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보르헤스가 알베르토 망겔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많은 운명적인 만남이 그러하듯이.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어느 날 오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여든여덟 살 된 노모의 손에 이끌려 그 서점을 찾아왔다. 당시 그는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는데도 나는 그의 시 몇 편과 소설을 읽었을 뿐 아직 그의 문학에 압도감을 느끼지는 않던 때였다. 그는 거의 맹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거부했으며 서점에 들르면 마치 손가락으로도 제목을 볼 수 있다는 듯이 손으로 서가를 훑곤 했다. 보르헤스는 당시 자신이 막 열정을 쏟고 있던 영어를 연마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고 있었는데, 그를 위해 우리는 월터 윌리엄 스키트의 사전과 주해가 붙은 『몰던의 전투Battle of Malden』를 주문해 주었다. ······ 마침내 그는 몸을 돌려 나에게 책 몇 권을 주문했다. 나는 그 중 몇 권을 찾아 줬고 나머지 책은 서지 사항 등을 적어 두었는데,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
그 후 2년 동안 나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다른 우연한 만남이 그러하듯, 저녁 시간이나 또 학교가 허락할 때는 아침 시간에도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31∼32쪽)
비록 망겔에게는 보르헤스에게 읽어 줄 '책을 선택할 자유'까지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면서 자연스레 얻게 된 소득이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보르헤스에게 글을 읽어 주는 일을 두고 나는 그저 하루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만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 경험은 일종의 행복한 포로처럼 느끼게 했다.' 그런데 망겔이 보르헤스로부터 배운 책 읽기 방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건 바로 '간통 같은 독서'였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그의 반응에 자극을 받아 나는 나 혼자 읽었을 때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까지도 이제는 마치 이미 오래 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회상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는 촌평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보르헤스는 체계적인 도서 목록을 불신하고 그런 간통 같은 독서를 권장했다.(37쪽)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그런데 보르헤스가 권장했던 '간통 같은 독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그리고 이왕이면 '간통의 심리'에 대해서까지도 얼마간 살필 요량으로 이리저리 뒤적거려 봐도 별다른 소득이 없다. 내가 고작 찾아낸 건 스티븐 핑커의 책 속에 담긴 다음의 몇 구절뿐.
간통 파트너와 결혼 파트너
이 모든 이야기는 단 하나의 성차이, 즉 남자들이 다수의 파트너를 더 많이 원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남자라고 해서 완전히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고, 제아무리 독재적인 사회라도 여성의 발언권을 완전히 억압하지는 못한다. 양성은 각자 간통 파트너와 결혼 파트너를 고르는 기준을 갖고 있다. 인간의 다른 견고한 취향들처럼 그 기준들도 적응특성일 것이다.
양성은 모두 배우자를 원하고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간통을 더 많이 원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이 간통을 전혀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일 여자들이 간통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면, 여자를 희롱하는 남성 충동은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고(혼인을 빙자하는 경우에는 보상을 받겠지만, 그렇다 해도 결혼한 여자는 남자를 희롱하거나 희롱의 목표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진화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자의 정액은 수적으로 불리해질 위험을 겪지 않을 것이므로, 고환은 고릴라의 신체 대비 크기보다 더 크게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를 향한 질투 감정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보겠지만 남편들의 질투심은 분명히 존재한다. 민족지학의 기록을 보면 모든 사회에서 양성 모두 간통을 저지르고, 그때마다 여자들이 항상 비소를 먹거나 상트페테르부르크 5시 2분발 열차에 몸을 던지지도 않는다.(735쪽)
간통의 심리
여자들은 남편보다 애인을 고를 때 외모와 힘을 더 중시한다고 보고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외모는 유전자의 품질을 보여 주는 지표다. 그리고 여자들은 불륜 관계를 맺을 때 일반적으로 남편보다 지위가 높은 남자를 고르는데, 지위를 뒷받침해 주는 자질들은 거의 틀림없이 유전이 되는 것들이다.(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은 첫 번째 동기인 자원 얻어내기에도 도움이 된다.) 우수한 남자와 성관계를 하면 여자는 또한 결혼 시장에서의 거래 능력을 테스트할 수도 있다. 이것은 차후에 직면할 그런 거래의 전주곡이 되거나,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입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이먼은 성관계와 관련된 성차이에 대해, 여자는 남자가 어떤 면에서 우수하거나 남편을 보완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성관계를 하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간통을 한다고 요약한다.(737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중에서
스티븐 핑커의 다소 과학적인(?) 주장으로부터 '간통 같은 독서'와 관련해서 무슨 시사점을 얻으려는 자체가 너무 엉뚱하긴 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얻을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싶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불륜 관계'를 맺을 때 '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러고 보니 알베르토 망겔이 『독서의 역사』에서 언급한 수많은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도 어쩌면 책의 저자들과 독자들 사이에 벌어진 '온갖 흥미진진한 간통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어디선가 본 듯한' 혹은 '어디선가 분명히 읽은 듯한' 대목들을 마주치게 마련이다. 그러면 나는 늘 먼저 읽었던 책의 '바로 그 대목'을 찾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좀체로 거기서 헤어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곤 한다. 분명히 어느 책에선가 읽은 듯한데 바로 그 '은밀한 간통 현장'을 찾아내지 못할 때의 그 안타까움이란 너무나 개인적이고도 독특한 것이어서, 이 세상 누구에게도 감히 하소연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그런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떤 책을 읽든지 그런 경험들은 늘 예고없이 불쑥 찾아들게 마련이겠지만, 내가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으면서도 그런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사실 그 철학자가 자신보다 더 앞선 시대를 살았던 '고대의 명망 있는 애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고, 또 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얻었는지를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후세의 수많은 학자들이 끊임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간통 현장'들을 찾으려 애쓴 결과 수없이 많은 '주석'들이 그의 책에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그런 '간통의 흔적'을 굳이 애써 찾으러 나설 필요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독서를 통해 많은 작가들의 은밀한 '간통 현장'들을 발견하는 일은 늘 즐겁다. 사정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심증은 가는데 물증을 확보하지 못할 땐 늘 괴롭다. 그나마 어젯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속 구절을 훔친 몽테뉴의 흔적을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찾아낸 건 큰 행운처럼 느껴진다. 비록 두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로 사뭇 다르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 이상한 사례'를 두 사람의 책에서 똑같이 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야릇하기만 하다.
분노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덜 창피하다는 사실
이제 분노(thymos)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망(epithymia)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덜 창피하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분노는 어느 정도 이성에 귀를 기울이긴 하지만 그것을 잘못 알아듣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달려 나가 지시와는 다르게 행하는 실수를 범하는 성급한 하인들처럼. 혹은 개들이 친한 사람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소리만 나면 짖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이렇게, 분노는 그 본성의 열기와 빠르기로 말미암아 듣기는 하되 해야 할 바를 듣지 않은 채 복수로 돌진하는 것이다. 모욕이나 멸시를 당했다고 이성이나 상상이 보여 주고 나면 [분노를 관장하는 부분이] 그런 일에는 마땅히 싸워야 한다고 추론해 낸 것처럼 대뜸 성을 내고 나서는 것이다. 반면에 욕망은, 이성이나 지각이 즐거운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그것을 즐기는 일로 돌진하는 것이다. 결국 분노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을 따르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더 창피한 것이다. 분노에 대해 자제력 없는 사람은 욕망에 지는 것이지 이성에 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본성적인 욕구를 따르는 것을 보다 쉽게 용서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욕망들에 따르는 것은 더 쉽게, 또 공통적일수록 더 쉽게 용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노와 화를 잘 내는 성질은 지나침에 대한 욕망, 필수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보다 더 본성적이다. 마치 자기 아버지를 때린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 즉 "이 사람도 자기 아버지를 때렸고, 그렇게 맞은 사람도 그의 아버지를 때렸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자식을 가리키면서 "얘도 어른이 되면 나를 때릴 겁니다. 우리 집안 내력이니까요"라고 변명하는 사람의 경우가 보여 주는 것처럼 말이다. 또 아들에 의해 끌려 나가다 문간에서 자신도 자기 아버지를 거기까지만 끌고 갔으니 거기에서 멈추라고 명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251∼252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제6장 「자제력 없음의 종류들」 중에서
여기까지가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
제 아비를 때리고 있던 자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자기 집 습관이라고 하였다. 그 아비는 그 조부를 그렇게 때렸고, 그 조부는 그 증조부를 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가리키며, 이 애도 내 나이쯤 되면 나를 때릴 것이라고 하였다. 아들이 거리에서 아비를 잡아당기며 끌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문 앞에 와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비를 거기까지밖에는 끌고 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들들이 습관적으로 버릇이 되어서, 그 가정에서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였다.(127쪽)
- 몽테뉴,『몽테뉴 수상록』「습관에 대하여, 그리고 이어받은 법을 쉽사리 변경하지 않음에 대하여」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몽테뉴를 나는 딱 '여기까지만' 끌고 오겠다. 이것이 나의 한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