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알라딘 마을은 말하자면 어떤 공동체이다. 거기선 서로 얼굴도 모른 채 마치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인 양 시도 때도 없이 인사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꼭 인사성이 밝은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떨 땐 다른 사람과 코가 맞닿을 만큼 아주 가까이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냥 아무런 인사도 없이 불쑥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간다.

 

그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굴'을 하나씩 파고 있다. 물론 활달한 사람들은 수시로 자신의 '굴'에서 빠져 나와 남의 '굴'을 열심히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 마을의 '성곽광장'으로만 나오면 길이 모든 방향으로 다 뚫려 있어 어느 굴에든 즉시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굴'만 열심히 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바깥 세상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서로 어디서 왔는지, 앞으로 그 마을에서 얼마나 더 머물 것인지, 또 언제 떠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걸 드러내 놓고 밝히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굴'을 파는 일에 몰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끔씩은 자신이 파던 '굴'에서 기어 나와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훌쩍 나타나 또다시 자신의 '굴'을 파기 시작한다. 마치 자신이 오래 전부터 해야만 했던 일들을 새까맣게 잊고 살아왔다는 것처럼.

 

카프카의 소설들을 읽으면 '똑같은 해석'을 한사코 거부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다 다르게 읽히는 묘한 매력이 있다. 아주 짧은 장편(掌篇)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다음에 인용하는『공동체』는 이 소설의 거의 전부를 옮겨 왔다고 봐도 좋다. 그만큼 짧다. 아래의 글을 읽으면서 어떤 이는 '독수리 五형제'를 떠올릴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이는 '五공주'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좋다. 그런 느낌을 받는다고 한들 어느 누가 그 사람을 탓할까.

 

그때부터 우리는 같이 살고 있다, 어떤 여섯번째가 자꾸만 끼여 들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평화로운 생활이리라. 그는 우리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귀찮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히 무슨 짓인가를 하는 것이다, 싫다는데도 그는 왜 밀고 들어오는 것일까? 우리는 그를 모르며 우리들한테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우리 다섯도 전에는 서로 잘 몰랐으며, 굳이 말한다면, 지금도 서로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다섯에게서 가능하고 참아지는 것이 저 여섯번째에게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참아지지도 않는다. 그 밖에도 우리는 다섯이며 여섯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도무지 이 끊임없이 같이 있음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우리 다섯에게도 그것은 아무런 뜻이 없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미 같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결합은 원하지 않는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상.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여섯번째에게 가르친단 말인가. ……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밀쳐내도 그는 다시 온다.

 

- 프란츠 카프카, 『공동체』 중에서

 

그런데 내가『공동체』라는 소설 속에서 문득 '북플'을 떠올렸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북플'이 무슨 사람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게 어째서 '여섯번째'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우리 다섯'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마당에. 그냥 나만의 엉뚱한 상상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언제부턴가 '알라딘 서재'에도 '북플'이 슬며시 끼어들어 어느새 한 쪽 구석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침침한 내 눈에도 빤히 드러나 보인다. 가끔씩은 우리에게 '느슨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뭐라고? 북플이 명령을 내린다고? 그럼 당신은 이런 명령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인가?

 

"당신은 어떤 분야의 마니아인지 지금 확인하세요"

 

나도 가끔씩은 그의 명령을 따른다. 혹시라도 나 자신의 '굴'을 파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해서. 그런데 이쯤에서 '나의 불만'을 얘기하지 않으면 나는 여섯번째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 셈이 된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여태까지 '나의 굴'을 파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가 알 턱이 없잖은가. 더군다나 내가 속으로만 꽁꽁 숨겨 왔던 '나의 불만'을 여기서조차 입을 다문 채 영영 드러내지 않는다면 언제 또다시 꺼낸단 말인가.

 

갑자기 너무 엉뚱한 길로 새는 기분이 들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내가 파 놓은'굴'을 가끔씩이라도 심사하고 평가할 의무감을 느낄 때가 있다. 혹은 카프카가『굴』에서 표현한 대로 '마치 감독관이 오기라도 한 듯이 그리고 감독관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듯이' 느낄 때도 있다. 이것 말고도 이유는 더 있다. 나는 어쨌든 내가 파 놓은 굴 속에 응당 쌓여 있어야 할 양식들 가운데 일부가 헛되이 새나가는 듯한 '결함'을 오랫동안 견디는 것도 힘들다.

 

굴은 어차피 자연이 가해 놓은 약점을 숱하게 지니고 있으니 내 손이 만들어놓은, 뒤늦게야, 그러나 정확하게 인지된 이 결함 또한 같이 지니고 있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이 결함이 이따금씩 혹은 어쩌면 항상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여느 때의 산책에서 내가 굴의 이 부분을 멀리한다면 그것은 주로 그것을 보는 것이 나에게 유쾌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굴의 결함을, 이 결함이 이미 나의 의식 속에서 너무도 심하게 소란을 부리는 바에야, 늘 눈으로 보기까지하고 싶지는 않은 때문이다.

 

 - 프란츠 카프카, 『굴』 중에서

 

나의 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결함들은 물론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대부분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얘기까지 꺼내면 내 장광설이 너무 길어질 게 뻔하다. 오늘은 그저 굴 파는 작업에서 결코 외면하기가 쉽지 않은 존재인 '북풀'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아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북플 마니아'에 대해서만 특별히 좁혀서 말하겠다.

 

북플은 그동안 나에게 적잖은 마니아를 선물했다. 물론 고맙다. 이게 다 나로선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던 덤이라고 생각하면 마땅히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거기엔 무슨 결함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당하게 굴을 팠으면 응당 저절로 굴러 떨어져 쌓여야 할 '도토리'가 보이지 않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내가 그동안 적잖이 애를 쓰며 굴을 파들어갔던 그 '광산처럼' 단단하던 벽들은 아직 조금도 뚫리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제 그만 쉽게 풀어서 '광산'을 책에 비유해서 말해 보자. 어떤 광산이든 '작품이라는 광맥'과 '저자라는 광산의 소유주'가 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어떤 '광산'의 경우에는 저자와 작품이 아예 모두 '마니아'에서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또다른 경우엔 '작품'은 마니아에 어엿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저자'만 쏙 빼놓은 경우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 이들 저자와 작품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마니아'에서 빠진 것인지 나는 그게 자못 궁금하다. 내가 알고 있는 저자와 작품이 함량미달이어서 그런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랫동안 굴을 파 온 경험에 비춰 생각해 보면 결국 혐의는 '북플의 결함'에 둘 수밖에 없다.

 

 

 

지금 '북플 마니아'에서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나는 <저자/아티스트> 부문에서 38명의 '광산 소유주들'과 친한 모양이다. 그런데 미리 말했다시피 나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다른 몇몇 '광산 소유주들'과도 친하게 지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을 이 글에서 직접 밝혀보겠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북플의 결함'은 물론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느끼지 못할 성질의 것이다. 그렇지만 나한테만 느껴지는 결함이 만약에 금세 고쳐질 수 있는 문제라면 그러한 '개선'이 다른 이웃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어쨌든 그런 결함이 쉽게 고쳐진다면 누구라도 종전보다는 분명히 더 많은 '광산 소유주'들과 친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① 내가 열심히 곡괭이질을 했다고 믿는 '광산' 가운데 저자와 작품 모두 누락된 경우

 

베르길리우스   (BC70∼BC19), 『아이네이스』

몽테뉴             (1533∼1592), 『수상록』

아담 스미스      (1723∼1790), 『국부론』,『도덕감정론』 

클라우제비츠    (1780∼1831), 『전쟁론』

쇼펜하우어       (1788∼1860),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앙리 베르그송    (1859∼1941),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창조적 진화』

막스 베버           (1864∼1920),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케인즈               (1883∼1946),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하이데거            (1889∼1976), 『존재와 시간』 

찰스 P. 킨들버거(1910∼2003),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②    "     작품은 일부만 등재되어 있고, 작가는 누락된 경우

 

헤로도토스        (BC484∼BC425),『역사』

투키디데스        (BC460∼BC400), 『펠로폰네소스전쟁사

키케로               (BC106∼BC43), 『의무론』(『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는 등재)

벤저민 그레이엄 (1894∼1976), 『증권분석』(『현명한 투자자』는 등재)

엘빈 토플러        (1928∼       ), 『부의 미래』

 

 

    "     작가만 등재되어 있고 작품은 누락된 경우

 

찰스 다윈          (1809∼1882), 『종의 기원』,『인간의 유래』

 

어쨌든 나로서는 마땅히 내 굴 속에 이미 굴러 떨어져 있어야 할 '도토리'가 몇 개쯤 거기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 서운하다. 이런 결함은 빨리 고쳐졌으면 좋겠다. 어쨌든 저쪽 한켠에 자리잡은 북플은 결코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을 테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의 굴을 파는 일을 쉽사리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굴을 파다가 가끔씩 저절로 굴러 떨어지는 '한 알의 도토리'에 나는 기꺼이 즐거워 할 테니까.

 

나는 장소를 바꾼 것이다, 윗세계를 떠나 나는 나의 굴 안으로 왔으며, 굴의 영향력을 금방 느낀다. 이곳은 새로운 힘을 주는 새로운 세계이니, 위에서는 피로감인 것이 여기서는 피로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온 것이다, 힘이 들어 까무러칠 듯 피곤하지만 옛집을 다시 본다는 것,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정돈 작업, 얼른 모든 방들을 겉핥기로라도 살펴볼 필요성,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껏 서둘러 성곽광장으로 달려갈 필요성, 그 모든 것이 나의 피로를 소란과 열성으로 변화시키니, 마치 내가 굴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에 깊고 긴 잠을 자고 난 것만 같다.

 

 - 프란츠 카프카, 『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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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힌 부분 펼치기 ▼

 

아래 부분은 이 시각 현재 '나의 북플 마니아' 가운데 <저자/아티스트> 부분만 통째로 긁어서 옮겨붙인 것이다. 며칠 전에 '비공개글 카테고리'에 이 내역을 저장해 둔다는 것이 그만 깜빡  '실수'로 공개글에 덜컹 등록되고 말았다.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발견하고 황급히 '비공개'로 돌렸다. 아무런 설명글도 없는 보잘 것 없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짧은 노출 시간 동안에도 '좋아요'와 '댓글'로 호감을 표시해 주신 이웃분들께 감사드린다. 결국 그 분들 때문에 이런 장광설을 늘어놓게 되었다. 때로는 그런 '실수'가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할 때도 있다. 아무쪼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

 

저자/아티스트

 

  • 손택수
  • 8번째 마니아 (10명 중, 44점)
  •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 305번째 마니아 (331명 중, 42점)
  • 어니스트 헤밍웨이
  • 40번째 마니아 (42명 중, 42점)
  • 찰스 다윈
  • 2번째 마니아 (11명 중, 349점)
  • 로맹 가리
  • 12번째 마니아 (24명 중, 68점)
  • 윌리엄 셰익스피어
  • 47번째 마니아 (57명 중, 46점)
  • 이윤기
  • 32번째 마니아 (40명 중, 45점)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 2번째 마니아 (22명 중, 438점)
  • 허먼 멜빌
  • 11번째 마니아 (18명 중, 62점)
  • 조지프 캠벨
  • 10번째 마니아 (13명 중, 48점)
  • 소포클레스
  • 1번째 마니아 (12명 중, 280점)
  • 알베르토 망겔
  • 3번째 마니아 (12명 중, 331점)
  • 스티븐 제이 굴드
  • 5번째 마니아 (12명 중, 84점)
  • 스티븐 핑커
  • 1번째 마니아 (13명 중, 1520점)
  • 프리드리히 니체
  • 2번째 마니아 (30명 중, 1252점)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 1번째 마니아 (19명 중, 1083점)
  • 오비디우스
  • 1번째 마니아 (11명 중, 773점)
  • 호메로스
  • 1번째 마니아 (13명 중, 576점)
  • 아리스토텔레스
  • 2번째 마니아 (19명 중, 416점)
  • 재러드 다이아몬드
  • 3번째 마니아 (24명 중, 315점)
  • 플라톤
  • 3번째 마니아 (51명 중, 280점)
  • 에드워드 기번
  • 3번째 마니아 (17명 중, 258점)
  • 제임스 조이스
  • 5번째 마니아 (21명 중, 174점)
  • 단테 알리기에리
  • 2번째 마니아 (13명 중, 167점)
  • 사마천
  • 4번째 마니아 (28명 중, 159점)
  • 빅토르 위고
  • 8번째 마니아 (26명 중, 123점)
  • 레프 톨스토이
  • 19번째 마니아 (90명 중, 119점)
  • 마르셀 프루스트
  • 4번째 마니아 (28명 중, 117점)
  • 알랭 드 보통
  • 32번째 마니아 (137명 중, 98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11번째 마니아 (46명 중, 87점)
  • 알베르 카뮈
  • 33번째 마니아 (67명 중, 62점)
  • 에드워드 O. 윌슨
  • 9번째 마니아 (16명 중, 58점)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44번째 마니아 (86명 중, 55점)
  • 백승선
  • 13번째 마니아 (22명 중, 55점)
  • 데일 카네기
  • 21번째 마니아 (39명 중, 49점)
  • 리처드 도킨스
  • 31번째 마니아 (42명 중, 45점)
  • 브라이언 트레이시
  • 13번째 마니아 (19명 중, 44점)
  • 피터 싱어
  • 11번째 마니아 (13명 중, 4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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