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묘한 '말', 묘한 '욕망'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 몽테뉴

 

 * * *

 

'미처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분을 소포클레스만큼 재치있게 말한 사람도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포악한 주인'은 물론 '여자와 동침하고 싶은 욕망'을 의인화한 표현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얼마나 그 욕망에 시달렸으면 그런 말을 다 했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는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그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쁨을 격하게 표현했는데, 마침 그 '대화의 현장'엔 케팔레스 옹도 있었던 모양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그런 얘기가 나오니 말이다.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그래서 내가 말했네. "케팔레스 옹, 나는 연로하신 분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오. 우리는 그분들한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치 어쩌면 우리도 지나가야 할 길이 어떠한지, 거칠고 험한지, 아니면 쉽고 순탄한지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한테서 배우듯이 말이오. 그대는 지금 시인들이 '노년의 문턱'이라고 말하는 그런 연세가 되신 만큼, 나는 무엇보다도 그대의 심경이 어떠하신지 듣고 싶어요. 산다는 것이 힘드신가요? 아니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케팔로스 옹이 말했네. "제우스에 맹세고, 내 심정이 어떠한지 그대에게 말하겠소, 소크라테스 선생. 나는 또래의 늙은이들 몇 명과 가끔 모이곤 하는데, 옛 속담 그대로지요. 우리가 만나면 대부분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해요. 그들은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그리워하며, 연애하고 술 마시고 잔치에 참석하던 일 등등을 회상하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크나큰 상실로 여기고 화를 내곤 하지요. 그때는 잘 살았는데 지금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들 중 몇몇은 자기들이 늙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괄시받는다고 투덜대며, 그래서 온갖 참상이 다 노년 탓이라고 읊어대곤 하지요. 그러나 소크라테스 선생, 이들은 탓해서는 안 될 것을 탓하고 있는 듯해요. 그게 정말 노년 탓이라면, 나도 노년과 관련하여 똑같은 경험을 했을 테고, 다른 노인들도 모두 같은 경험을 하겠지요. 그러나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을 나는 여럿 만났소. 예컨대 누가 시인 소포클레스에게 '소포클레스 선생, 그대의 성생활은 어떠시오? 그대는 아직도 여자와 동침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소포클레스 님은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나는 거기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꼭 미쳐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것 같다니까'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때도 그분의 대답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그때 못지않게 그렇다고 생각하오. 노년이 되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런 감정들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아주 편해지니까요. 욕망들이 한풀 꺾여 귀찮게 조르기를 멈추면 소포클레스가 말한 그대로 우리는 미쳐 날뛰는 수많은 주인에게서 해방된다는 말이지요. 이 점에서나 가족과의 관계에서나 탓할 것은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노년이 아니라 성격이라오, 소크라테스 선생. 사람 됨됨이가 반듯하고 자족할 줄 알면 노년도 가벼운 짐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소크라테스 선생, 노년뿐 아니라 젊음도 견디기가 힘들다오."

 

- 플라톤, 『국가』제1권

 

 

우리가 책을 늘 옆에 끼고 살고 싶은 욕망도 그와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곁에 쌓아놓고 살아야 만족할까. 나도 한때는 '책으로 빙 둘러싸인 내 서재'를 꿈꾼 적이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그런데 책이 방안에 자꾸 쌓이니 불편한 점도 여럿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찾아 읽고 싶은 책을 재빨리 찾지 못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불편했다. 책이 많아지면 '책탑'이 독버섯처럼 자꾸 생겨나서 자라기 시작한다. 마침 어젯밤에 그 중 하나가 너무 웃자랐던지 마침내 '꽈다당'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내렸다. 그것도 오밤중에.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잠자던 아내마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놀라 물었을 정도였다. 책탑이 여럿 생기니 '원하는 책'을 빼낼 때마다 힘도 든다. 미처 읽지도 않은 책이 책탑 저 밑에 깔려서 낑낑거리고 있는 꼴을 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러울 때도 있다.

 

그나저나 우리는 도대체 '몇 권의 책'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릴까. 내가 가진 책들은 많은가? 적은가? 가끔씩 도서관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을 둘러 보노라면 '내가 가진 책들'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시내에 있는 초대형 서점에 들러도 마찬가지다. 이 많은 책들이 도대체 언제 다 팔릴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들과 비교해서 내가 지닌 책들이 차지하는 부피가 너무나 자그마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다. 어쨌든 사람은 마음 속으로나마 늘 비교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전세계에 널린 그 수많은 도서관에 쌓여 있는 엄청난 규모의 책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진 책들이 지닌 '초라함'이야말로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먼가? 가까운가?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우리는 이런 것을 더 가까이하기를 원한다. 들에 있으면 먼 것인가? 반나절쯤의 거리라면? 뭐? 40km 떨어져 있으면 먼가? 가까운가? 그것이 가깝다면 44km는? 48km는? 52km는?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책을 파는 알라딘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책을 많이 팔기 위해 애쓴다. 과거의 구매 기록, 현재의 지역별 연령대별 랭킹뿐만 아니라 미래의 연장선까지도 미리 정확하게 내다보도록 도와준다. 달리 말하면 책을 조금이라도 더 사도록 끊임없이 부추긴다는 말이다. 책을 많이 샀다고 해서 그게 '자랑'이라는 생각을 품은 적은 별로 없다. 내 곁에 두는 책이 많을수록 좋은 점도 많다.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미 사 둔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끊임없이 '새 책, 새 책'을 외치며 책을 사들이는 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제 손아귀에 움켜쥔 걸 놓지 못해 사람에게 붙잡히고 마는 아프리카 원숭이도 어리석지만, 내 손에 이미 들어 있는 책엔 눈길도 주지 않고 자꾸만 갖지 못한 다른 책을 끝없이 탐내는 것도 어리석긴 매일반이 아닐까.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문득 고대 신화에 나오는 에뤼식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탐욕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더 큰 탐욕을 부르기 마련이다. 책이든 무엇이든 '더 많이' 가지려고 애를 쓸수록 결국 더 큰 '허기'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책은 좀 더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경우와는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에뤼식톤과 그의 딸)

 

책도 일정한 한계 수준을 넘으면 결국 '짐'으로 뒤바뀌는 수도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지평선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한 어느 농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온 그 농부의 '진흙수렁 같은 생활방식'이 가난의 원인이었는데도 그 사람은 결코 그같은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로우는 범인들과는 판단이 너무나 달랐던 사람이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한 것도 제발 '간소하게' 살라는 말이었다. 독서를 아주 많이 했던 그도 자신의 서재에 있는 몇백 권의 책으로 만족할 줄 알았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두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어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그리고 다른 일들도 그런 비율로 줄이도록 하라.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나는 아직까지는 '책 짐'에 대해서라면 제법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여태까지 이사를 다니면서 '책'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재활용을 하는 날 산더미처럼 내다버리는 책들을 보면 옛날엔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책이 결국 '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과감하게 자신이 빠진 '궁지'에서 마침내 벗어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궁지

덫에 걸린 꼬리를 잘라내고 달아난 여우는 운 좋은 놈이었다. 덫에 걸린 사향쥐는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하여 세번째 다리라도 물어서 끊는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탄력성을 잃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궁지에 빠지는가? "여보시오, 선생! 외람된 말이지만 궁지에 빠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당신이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 뒤로 그가 소유하는 모든 것과 자신의 것이 아닌 척하는 물건들, 심지어는 부엌 가구와 그 외에 그가 계속 모아두면서 태워버리지 못하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에 묶인 채로 어떻게든지 앞으로 전진해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옹이구멍이나 출입문을 빠져나갔지만 썰매에 실은 자신의 가구와 짐은 문턱에 걸려 나오지 못할 때 나는 그가 궁지에 빠졌다고 말한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런 생각에 대해 '심각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불쑥 나타날까 자못 두렵다. 물론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 철학자의 말이 맞다. '읽은 책'이 아니라 '구매한 책'에 대해서도 '다다익선'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을 하지 못할까. 그러나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달'을 보라고 말하는 데도 기어이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있다. '책'을 보라는 데도 '구매한 책'이 많으니 적으니, '읽은 책'이 많으니 적으니를 따진다. 나 또한 그런 '통계'에 마음이 흔들린다. 알라딘은 책 장사꾼이니 응당 그렇다 치더라도 알라디너마저 거기에 너무 동조하거나 집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철학자들 중의 가장 현명한 학파(피론 학파)는 말한다. 나는 방금 옛 사람(세네카)이 인생을 경멸하며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한 사물을 잃어버렸다는 비통과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은 똑같다"(세네카)고 한 이 묘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 말은 그것을 잃을 근심이 있으면 생을 즐긴다는 것이 진실한 재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이 찬 기운이 있을 때에 더 잘 일어나듯, 우리의 의지는 반대에 부딪칠 때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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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맨 처음으로 떠올렸던 '책 속 구절'은 아래와 같다. 이 대목을 본문에 인용할 만큼 '강한 글'을 쓸 재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 위해서 '접어서' 덧붙인다. 

 

 

모든 부질없는 상념들은 울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외따로 반성하는 소질을 풍부하게 선사하였고,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사회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그 최대 부분은 우리 자신에게 신세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스스로 반성해 보도록 자주 권고한다. 내 공상에도 어떤 질서와 계획을 세워서 몽상해 가도록 정리하여 그것이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면, 이 공상에 떠오르는 하고많은 자디잔 생각들에 형체를 주어서 기록해 두는 수밖에 없다. 나는 몽상들을 기록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 몽상들을 주의해서 듣는다. 내가 얼마나 여러 번 어떤 행동에 관해서 예법과 이성이 드러내 놓고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데 마음속에 화가 북받쳤는가, 그것을 대중에게 알려 주려는 의도도 없지 않아서 여기에 털어놓는다. 그리고 참으로---

저 잡놈의 눈깔 위에 탁!
배때기에 탁! 등때기에 탁!                                                                                              (마로)

이 시의 채찍은 몸뚱이에 때릴 때보다 종잇장 위에 매질할 때에 자국이 더 잘 박힌다. 뭐? 내가 다른 책들에서 무엇이건 도둑질해 작품을 장식하거나, 보강할 수 있을까 하고 엿보아 온 것에, 좀더 책들의 말에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면 어떠냐고? 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 공부한 것이 아니고,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얼마쯤 공부하였다. 적어도 이때는 이 작가, 저때는 저 작가의 머리나 다리를 스쳐 보고 꼬집어 보는 것이 공부라면 말이다. 결코 내 사상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벌써 오래 전에 형태가 잡힌 사상들을 보충하고 거들어 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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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06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있는 책들을 보면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들을 얼마나 온전하게 아는지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진정한 친구 1명을 사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비단 친구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듯 합니다...

oren 2017-07-06 23:17   좋아요 1 | URL
그렇죠. 한 번 읽은 책은 늘 ‘거기‘에 머물고 있는데 우린 좀처럼 다시 만날 생각을 하질 못하죠. ‘친한 친구‘라면 절대로 그렇게 홀대하진 않을텐데 말이지요. 헤럴드 블룸도 ‘독서‘와 ‘우정‘이 매우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자주 언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 * *
『돈 키호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은 구성을 찾으려고 읽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산초 판자와 돈 키호테, 스완과 알베르틴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스탕달과 디킨스에 관해서 다시 읽는다는 개념에 대해 주창한 바가 있는데, 이는 제인 오스틴이나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cyrus 2017-07-07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새 책을 소개하는 분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 책을 소개하는 글을 자주 접하면 정작 제가 읽어야 할 책, 이미 산 책들을 쳐다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간략한 설명 없이 ‘알라딘 상품 넣기’ 기능만으로 작성된 게시물도 있습니다. 글이라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게시물’이라고 했습니다. 사지도 못할 거면서 새 책(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을 성의 없이 소개하는 게시물이 있으면 못 보는 척하고 넘어갑니다. 그런 게시물을 쓰는 분들을 보면 오기가 생겨요. 저는 그분들과 반대로 절판된 책, 오래된 책들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새 책을 읽었으면 ‘리뷰’로 기록하려고 합니다. 새 책이 포함된 페이퍼는 별점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oren 2017-07-07 16:32   좋아요 0 | URL
cyrus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 전부터 꼭 포함시키고 싶었던 내용이 ‘책을 건축물에 비유해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이 글을 쓰면서 그런 내용을 일부 집어 넣었다가 결국엔 도로 뺐습니다만..)

인류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해 놓은 수많은 걸작들을 책으로 비유한다면 아마도 ‘고전‘에 비유할 수 있겠지 싶어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을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걸작 건축물에 비유한 인물도 있었고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에 지어진 르네상스 시대나 고대의 건축물 가운데서도 현대인의 눈을 의심케 하는 걸작들도 숱하게 많지요. 인류가 남긴 위대한 고전 작품 가운데서도 그런 걸작들이 많다고 봅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도 뛰어난 건축술이 발휘된 예술작품 같은 건축물이 드물진 않지만, 500년이나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위대한 건축물들에 비하면 어딘지 ‘깊이‘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가치는 충분히 지니겠지만요. 그런데 정작 우후죽순 격으로 마구 지어지는 ‘조잡한 신축 건물‘을 닮은 듯한 ‘신간‘들은 ‘걸작 건축물‘에 비한다면 그 예술성과 가치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지요. 건축물에서도 ‘인류의 문화유산‘과도 같은 탁월한 걸작이 있듯이, 책에서도 그런 걸작들이 분명히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건축물과 달리 책은 ‘아주 값싼 비용으로도‘ 그런 걸작들을 충분히 쉽게 만나볼 수 있고요. 마구 쏟아지는 신간들에 너무 눈길을 주다 보면 결국 탁월한 작품들을 만날 시간을 그만큼 빼앗길 수밖에 없다고도 봅니다. ‘새로운 책‘이 새로운 만큼 우리 눈에 반짝 빛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만큼 ‘빛나는 가치‘를 지닌 책인지는 늘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