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과 지각의 혼란은 잠깐 가르쳐 주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런 것을 교정하는 문제에는, 막 전투하려는 마당에 군대의 사기를 북돋워 달라고 재촉하던 자에게, "사람들은 훌륭한 연설 한마디로 당장에 용감해지거나 잘 싸우게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좋은 노래를 듣고, 바로 음악가가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키로스가 대답한 말이 바로 적용된다. 그것은 미리 오래 두고 꾸준한 훈련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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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밤 음악 공연은 내겐 약간 혼란스러웠다. 제법 기대가 컸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제대로 몰입이 되지 않았고, 뒤이어 연주된 교향곡 4번은 내 가슴에 격동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지각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달리 나타나는 분야가 '음악'이라고 하지만, 똑같은 사람이 듣는 음악도 불과 몇십 분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크게 엇갈릴 수 있다는 사실이 영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고찰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뒤따를 자를 보지 못했던 몽테뉴가 한 말이 과연 맞았다.
지금의 나와 조금 전의 나는 확실히 둘이다.
이번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이 연주한 작품은 모두 슈만의 곡이었다. '슈만 집중 탐구 프로젝트'인 셈인데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 <피아노 협주곡 Op.54>와 <교향곡 4번>이 무대 위에 올려졌다. 나는 이 공연을 예매할 때부터 약간은 망설였다. 지휘자인 파보 예르비와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내게 낯설지 않았지만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슈만의 작품들은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보 예르비는 이번에 여섯 번째로 내한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왔던 2012년에 처음 만났다. 그 연주를 듣고 나는 단번에 그의 지휘에 매료되었다. 그 때 협연했던 힐러리 한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도 좋았고, 특히 말러 5번 교향곡이 멋지게 마무리된 직후의 '감동의 도가니'를 잊지 못했다. 파보 예르비가 그런 관객들의 흥분을 보고 자신마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곧바로 포디엄으로 뛰어올라가 오케스트라를 마구 휘저으면서 들려주었던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은 또 얼마나 마법처럼 순식간에 그 시공간을 아름답고 영롱하게 물들였던지 그 감동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그날 그 지휘자는 마치 내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듯 앙코르 연주를 무려 세 번씩이나 들려줬고, 밤 11시가 넘도록 팬들을 위해 아낌없이 싸인을 남겨주고 돌아갔다. 그때부터 그는 언제나 내게 '팬들의 굳은 믿음'을 절대로 무너뜨릴 것 같지 않은 인물로 단단하게 각인되었다.
협연자로 나선 김선욱은 엊그제 세 번째로 만났다. 2010년 5월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영국 필하모니아를 이끌고 내한했을 때 일산 아람음악당에서 처음 만났고, 그 해 늦가을에 '영국 진출 후 첫 전국투어 리사이틀' 첫날 공연때 아람음악당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 두 번 모두 좋았다. 첫 번째 인상은 이랬다. 이미 명성이 자자한, 먼 데서 오신 하얀 머리의 노신사, 자그마한 체구에 무척 나이가 든 모습으로 등장한 아쉬케나지는 얼굴에 묻어나는 온화한 미소가 이미 온 몸으로 다 퍼져나간 것처럼 첫느낌이 참 따스했다. 그래서 그만큼 더 대비되는 젊은이 김선욱도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새까만 머리에 하얗고 반듯하고 해맑은 얼굴이지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미소는 찾아 보기 어렵고 어딘지 모르게 진지함만 계속 묻어나는 그 젊은 피아니스트는 늙은 지휘자와 그렇게 서로 묘한 대조를 이뤘다.
김선욱과 아쉬케나지를 난생 처음으로 만났던 내가 그날 들었던 음악은 그저 '정말 좋았었다'는 정도로만 요약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들려줬던 음악보다는 그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상이 내게 훨씬 더 강렬하게 새겨졌음에 틀림없다. 그 때의 '감상'을 남겨둔 기록조차 없으니 그때의 나의 '음악적 지각'을 무엇으로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이며 무엇으로 또 되짚어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김선욱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들었던 베토벤의 '월광'은 정말 대단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피아니스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자리를 잡은 덕분이었다.
지난 18일 경기 고양시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다소 창백한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런 낯빛과는 상관없이 김선욱은 무섭게 베토벤 선율에 빠져들었다. 베토벤 3대 후기 소나타 중 걸작 30번으로 문을 연 뒤 베토벤 소나타 14번 '월광'으로 이어지면서 연주는 후끈 달아올랐다. 슈만의 '아라베스크'와 '크라이슬레리아나'에선 특유의 화려한 손놀림으로 관객을 빨아들였다. 앙코르곡으로 브람스 '인터메조', 슈베르트 '즉흥곡'을 선사하자 객석에선 환호가 터져나왔다. '영국 진출 후 첫 리사이틀 전국 투어' 첫 테이프를 끊은 이날 김선욱의 연주는 예상대로 유쾌했다. (2010.11.19 뉴스에서 발췌)
나는 이번 공연을 앞두고 따로 예습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거푸 이어지는 송년 모임이 끝나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온 뒤에도 유튜브를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찾아낸 '슈만 피아노 협주곡 연주 실황' 가운데 최고는 당연히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였다. 그녀의 연주를 지난주에만 너댓번은 들었던 듯하다. 그녀는 이미 50년 전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사실조차 그녀를 수식하는 더 멋진 장식이 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건반 위의 마녀'로 불리는 현존 최고의 피아니스트다.
그녀가 리카르도 샤이와 함께 연주한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은 '명연주 명음반'이 어떤 것인가를 눈과 귀로 확인시켜주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라디오를 통해 하나의 악장만 따로 떼어내서 들은 적은 많아도 이번처럼 한꺼번에 '협주곡 전곡 연주'를 그것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듣는 기회는 드물다. 이렇게 예습을 조금 열심히 하다 보면 아무리 귀가 어두워도 예전에 미처 듣지 못했던 '음악'들이 조금씩 새롭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내가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에 대해 좀 더 알아본 끝에 찾아낸 연주는 아주 젋은 여성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Khatia Buniatishvili)였다. 마침 파보 예르비와 협연한 멋진 실황 영상이 곧바로 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나는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틈틈이 듣다가 정말 뜻밖에도 이번 공연에서 실제로 만날 지휘자 파보 예르비까지 덤으로 만나는 행운까지 얻은 셈이었다. 좀 더 알고 보니 파보 예르비는 슈만에 대해서도 '교향곡 전곡 녹음'을 남겼을 정도로 이미 권위를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피아니스트인 김선욱 또한 베토벤에 훨씬 더 깊이 천착하는 듯하지만 '슈만'에 대해 소홀했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2006년 리즈 콩쿠르 우승과 함께 런던으로 음악 무대를 옮긴 김선욱은 자신의 핵심 레퍼토리인 독일 피아니즘, 그 가운데 슈만 피아노 협주곡으로 필하모니아와 만난다. 전통적인 해석의 미덕과 구조와 디테일을 이끌어내는 감각적인 터치로 이미 무수한 수연을 남긴 김선욱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가 기대된다.
김선욱은 이미 지난해 영국 레스터시티에서 필하모니아(지휘-아쉬케나지) 오케스트라와 같은 곡을 협연한 바 있으며, 한국 공연을 마친 다음달 8일에도 런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필하모니아와 같은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2010-04-05 뉴스에서 발췌)
5년 전에 내가 김선욱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연주가 어떤 것이었나 하고 살펴보던 나는 방금 인용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내가 아쉬케나지의 지휘와 김선욱의 연주로 들었던 협주곡이 바로 지금껏 내가 열심히 예습했고 또 이틀 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들었던 바로 그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나는 2010년 봄날 저녁에 도대체 무슨 음악을 들었던 것일까. 귀는 닫고 그저 눈으로만 음악을 보았단 말인가. 5년 전에 나의 음악에 대한 지각이 그토록 둔감했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적잖은 예습,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에 대한 한두 차례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엊그제 내가 들었던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은 내게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몰입을 하기 위해 애를 쓸수록 피아노 연주와 오케스트라 연주가 서로 겉도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연주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피아노 소리가 뭔가 둔탁하고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듯하더니 그렇게 내 귀에 거슬리던 피아노 소리가 좀처럼 아름답게 바뀔 줄 몰랐다. 그렇다고 그들의 연주가 크게 잘못된 것 같지도 않았다. 김선욱은 연주가 끝나자 곧바로 지휘자와 뜨겁게 포옹할 정도로 자신의 연주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협연도 훌륭했음을 거듭 표시했다. 관객들의 박수도 적잖이 뜨거웠다. 비록 나만의 느낌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열광적이진 않은 듯했다. 예습때 내가 너무 아름다운 연주만 골라 들어서 나의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음 연주에 기대하는 수밖에...
인터미션이 끝난 후 시작된 '슈만 교향곡 4번'은 시작부터 달랐다. 캄머필하모닉이 지닌 소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에도 불구하고 슈만의 격정과 불안과 방황과 강렬한 열망들이 1악장 연주에서부터 거침없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클라리넷 독주는 당당하면서도 가득한 호소를 담아 매혹적인 소리를 맘껏 뽐냈고 다른 목관악기와 금관악기들의 호흡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현악 연주들은 조용히 그런 호소와 갈망들을 받쳐주면서 '어두운 날 새벽에 떠나는 먼 여정'을 차분히 예고해 주는 듯했다. 뒤이은 현악기들의 땅을 뒤흔드는 듯한 저음 연주들은 밝아오는 새아침에 길을 나서는 젊은이의 가슴 벅찬 요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경쾌한 목관들과 현들이 주고 받는 지저귐은 새소리와 물소리로 변했고 금관의 힘찬 울림은 높은 산마루에 올라 가슴 벅찬 미래를 내다보는 젊은이의 포부를 그대로 표출하는 듯했다. 이따금씩 귓가를 스치는 감미로운 선율들은 금새 뜀박질을 재촉하는 듯한 거친 약동 속에 묻혔다. 내가 미리 예습할 때 느꼈던 '슈만의 격정들'이 캄머필하모닉을 통해서 고스란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번 예습때 가장 많이 들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연주)
첼로의 독주로 시작되는 2악장에선 꿈꾸는 듯한 아련한 그리움과 슬픈 이별이 가득하다. 그러다가도 애타는 절박한 그리움들이 다시 희망으로, 또다시 아름다운 옛 추억들로 되돌아가는 감정들이 수시로 교차한다. 무릇 어떤 사랑이든 결실을 맺기까지는 무수한 엇갈림과 만남과 이별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애잔한 악장이다.
네가 가까이 있으면 난 네가 두렵고 멀리 있으면 네가 그립다. 네가 달아나기라도 하면 나의 마음은 네게 끌리고, 네가 나를 찾기라도 하면 나 꼼짝을 할 수가 없다. 나 괴롭다. 그러나 너를 위해 내 어떤 괴로움을 마다했던가!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3악장에선 그런 연약하면서도 여린 감정들이 순식간에 모두 사라지면서 미래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벅찬 희망들로 다시 활활 불타오른다. 길고도 어두운 방황과 고뇌와 슬픔들은 저편으로 모두 사라지고 힘찬 미래만 남았다. 떨리는 가슴으로 맞이할 부푼 나날들과 충만한 기쁨들이 금세라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질 듯하다.
마침내 4악장에 이르면 '이젠 됐다'는 감격과 환희가 한 순간에 터져나온다. 니체가 말한 대로 목표에 다다른 사람은 '어깨춤'을 추게 마련이다. 어떤 일이든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기분으로 뛸 듯이 기뻐하며 신나게 앞으로 내달리는 모습이다.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이 느껴진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바로 작곡가 슈만이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필생의 연인' 클라라와 마침내 완전한 부부로 맺어지는 환희가 그대로 느껴지는 악장이다. 종반에 다가서면서 숨가쁘게 고조되는 현악의 선율들과 곧이어 격렬하게 뒤흔드는 저음의 선율들은 곧바로 승리의 함성처럼 터져나오는 관악기들의 합주들과 곧장 하나로 뭉쳐 열광적인 클라이맥스로 격렬하게 마무리된다.
이제 내가 처음 꺼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나는 똑같은 작곡가가 쓴 작품을 똑같은 악단과 지휘자의 연주를 듣고도 그토록 크나큰 '음악적 지각의 차이'를 경험했다. 그리고 김선욱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연주가 마침 이번에 내가 들은 바로 그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인 줄도 모른 채 '또다른 예습'에 열을 올렸다. 그래도 나는 이번에 경험한 지각의 혼란에 대해 나 자신을 심하게 책망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음악이든 그걸 듣는 사람은 결국 그가 지닌 그릇만큼만 수용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내가 이것은 빈 수레를 끌고 지나가듯 아무것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반면에 저것은 그릇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철철 넘치도록 많이 받아냈다고 한들 그게 무슨 큰 허물이겠는가.
김선욱도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베토벤이 자신의 모든 생각을 꾹꾹 눌러 담았다면 슈만은 악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슈만은 연주자마다 너무나 독특한 해석이 나오는 것 같다. ‘슈만이 어때야 한다’는 정답은 없다. 나의 슈만은 나의 슈만일 뿐이다”라고 말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훌륭한 대왕이 말했듯이 누구든 훌륭한 연설 한마디로 당장에 용감해지거나 잘 싸우게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몽테뉴의 말대로 '어리석음과 지각의 혼란은 잠깐 가르쳐 주어서 될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니 오래 두고 꾸준한 훈련으로 차츰 더 가까이 다가설 수밖에... 이토록 부실한 '지각'으로 이렇게 어렵사리 쓰는 글 또한 그런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음악을 잘 감상하기 위해 억지로 시계를 거꾸로 되돌릴 필요가 없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런 면에서 몽테뉴의 다음 말은 묘한 역설처럼 반갑게 들릴 때도 없지 않다.
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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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파보 예르비가 2012년 6월에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내한했을 때 힐러리 한과 협연했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 Minor Op.64>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다. 그날 공연 이후 다시는 그 연주를 듣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차마 몰랐다. 다시 봐도 정말 좋은 연주였다 싶다. 지금까지 조회수는 무려 4,879,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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