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온 드문 영혼, 빅토르 위고.

 - 샤를 보들레르

 

 * * *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틀리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우리는 무엇이든 '봐야' 제대로 알고 느낄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봄'은 그토록 기이한 우위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노트르담 드 파리>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나는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이 유명한 뮤지컬을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작품의 원작인 빅토르 위고의『파리의 노트르담』또한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내가 이 작품에 대해 그동안 '봤던 것'이라고 굳이 몇 가지를 내세워 봐야 그건 그만큼 더 내가 봤던 것들의 빈약함을 더할 뿐이리라. 어릴 때 동화로 읽었던 <노틀담의 곱추>만 하더라도 얼마나 이 뮤지컬과 거리가 멀었던가. 그 동화는 단지 내가 오래 전에 유럽에 처음 갔을 때 봤던 '노틀담 대성당' 앞에서 그저 자연스레 떠올린 동화책의 제목일 뿐이었다. 그나마 라디오에서 여러 차례 들었던 <대성당의 시대> 라는 그 유난히 커다란 울림으로 들렸던 노래만이 이 작품과 연관지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끈이었다.

 

그렇게나 허약한 토대로도 이런 걸작 공연을 얼마든지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어쨌든 나는 눈만 뜨고 귀만 열어 놓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허약한 관객'일 뿐이었다. 적어도 이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뮤지컬이고, 더구나 '프렌치 오리지널 내한공연'이니 만큼 작품의 수준은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 원작임에랴. 운도 따랐다. 예약할 때도 몰랐고 공연 당일까지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캐스팅'조차 나무랄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공연이 끝나고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이들 배우들은 하나같이 <노트르담 드 파리>의 '전설'로 통하는 인물들이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말자 음유시인 그랭구와르 역을 맡은 리샤르 샤레스트가 홀로 나와 <대성당의 시대>를 부르는데 머리가 쭈뼛 설 만큼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직접 무대를 보면서 배우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대성당의 시대>는 그저 어쩌다가 라디오로 흘려 듣는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대와 조명, 음악과 가사, 배우의 호소력으로 가득 찬 슬픈 노래는 마치 마법처럼 순식간에 모든 걸 뒤바꿔 놓았다. 오로지 공연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놀라운 몰입감이 주는 위력은 대단했다. 마치 순식간에 나를 포함한 관객들 모두를 파리의 대성당 앞 광장 속으로 이끌고 가는 듯한 강렬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이야기는 신의 권력이 강성했던 1482년,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서 생긴

욕망과 사랑의 이야기라네

이름있는 예술가들은

조각을 하거나 시를 읊어

이 이야기를 전하여 후세에 길이 남게 하리

대성당의 시대가 왔네

새로운 세상 새 천 년을 맞이하며

인간은 저 높이 별에 닿아

역사를 새기네, 유리와 돌 위에


그 쌓인 돌과, 그 세월들이 흘러

한 세기를 새겨가고

인간은 그들의 손으로 세운 탑들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보네

시인도 음유시인도

온 인류의 아름다운 날들을 약속하는

사랑의 노래를 불렀네.

 

<대성당의 시대> 중에서

 

 

 

 

이렇게 '시인의 노래'로 시작되는 기나긴 이야기는 오로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만 붙어 사는, 좀 더 심하게 얘기하면 대성당의 부속물로까지 여겨질 만한 여러 등장 인물들의 '삶과 사랑'을 우리 앞에 송두리째 내보인다. 그들에게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신분과 외모와 처지의 격심한 차이'들은 그들 사이에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무너져내린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일으키는 놀라운 소용돌이와 마법 같은 힘 앞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서로 급격히 휩쓸린다. 자신의 삶의 전부가 뒤바뀔지 몰라도 그들은 사랑의 힘을 결코 거역할 수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갈구하는 사랑 앞에서 삶의 다른 모든 측면들은 하나같이 무의미해지고 약화되고 만다.

 

이야기의 무대가 '사랑'을 빼놓고는 결코 얘기하기 어려운 프랑스의 파리, 그 속에서도 노트르담 대성당을 한가운데 두고 있다는 점만 해도 흥미로운데, 등장 인물들이 성당의 종지기 곱추, 집시 여인, 대성당의 주교, 음유시인, 파리의 근위대장 등으로 이뤄져 있다 보니 각각의 인물들이 자아내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잇따르는 수많은 장면들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같이 극적이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시대적 배경조차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흔하게 일어나던 중세이다 보니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무대 전면에 깔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분위기에 강한 역동성과 에너지를 불어넣는 요소는 '거리의 방랑자들'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앞뜰 광장에서 우두머리 클로팽이 자신의 패거리들과 함께 '은신처'를 요구하며 항거하듯 부르는 노래와 춤들은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외침이다.

 

 

우리들은 이방인, 불법체류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거리의 부랑자

오! 노트르담!

우리에게 은신처! 은신처를!

 

 

노트르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려는 집시 무리를 저지하려는 사람은 대성당의 주교 프롤로다. 그는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의 온갖 권위와 사법권을 포함하는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근위대장 페뷔스에게 집시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한다. 그 와중에 아름다운 집시 처녀 에스메랄다가 등장하며 자신의 운명이 담긴 듯한 구슬프고도 매혹적인 노래 <보헤미안>을 부른다.

 

 

보헤미안, 보헤미안

내가 온 곳을 그 누가 알까

나는 거리의 여인

보헤미안, 보헤미안

내가 어디로 갈지, 그 누가 알까

보헤미안, 보헤미안

내 손금에 써 있을까?

 

<보헤미안> 중에서


 

여덟 살 때부터 에스메랄다의 보호자를 자처해 온 클로팽은 에스메랄다에게 '남자들의 음흉함'을 충고하며 조심할 것을 당부한다. '이제 너도 사랑할 나이가 된 거란다. 이젠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남긴 채. 대성당의 주교인 프롤로는 에스메랄다를 종교적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종지기 콰지모도에게 그녀를 납치해 성당안으로 데려올 것을 명령한다. 어릴 때부터 괴물처럼 못생긴 추남이자 절름발이 곱추였던 콰지모도를 입양해 '글을 읽고 쓰는 법'까지 가르쳐준 인물이 바로 프롤로였다. 콰지모도는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콰지모도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한다.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 하지만 청년 근위대장 페뷔스가 이를 제지한다.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 페뷔스와 에스메랄다는 '내일 해가 질 무렵, 땅거미가 꺼질 때, 발 다무르 카페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페뷔스는 파리 태생의 귀족 처녀 플뢰르와 이미 약혼한 사이였지만 에스메랄다를 만나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빠져들고, 한동안 두 여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집시 처녀 에스메랄다에게 어느새 마음을 빼앗긴 프롤로는 질투에 눈이 멀기 시작한다. 그랭구와르는 성당의 벽에 새겨진 '아나키아'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프롤로 주교는 그리스어로 '숙명'이라는 뜻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는 사이에 비운의 종지기는 바퀴형틀에 묶여 광장으로 끌려나온다. 죄인으로 뒤바뀐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한 모금의 물 뿐이었다.

 

 

가엾은 콰지모도를 볼쌍히 여겨주오

그의 등은 이미 지상의 모든 불행을 짋어지고 있네

그가 원하는 건 물 한 모금뿐

구경꾼들이여 이 종지기에게 자비를

콰지모도에게 물 한 모금만

물 좀 주오! 내게 물 좀 주오!

물 좀! 물 좀!

내게 물 좀 주오...

 

<물을 주오> 중에서

 

 

에스메랄다가 콰지모도에게 다가가 물을 건네주고, 콰지모도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름답다.... 아름답다...'를 되풀이하며 중얼거린다. 곧이어 콰지모도, 프롤로, 페뷔스는 저마다 에스메랄다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다. 제1막의 절정을 이루는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 노래는 프랑스에서 44주간 1위를 차지하였으며 1998년 당시 싱글앨범으로 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말은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말

춤추는 그녀의 몸짓은

마치 비상을 위해 날개를 펼치는 새와도 같네

 

내 두 눈은 집시 여인의 치마에 머물렀네.

성모 마리아께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어느 누가 집시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런 자, 이 세상에 살아 있을 가치도 없네

 

오, 사탄이여! 오! 단 한 번만이라도

에스메랄다의 머리결을 쓸어넘길 수만 있다면

 

 

아름답다..

그대는 정녕 사탄의 정령이어서

나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저버리게 하려는가

내 안의 쾌락의 정념을 달구어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게 하려는가

 

숙명의 원죄를 가지고 있는

그녀를 향한 나의 욕망만이 죄가 되련가

자유의 여인이여 쾌락을 파는, 천한 여자일진대

갑자기 인류의 십자가를 지는 듯하네

 

오! 성모 마리아여! 오, 단 한 번만이라도

에스메랄다 낙원의 문을 열 수 있게 해 주오

 

 

아름답다..

남자를 유혹하는 커다란 검은 눈동자여

그대는 아직 순결한가

그대가 춤출 때 무지개 빛 치마 속으로

속세의 경이와 황홀을 보았네

 

나의 정인이여 결혼의 성전으로 가기도 전

그대에게 충실하지 못함을 용서하고

어느 누가 그녀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금동상으로 변하는 천형이라도 감수하리

 

오 플뢰르 드 리스 난 진실한 남자가 못 된다오

에스메랄다 사랑의 꽃을 꺽으러 가리니

 

<아름답다> 중에서

 

 

 

바퀴형틀에서 풀려난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성당 안으로 데려간다. '겨울엔 덜 춥고, 여름엔 덜 덥고, 피난처가 필요하거든 언제든지 말만 해요. 나의 집은 너의 집'이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이방인 에스메랄다는 처음으로 <아베마리아>를 부르며 간절히 기도한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현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프롤로는 자신이 평생 동안 지켜온 신념과 에스메랄다를 향한 정념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녀의 치명적인 매혹을 끝내 거부하지 못한 채 평생의 신념을 버린 후 겪게 될 고통을 예견하면서 괴로워한다. "네가 나를 파멸시키는구나. 네가 나를 파멸시키는구나. 너를 저주하리, 내 생이 끝날 때까지."

 

페뷔스는 에스메랄다를 만나러 가고, 프롤로는 그를 미행한다. 온통 페뷔스에게 반한 에스메랄다는 페뷔스와 발 다무르 카페에서 만난다. 에스메랄다와 페뷔스가 침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프롤로는 마침내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에스메랄다의 단도로 페뷔스를 찌르고 만다. '숙명'이 지배하는 순간이다. 곧바로 그랭구와르가 '숙명'에 대하여 노래한다. 1막은 여기서 끝난다.

 

 

숙명이여! 우리 운명의 여인이여!

숙명이여! 그대 우리의 곁을 지나갈 때

숙명이여 왕자런가 거지런가

숙명이여 여왕이런가 창녀런가

숙명이여 우리 삶과 인생이 그대 손안에 놓였구나

숙명이여! 숙명이여! 숙명이여!

 

 

 

 

2막이 열리면 다시 시인의 노래가 시대를 앞서 '세상의 변화'를 미리 알린다. '위대한 휴머니스트'였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인도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목표와 신념'이 1막 보다 훨씬 더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2막의 첫 시작은 세계의 변화를 노래하는 <피렌체>다.

 

 

피렌체와 르네상스 이야기를 들려다오

브라만트와 단테의 "지옥편"을 들려다오

피렌체에서는 지구가 둥글 거라 하고

지구상에는 또 다른 대륙이 있을 거라 하네

배들은 벌써 인도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대서양을 향해 떠났네

루터는 신약을 다시 쓸 것이고

우리는 분열의 시대 문턱에 서 있네

구텐베르크는 세상을 변화시켰고

뉘른베르크 인쇄소에서는 쉴 새 없이 인쇄물이 쏱아지네

인쇄된 시들과 연설문과 팜플렛

새로운 생각들이 모든 것을 바꾸리라

작은 일은 항상 큰 일들의 일부에서 오는 법

그리고 문학은 건축을 파괴시키고

성경은 종교를, 인간은 신을 파괴할 것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할 것이다

 

<피렌체> 중에서

 

 

에스메랄다가 체포되고 난 후,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콰지모도는 벌써 3일째 종을 울리지 않고 있다. 종은 그에게 가장 친한 친구인데도 말이다. 콰지모도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미치고, 사랑에 번민하고 있는 것이다. 평생토록 종을 애인이자 친구로 여기며 살아왔던 콰지모도에게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전부이고 종은 이제 그녀를 위해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내가 울리는 종들은 내 사랑, 내 애인이죠

나는 종들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노래 부르길 원해요

우박이 떨어져도 천둥이 쳐도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동들이 울리기를 원해요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탄생을 알리는 종

죽음을 알리는 종

매일 매시 밤낮으로 울리는 종

······

이 모든 종들 중에 나를 위하여 울리는 종은 하나 없네

내가 울리는 종들은 나의 친구 나의 애인

에스메랄다가 살아 있다면 나팔소리로 울려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노라고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성당의 종들> 중에서

 

 

 

 

 

에스메랄다가 체포된 이후 부터 무대는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그녀 없는 세상'은 이제 우울하게 변하기 시작하고 침울하게 뒤바뀌고 번민으로 휩싸인다. 라 쌍테 감옥에 갇힌 그녀를 떠올리며 부르는 회상의 노래들이 애절하게 울려퍼진다. 에스메랄다를 감옥에 가둔 프롤로는 짐짓 모른 체하며 그랭구와르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는다. 클로팽도 에스메랄다를 걱정하며 두 사람의 노래에 끼어든다

 

 

당신은 신부, 나는 시인 우리들은 아내가 없잖소

신부에겐 종교, 시인에겐 시가 있지 않은가

 

너의 에스메랄다 그녀는 어디 있나

그녀 없는 파리의 거리는 슬픔 뿐이네

 

그녀를 악마로 보는 이로부터 멀리 떨여져

작은 탑 안에 홀로 있지

 

시인이여 무슨 말이냐 악마의 혀를 가졌구나

들러대지 말고 봤는지나 말하거라

 

나의 에스메랄다,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

도둑들의 궁정이 여왕을 잃었네

 

그녀는 두 날개가 잘린 가엾은 제비 같이

'라 쌍테' 감옥에 갇혀 있네

그녀를 구해내지 않으면 교수형을 선고받으리

 

더이상 말하지 말게

우리의 에스메랄다 그녀는 어디에 있나

그녀 없는 파리의 거리는 슬픔 뿐이네

그녀는 두 날개가 잘린 가엾은 제비 같구나

 

<그녀는 어디에?> 중에서

 

 

창살 많은 감옥에 갇힌 에스메랄다도 안타까운 노래로 호소한다. 도와달라고. 에스메랄다의 행방을 모르는 콰지모도 역시 그녀를 그리워한다. 자신에게 물을 주었던 그날을 회상하며... 에스메랄다는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되었고, 콰지모도는 자신을 버려진 아이로 여기고 있다. 서로 다시 사랑 받을 수 있는 날들을 기다리며...

 

 

새장에 갇힌 새가 다시 날 수 있을까?

버림받은 아이들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제비처럼 봄과 함께 왔었지

집시의 노래를 부르며 골목길을 뛰어 다녔지

성당의 종지기, 넌 어딨니

나의 콰지모도, 넌 어디 있니

밧줄을 풀고 창살을 열어 나를 구하러 와줘

 

 

나의 에스메랄다, 그대 어디 있나요?

나를 피해 어디로 숨었나요?

그대 보이지 않은지 벌써 3일이나 되었네

그대의 멋진 기사와 여행을 떠났나요

이교도의 풍속처럼 약혼도 결혼식도 없이

혹시나 죽었을까? 기도도 왕관도 없이

 

'사람들이 나를 바퀴형틀에 매단 날'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그날 이후로 우린 영원한 친구가 되었네

우리 둘 사이에 강렬한 무언가가 생겨났지

 

새장에 갇힌 새가 다시 날 수 있을까?

버림 받은 아이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새장 속에 갇힌 새> 중에서

 

 

에스메랄다는 감옥에 갇힌 채 재판을 받는 동안에 자신이 살인죄가 아닌 상해죄로 기소된 것을 알고 페뷔스가 살아있음에 기뻐한다. 에스메랄다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페뷔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거듭 맹세하고, 프롤로는 결국 그녀에게 교수형을 선고한다. '신부가 되어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두고 프롤로가 자신의 고통과 갈등을 노래하는 대목은 처절하다. 원래 사랑의 본질이 그러하니 그 어떤 강한 신념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사랑의 형이상학'을 뛰어넘을 힘은 없는 셈이다.

 

에스메랄다는 페뷔스가 자신을 구하러 와주기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근위대장은 자신의 옛 애인에게로 되돌아간다. 그에게 에스메랄다는 애초부터 하룻밤 풋사랑 같은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편 에스메랄다의 교수형 집행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새벽 5시에 프롤로 주교는 에스메랄다 앞에 불쑥 나타난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그녀를 풀어주겠다고 유혹한다. 형틀에 묶인 춘향이를 협박하는 변사또의 모습 그대로다. 동서고금에 어디 완력으로 사랑을 얻은 적이 있었던가. 그저 "예"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된다고 끈질기게 설득하지만 그녀는 끝내 "가버려" 하며 거부한다.

 

한때 체포됐던 클로팽과 집시 무리들은 콰지모도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저 다시 '은신처'일 뿐이다. 배경이 바뀌며 이제 초생달이 뜬 캄캄한 밤이 된다. 음유시인 그랭구와르는 '달'을 보며 사랑으로 고통 받는 인간의 삶을 감미로운 선율로 노래한다.

 

 

달아. 파리의 지붕 위

저 위에서 빛나는 달아

보라, 인간이 얼마나 사랑으로 번민하는지

 

아름답고 외로운 별아

아침이 오면 사라지는 별아

들어보라

너를 향해 솟아오르는 지상의 노랫소리를

불행한 한 남자의 외침을 들어라

그의 눈에는 수백만의 별들보다

그가 죽도록 사랑하는

그 여인의 눈빛이 더 밝게 빛나니

달아

 

달아

아침이 오기도 전에 저 위에서

스러지는 달아

들으라

포효하는 인간의 가슴이 고동치는 소리를

그것은 비탄하는 콰지모도의 하소연

그 한탄의 목소리가 산과 계곡을 넘어 울려 퍼져

네가 닿으려 한다

달아

 

그의 목소리가 천사의 노래 속으로 스며들어

이 이상한 세상을 살펴 주어라

달아

내 펜 끝을 비추려고 저 위에서 빛나는 달아

보라 인간이 얼마나 사랑으로 번민하는지

사랑으로

 

<달> 중에서

 

 

에스메랄다는 콰지모도의 도움으로 성당 지붕에 피신하고,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잠든 에스메랄다을 지켜보는 콰지모도는 추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세상의 불공평함'을 노래한다.

 

 

세상은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지

그는 그렇게 멋지고, 나는 이렇게 추하고

나는 그녀에게 달을 주고 싶은데

그녀는 나의 사랑을 원하지 않네

‥‥‥

 

세상은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지

그는 주인이고, 나는 하찮은 인간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그는 당신에게 달을 선사하겠지

‥‥‥

 

그대 뛰어난 미모에 비해

나의 추한 몰골은 모독이지요

타고난 운명으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몸

 

세상은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지

내 몫은 항상 그들의 몫과 다르지요

우리는 재물이 없어요

하지만 그들에겐 가슴이 있던가요?

그들은 비단금침을 감고 나왔지

사랑을 하고 전쟁에 나가지

가련한 땅 벌레들 같은 우리지만

우리의 인생이 더 아름답지요.

 

신은 누구 편인가요?

오만한 자들의 편인가요

아니면 밤낮으로

신께 기도 드리는 자들의 편인가요?

 

……

서로를 갈구하는 두 사람에게

삶은 어찌 이리도 잔인한가요

 

<불공평한 이 세상> 중에서

 

 

잠에서 깨어난 에스메랄다는 '죽고 싶지 않다'고 노래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살리라 다짐한다. 파문도 없고 금기도 없는 삶을 택하리라 다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살리라 다짐한다. 밤이 낮을 사랑하듯 그렇게 사랑하며 살리라 다짐한다. 그 사랑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집시 무리들은 또다시 '은신처'를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키고, 주교는 불법체류자들을 타도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 와중에 클로팽이 죽는다. 집시들의 폭동에 적극 가담한 에스메랄다는 결국 마녀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노트르담 대성당 탑 위에서 에스메랄다의 교수형 집행을 지켜보던 프롤로는 콰지모도에게 이 모든 일이 자신이 저지른 일임을 밝힌다. 그녀가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이 그녀를 죽인 이유였다고 말이다. 충복처럼 그를 따르던 콰지모도는 격분에 휩싸여 주교를 탑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인다. 성당의 종들은 댕댕댕 울리고... 교수형을 당한 에스메랄다를 발견한 노트르담의 곱추 종지기는 비탄에 빠져 절규한다. "그녀를 내게 주오. 그녀를 돌려주오. 그녀는 내 여자요. 가지 마오. 내 곁에 있어 주오. 에스메랄다!"

 

죽은 에스메랄다를 끌어안은 채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부르는 종지기의 마지막 노래는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에스메랄다를 사랑했던 종지기는 끝내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녀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에스메랄다가 교수형에 처해진 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더이상 콰지모도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죄인들의 무덤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두 구의 뼈가 발견되고, 하나는 한쪽 다리가 짧아 콰지모도의 것이라 여겨졌다. 사람들이 엉켜있는 두 개의 뼈를 서로 떼어 놓으려 하자 먼지처럼 부스러졌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얼싸안은 우리의 뼈를 땅 속에서 찾으리

콰지모도가 얼마나 에스메랄다를 사랑했는지

 

어둠의 독수리여

나의 살을 뜯고 나의 피를 마셔라

죽음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하나가 될 수 있게!

 

지상의 불행으로부터 탈출하여

내 영혼이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내 사랑이 스며들게

우주의 불빛 속으로

우주의 불빛 속으로

 

춤 추어라 나의 에스메랄다

노래하라 나의 에스메랄다

춤추어요 나를 위해 조금만 더

나 죽도록 그댈 원해요

 

춤 추어요 나의 에스메랄다

노래해요 나의 에스메랄다

나 그대와 함께 떠나게 해 주오

그댈 위해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죠

 

 <춤을 춰요, 나의 에스메랄다> 중에서

 

 

 

 

중세에 벌어진 특별한 인물들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가 이토로록 절절한 호소를 담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무엇보다도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이 워낙 탁월한 점에 있겠지만, 그건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다른 많은 사람들까지도 이 뮤지컬에 열광하는 이유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내가 보기엔 이 뮤지컬은 원작, 극본 및 가사, 음악, 연출, 안무, 무대디자인 등등이 특별히 훌륭하게 결합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생생하게 들려주는 프렌치 오리지널 배역 배우들의 훌륭한 노래 솜씨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여태껏 이토록 가슴에 콕콕 다가와 박히는 음악과 가사들을 그리 자주 접해보지 못했다. 이토록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 제작진 모두에게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이 멋진 공연을 나중에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려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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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기이한 우위를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욕망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본디 눈에 딸린 것이 보는 것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감관으로 무엇을 알려고 할 때에도 "보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감관들도, 비슷한 점에서 인식함이 문제가 될 때면 눈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봄의 기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제36절 호기심> 中에서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

 

연정은 겉보기에는 별나라 같아도, 사실은 성욕이라는 본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니, 이 본능이 특수화된 것이며 개체화된 것이다.

점을 염두에 두고 사랑이 희곡이나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거기서는 자기보존 본능과 함께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며, 모든 동작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다) 연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관찰하면, 언제나 모든 생애

 

에서 가장 젊은 시절, 즉 청춘시절 뭇사람들의 정력과 사고를 거의 절반쯤 강제로 동원한다. 또한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으로서, 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사건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며, 가장 진실한 과업을 중단시키고, 때로 가장 위대한 정신도 흐리게 하며, 외교적 교섭이나 학술연구에 몰두할 때도 체면불구하고 연출하여 장관의 문서철이며 철학자의 원고 속에 연애편지나 머리카락을 끼워넣게 한다. 또 수많은 나날 시끄러운 사건에 가장 악질적으로 사주한 사람이나 동지끼리 맺은 가장 친밀한 사이도 끊어버리고, 견고한 사슬도 풀며, 허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생명과 건강과 부와 지위와 행복을 빼앗아갈 뿐더러, 정직한 사람을 철면피로 만들고, 충신을 파멸시키려 한다. 이 모든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토록 소란을 피우고 애쓰고 고민하며 불행에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듯 하찮은 일이 그처럼 큰 파문을 일으키며 안정된 생활에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진리 탐구 정신이 투철한 사상가라면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즉, 그것은 결코 작은 일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그 중대성은 그것을 추구하는 경우 맞닥뜨리게 되는 진지하고 열렬한 모습에 맞먹는다.

정사의 목적은 비극으로 나타나든 희극으로 나타나든 인생의 여러 가지 목적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것이며, 누구나 끈질기게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은 다음 세대의 조정이라는 중대한 일이며, 다음 무대 위에 우리를 대신해 등장할 인원은 이같이 사소한 장난처럼 보이는 정사에 의해 그 존재와 양상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 미래에 인간이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성욕을 절대조건으로 삼고 있는 한편, 그들의 성격적인 특질인 본성(essentia)은 성애의 개체적인 선택을 절대조건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모든 점이 변함없이 결정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일시적인 사랑에서 가장 뜨거운 정열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모든 형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진상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랑의 여러 가지 형태는 이성을 선택하는 개인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세대의 연애를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크게 보면, 다음 세대의 성립을 숙고하고 그 뒤의 무수한 세대에 대해 배려하는 진지한 일이라고 하겠다. 사실 그것은 다른 정열같이 개인의 불행이나 이익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고, 앞으로 돌아올 인류의 존재와 그 특수한 양상에 관한 것으로, 이 경우 개인의 의지는 가장 높은 능력에 도달하여 자신을 종족의 의지로 돌아가게 한다.

연애란 엄숙하고도 뼈아픈 것으로, 큰 환락과 고뇌가 따르는 까닭은 종족에 관한 커다란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몇천 년 전부터 수많은 예를 들어 그것을 묘사했다. 이 주제는 종족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그밖의 어떤 주제도 더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한다. 즉 개인과 종족의 관계는 물체의 표면과 물체와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사랑은 옛날부터 다루어온 진부한 것임에도 언제까지나 고갈되는 일이 없다.

(중략)

당사자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정사는 결국 자식을 낳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따라서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의 우여곡절은 부수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고결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들은 내 주장이 지나친 실재론이라고 반박할 테지만, 이것은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등장할 인류의 외모와 성격을 정밀하게 선정하는 일은 그들의 꿈이나 공상보다 훨씬 고귀한 목적이 아닌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목적들 중에서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목적을 인정하지 못하면 사랑의 뜨거운 정열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정열이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고 극히 하찮은 일도 일단 이 목적과 관련 맺으면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연인을 위해 동분서주하거나 서둘러 접근하는 노력이나 노고는 언뜻 보아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대가보다 커보이는데,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위에서 말한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노고와 투쟁을 거쳐 현재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성적인 성격을 갖고 태어날 다음 세대의 인류다. 아니, 다음 세대의 인류는 벌써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저 사랑이라는 이름의 면밀하고도 끈기 있는 이성의 선택에서도 나타나 있다.

(중략)

이제 문제의 핵심에 대해 언급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심이 깊이 뿌리박혀 개개인에게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하고도 분명한 동기는 이기적인 것 이외에 없다. 종족은 개체에 대해 분명 우선권을 가지며, 보다 직접적이고 큰 권한을 갖고 있다. 종족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개체는 희생되어야 하는데, 개체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욕구에만 쏠려 있으므로 개체에게 이런 희생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해시켜야 한다. 그렇다 해서 개체에게 자신의 이해관계로부터 떠나게 할 수는 없으므로 자연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환상을 심어주어 개체를 기만할 수밖에 없다. 이때 개체는 이 환상에 미혹되어 사실은 종족에 관한 일인데도 자신의 행복이 되는 것처럼 오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개체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믿는 순간, 이미 자연의 무의식적인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의 눈앞에는 곧 탐스러운 환상이 나타나 이를 추구하게 된다. 이 환상이 다름아닌 본능으로, 그 대부분은 개체 의지가 아닌 종족 의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자기 이상에 맞는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면 남성은 미칠 듯한 정열을 일으키며, 이 여성과 결혼했을 경우 맛볼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 환영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 정열도 따지고 보면 '종족의 의지'며, 이것이 여성에 대해 스스로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보이며 그녀를 통해 자신을 유지해 나가려고 한다.

(중략)

그런데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들이 일단 그 정열을 충족시키면, 곧 미궁에서 벗어나 그처럼 열망했던 것이 얼마 안 가 실망을 안겨주는 일시적인 쾌락만 제공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 욕망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다른 욕망에 대해 종족과 개체, 무한과 유한 같은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욕망의 충족으로  종족만이 실제적 이득을 보게 되나, 개체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개체가 종족의 의지에 따르게 되어 지불한 희생은 그 자신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에 사용된 것이다. 모든 연인은 성교라는 큰일을 한 번 치르고 나면 곧 속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종족의 도구가 되게 한 환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성적 쾌락은 최대의 사기꾼"이라는 명언을 남기게 되었다.

(중략)

그러므로 종족의 영혼은 개체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보다 월등히 중요한 일을 처리한다고 자부하며, 전쟁의 불바다 속에서건, 분주하게 사무를 집행하는 중이건, 페스트가 창궐하는 중이건, 또는 한적한 절 속이건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자기 일을 수행한다.

(중략)

사랑이 어느 유일한 이성에게 쏠리게 되면 굉장한 힘과 열을 내어, 만일 사랑이 맺어지지 못하면 본인에게는 세계의 훌륭한 것들이 시들하게 보이고 나아가 목숨까지도 하찮게 생각되며 이 정열을 불태우기 위해 어떤 희생도 두렵지 않게 된다. 그 격정은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으며, 때로 미치거나 자살까지 하게 만든다.

(중략)

질투가 괴롭기 이를 데 없는 정념(情念)인 것도 이런 점에서 이해할 만하고, 또한 자기가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을 단념하는 일이 어떤 희생보다 크게 여겨지는 것도 납득이 된다. 영웅은 일상적인 일로 비탄에 빠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사랑의 비애에 대해서는 비탄을 억누르지 못한다. 이 경우 비탄에 빠지는 것은 본인 자신이 아니라 종족 자체이기 때문이다. 칼데론의 훌륭한 희곡 《위대한 제노비아》제2막에 제노비와 데시우스가 등장하여 데시우스가 말한다.

"아, 하늘이여, 당신이 날 사랑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백 번이라도 승리를 포기하겠소. 적진에서 도망쳐버리겠소."


여기서는 여러모로 이해타산적인 명예가 무시되고 그 대신 사랑, 즉 종족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명예와 의무, 그리고 충성은 지금까지 유혹이나 심지어 죽음의 협박에도 저항해 왔으나, 종족의 이해 앞에서는 고분고분 양보하고 굴복해 버린다.


(중략)

일단 종족에 대한 이해가 강조되면 개체에게만 관련되는 이해는 다 거기에 순종하며, 때로는 희생이 되기도 한다. 이같이 인간은 자신에게도 종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며, 자기가 개체 안에서보다 종족 가운데에서 더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에 빠진 자는 무엇 때문에 연인에게 완전히 얽매여 애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무릅쓰려고 하는가? 애인을 그리워하는 건 결국 그 사람 속에 깃든 영구불멸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밖의 것들은 오직 허망하게 생멸하는 일에만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열렬한 사모의 감정은 우리 본성이 불멸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광명을 던져주는 것으로, 이를 요약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성적 욕망에 의한 이성의 선택은 차츰 열기를 더하여 드디어 열렬한 사랑에 이르고, 이것은 앞으로 나타날 인류의 특수한 개성적인 소질이 종족 속에서 존속된다는 것을 입증한다.

(중략)

이 내재적인 본성이야말로 의식의 핵심이고 그 근저에 있으며 의식 자체보다 더욱 직접적인 것, 즉 개개의 원리에서 떠난 물자체(物自體)다. 개체가 시간적·공간적으로 어디에 흩어져 있더라도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또한 내가 다른 말로 '살려는 의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생명의 존속을 요구하며 죽음이 손대지 않고 남겨두는 힘이다.

 - 쇼펜하우어, 『인생을 생각한다』중 '사랑의 형이상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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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6-01-02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새해 첫인사 드리네요. 새해에도 항상 책과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이 뮤지컬은 국내 초연 때 한 번 보고 감동받아서 얼마 후 한 번 더 본 기억이 나네요. 물론 공연 DVD로도 몇 번 더 봤구요. Oren님 페이퍼 보니 그때 감동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

oren 2016-01-02 12:23   좋아요 0 | URL
새해 첫 글에 첫 인사를 야클 님으로부터 받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야클 님은 이 뮤지컬을 국내 초연으로 보셨다니 어언 10년 전에 만났던 작품이었군요. 첫 공연 이후로도 공연을 한번 더 보시고 DVD로도 여러 번 더 보셨다니 그때 받았을 감동의 크기가 짐작되고도 남네요. 저도 이 공연을 본 지 어느새 한달도 더 지났는데 그때 받았던 격한 감동이 계속 맴돌아 이렇게 기나긴 글로 옮겨 보게 되네요. 심금을 울리는 매혹적인 노래들이 너무 많아 가사들을 일일이 `채록`하는데 애를 먹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들을 거듭 반복해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야클 님께서도 올 한해 좋은 책들과 더불어 멋지게 보내시길 바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