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서재 풍경'을 묘사한 대목을 다시 만나니 오래 전에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 당시 이 대목들을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몽테뉴의 프랑스식 서재' 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나만의 서재'를 꼭 만들어야지...' 라는 다짐도 했었던 것 같다. 너무 어렴풋한 기억이라 반드시 '그런 다짐'을 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30 년쯤 전에 내 마음 속을 잠시 스쳐 지나갔을 지도 모르는 생각 한 자락을 두고 애써 '정답'을 찾을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몽테뉴가 <세 가지 사귐에 대해서>라는 장(章)에서 말한 '책과의 교제'가 주는 즐거움은 알랭 드 보통의 책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서 독서에 관해 말한 대목과 어쩐지 닮은 데가 많다. 그러고 보니 문득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알랭 드 보통이 꼽은 '내 인생의 책' 가운데 《몽테뉴 수상록》도 포함되어 있던 걸 알라딘 서재글에서 읽은 듯하다. 최근에야 안 일이지만,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기 소르망이 꼽은 '내 인생의 책' 가운데 한 권도 《몽테뉴 수상록》이다.

몽테뉴가 선보인 중세 남프랑스 '페리고르 스타일'의 '더없이 진솔한 고백'은 루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책이 후세에 파스칼과 셰익스피어에게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오히려 '책과 가까이 한 인물들' 가운데 몽테뉴로부터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인물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듯하다.

이 모든 게 '책과의 교제'가 주는 광범위한 시공간적 영향력이며 독특한 장점이자 매력일 것이다.

사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책과의 교제'와 연관된 글들만 뽑더라도 족히 어지간한 책 한 권 분량 이상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건 매우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3권 107장, 동서문화사판 1,330쪽) 그의 책 내용 자체가 거의 대부분 '책과의 교제'로 부터 얻어낸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래에 인용한 대목들은 <제3권 3. 세 가지 사귐에 대하여>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일부이다.


 * * *

(밑줄긋기)
















독서는 특히 여러 가지 소재로 내 사색을 잠 깨우며, 기억력이 아니라 판단력을 일하게 하는 데 쓰인다.

 


 

김 빠지고 노력이 없는 대화

그러므로 김 빠지고 노력이 없는 대화는 내 주의를 멈추는 일이 드물다.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중후함과 심오함만큼, 또는 그보다 더 내 마음을 채우며 사로잡는 게 진실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교제에서 내 마음은 잠들며, 거기에 내 주의력의 껍데기밖에 빌려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힘빠진 비굴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는 어린아이가 하기에도 유치한 꼴사나운 군말이나 천치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든가, 또는 더 서투르고 무례한 수작으로 고집하며 곧잘
침묵을 지키고 있는다.

 


 

내가 친분을 가지고 교제하고 싶은 사람들

내가 친분을 가지고 교제하고 싶은 사람들은 점잖고 재능이 있다고 알려진 위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다른 자들은 싫증이 난다.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은 우리 중의 가장 희귀한 전형이며, 주로 본성에서 받아 온 전형이다. 이 교제의 목적은 단지 친분과 우의와 이야기 친구를 갖는 것이다. 즉, 심령의 단련일 뿐이고, 다른 성과는 없다. 우리의 이야기에서는 무슨 제목이든지 똑같다. 무게나 깊이가 없어도 상관없다. 거기에는 늘 아담한 풍치와 온당성이 있다. 모든 것이 거기서는 성숙한 지조 있는 판단으로 물들어 있고, 호의와 솔직성, 쾌활미와 우정이 섞여 있다.



 

책과의 교제는 훨씬 더 확실하며 더 한층 우리의 차지이다

 

······ 이 두 가지(우정과 사랑) 교제는 우연적이며 다른 자에 매여 있다. 하나는 얻기가 드문 것이 흠이고, 또 하나는 나이와 더불어 시들어 버린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내 인생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 주지 못하였다. 세 번째 것으로서 책과의 교제는 훨씬 더 확실하며 더 한층 우리의 차지이다. 이것은 다른 장점에서는 먼저 것들만 못하다. 그러나 그것은 제 몫으로 언제나 꾸준하며, 그 봉사를 얻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이것은 언제나 내가 가는 곳에 있으며 어디서나 나를 도와 준다. 그것은 노년기에, 그리고 외롭고 쓸쓸함 속에서 나를 위로해 준다. 그것은 내가 한가로울 때 권태의 무게를 덜어 준다. 그리고 어느 시간에라도 내게서 귀찮은 동무들을 떼어 준다. 또 내 번민이 극도로 심하지 않을 때에는 고통을 덜어 준다. 불쾌한 생각을 덜어 보려면 책의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된다. 책은 쉽사리 그런 생각을 흩어 주며 빼앗아 간다. 그렇지만 서적들은 그보다 더 실제적이고 생생한 자연의 쾌락인 이런 다른 편익을 얻지 못하는 때에만 그들을 찾는 것을 보고도 불평을 하지 않고 늘 같은 얼굴로 나를 맞이해 준다.




구두쇠들이 보물을 가지고 즐기듯

 

병자는 그 치유 방법을 손에 쥐고 있는 경우, 가련하게 생각해 줄 필요가 없다. 내가 서적들에서 끌어내는 모든 성과는 이런 어구의 실천과 적용으로 되어 있다. 사실 나는 책을 모르는 자들만큼이나 책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구두쇠들이 보물을 가지고 즐기듯, 책을 가지고 즐긴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때에 언제든지 그것을 즐길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이것을 소유하는 권리에 포만하도록 만족을 느낀다. 




내가 인생 행로에 갖추고 있는 최상의 장비 

 

나는 평화시나 전시나 책 없이는 여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며칠이건 몇 달이건 책을 들추어 보지 않고 보내는 수도 있다. "조금 있다가 하거나 내일 하거나 아무 때라도 생각날 때에 하지" 하고 나는 말한다. 세월은 달음질쳐 흘러간다. 그렇다고 그 동안에 마음이 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책이 내 옆에 있으며, 내가 읽고 싶은 시간에 언제든지 쾌락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얼마나 내 마음이 안심하여 가벼워지며, 얼마나 이 책들이 내게 도움을 주는가를 이루 다 인정하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인생 행로에 갖추고 있는 최상의 장비이다. 그리고 이해력 있는 사람으로 이런 준비가 없는 자들을 지극히 가련하게 생각한다. 나는 이것만은 내게 결핍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오락은 아무리 변변찮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집에 있을 때에는 나는 좀더 자주 서재에 들며, 거기서 집안일도 손쉽게 보살펴 간다. 나는 입구에 자리잡고, 내 아레에 정원과 양계장, 안마당 그리고 내 집안의 대부분을 내려다본다. 거기서 나는 이때에는 이 책, 저때에는 저 책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무렇게나 들춰 보며, 때로는 몽상도 하고 때로는 이리저리 거닐면서, 여기에 보듯이 내 생각하는 바를 불러 주며 적어 가게도 한다.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2층은 나의 예배실이고, 3층은 거처하는 방과 그 부속실이며, 혼자 있고 싶은 때에는 거기서 자는 일이 많다. 위에는 커다란 의장실이 있다. 그것은 지난날 내 집에서는 가장 쓸모없는 곳이었다. 나는 이 서재에서 내 생애의 대부분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밤에는 결코 거기에 있는 일이 없다.
 
······ 이 탑은 삼면으로 풍부하고 끝없는 조망이 내다보이며 실내에는 직경 16보의 공간이 있다.

겨울에는 나는 줄곧 거기 있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이름이 말하듯 언덕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여기보다 더 바람 타는 곳도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떨어진 곳이라 찾아오기도 힘들어서 사람들의 소란도 물리쳐 주고 글을 읽기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든다. 여기가 내 자리이다. 나는 이 장소를 내 지배하에 두고, 이 구석 하나만은 아내이건 자식이건 일반 사람들이건 공동 생활에서 구애받지 않고 간직하려고 한다. 다른 데는 나는 모두 본질상으로 확실치 못한 명목상의 권위밖에 갖지 않았다. 자기 집에 있으며 자기대로 있을 곳도, 자기만의 궁전을 차릴 곳도, 몸을 감출 곳도 없는 자들은 내 생각으로는 아주 가련한 신세들인 것 같다!

 

 

 

책은 그것을 택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많은 유쾌한 소질을 가졌다


나는 그날 그날을 살아간다. 그리고 좀 말하기가 거북하지만 나를 위해서만 살아간다. 내 의도는 거기서 그친다. 나는 젊어서는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공부했다. 다음에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였다. 지금 이 시간에는 재미로 한다. 결코 소득을 위해서 한 일은 없다. 이런 종류의 가구(책을 말함)를 가지고 내 필요에 충당할 뿐 아니라, 서너 걸음 더 나가서 나를 덮어 치장하려던 낭비적인 헛된 심정은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책은 그것을 택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많은 유쾌한 소질을 가졌다. 그러나 좋은 일로 수고가 들지 않는 것이라고는 없다. 이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순수한 쾌락은 아니다. 거기에도 상당히 힘든 그 자체의 불편이 있다. 심령은 거기서 훈련받는다. 그러나(그것도 나는 보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신체는 그 동안 움직이지 않고 머무르며 힘빠지고 우울해진다. 나는 이렇게 노쇠해 가는 나이에 이것을 과도하게 하는 것보다 더 내게 해롭고 피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내가 총애하는 내 개인의 세 가지 직무이다. 나는 국민의 의무로 세상에 대해서 부담하는 직무를 말하지 않는다.



 * * *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책은 미셸 드 몽테뉴의 작품이에요. 16세기의 위대한 프랑스 수필 작가였어요. 사실 그가 바로 수필을 창시한 사람입니다. 수필은 다소 지엽적이고, 장난기 넘치며 예측 불가능한 개인적인 글쓰기죠. 몽테뉴의 수필은 제목만 봐도 정말 놀라운데요, 하나의 예를 들면 ‘심각하게 얘기하는 것은 죽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는 것이 있어요. 다른 것들을 살펴보면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부정’, ‘로마의 위대함’ 등이 있지요. 또 엄지 손가락을 갖는 것에 대한 고찰을 한 ‘엄지 손가락’이란 이름의 글도 있어요. 이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로운 생각인 것 같아요. 또 ‘화’ 와 ‘무기력’ 에 대한 것도 있지요. 몽테뉴 전에는 아무도 ‘무기력’에 관한 글을 쓰지 못했어요. 그리고 ‘말’에 대한 수필도 있어요. 이러한 몽테뉴의 매우 개인적이고 일상적이며 친밀한 지성이 저로 하여금 많은 주제에 대한 글을 쓰도록 용기를 주었어요.
 -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알랭 드 보통의 〈내 인생의 책〉中에서

















 

독서 쪽에 핵심적인 이익이 있다


독서에서는, 우정이 갑자기 그 원래의 순수성을 되찾게 마련이다. 책을 상대로 해서는 거짓된 친절 따위가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런 친구들과 저녁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러고 싶어서일 것이다.

 

 

차라리 종이책과의 소통을 선호하는 이유


우리는 몰리에르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재미있을 때에만 웃을 수 있다. 그가 우리를 지루하게 만들 경우라도, 우리는 지루한 표정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며, 일단 그를 충분히 즐겼다는 확신이 서면 마치 그가 천재도 유명인사도 아닌 것처럼 냉큼 원래의 자리에 꽂아둘 수도 있다.


  -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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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3-08-23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수백년 전 옛날 사람들의 지적인 사고력 수준이 현대인들 보다 한참 열등할 것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몽테뉴를 포함해서 옛 고전들을 접할 때 마다 그런 생각들을 반성하게 됩니다.
'인생 행로에 갖추고 있는 최상의 장비 ' 파트의 글은 책 읽어 내는 속도 보다 항상 책을 많이 사서 책장에 책 늘어가는 속도가 빠른 제게 조금 위안이 되네요. 언젠가 나중에 읽으면 되지, 하는 생각. ^^


oren 2013-08-23 11:41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살았던 몽테뉴조차 늘 '옛사람들을 더 좋아한다. 옛사람들이 훨씬 더 현명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걸 보면, 우리 현대인들이 얼마나 제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얼마나 '얄팍한 생각들'로 단단히 무장하고 제 꾀에 스스로 넘어가고 있는지 가소로울 지경이지요.

좋은 책들을 사두고 당장 읽지 못한다고 너무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야클님처럼 책들을 쌓아두고 읽지 못한 채 바라만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오는데, 조금씩 그런 생각들이 줄어들 때도 있더라구요. 몽테뉴의 글들도 적지 않은 위로가 되는 것도 사실이구요. ㅎㅎ

yamoo 2013-08-23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압도적인 발췌문들!
오~~근데, 인용하신 부분 중 엔날사람들이 훨씬 현명했다고 한 몽테뉴의 글귀는 기억합니다. 저도 거기에 줄 좍~쳤었거든요~ㅎ

몽테뉴 책으로 페이퍼를 쓰셨으니, 이제 좀만 기둘리면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나 <시론>에 대한 페이퍼가 올라오겠네요. 완전 기대되요! 완전~~^^

oren 2013-08-23 21:03   좋아요 0 | URL
베르그손의 <시론>에 대한 서평은 '매우 길게' 써 놓은 게 있구요.
http://blog.aladin.co.kr/oren/6018926

베르그손의 <시론>과 <창조적 진화>, 다윈의 <종의 기원>과 쇼펜하우어의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묶어서 페이퍼를 쓴 적도 있었답니다. <창조적 진화>를 읽은 지 제법 된 듯한데 그래도 언젠가는(<물질과 기억>을 읽고 난 후쯤?) 그 책에 대한 서평글을 꼭 한번 써 보고 싶어요.

베르그송이 말했던 '어떤 과감한 소설가'는 결국 프루스트가 아니었을까?
http://blog.aladin.co.kr/oren/5959035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관한 이야기
http://blog.aladin.co.kr/oren/6067699
 


까마득한 옛날(심지어 이 땅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도 전인)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쓰여진 책이지만, 이 대목을 읽으면 신기하게도 '요즘 배우들'이 자꾸만 떠오르는 건 무슨 까닭일까?

 * * *

(밑줄긋기)

 













예쁘고 우아한 여자들과 교제하는 것도 내게는 포근한 재미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역시 그 점에 박식한 안목을 가졌기 때문에"(키케로) 그렇다. 심령은 이 점에는 먼젓것만큼 누릴 거리를 갖지 못한다 해도, 이 편에 더 많이 참여하는 육체적 감각은, 내 생각으로는 그 비중이 서로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여자와의 교제는 전자에 가까운 정도의 무게를 준다. 하나 이 방면의 교제에는 미리 경계하며 다가서야 한다. 특히 나와 같이 육체 생활의 비중이 큰 자에게는 그렇다. 나는 젊었을 적에 시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의 절도없이 무비판적으로 끌려가는 자들이 당한다는 식으로, 이런 일에 뜨거운 거동을 보고, 모든 광분의 고통을 겪었다. 이 호된 매를 맞은 것이 다음에 내게 교훈이 된 것은 사실이다.


아르고의 함선을 타고

카팔레아의 암초를 피해 온 자는 누구든지,
항상 에우보이아의 수로(水路)에서 이물을 돌린다.                                                    (오비디우스)


우리의 모든 생각을 거기에 매어 두고 무분별하고 맹렬한 정열로 덤벼드는 것은 철부지 같은 짓이다.


그러나 한편에는 사랑도 책임감도 없이, 연극배우처럼 풍습과 나이가 모두 하는 버릇이라고 거기에 달려들며, 말로만 하고 마음을 주지 않는 일은 사실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지마는, 그 비굴한 꼴은 마치 위험이 무서워서 명예도 이익도 쾌락도 버리는 식이다. 이러한 교제를 실천하는 자는 아름다운 심령을 감동시키거나 만족시키는 아무런 성과도 바랄 수 없다. 진심으로 누려 보았으면 하는 것은 진심으로 바라야만 한다. 운이 부당하게 그들 가면의 사랑을 유리하게 꾸며 준 때에도 말이다. 이런 일은 여자들이 아무리 팔자를 잘못 타고 났다고 해도, 자기가 아주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자기 나이로나 그 웃는 모습으로나 그 동작으로,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여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자주 일어나는 일이니 하는 말이다. 전반적으로 예쁜 여자가 없듯이 전체가 못생긴 여자도 없다. 그래서 브라만 교도의 처녀들은 다른 장점이 없으면 장터로 나가서 이런 취지로 소리질러 광고해서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에 여자의 부분을 들춰 보이는데, 적어도 그것만으로도 남편을 얻을 값어지차 있나 없나를 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믿음직하고 착실하게 섬기겠다고 하는 첫번 맹세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 여자는 없다. 그런데 오늘날 남자들이 여자를 예사로 배반하는 결과에서, 여자들은 남자를 피하려고 서로 단결해서 스스로 뒤로 물러서거나 자기들끼리 놀게 되었다. 또는 어느 때는 우리가 보여 주는 본을 떠서 그녀들도 연극을 꾸미면서 정열도 생각도 사랑도 없이 교제해 온다. "자기에게서 오건, 타인에게서 오건, 정열에 무감각하며"(타키투스), 플라톤에 나오는 리시아스가 설복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여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을수록 그만큼 그녀들은 우리에게 유리하고 편리하게 몸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연극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연극 배우들만큼의, 또는 더 많은 재미를 볼 것이다.

나로 말하면 어린애 없는 모성애를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큐피드 없는 비너스를 생각해 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본질을 서로 빌려 주고 서로 부채를 지고 하는 사물들이다. 그러므로 이 속임수는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다시 되돌아온다. 그에게 부담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대신 그는 쓸모 있는 아무런 것도 알지 못한다. 비너스를 여신으로 만든 자들은 그녀의 미(美)를 비육체적이며 정신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들이 찾는 여자는 인간적인 것도 아닐 뿐더라 짐승과 같은 욕정을 지닌 것도 아니다. 짐승들도 그렇게 둔중하고 속된 것은 원치 않는다. 짐승들은 무리 속에서 이성(異性) 간에 그들의 애정에 쓸 것을 쓰고 버릴 것은 버리며, 그들 사이에 오랜 호의의 교분 있는 것을 본다.

늙어서 체력이 다한 놈들도 아직도 몸을 치떨며 사랑으로 이히잉거리며 울부짖고 전율한다. 우리는 이 짐승들이 일에 앞서 희망과 열성으로 충만함을 본다. 그리고 육체가 할 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그 추억의 달콤한 맛에 취하며, 거기서부터 의기양양해서 뽐내며, 피로하고 포만하면서도 경축과 승리의 노래를 불러 대는 것을 본다. 신체를 생리적 욕구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것밖에 없는 자는 그렇게 복잡한 마음씨를 준비하여 남에게 바쁘게 굴 필요는 없다. 그것은 무례하고 수준 낮은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한 음식은 아니다.


- 제3권 <3. 세 가지 사귐에 대하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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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3-08-23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궁금한데 타이핑을 엄청 빨리 치시나 봐요? 늘 많은 내용을 책에서 옮겨 적으시는 걸 보면요.
또 한가지 오렌님 페이퍼를 보며 놀라는 점입니다. ^^

oren 2013-08-23 11:56   좋아요 0 | URL
책 내용을 손으로 옮겨 적는 일도 '습관'이고 재미가 있는 일이에요. 자꾸만 쌓여가는 '독서노트'를 보는 즐거움도 있고, 그걸 나중에라도 가끔씩 들춰보는 재미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날로그로 남긴 메모들은 '검색'하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죠. 그래서 심심할 땐 밑줄친 내용을 펜으로 쓰기 보다는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판에서 눈을 뗄 수 있게 되고 나서는 타이핑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더라구요. 굳이 속도를 재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손글씨를 자주 쓰지 않는) 요즘은 '두드려 쓰는' 편이 조금 더 빠른 것 같기도 해요. ㅎㅎ

yamoo 2013-08-23 14:29   좋아요 0 | URL
저두요!!!!^^

프레이야 2013-08-2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으로 누려보았으면 하는 것은 진심으로 바라야한다! 귀한 구절 읽어내려가면서 특히 눈에 드는 단순하고 진실된 문장입니다.

oren 2013-08-23 11:47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가슴으로 다가오는 문장' 같아서 밑줄을 그었는데, 프레이야님께서도 댓글로 공감해 주시니 저 말이 더욱 기억에 남을 듯해요. ㅎㅎ

yamoo 2013-08-2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말이지요~ 저는 몽테뉴 수상록을 홍신문화사판으로 오래 전에 읽었어요. 정말 빽빽한 글자들을 헤치고 좀 지루하게 완독했던거 같은데...이상하게도 인용해 주신 내용들은 하나두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이에요. 정말 내가 이 책을 읽었나...하는 자괴감이 든다눈..ㅜㅜ
다~~오렌님 때문이어요~~~
압도적인 인용! 핵심적이고 시의적절한 발췌!! 같이 읽었는데, 전혀 기억 못하는...ㅜㅜ

oren 2013-08-23 15:20   좋아요 0 | URL
저도 너무 오랜만에 몽테뉴의 책을 다시 읽으니 '이런 내용도 있었나?' 하는 대목을 여러 번 만나게 되더라구요. 그나마 낯설지 않은 대목이 가끔씩 나올 땐 마냥 반가웠고, 제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던 '촌철살인'과 같은 말들은 여전히 보석처럼 밝게 빛나는 광채를 조금도 잃지 않고 있어서 더욱 기쁘기도 하더라구요.

몽테뉴를 다시 만나면서 '30년의 간극'이 결코 적지 않음을 느꼈고, 몽테뉴의 글은 그대로인데 제가 '참 많이 변했구나' 싶은 생각도 여러 대목에 걸쳐 하게 되더라구요. 마치 30년 전까지 익히 잘 알고 지내왔던 친구를 다시 만나서 '맞다 맞아... 자네 조금도 변치 않고 여전히 그대로네.....' 하다가도, '그래도 뭐 달라진 건 없나' 하고 요모조모 살펴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더라구요.

yamoo님께서도 좀 더 세월이 흐른 뒤에 몽테뉴를 다시 만나보면 틀림없이 제가 요즘 느끼는 심정을 아주 자세하게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ㅎㅎ
 


(밑줄긋기)















그대와 함께 있는 자들의 수준으로 몸을 좀 낮춰서 때로는 무식한 체도 해야 한다. 힘과 꾀는 따로 간직해 두라. 보통의 만남에는 거기에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남들이 좋아하거든 그 동안 땅을 기어라.

학자들은 흔히 이 돌에 잘 채인다. 그들은 항상 학자 투를 뽐내며 책에서 얻은 지식을 사방에다 뿌리고 다닌다. 요즈음 그들은 이런 것을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방과 귀에 너무 심하게 쏟아 넣었기 때문에, 그녀들은 그 실질은 파악하지 못했을망정 적으나마 그런 인상을 풍긴다. 모든 종류의 제목과 재료에, 그녀들은 아무리 변변찮고 평범한 일이라도 새롭고 박식한 말투와 문장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말투로 그녀들은 무서움과
분노, 기쁨, 걱정, 마음의 비밀 모두를 쏟아 놓는다.
이 밖에 또 무엇을?
그녀들은 사랑의 고백까지도 박식하게 한다.                                                                           (주베날리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증언해 줄 사물들을 가지고, 구태여 플라톤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인용해서 말한다. 그녀들의 심령 속에 들어가지 못한 학설은 그녀들의 혀끝에 머물러 있다.

점잖은 여인들이 내 말을 믿는다면, 그녀들은 그 고유의 자연스런 보배들을 빛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녀들은 밖에서 들여온 미(美)로 자기들의 미를 덮어 감춘다. 빌려 온 광채로 빛나기 위해서 자기의 광채를 없애는 일은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다. 그녀들은 기교 속에 덮여서 묻혀 있다. "미용실에서 방금 나온 얼굴이다."(세네카) 그것은 그녀들이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녀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녀들이 기술에 영광을 주며, 백분으로 분칠해 주는 것이다. 그녀들은 사랑받고 숭배받고 살아가는 것 외에 무엇이 또 필요할까? 그녀들은 그런 것을 너무 많이 가졌고,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녀들에게 있는 소질들을 잠 깨워 일으켜 주는 것밖에 다른 필요가 없다. 그녀들이 수사학이나 법학이나 논리학이나 이와 비슷한, 그녀들에게 아무 필요가 없는 헛된 처방전에 매여 있는 것을 보면, 그런 것을 충고하고 있는 남자들이 이런 핑계로 여자들을 지배할 권한을 가지려고 하는 일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진다. 과연 거기에 다른 변명이 있을 것인가? 그녀들은 우리의 도움 없이도 우아한 눈을 유쾌하고 엄격하게 또는 상냥하게 굴리며, 거절할 때도 쌀쌀하고 은근하게, 그리고 호의를 지닌 눈초리를 곁들여 줄 줄 알면 충분하고, 그녀들에게 봉사하려고 하는 말에 통역을 붙여 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지식만 가지면, 그녀들은 회초리를 손에 든 것이고, 선생들과 학교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남자에게 무엇이건 양보하기가 싫고 호기심으로 서적 등과 사귀고 싶어진다면, 시는 그 필요에 맞는 취미이다. 그것은 여자와 같이 촐랑이고 미묘하고 장식적인 말재간이며, 재미 있고 화려한 예술이다. 역사에서도 역시 여러 가지 편익을 얻을 것이다. 철학에서는 인생에 소용되는 면에서, 남자들의 심경과 조건을 판단하고 남자들의 배반에서 몸을 지키며, 자신의 벅찬 정욕을 조절하고, 그녀들의 자유를 아끼고, 인생의 쾌락을 누리며, 하인의 하는 일이 믿음성이 없다든다, 남편이 혹독하게 대한다든가, 나이 들어 주름살이 잡히는 걱정 등등, 이와 같은 일들을 인간적으로 참아 내게 하는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자들에게 학문에 관해서 지정해 주고 싶은 부문들이다.


 - 제3권 <3. 세 가지 사귐에 대하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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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에게는 단 한 가지의 생물학만으로 충분하다. 생물학을 음악에 비유해 볼 때, 지구 생물학은 단성부, 그리고 단일 주제 형식의 음악만을 우리에게 들려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수천 광년 떨어진 저 먼 곳의 생명은 우리에게 어떤 형식의 음악을 들려줄 준비를 해 놓고 있을까 무척 궁금하다. 풀피리 하나로 연주되는 지구 생명의 이 외로운 음악 하나가 우리가 우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음악일까? 우주 생물이 들려줄 음악은 외로운 풀피리 소리가 아니라 푸가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우주 음악에서 화음과 불협화음이 교차하는 다성부 대위법 양식의 작품을 기대한다. 10억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은하 생명의 푸가를 듣는다면, 지구의 생물학자들은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 칼 세이건

 * * *

위의 인용글은 유명한 과학책『코스모스』의 2장 ‘우주 생명의 푸가’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이다. 그런데 그가 '우주의 아름다움'을 구태여 음악이라는 매우 독특한 예술에 빗대어 설명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은 그가 무엇보다도 '음악'을 가슴깊이 사랑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또다른 이유는 '음악' 자체가 '지구와 우주'를 비유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자연과학과 음악에 두루 깊은 지식과 놀라운 혜안을 지녔던 쇼펜하우어가 '음악'에 대해 설명한 대목을 상기시킨다. 칼 세이건의 아름다운 설명이 얼마나 철학적인 깊이를 더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음악이 세계에 대해 모방 또는 재현이라는 관계에 서 있다는 점

음악과 세계에 대한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묘사와 묘사되는 것의 관계, 모상과 원상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다른 예술과의 유사성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 밖의 예술은 모두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음악이 우리의 마음에 주는 효과도 이것들의 효과와 대체로 같지만, 단지 음악 쪽이 더 강하고 빠르고 필연적이며 더 확실하다는 차이가 있다. 음악은 누구에게나 곧 이해되고, 그 형식은 숫자로 표시할 수 있는 일정한 규칙으로 바뀐다. 음악은 이 규칙에서 떠날 수 없으며, 만약 떠난다면 음악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음악에는 인정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음악의 묘사적인 관계는 극히 절실하고, 무한히 진실하며, 핵심을 찌른 관계여야 한다. 그러나 음악과 세계의 비교점, 즉 음악이 세계에 대해 모방 또는 재현이라는 관계에 서 있다는 점은 깊이 감추어져 있다. 어떤 시대에도 사람들은 음악을 영위하면서도 이 점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음악을 직접 이해하는 데 만족하여, 이 직접적인 이해를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단념해 버린다.(788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중에서



그런데 칼 세이건의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한 가지 예상밖의 어려움과 맞닥뜨린다. 그의 설명에 따라 우리가 가령 우주선을 타고 드넓은 우주공간으로 나아가 실제로 '우주 음악'을 얼마쯤 감상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귓가에 어떤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지 잠시나마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때 들려오는 (듯한) 그 음악 소리의 '화려함과 장엄함'에 정신을 잃기도 전에, 도대체 칼 세이건이 말한 그 '다성부 대위법 양식'의 푸가라는 그 음악이 어떤 것인지부터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주 음악의 화려함과 장엄함을 맛보기도 전에 그 '음악 양식'의 난해성이라는 전혀 엉뚱한 장벽 때문에 도리어 머리가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내가 굳이 어느 천문학자의 문장 한 대목을 가지고 이렇게 복잡하게 '의식의 흐름'을 좇아가며 얘기하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베토벤의 현악 4중주'가 끝없이 귓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이 영화를 얘기하면서, '음악의 형식'이 던져주는 독특한 '어려움'을 빼놓고는 뭔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로는 보기 드물게 유명했던 칼 세이건은 어려서 부터 음악적 재능이 특별히 뛰어났던 인물이다. 평생 동안 음악을 매우 사랑했고 늘 음악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다성부 대위법' 작품 만큼은 맨귀로 듣기에는 무언가 성에 차지 않았던 점이 있었던 듯하다.

그는 하버드 의대에서 마약의 효과를 깊이 연구하던 그의 친구가 쓴 책에 '익명의 경험자'라는 신분으로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을 때 기어코 자신의 마약 경험담을 털어놓고 만다. 마약을 통한 황홀경 상태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3옥타브의 화성을 분명히 구분해서 들을 수 있었고, 여러 성부로 이루어진 대위법 작품에서도 각각의 선율을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그만큼 클래식 음악은 어딘가 모르게 예민한 정서적 감응 능력을 요구하는 영역이며, 나처럼 무딘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더더욱 쉽게 그 아름다움을 함부로 드러내주지 않는다는 것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지막 사중주'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이 영화의 '주제음악'에 대해서는 가슴 깊숙히 느껴지는 감동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음악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화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베토벤 현악 4중주 제14번 Op.131'을 제대로 감상할 줄도 모르면서 영화를 보고 난 이야기를 쓰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래도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음악 감상이 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운이 남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뭐 좀 없을까 하고 궁리해 본다.

음악영화가 주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명백히 '영상에 얹어진 음악'은 그 감동이 훨씬 더 배가되는 점에 있지 싶다. 관객을 감동시킬 생각에만 골몰하는 영화제작진들이 '음악과 영상의 절묘한 결합'이 제공하는 커다란 감동을 놓칠 리가 없다. 연주자들의 경쾌한 손놀림과 몸짓은 보는 것만으로도 음악이 저절로 춤을 추고 선율이 가슴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도와 준다. 이런 사정은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수십 장의 사진을 책장 넘기듯이 보는 것보다 '멋진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 슬라이드쇼'를 통해서 볼 때 그 사진속 풍경과 인물들은 또 얼마나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인지 놀랄 지경이다.

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흐르는 음악은 베토벤의 생애 말기에 작곡한 '후기' 현악 4중주 여러 작품 가운데 7악장으로 이루어진 제14번 곡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다섯 곡(Op.127, Op.130, Op.131, Op.132, Op.135) 가운데 '일부'를 이루는 작품으로서 반드시 '다섯 곡'의 전체를 '한 작품'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만 그 깊디깊은 음악을 제대로 맛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심오한 깊이를 나같은 사람이 어찌 제대로 느껴볼 도리가 있겠는가.

베토벤이 이들 작품을 쓴 시기는 불후의 걸작인 '교향곡 9번'까지도 작곡을 마저 끝내고 난 뒤 자신의 삶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는데, 그가 최후의 예술적 열정을 쏟아부어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다시피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후기 현악 4중주 다섯 곡이다. 그런만큼 '베토벤 만년 예술의 심오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작품이며, 특히 이 가운데 《마지막 사중주》에 등장하는 작품은 베토벤 스스로 자신의 현악 4중주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둔 슈베르트가 연주회장에서 이 곡을 듣고 너무나 흥분해서, 함께 갔던 친구가 걱정을 했다는 기록으로도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베토벤 만년의 깊이 있는 사색과 차원 높은 고매함이 엿보인다는 이 작품이 '마지막 사중주'로 번역된 건 조금 아쉽다. 마지막이란 형용사는 늘 극적인 느낌을 고조시킬 수는 있겠지만 뒤를 없애버리는 '여운 없는' 느낌 때문에 그리 달갑지 않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은퇴할 수밖에 없는 어느 노쇠한 첼로 연주자에겐 '마지막'일 수 있겠지만 다른 세 사람의 연주자에겐 또다른 사중주의 시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제(A Late Quartet)만 보면 '마지막'으로 번역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영화를 본 나로서는 왠지 '뒤늦은' 혹은 '만년의' 느낌을 주는 제목이 더욱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지막 사중주'가 끝나더라도 현악 사중주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첼리스트 '피터'에게만 마지막이었을 뿐.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25년 씩이나 별다른 흔들림없이 '합주 연주'를 해 오던 어느날, 첼로를 맡은 노년의 연주자 피터에게 찾아온 파킨슨 병은 '잠재해 있던 여러 문제들'을 한꺼번에 불러오는 촉매 역할을 한다. '언젠가는 닥쳐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리는 가끔씩 너무 오랫동안 외면하며 살아간다. '낡은 기계'처럼 더 이상 원할하게 작동하기 어려운 '육체적 노화'는 오래 살아가고픈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그런 상황이 그렇게 빨리 닥쳐 오지는 않을 거라고 애써 부정하거나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음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현악 사중주단의 최고참 리더에게 '뒤늦게' 찾아온 시련이 파생시키는 '여러 갈등들'의 전개가 그 중심을 이룬다. 첼리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세 단원들은 줄리어드 음대에서 함께 공부한 동창생들인데, 25년 동안의 '평탄했던' 음악 생활과 가정 생활이 결코 매우 단단한 기반 위에서 지속되어 온 것은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재미있는 것은 베토벤이 (기존의 현악 4중주 형식에서 벗어나) 모두 7악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을 악장 사이의 휴식도 없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연주하게 한 뜻이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제1주제' 역할을 해 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우리의 삶도 '도중에 악장이 바뀌거나 혹은 예상치 못한 여러 불협화음이 생기더라도' 결코 쉬지 않고 이어 나가야 한다는 측면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파킨슨 병이 찾아온 이후에 미리 예정된 '현악 사중주' 공연을 앞두고 피터가 보인 행동들에 유난히 관심이 많이 갔다. 그리고 '더이상' 연주를 이어나갈 능력을 상실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가운데 어느 미술관에서 '램브란트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저 늙은 나이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예술가의 강렬한 눈빛'을 몹시도 부러워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노년에 찾아온 병은 순순히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철 맞추어 생명을 내놓지 않는 자에게

세월이 그들과 오래 교제하는 자들에게 주기로 되어 있는 여러 선물들 중에도 내가 수락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이 골라 주었더라면 좋았을 성싶다. 그들은 내가 어릴 적부터 가장 흉측하게 생각하던 것을 줄 수는 없을 테니까. 이것은 노년기에 일어나는 모든 재앙들 중에도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고, 이렇게 먼 길을 가다가는 결국 어떤 불쾌한 일에 걸리고 말 것이라고 혼자 여러 번 생각했다. 나는 이미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외과의들이 신체의 어느 부분을 끊어 낼 때의 규칙을 따라서 이 인생을 생짜로 그 알맹이에서 잘라 내야 하는 것이고, 철 맞추어 생명을 내놓지 않는 자에게 대자연은 아주 호된 높은 이자를 물리는 습관이 있다고 어지간히 느끼고 있다고 주장했다.
 - 몽테뉴, 『수상록』中에

 

 

이제 막 오십대 초반에 접어든 나머지 세 사람의 단원들에겐 여전히 '사랑'과 '지배'가 그들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4중주단의 유일한 여성 멤버인 비올리스트 '줄리엣'은 다른 세 사람의 단원들과 다소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다. 스승과 제자, 옛 애인, 그리고 부부 사이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래 전에 이미 굳어진 그들의 ''든든한 관계'가 새로운 갈등 국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화의 불씨'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25년 동안 제2바이올린을 맡아온 착한 남편 '로버트'의 숨겨진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

언제나 제1바이올린의 리드를 졸졸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역할'이 너무나 싫은 로버트는 단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결코 굽히지 않는다. 자신도 이 기회에 '제1바이올린'을 연주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1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친구 '다니엘'은 자신의 친구 로버트가 제1바이올린을 연주할 성격이 못 된다고 반박한다. 아내 줄리엣의 견해도 마찬가지이다. 상심한 로버트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내와 그 아내의 옛 애인이자 자신의 친구인 다니엘이 '합창하듯' 자신을 '그 자리에 머물도록' 강요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분해 한다. 언제나 완전한 지배나 소유는 우리의 욕심과는 거리가 멀게 마련인데, 로버트는 워낙에 착하게 살아온 남자여서 여태껏 별로 느껴볼 기회조차 없었던 '주변 인물들과의 거리감'이 갑자기 크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그런 상실감에 결국 '사고'를 치게 된다.

늘 완벽한 연주만을 추구하는 '다니엘'의 삶은 한편으로는 존경받을 만하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고독하다. 그런 그에게 옛 애인이었던 줄리엣의 딸인 알렉산드라는 바이올린을 매개로 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지만 단지 그런 상태로 계속 머물지는 않는다. 흔히 그렇듯 이들 사제지간이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뒤늦은' 혹은 '너무 이른' 사랑의 대상도 너무 가까이에서 찾아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의 일치된 감상평 가운데 하나가 '음악은 참 좋은데....'에 뒤이어 나오는 '한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는 얘기이다. 옛 애인의 딸을 가르치다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두 인물과 '홧김에 조깅 파트너이자 댄서로 일하는 여성과 외도'를 벌이는 로버트의 애정행각을 두고 하는 말인데, 나로서는 '막장 드라마'를 별로 보지 못해서 그럴지 몰라도 그들의 연애가 그리 부자연스럽지는 않아 보였다. '사랑' 만큼 우리의 모든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또 어디 있으며, 오래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엿보고 파고드는 일이 또 무엇이 있길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런 에피소드를 가지고 흥분하는지 모를 일이다.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

연정은 겉보기에는 별나라 같아도, 사실은 성욕이라는 본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니, 이 본능이 특수화된 것이며 개체화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랑이 희곡이나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거기서는 자기보존 본능과 함께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며, 모든 동작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다) 연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관찰하면, 언제나 모든 생애에서 가장 젊은 시절, 즉 청춘시절 뭇사람들의 정력과 사고를 거의 절반쯤 강제로 동원한다. 또한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으로서, 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사건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며, 가장 진실한 과업을 중단시키고, 때로 가장 위대한 정신도 흐리게 하며, 외교적 교섭이나 학술연구에 몰두할 때도 체면불구하고 연출하여 장관의 문서철이며 철학자의 원고 속에 연애편지나 머리카락을 끼워넣게 한다. 또 수많은 나날 시끄러운 사건에 가장 악질적으로 사주한 사람이나 동지끼리 맺은 가장 친밀한 사이도 끊어버리고, 견고한 사슬도 풀며, 허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생명과 건강과 부와 지위와 행복을 빼앗아갈 뿐더러, 정직한 사람을 철면피로 만들고, 충신을 파멸시키려 한다. 이 모든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토록 소란을 피우고 애쓰고 고민하며 불행에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듯 하찮은 일이 그처럼 큰 파문을 일으키며 안정된 생활에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진리 탐구 정신이 투철한 사상가라면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즉, 그것은 결코 작은 일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그 중대성은 그것을 추구하는 경우 맞닥뜨리게 되는 진지하고 열렬한 모습에 맞먹는다.

정사의 목적은 비극으로 나타나든 희극으로 나타나든 인생의 여러 가지 목적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것이며, 누구나 끈질기게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은 다음 세대의 조정이라는 중대한 일이며, 다음 무대 위에 우리를 대신해 등장할 인원은 이같이 사소한 장난처럼 보이는 정사에 의해 그 존재와 양상이 결정된다.

 - 쇼펜하우어, 『사랑의 형이상학』中에서


 

예술의 형식 가운데 음악이 독특할 수 있다면, 음악의 형식 가운데는 역시 '푸가'가 그 '독특성' 면에서 앞장을 설 만한 위치에 있다고 본다. 칼 세이건은 '보이저 우주비행계획'에서 외계 생명체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떠맡았다. '귀가 없을지도 모르는 외계인'에게 음악을 보낸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그는 우주에 음악을 보내자는 계획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고 한다.


(보이저 금제 음반)

골든디스크에 실린 27곡의 음악 중에는 베토벤의 후기 현악 사중주 가운데 한 곡도 빠지지 않았다. 그의 선택기준은 '적어도 몇 곡은 우주의 고독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추상적인 구조를 지닌 곡들도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개념있는 동물'인 인간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셈이다. 이를 위해 선택된 음악이 바로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3번과 바흐의 대위법 작품의 '푸가'였다.
 
1977년 8월에 발사된 보이저 1호는 2003년에 태양계를 벗어나 앞으로 4만 년 뒤에는 다른 행성계에 접근하게 된다고 한다. "보이저호는 음악과 사랑이 흐르는 작은 행성의 메시지를 간직한 채 태양계의 행성들을 지나 광활한 우주의 바다로 항해하고 있다. 두 대의 우주선은 시속 4만 5천 마일의 빠른 속도로 머나먼 별들과 미지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베토벤의 현악 4중주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위대한 걸작'의 지위를 잃지 않으며 중단없이 연주될 것으로 믿는다. 영화 한 편을 두고 내 이야기가 너무 먼 곳까지 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시 우리의 삶으로 되돌아 오자. 우리의 삶에서 '위대한 걸작'은 무엇일까. 몽테뉴의 글에서 한 가지 대답을 찾아보는 것도 그리 어리석지는 않아 보인다.


적당하게 살아가는 일

우리의 영광스럽고 위대한 걸작은 우리가 적당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지배한다, 재물을 모은다, 건설한다는 따위의 모든 일들은 기껏했자 부수적이며 부차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한 군대의 장군이 방금 공격하려고 하는 돌격구(突擊口) 아래에서, 친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마음을 터놓고 한가로이 담소하는 장면이나, 천지가 자기와 로마의 자유에 반대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때에 브루투스가 순회 근무에서 물러나와 밤의 몇 시간을 안심하고 사학자 폴리비오스를 읽으며 주(註)를 달던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하찮은 심령들이나 자기 일의 무거운 부담에 눌려 지내며, 그런 일에서 완전히 풀려나와 채워 두었다가 다시 잡아서 처리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오오, 나와 함께 가장 독한 시련을 겪어 온 용감한 전사여,
오늘은 그대 근심을 술잔에 담그라.
내일 우리는 망망한 대해로 배 띄워 나가리라.
                                                                       (호라티우스)

농담으로건 진담으로건, 소르본 대학의 신학주(神學酒)와 향연은 속담에도 오르지만, 그들이 오전은 유익하고 근직하게 학문의 단련에 보낸 만큼, 저녁 만찬은 태평하고 더 유쾌하게 든다는 것은 지당한 일이라고 본다. 다른 시간들을 잘 사용했다는 생각은 식탁에서 더 정당하고 맛있는 향미가 된다. 현자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저 두 카토가 도덕을 위해서 남이 모방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에 놀라는 바이지만, 그들의 그 어색할 만큼 엄격한 심정은 그들 학파의 교훈을 따라서 인간 조건의 법칙과 비너스와 바쿠스의 법칙에도 유순하게 복종하며 그 법칙들을 즐겼던 것이다. 그들 학파는 완벽한 현자에게, 인생의 다른 모든 의무와 마찬가지로 타고난 탐락의 습성에도 똑같이 기술이 있고 이해가 깊기를 요구하고 있다. "미묘한 판단력을 가졌으면, 미묘한 구미도 가져야 한다."(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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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08-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오렌님의 리뷰를 보니, 이 영화를 안 볼 수 없군요!
좋은 영화를 멋지게 리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oren 2013-08-16 17:21   좋아요 0 | URL
이 영화 상영관이 그리 많지 않던데 혹시나 종영되지나 않았을까 염려됩니다.
얼른 찾아보시고 아직도 상영중이라면 꼭 '개봉관'에서 보시길 바랄께요~

야클 2013-08-16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글 쓰실 때의 엄청난 양의 reference에 놀랍니다. ^^

oren 2013-08-16 17:30   좋아요 0 | URL
'푸가풍'의 '베토벤 현악 4중주'가 보이저호에 실려 '머나먼 여행길'에 올랐다는 얘기를 여러 곳에서 읽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이 영화가 현악 4중주 14번을 주제로 하고 있어서 저도 놀랬습니다.

1FM에서 새벽 1시에 들려주는 '한밤의 실내악'에서도 가끔 들었던 곡인데, 요즘 이 영화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1FM에서 자주 듣는 호사를 누리기도 합니다.

1FM 오후 2시에 방송되는 '명연주 명연반'에서도 최근에 방송된 적이 있었는데, '라디오 다시듣기'로 7.29(월) 방송분을 찾아보시면 'Alban Berg Quartet'의 멋진 연주를 들으실 수도 있답니다. ㅎㅎ

Jeanne_Hebuterne 2013-08-17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잘 보았는데 오렌님의 서재에서 이 영화와 음악 이야길 읽으니 반가워서 흔적 남겨요.

막장 드라마 때문에 저역시 욕설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긴 하였습니다만(퍼부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옵고), 음악은 그것과는 별개로 참 좋았어요. 이야기와 소리를 섞은 영화로 보자면 아름다웠지만 이야기와 소리 사이의 균형이 약간 아쉬웠거든요. 그렇지만 연주자의 입장이 얽히는 그 시선을 표현하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사운드 싱크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로 인해 14번을 찾아듣는 많은 이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고요.

언젠가 인류가 우주에 흘려보낸 어떤 소리들 가운데엔 바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 있었어요. 무한과 유한이 만나는 그 지점이 깊을 것 같았는데, 오렌님의 멋진 글로 다시금 그 침묵의 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oren 2013-08-19 15:34   좋아요 0 | URL
음악은 그것과는 '별개로' 참 좋았다는 말씀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Jeanne님처럼 예민한 감각을 가지신 분들은 배우들의 거짓 연주 때문에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는데 다소 애를 먹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Jeanne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감독의 역량' 때문에 '연주자들의 숨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기대 이상의 놀라운 수확이었던 것 같아요. 가령, 솔로와 합주단원이나 교향악단원들 간의 '연주 방식' 혹은 '삶의 방식'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다룬 부분과 '음악가를 부모로 둔 자식의 애환' 같은 데서 화장을 지운 '생얼'을 보는 느낌이 확 들더군요.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앞으로는 음악을 듣거나 연주회를 보러 갈 때에도 음악 뿐만 아니라 연주의 이면에 묻혀 있을 '그들의 삶'이 더욱 궁금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klavier1561 2013-08-2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바로 영화 내내 어설픈 연주 장면이 거슬려 음악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1인 중의 하나입니다.. ㅎㅎ (음악을 전공했거든요) 그렇지만 영화에의 몰입도는 상당히 좋았는데 감독의 역량이 정말 돋보이는 것이었죠.

외국에 오래있다가 와서인지 저에겐 그런 사랑이 막장으로 보이지만은 않았지만, 우리의 정서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어요. 반드시 윤리만을 따지기 이전에 서양인들은 자기의 순수한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현실이라면 어떻게 끝났을지 알 수없지만 영화에서는 적어도 올바른 윤리쪽으로 결말을 짓는 영화들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들도 역시 기독교 윤리에 맞게 그런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감정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실화들도 많이 접했었죠. 이야기가 두서 없네요.

oren 2013-08-26 09:52   좋아요 0 | URL
klavier님 반갑습니다. klavier님의 댓글을 읽어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속담과 비슷하게 '듣는 만큼 보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귀에 들려오는 음악이 눈에 보이는 영상과 어긋날 때, 관객뿐 아니라 영화배우들과 제작진들이 당혹스러워 했을 풍경을 떠올려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해요.

저로서는, 그래도 수많은 연습끝에 저런 정도로 맞췄겠거니 했고, 빠르게 내달려가는 선율을 (음악가가 아닌) '배우의 어설픈 흉내'로 따라잡는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여기며 '귀로만' 음악을 들으려 애썼더니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싶더라구요.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 탐구를 시도한 심오한 통찰을 담은 책



(밑줄긋기)


 

기적의 모든 난해성보다 더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괴상한 일

우리가 여느 때 보고 있는 사물들 중에도 기적의 모든 난해성보다 더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괴상한 일들이 많다고 본다.


도대체 이 정액 한 방울이라는 것이 무슨 괴물이기에 거기서 우리가 생겨나며, 거기에 우리 조상들의 육체적 형태뿐 아니라, 그 사상과 경향의 흔적까지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 물방울은 어디다 이 무한한 수의 형태를 깃들이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 물방울들은 종잡을 수 없게 혼란된 추이로, 증손자가 증조부를 닮고 조카가 삼촌을 닮는 이런 유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 내가 이 담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친에게서 받은 것이라 믿을 만하다. ······
 
어디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 결함의 성향은 부화되고 있었던 것일까? 부친이 이 병에 걸리기까지에는 아직도 시일이 멀던 시절에 그가 나를 이뤄 낸 그 실체의 변변찮은 한 조각이, 어떻게 이렇게도 굉장한 사태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그 많은 형제들과 자매들 중에 지금까지 나 혼자만 40년이 지난 뒤에 내가 그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정도로 어떻게 그토록 깊이 숨어 있었던 것인가? 누가 내게 이 추이에 대해 설명해 준다면, 나는 그만큼 다른 기적들도 그가 바라는 대로 믿어 줄 것이다. (839쪽)



 * * *


 


무엇이 우리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는가


알렉산더 포프는 "가지가 휘는 대로 나무는 굽는다."라고 말했다. 워즈워스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고, 밀턴은 "아침이 하루를 보여 주듯 유년은 그 사람을 보여 준다."라고 말했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아이의 처음 7년을 다오. 그러면 너에게 어른을 돌려줄 수 있다."라고 했는데, 이 금언은 영화 감독 마이클 앱티드가 영국 아이들을 7년 단위로 추적해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맺음말로 사용되기도 했다.(652쪽)



생애 후반


예를 들어 지능의 유전율은 개인의 나이에 따라 증가하고, 생애 후반에는 0.8까지 높게 나타나기도 한다. "가지가 휘는 대로"가 아니라, "이런, 내가 우리 부모랑 똑같이 되어 가고 있군!"인 것이다.(6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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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3-08-1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맛도 그런걸까요?
우리 아버지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던, 하지만 저는 입에도 안대던 콩국수가 세상에나 이렇게 맛난 음식인 줄 요즘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시원하고 고소한 콩국수 한 그릇이 생각나는 날입니다. ^^

oren 2013-08-11 23:28   좋아요 0 | URL
입맛도 그리 쉽게 '유전과는 상관없는' 경향으로 빼돌리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냉콩국수는 저도 엄청 좋아하는 음식인데, 야클님께선 요즘에야 비로소(?) 알게 되신 거로군요. ㅎㅎ

* * *

"모든 특성은 유전적이다."는 약간은 과장되었지만 그리 크게 과장된 말은 아니다. 물론 가정이나 문화가 제공하는 내용에 의존하는 구체적인 행동 특성들, 가령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 어떤 종교를 믿는가, 어떤 정당에 가입하는가 등은 유전과 전적으로 무관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재능과 기질에 반영되는 행동 특성들, 가령 언어에 얼마나 능숙한가, 얼마나 종교적인가, 얼마나 자유주의적인가 또는 보수주의적인가 등은 유전적이다. ······ 그리고 놀라울 만큼 구체적인 특성들-가령 니코틴이나 알코올 의존성, 텔레비전 시청 시간, 이혼 가능성 등-도 유전적이다. - 스티븐 핑커, 『빈서판』중에서

다크아이즈 2013-08-12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닌 게 아니라 나 닮지 않았으면 하는 면만 쏙쏙 닮는 아이들을 보면서 오늘도 한숨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런 철학서들이 이 책이 위안이 될까요? ㅠㅠ

oren 2013-08-12 09:58   좋아요 0 | URL
팜므님의 댓글을 보니 어느 철학자의 말을 패러디해서 답글을 달고 싶네요.

"모든 유전은 결핍 아니면 과잉이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도 못할 뿐더러, 내가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기필코 전하고 만다"고 말이지요. ㅎㅎ (이 패러디의 원본은 제가 자주 인용한 적이 있었던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랍니다.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내가 전하지 않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후애(厚愛) 2013-08-13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테뉴>는 예전에 선물로 받고 조금 읽다가 좀 어려워서 나중에 읽으려고 덮어 둔 책입니다.
저한테는 조금 어려운 책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한번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oren 2013-08-13 17:10   좋아요 0 | URL
어제 어떤 분과 책 얘기를 나누다가 그 분으로부터 후애님과 거의 비슷한 말씀을 들었답니다. ㅎㅎ

몽테뉴의 문장은 짧은 건 극히 짧고도 명료해서 '촌철살인'과 같은 쾌감을 주지만, 가끔씩 '길게 길게 빙빙 돌려' 얘기하는 구절들을 만나면 어려운 철학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많지요.

그래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깊디깊은 생각 속으로 함께 빠져드는 즐거움과, 또 오랜 세월이 지나도 조금도 변치 않고 오히려 더 큰 호소력을 지닌 듯한 그의 빛나는 문장들을 마주치는 기쁨은 다른 책에서는 쉽게 맛보기 어려운 독특한 매력을 듬뿍 지니고 있다 싶어요. 후애님께서도 다시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