는 미칠 테고

무식한 질투심을 품었으니 불쌍한 카시오의

미소와 몸짓과 경박한 행동을 완전히

오해할 수밖에 없다. 부관님, 기분이 어때요?

 

카시오

내 직위를 불러 주니 더욱 나빠지는군,

그게 없어 죽을 지경이니까.

 

이아고

데스데모나를 다그치면 확보하실 겁니다.

(낮은 목소리로)

그런데 이 청이 비앙카의 능력에 달렸다면

얼마나 빨리 성공하겠어요!

 

카시오

아, 딱한 천것!

 

오셀로

봐, 놈이 벌써 웃고 있어!

 

이아고

남자를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는 못 봤어요.

 

 카시오

아, 딱한 잡것, 정말 날 사랑하는 것 같아.

 

 오셀로

이젠 그걸 살짝 부인하면서 웃어 넘겨.

 

 이아고

들었어요, 카시오?

 

오셀로

이젠 그가 그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르네. 허 참, 잘했다, 잘했어.

 

 

이아고

당신이 자기와 결혼할 거라고 하는데

그럴 작정이세요?

 

카시오

하, 하, 하!

 

오셀로

환희한단 말이지, 로마인아, 환희해?

 

 카시오

내가 결혼해! 뭐, 고객이! 제발 내 판단력을 자비롭게

봐 주게, 너무 부실하다고 생각하진 말게나. 하, 하, 하!

 

오셀로

그래, 그래, 이긴 자가 웃는다.

 

이아고

사실, 소문에는 결혼하실 거랍니다.

 

카시오

제발, 올바로 말하게!

 

 

이아고

아니라면 제가 정말 나쁜 놈입니다.

 

『오셀로』, <4막 1장, 90∼125행>

 

 

 * * *

 

 

OTHELLO

 

Dost thou hear, Iago?
I will be found most cunning in my patience;
But--dost thou hear?--most bloody.

 

IAGO

That's not amiss;
But yet keep time in all. Will you withdraw?

OTHELLO retires

Now will I question Cassio of Bianca,
A housewife that by selling her desires
Buys herself bread and clothes: it is a creature
That dotes on Cassio; as 'tis the strumpet's plague
To beguile many and be beguiled by one:
He, when he hears of her, cannot refrain
From the excess of laughter. Here he comes:

Re-enter CASSIO

As he shall smile, Othello shall go mad;
And his unbookish jealousy must construe
Poor Cassio's smiles, gestures and light behavior,
Quite in the wrong. How do you now, lieutenant?

CASSIO

The worser that you give me the addition
Whose want even kills me.

IAGO

Ply Desdemona well, and you are sure on't.

Speaking lower

Now, if this suit lay in Bianco's power,
How quickly should you speed!

CASSIO

Alas, poor caitiff!

OTHELLO

Look, how he laughs already!

IAGO

I never knew woman love man so.

CASSIO

Alas, poor rogue! I think, i' faith, she loves me.

OTHELLO

Now he denies it faintly, and laughs it out.

IAGO

Do you hear, Cassio?

OTHELLO

Now he importunes him
To tell it o'er: go to; well said, well said.

IAGO

She gives it out that you shall marry hey:
Do you intend it?

CASSIO

Ha, ha, ha!

OTHELLO

Do you triumph, Roman? do you triumph?

CASSIO

I marry her! what? a customer! Prithee, bear some
charity to my wit: do not think it so unwholesome.
Ha, ha, ha!

OTHELLO

So, so, so, so: they laugh that win.

IAGO

'Faith, the cry goes that you shall marry her.

CASSIO

Prithee, say true.

IAGO

I am a very villain else.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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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08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짧은 대사 하나 속에 작품 전체의 내용이 담길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oren 2017-07-09 00:24   좋아요 1 | URL
『오셀로』의 4막 1장에 나온다는 ˝Alas, poor caitiff!˝에 대한 번역이 출판사마다 서로 다르더군요. 『평생 독서 계획』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그냥 우리가 흔히 쓰는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뜻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오랫동안 장식품처럼 책장에 꽂혀 있던 ‘학원 세계문학전집판‘ 『셰익스피어』에서 그 대목에 대한 ‘보다 정확한 뜻‘을 알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평생 독서 계힉』을 번역하신 분의 말대로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번역하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해석‘이나 ‘주석‘을 붙이는 이유 또한 궁극적으로는 ‘말이 지닌 결핍과 과잉‘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명박 물광피부 2017-12-21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본까지 보니 좋네요

oren 2017-12-22 00:04   좋아요 0 | URL
영어로는 똑같은 세 단어를 두고 사람마다 이토록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더군요.^^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묘한 '말', 묘한 '욕망'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 몽테뉴

 

 * * *

 

'미처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분을 소포클레스만큼 재치있게 말한 사람도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포악한 주인'은 물론 '여자와 동침하고 싶은 욕망'을 의인화한 표현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얼마나 그 욕망에 시달렸으면 그런 말을 다 했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는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그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쁨을 격하게 표현했는데, 마침 그 '대화의 현장'엔 케팔레스 옹도 있었던 모양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그런 얘기가 나오니 말이다.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그래서 내가 말했네. "케팔레스 옹, 나는 연로하신 분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오. 우리는 그분들한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치 어쩌면 우리도 지나가야 할 길이 어떠한지, 거칠고 험한지, 아니면 쉽고 순탄한지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한테서 배우듯이 말이오. 그대는 지금 시인들이 '노년의 문턱'이라고 말하는 그런 연세가 되신 만큼, 나는 무엇보다도 그대의 심경이 어떠하신지 듣고 싶어요. 산다는 것이 힘드신가요? 아니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케팔로스 옹이 말했네. "제우스에 맹세고, 내 심정이 어떠한지 그대에게 말하겠소, 소크라테스 선생. 나는 또래의 늙은이들 몇 명과 가끔 모이곤 하는데, 옛 속담 그대로지요. 우리가 만나면 대부분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해요. 그들은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그리워하며, 연애하고 술 마시고 잔치에 참석하던 일 등등을 회상하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크나큰 상실로 여기고 화를 내곤 하지요. 그때는 잘 살았는데 지금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들 중 몇몇은 자기들이 늙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괄시받는다고 투덜대며, 그래서 온갖 참상이 다 노년 탓이라고 읊어대곤 하지요. 그러나 소크라테스 선생, 이들은 탓해서는 안 될 것을 탓하고 있는 듯해요. 그게 정말 노년 탓이라면, 나도 노년과 관련하여 똑같은 경험을 했을 테고, 다른 노인들도 모두 같은 경험을 하겠지요. 그러나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을 나는 여럿 만났소. 예컨대 누가 시인 소포클레스에게 '소포클레스 선생, 그대의 성생활은 어떠시오? 그대는 아직도 여자와 동침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소포클레스 님은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나는 거기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꼭 미쳐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것 같다니까'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때도 그분의 대답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그때 못지않게 그렇다고 생각하오. 노년이 되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런 감정들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아주 편해지니까요. 욕망들이 한풀 꺾여 귀찮게 조르기를 멈추면 소포클레스가 말한 그대로 우리는 미쳐 날뛰는 수많은 주인에게서 해방된다는 말이지요. 이 점에서나 가족과의 관계에서나 탓할 것은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노년이 아니라 성격이라오, 소크라테스 선생. 사람 됨됨이가 반듯하고 자족할 줄 알면 노년도 가벼운 짐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소크라테스 선생, 노년뿐 아니라 젊음도 견디기가 힘들다오."

 

- 플라톤, 『국가』제1권

 

 

우리가 책을 늘 옆에 끼고 살고 싶은 욕망도 그와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곁에 쌓아놓고 살아야 만족할까. 나도 한때는 '책으로 빙 둘러싸인 내 서재'를 꿈꾼 적이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그런데 책이 방안에 자꾸 쌓이니 불편한 점도 여럿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찾아 읽고 싶은 책을 재빨리 찾지 못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불편했다. 책이 많아지면 '책탑'이 독버섯처럼 자꾸 생겨나서 자라기 시작한다. 마침 어젯밤에 그 중 하나가 너무 웃자랐던지 마침내 '꽈다당'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내렸다. 그것도 오밤중에.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잠자던 아내마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놀라 물었을 정도였다. 책탑이 여럿 생기니 '원하는 책'을 빼낼 때마다 힘도 든다. 미처 읽지도 않은 책이 책탑 저 밑에 깔려서 낑낑거리고 있는 꼴을 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러울 때도 있다.

 

그나저나 우리는 도대체 '몇 권의 책'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릴까. 내가 가진 책들은 많은가? 적은가? 가끔씩 도서관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을 둘러 보노라면 '내가 가진 책들'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시내에 있는 초대형 서점에 들러도 마찬가지다. 이 많은 책들이 도대체 언제 다 팔릴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들과 비교해서 내가 지닌 책들이 차지하는 부피가 너무나 자그마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다. 어쨌든 사람은 마음 속으로나마 늘 비교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전세계에 널린 그 수많은 도서관에 쌓여 있는 엄청난 규모의 책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진 책들이 지닌 '초라함'이야말로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먼가? 가까운가?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우리는 이런 것을 더 가까이하기를 원한다. 들에 있으면 먼 것인가? 반나절쯤의 거리라면? 뭐? 40km 떨어져 있으면 먼가? 가까운가? 그것이 가깝다면 44km는? 48km는? 52km는?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책을 파는 알라딘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책을 많이 팔기 위해 애쓴다. 과거의 구매 기록, 현재의 지역별 연령대별 랭킹뿐만 아니라 미래의 연장선까지도 미리 정확하게 내다보도록 도와준다. 달리 말하면 책을 조금이라도 더 사도록 끊임없이 부추긴다는 말이다. 책을 많이 샀다고 해서 그게 '자랑'이라는 생각을 품은 적은 별로 없다. 내 곁에 두는 책이 많을수록 좋은 점도 많다.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미 사 둔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끊임없이 '새 책, 새 책'을 외치며 책을 사들이는 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제 손아귀에 움켜쥔 걸 놓지 못해 사람에게 붙잡히고 마는 아프리카 원숭이도 어리석지만, 내 손에 이미 들어 있는 책엔 눈길도 주지 않고 자꾸만 갖지 못한 다른 책을 끝없이 탐내는 것도 어리석긴 매일반이 아닐까.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문득 고대 신화에 나오는 에뤼식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탐욕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더 큰 탐욕을 부르기 마련이다. 책이든 무엇이든 '더 많이' 가지려고 애를 쓸수록 결국 더 큰 '허기'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책은 좀 더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경우와는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에뤼식톤과 그의 딸)

 

책도 일정한 한계 수준을 넘으면 결국 '짐'으로 뒤바뀌는 수도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지평선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한 어느 농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온 그 농부의 '진흙수렁 같은 생활방식'이 가난의 원인이었는데도 그 사람은 결코 그같은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로우는 범인들과는 판단이 너무나 달랐던 사람이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한 것도 제발 '간소하게' 살라는 말이었다. 독서를 아주 많이 했던 그도 자신의 서재에 있는 몇백 권의 책으로 만족할 줄 알았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두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어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그리고 다른 일들도 그런 비율로 줄이도록 하라.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나는 아직까지는 '책 짐'에 대해서라면 제법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여태까지 이사를 다니면서 '책'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재활용을 하는 날 산더미처럼 내다버리는 책들을 보면 옛날엔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책이 결국 '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과감하게 자신이 빠진 '궁지'에서 마침내 벗어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궁지

덫에 걸린 꼬리를 잘라내고 달아난 여우는 운 좋은 놈이었다. 덫에 걸린 사향쥐는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하여 세번째 다리라도 물어서 끊는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탄력성을 잃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궁지에 빠지는가? "여보시오, 선생! 외람된 말이지만 궁지에 빠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당신이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 뒤로 그가 소유하는 모든 것과 자신의 것이 아닌 척하는 물건들, 심지어는 부엌 가구와 그 외에 그가 계속 모아두면서 태워버리지 못하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에 묶인 채로 어떻게든지 앞으로 전진해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옹이구멍이나 출입문을 빠져나갔지만 썰매에 실은 자신의 가구와 짐은 문턱에 걸려 나오지 못할 때 나는 그가 궁지에 빠졌다고 말한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런 생각에 대해 '심각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불쑥 나타날까 자못 두렵다. 물론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 철학자의 말이 맞다. '읽은 책'이 아니라 '구매한 책'에 대해서도 '다다익선'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을 하지 못할까. 그러나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달'을 보라고 말하는 데도 기어이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있다. '책'을 보라는 데도 '구매한 책'이 많으니 적으니, '읽은 책'이 많으니 적으니를 따진다. 나 또한 그런 '통계'에 마음이 흔들린다. 알라딘은 책 장사꾼이니 응당 그렇다 치더라도 알라디너마저 거기에 너무 동조하거나 집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철학자들 중의 가장 현명한 학파(피론 학파)는 말한다. 나는 방금 옛 사람(세네카)이 인생을 경멸하며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한 사물을 잃어버렸다는 비통과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은 똑같다"(세네카)고 한 이 묘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 말은 그것을 잃을 근심이 있으면 생을 즐긴다는 것이 진실한 재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이 찬 기운이 있을 때에 더 잘 일어나듯, 우리의 의지는 반대에 부딪칠 때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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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맨 처음으로 떠올렸던 '책 속 구절'은 아래와 같다. 이 대목을 본문에 인용할 만큼 '강한 글'을 쓸 재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 위해서 '접어서' 덧붙인다. 

 

 

모든 부질없는 상념들은 울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외따로 반성하는 소질을 풍부하게 선사하였고,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사회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그 최대 부분은 우리 자신에게 신세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스스로 반성해 보도록 자주 권고한다. 내 공상에도 어떤 질서와 계획을 세워서 몽상해 가도록 정리하여 그것이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면, 이 공상에 떠오르는 하고많은 자디잔 생각들에 형체를 주어서 기록해 두는 수밖에 없다. 나는 몽상들을 기록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 몽상들을 주의해서 듣는다. 내가 얼마나 여러 번 어떤 행동에 관해서 예법과 이성이 드러내 놓고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데 마음속에 화가 북받쳤는가, 그것을 대중에게 알려 주려는 의도도 없지 않아서 여기에 털어놓는다. 그리고 참으로---

저 잡놈의 눈깔 위에 탁!
배때기에 탁! 등때기에 탁!                                                                                              (마로)

이 시의 채찍은 몸뚱이에 때릴 때보다 종잇장 위에 매질할 때에 자국이 더 잘 박힌다. 뭐? 내가 다른 책들에서 무엇이건 도둑질해 작품을 장식하거나, 보강할 수 있을까 하고 엿보아 온 것에, 좀더 책들의 말에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면 어떠냐고? 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 공부한 것이 아니고,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얼마쯤 공부하였다. 적어도 이때는 이 작가, 저때는 저 작가의 머리나 다리를 스쳐 보고 꼬집어 보는 것이 공부라면 말이다. 결코 내 사상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벌써 오래 전에 형태가 잡힌 사상들을 보충하고 거들어 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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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06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있는 책들을 보면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들을 얼마나 온전하게 아는지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진정한 친구 1명을 사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비단 친구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듯 합니다...

oren 2017-07-06 23:17   좋아요 1 | URL
그렇죠. 한 번 읽은 책은 늘 ‘거기‘에 머물고 있는데 우린 좀처럼 다시 만날 생각을 하질 못하죠. ‘친한 친구‘라면 절대로 그렇게 홀대하진 않을텐데 말이지요. 헤럴드 블룸도 ‘독서‘와 ‘우정‘이 매우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자주 언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 * *
『돈 키호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은 구성을 찾으려고 읽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산초 판자와 돈 키호테, 스완과 알베르틴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스탕달과 디킨스에 관해서 다시 읽는다는 개념에 대해 주창한 바가 있는데, 이는 제인 오스틴이나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cyrus 2017-07-07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새 책을 소개하는 분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 책을 소개하는 글을 자주 접하면 정작 제가 읽어야 할 책, 이미 산 책들을 쳐다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간략한 설명 없이 ‘알라딘 상품 넣기’ 기능만으로 작성된 게시물도 있습니다. 글이라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게시물’이라고 했습니다. 사지도 못할 거면서 새 책(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을 성의 없이 소개하는 게시물이 있으면 못 보는 척하고 넘어갑니다. 그런 게시물을 쓰는 분들을 보면 오기가 생겨요. 저는 그분들과 반대로 절판된 책, 오래된 책들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새 책을 읽었으면 ‘리뷰’로 기록하려고 합니다. 새 책이 포함된 페이퍼는 별점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oren 2017-07-07 16:32   좋아요 0 | URL
cyrus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 전부터 꼭 포함시키고 싶었던 내용이 ‘책을 건축물에 비유해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이 글을 쓰면서 그런 내용을 일부 집어 넣었다가 결국엔 도로 뺐습니다만..)

인류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해 놓은 수많은 걸작들을 책으로 비유한다면 아마도 ‘고전‘에 비유할 수 있겠지 싶어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을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걸작 건축물에 비유한 인물도 있었고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에 지어진 르네상스 시대나 고대의 건축물 가운데서도 현대인의 눈을 의심케 하는 걸작들도 숱하게 많지요. 인류가 남긴 위대한 고전 작품 가운데서도 그런 걸작들이 많다고 봅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도 뛰어난 건축술이 발휘된 예술작품 같은 건축물이 드물진 않지만, 500년이나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위대한 건축물들에 비하면 어딘지 ‘깊이‘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가치는 충분히 지니겠지만요. 그런데 정작 우후죽순 격으로 마구 지어지는 ‘조잡한 신축 건물‘을 닮은 듯한 ‘신간‘들은 ‘걸작 건축물‘에 비한다면 그 예술성과 가치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지요. 건축물에서도 ‘인류의 문화유산‘과도 같은 탁월한 걸작이 있듯이, 책에서도 그런 걸작들이 분명히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건축물과 달리 책은 ‘아주 값싼 비용으로도‘ 그런 걸작들을 충분히 쉽게 만나볼 수 있고요. 마구 쏟아지는 신간들에 너무 눈길을 주다 보면 결국 탁월한 작품들을 만날 시간을 그만큼 빼앗길 수밖에 없다고도 봅니다. ‘새로운 책‘이 새로운 만큼 우리 눈에 반짝 빛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만큼 ‘빛나는 가치‘를 지닌 책인지는 늘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