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서재 풍경'을 묘사한 대목을 다시 만나니 오래 전에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 당시 이 대목들을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몽테뉴의 프랑스식 서재' 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나만의 서재'를 꼭 만들어야지...' 라는 다짐도 했었던 것 같다. 너무 어렴풋한 기억이라 반드시 '그런 다짐'을 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30 년쯤 전에 내 마음 속을 잠시 스쳐 지나갔을 지도 모르는 생각 한 자락을 두고 애써 '정답'을 찾을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몽테뉴가 <세 가지 사귐에 대해서>라는 장(章)에서 말한 '책과의 교제'가 주는 즐거움은 알랭 드 보통의 책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서 독서에 관해 말한 대목과 어쩐지 닮은 데가 많다. 그러고 보니 문득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알랭 드 보통이 꼽은 '내 인생의 책' 가운데 《몽테뉴 수상록》도 포함되어 있던 걸 알라딘 서재글에서 읽은 듯하다. 최근에야 안 일이지만,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기 소르망이 꼽은 '내 인생의 책' 가운데 한 권도 《몽테뉴 수상록》이다.

몽테뉴가 선보인 중세 남프랑스 '페리고르 스타일'의 '더없이 진솔한 고백'은 루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책이 후세에 파스칼과 셰익스피어에게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오히려 '책과 가까이 한 인물들' 가운데 몽테뉴로부터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인물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듯하다.

이 모든 게 '책과의 교제'가 주는 광범위한 시공간적 영향력이며 독특한 장점이자 매력일 것이다.

사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책과의 교제'와 연관된 글들만 뽑더라도 족히 어지간한 책 한 권 분량 이상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건 매우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3권 107장, 동서문화사판 1,330쪽) 그의 책 내용 자체가 거의 대부분 '책과의 교제'로 부터 얻어낸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래에 인용한 대목들은 <제3권 3. 세 가지 사귐에 대하여>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일부이다.


 * * *

(밑줄긋기)
















독서는 특히 여러 가지 소재로 내 사색을 잠 깨우며, 기억력이 아니라 판단력을 일하게 하는 데 쓰인다.

 


 

김 빠지고 노력이 없는 대화

그러므로 김 빠지고 노력이 없는 대화는 내 주의를 멈추는 일이 드물다.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중후함과 심오함만큼, 또는 그보다 더 내 마음을 채우며 사로잡는 게 진실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교제에서 내 마음은 잠들며, 거기에 내 주의력의 껍데기밖에 빌려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힘빠진 비굴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는 어린아이가 하기에도 유치한 꼴사나운 군말이나 천치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든가, 또는 더 서투르고 무례한 수작으로 고집하며 곧잘
침묵을 지키고 있는다.

 


 

내가 친분을 가지고 교제하고 싶은 사람들

내가 친분을 가지고 교제하고 싶은 사람들은 점잖고 재능이 있다고 알려진 위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다른 자들은 싫증이 난다.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은 우리 중의 가장 희귀한 전형이며, 주로 본성에서 받아 온 전형이다. 이 교제의 목적은 단지 친분과 우의와 이야기 친구를 갖는 것이다. 즉, 심령의 단련일 뿐이고, 다른 성과는 없다. 우리의 이야기에서는 무슨 제목이든지 똑같다. 무게나 깊이가 없어도 상관없다. 거기에는 늘 아담한 풍치와 온당성이 있다. 모든 것이 거기서는 성숙한 지조 있는 판단으로 물들어 있고, 호의와 솔직성, 쾌활미와 우정이 섞여 있다.



 

책과의 교제는 훨씬 더 확실하며 더 한층 우리의 차지이다

 

······ 이 두 가지(우정과 사랑) 교제는 우연적이며 다른 자에 매여 있다. 하나는 얻기가 드문 것이 흠이고, 또 하나는 나이와 더불어 시들어 버린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내 인생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 주지 못하였다. 세 번째 것으로서 책과의 교제는 훨씬 더 확실하며 더 한층 우리의 차지이다. 이것은 다른 장점에서는 먼저 것들만 못하다. 그러나 그것은 제 몫으로 언제나 꾸준하며, 그 봉사를 얻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이것은 언제나 내가 가는 곳에 있으며 어디서나 나를 도와 준다. 그것은 노년기에, 그리고 외롭고 쓸쓸함 속에서 나를 위로해 준다. 그것은 내가 한가로울 때 권태의 무게를 덜어 준다. 그리고 어느 시간에라도 내게서 귀찮은 동무들을 떼어 준다. 또 내 번민이 극도로 심하지 않을 때에는 고통을 덜어 준다. 불쾌한 생각을 덜어 보려면 책의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된다. 책은 쉽사리 그런 생각을 흩어 주며 빼앗아 간다. 그렇지만 서적들은 그보다 더 실제적이고 생생한 자연의 쾌락인 이런 다른 편익을 얻지 못하는 때에만 그들을 찾는 것을 보고도 불평을 하지 않고 늘 같은 얼굴로 나를 맞이해 준다.




구두쇠들이 보물을 가지고 즐기듯

 

병자는 그 치유 방법을 손에 쥐고 있는 경우, 가련하게 생각해 줄 필요가 없다. 내가 서적들에서 끌어내는 모든 성과는 이런 어구의 실천과 적용으로 되어 있다. 사실 나는 책을 모르는 자들만큼이나 책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구두쇠들이 보물을 가지고 즐기듯, 책을 가지고 즐긴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때에 언제든지 그것을 즐길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이것을 소유하는 권리에 포만하도록 만족을 느낀다. 




내가 인생 행로에 갖추고 있는 최상의 장비 

 

나는 평화시나 전시나 책 없이는 여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며칠이건 몇 달이건 책을 들추어 보지 않고 보내는 수도 있다. "조금 있다가 하거나 내일 하거나 아무 때라도 생각날 때에 하지" 하고 나는 말한다. 세월은 달음질쳐 흘러간다. 그렇다고 그 동안에 마음이 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책이 내 옆에 있으며, 내가 읽고 싶은 시간에 언제든지 쾌락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얼마나 내 마음이 안심하여 가벼워지며, 얼마나 이 책들이 내게 도움을 주는가를 이루 다 인정하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인생 행로에 갖추고 있는 최상의 장비이다. 그리고 이해력 있는 사람으로 이런 준비가 없는 자들을 지극히 가련하게 생각한다. 나는 이것만은 내게 결핍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오락은 아무리 변변찮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집에 있을 때에는 나는 좀더 자주 서재에 들며, 거기서 집안일도 손쉽게 보살펴 간다. 나는 입구에 자리잡고, 내 아레에 정원과 양계장, 안마당 그리고 내 집안의 대부분을 내려다본다. 거기서 나는 이때에는 이 책, 저때에는 저 책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무렇게나 들춰 보며, 때로는 몽상도 하고 때로는 이리저리 거닐면서, 여기에 보듯이 내 생각하는 바를 불러 주며 적어 가게도 한다.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2층은 나의 예배실이고, 3층은 거처하는 방과 그 부속실이며, 혼자 있고 싶은 때에는 거기서 자는 일이 많다. 위에는 커다란 의장실이 있다. 그것은 지난날 내 집에서는 가장 쓸모없는 곳이었다. 나는 이 서재에서 내 생애의 대부분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밤에는 결코 거기에 있는 일이 없다.
 
······ 이 탑은 삼면으로 풍부하고 끝없는 조망이 내다보이며 실내에는 직경 16보의 공간이 있다.

겨울에는 나는 줄곧 거기 있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이름이 말하듯 언덕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여기보다 더 바람 타는 곳도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떨어진 곳이라 찾아오기도 힘들어서 사람들의 소란도 물리쳐 주고 글을 읽기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든다. 여기가 내 자리이다. 나는 이 장소를 내 지배하에 두고, 이 구석 하나만은 아내이건 자식이건 일반 사람들이건 공동 생활에서 구애받지 않고 간직하려고 한다. 다른 데는 나는 모두 본질상으로 확실치 못한 명목상의 권위밖에 갖지 않았다. 자기 집에 있으며 자기대로 있을 곳도, 자기만의 궁전을 차릴 곳도, 몸을 감출 곳도 없는 자들은 내 생각으로는 아주 가련한 신세들인 것 같다!

 

 

 

책은 그것을 택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많은 유쾌한 소질을 가졌다


나는 그날 그날을 살아간다. 그리고 좀 말하기가 거북하지만 나를 위해서만 살아간다. 내 의도는 거기서 그친다. 나는 젊어서는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공부했다. 다음에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였다. 지금 이 시간에는 재미로 한다. 결코 소득을 위해서 한 일은 없다. 이런 종류의 가구(책을 말함)를 가지고 내 필요에 충당할 뿐 아니라, 서너 걸음 더 나가서 나를 덮어 치장하려던 낭비적인 헛된 심정은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책은 그것을 택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많은 유쾌한 소질을 가졌다. 그러나 좋은 일로 수고가 들지 않는 것이라고는 없다. 이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순수한 쾌락은 아니다. 거기에도 상당히 힘든 그 자체의 불편이 있다. 심령은 거기서 훈련받는다. 그러나(그것도 나는 보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신체는 그 동안 움직이지 않고 머무르며 힘빠지고 우울해진다. 나는 이렇게 노쇠해 가는 나이에 이것을 과도하게 하는 것보다 더 내게 해롭고 피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내가 총애하는 내 개인의 세 가지 직무이다. 나는 국민의 의무로 세상에 대해서 부담하는 직무를 말하지 않는다.



 * * *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책은 미셸 드 몽테뉴의 작품이에요. 16세기의 위대한 프랑스 수필 작가였어요. 사실 그가 바로 수필을 창시한 사람입니다. 수필은 다소 지엽적이고, 장난기 넘치며 예측 불가능한 개인적인 글쓰기죠. 몽테뉴의 수필은 제목만 봐도 정말 놀라운데요, 하나의 예를 들면 ‘심각하게 얘기하는 것은 죽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는 것이 있어요. 다른 것들을 살펴보면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부정’, ‘로마의 위대함’ 등이 있지요. 또 엄지 손가락을 갖는 것에 대한 고찰을 한 ‘엄지 손가락’이란 이름의 글도 있어요. 이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로운 생각인 것 같아요. 또 ‘화’ 와 ‘무기력’ 에 대한 것도 있지요. 몽테뉴 전에는 아무도 ‘무기력’에 관한 글을 쓰지 못했어요. 그리고 ‘말’에 대한 수필도 있어요. 이러한 몽테뉴의 매우 개인적이고 일상적이며 친밀한 지성이 저로 하여금 많은 주제에 대한 글을 쓰도록 용기를 주었어요.
 -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알랭 드 보통의 〈내 인생의 책〉中에서

















 

독서 쪽에 핵심적인 이익이 있다


독서에서는, 우정이 갑자기 그 원래의 순수성을 되찾게 마련이다. 책을 상대로 해서는 거짓된 친절 따위가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런 친구들과 저녁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러고 싶어서일 것이다.

 

 

차라리 종이책과의 소통을 선호하는 이유


우리는 몰리에르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재미있을 때에만 웃을 수 있다. 그가 우리를 지루하게 만들 경우라도, 우리는 지루한 표정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며, 일단 그를 충분히 즐겼다는 확신이 서면 마치 그가 천재도 유명인사도 아닌 것처럼 냉큼 원래의 자리에 꽂아둘 수도 있다.


  -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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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3-08-23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수백년 전 옛날 사람들의 지적인 사고력 수준이 현대인들 보다 한참 열등할 것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몽테뉴를 포함해서 옛 고전들을 접할 때 마다 그런 생각들을 반성하게 됩니다.
'인생 행로에 갖추고 있는 최상의 장비 ' 파트의 글은 책 읽어 내는 속도 보다 항상 책을 많이 사서 책장에 책 늘어가는 속도가 빠른 제게 조금 위안이 되네요. 언젠가 나중에 읽으면 되지, 하는 생각. ^^


oren 2013-08-23 11:41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살았던 몽테뉴조차 늘 '옛사람들을 더 좋아한다. 옛사람들이 훨씬 더 현명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걸 보면, 우리 현대인들이 얼마나 제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얼마나 '얄팍한 생각들'로 단단히 무장하고 제 꾀에 스스로 넘어가고 있는지 가소로울 지경이지요.

좋은 책들을 사두고 당장 읽지 못한다고 너무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야클님처럼 책들을 쌓아두고 읽지 못한 채 바라만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오는데, 조금씩 그런 생각들이 줄어들 때도 있더라구요. 몽테뉴의 글들도 적지 않은 위로가 되는 것도 사실이구요. ㅎㅎ

yamoo 2013-08-23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압도적인 발췌문들!
오~~근데, 인용하신 부분 중 엔날사람들이 훨씬 현명했다고 한 몽테뉴의 글귀는 기억합니다. 저도 거기에 줄 좍~쳤었거든요~ㅎ

몽테뉴 책으로 페이퍼를 쓰셨으니, 이제 좀만 기둘리면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나 <시론>에 대한 페이퍼가 올라오겠네요. 완전 기대되요! 완전~~^^

oren 2013-08-23 21:03   좋아요 0 | URL
베르그손의 <시론>에 대한 서평은 '매우 길게' 써 놓은 게 있구요.
http://blog.aladin.co.kr/oren/6018926

베르그손의 <시론>과 <창조적 진화>, 다윈의 <종의 기원>과 쇼펜하우어의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묶어서 페이퍼를 쓴 적도 있었답니다. <창조적 진화>를 읽은 지 제법 된 듯한데 그래도 언젠가는(<물질과 기억>을 읽고 난 후쯤?) 그 책에 대한 서평글을 꼭 한번 써 보고 싶어요.

베르그송이 말했던 '어떤 과감한 소설가'는 결국 프루스트가 아니었을까?
http://blog.aladin.co.kr/oren/5959035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관한 이야기
http://blog.aladin.co.kr/oren/60676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