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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ㅣ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2월
평점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79883113593262.jpg)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 주면 인간은 한결 나은 존재가 될 것이다.
- 안톤 체호프
먼 미래에는 ······ 여러 가지 분야가 개척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은 개개의 정신적인 힘이나 가능성의, 점차적인 변화에 의한 필연적 획득이라는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워지게 될 것이다. 인간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광명이 던져질 것이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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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종의 기원』에서 인간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종의 기원』의 성공을 위해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인간의 기원에 관한 나의 신념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유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윈이 탄생한지 200년이 갓 지난 오늘날 '인간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증거들은 너무 많이 발견되었다 싶어서 오히려 충격적이다.
인간과 돼지, 인간과 소는 50개가 넘는 긴 배열을 공유한다. 모든 것이 살아있는 새끼나 젖이나 털만큼이나 설득력있는 공통 후손의 증거이다. ...... 대부분의 유전학적 전망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생쥐와 인간은 모든 부분에서 같으며, 수천개의 인간 유전자가 생쥐의 유전자와 정확히 똑같다. DNA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생쥐 염색체의 절반 이상이 인간의 염색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는 우리와 훨씬 더 많이 닮았다. 모든 식물 유전자의 절반이 생쥐의 유전자와 같다. 벌레는 고유 유전자의 1/5을 효모와 공유한다(효모는 벌레로부터 10억 년 전에 갈라져 나왔다).
- 스티브 존스, 진화하는 진화론 中에서
최근까지의 놀라운 과학적 발견과 증거들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아 언어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스티븐 핑커는 이 책을 통해 그의 신념들을 제대로 풀어낸 것같다. 이미 그의 전작들(언어본능,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단어와 규칙)을 통해 심리학의 새로운 기초를 세우는데 일익을 담당한 전력이 있었던 만큼, 이 책을 통해 저자가 펼치는 주장은 신념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저자의 신상에 유해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이다.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본래부터 타고난 '인간 본성'을 이제는 정말 제대로 파악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중세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의역한 말이다. '타불라 라사'라고 하면 오래 전 한 때 자주 접했던 용어라서 생소하지 않는데, 국내 최고의 온라인 게임회사인 N사가 '울티마' 시리즈의 아버지로 유명한 게리엇 형제들을 거액을 주고 영입하면서, 그들이 세계시장을 휩쓸 목적으로 개발에 나선 온라인게임의 이름이 바로 '타뷸라 라사'였던 것이다. 오늘 문득 살펴보니 7년간 개발한 그 게임의 흥행은 실패했지만 N사에 대한 스톡옵션을 통해 게리엇 형제들은 무려 600억 이상을 챙겼다는 뉴스도 보인다.
어쨌든 2001년경 타불라 라사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흥미가 생겨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라틴어가 어원이고 '빈 판때기'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정도로 알았었다. 그런데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을 통해 뭘 좀 제대로 알고 보니 이 용어의 기원은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단다. 어쨌든 로크는 흰 종이와도 같은 인간의 마음이 오로지 '경험으로부터' 채워진다고 주장하면서 '빈 서판 개념'을 들고 나왔던 것이고, 그의 경험론은 중세의 암흑기는 물론 그보다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인류에게 자명한 진리로 강요되었던 교회의 권위와 신성 왕권을 힘차게 타파하고 체제로서의 자유 민주주의의 토대를 확립하는 데 유용한 정치 철학으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토머스 홉스가 흔히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서로를 증오하고 파괴하는 비합리적 충동에 사로잡힌 존재라고 주장했던 것에 영향을 받아(혹은 반발하여), 루소는 소위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자연 상태의 인간은 욕심이 없고 평화로우며, 탐욕, 근심, 폭력과 같은 병폐는 문명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로크와 루소, 베이컨과 데카르트 등을 거치면서 경험적 합리주의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함에 따라, 인간이 '고상하지 못하고 야만스러운' 본성을 타고난다는 주장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게 되고 20세기로 건너올 때까지도 교육과 환경의 중요성만 더욱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이 조상으로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게 되는 '타고난 본성'에 대해 인정하는 부분이 적을수록, 인간이라는 존재가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개조 가능한 말랑말랑한 원재료 쯤으로 여기게 된 맹신들은 결국 유토피아적인 이상형 인간의 추구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 부분이 바로 스티븐 핑커가 '빈 서판' 이론을 맹렬히 비난하는 근거지로 삼는 무대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무시한 채 '고상한 야만인' 상태의 인간을 대상으로 훌륭한 환경과 교육 등을 통한 인위적인 '양육'으로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의 위험성을 조목조목 비판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 책이 이처럼 두꺼워진 주된 이유도 '빈 서판' 이론을 맹공하기 위한 무기 역할을 하는 그의 지식의 창고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랫동안(MIT에서 21년간, 하버드에서 8년째) '인간 본성의 과학' 연구에 매진해온 학자 답게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간 본성에 관한 증거들을 끊임없이 우리들 앞에 제시한다. 일견 지루할 것도 같지만 그의 주장은 유력 언론의 표현을 빌자면 '명료하고, 논점이 고르고, 공정하고, 깊이가 있고, 탄탄하고, 위트가 넘치고, 교양적이고, 자극적'이어서 전혀 따분하지 않다! 다만, 다윈의 영향을 깊숙히 받아들인 대부분의 과학자들처럼 '압도적인 증거에 의해 자연스럽게 침몰할 것'으로 보는 '창조론'을 아직까지도 압도적으로 믿는 서양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기 때문에 그가 특히 종교적 문제에 관해 지나칠만큼 자세한 설득과 논리적 반박에 지면을 너무 할애한 점은 아쉽다.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이라는 도발적인 책을 써서 수많은 교회를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드나드는 열성 신도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는데, 이 책에서 스티븐 핑커가 '허위와 날조'의 증거로 찾아낸 종교적 기록들 역시 그에 못지 않다 싶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삼위일체 이론에 대한 비판이나 교황청의 신성하고도 권위있는 발표는 물론이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성서의 기록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데 주저함이 없을 정도이다.
스티븐 핑커는 '빈 서판' 이론과 '고상한 야만인' 이론에 대한 광범위한 탐구를 통해 그 허구성을 반박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제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더 나아가 인간의 영혼 또한 신의 입김을 통해 생겨난 것이 아님을 인정하더라도) 인간의 도덕 관념이나 윤리, 정치 조직이나 사회 제도가 혼란에 빠질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키는데 열을 올린다. 오히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제대로 이해할 때 비로소 진정한 평등과 평화, 그리고 인류가 추구하는 즐거움과 행복한 삶이 오히려 더욱 확대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이러한 주장들은 일견 만들어진 신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인간의 기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때 종교적·이념적 분쟁이 사라지고 진정한 인류의 삶의 목적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과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본문 내용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주석을 따로 제쳐두더라도 참고문헌 목록만 해도 817쪽∼870쪽에 걸쳐 빼곡히 나열할 만큼 엄청나다. 솔직히 쉽게 읽겠다고 덤벼들기에는 다소 벅찬 내용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또한 역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물학과 인문학은 물론이고 역사와 철학적 방법론까지 포괄하는 거의 모든 지식 영역에서 다윈주의의 사회적, 역사적, 철학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고된 '건축'에 해당한다고 할만큼 독특한 깊이를 지닌 책이다.
저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부인 혹은 인정이 인간의 삶의 거의 대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데 주목하면서 사람의 '마음'이나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우리 인류의 삶과 직접 대조하면서 하나 하나 올바른 해결책들을 찾아 나선다. 그는 주로 정치, 폭력, 성(性), 어린이, 예술과 인문학에 대해 '인간 본성'이 던져주는 주요 쟁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탐구한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역시 어린이에 대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부모가 자식을 말랑말랑한 공작용 재료쯤 된다고 생각하는 이론은 부모들에게 부자연스럽고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한 양육 체제를 강요해 왔다고 본다. 그래서 각자 타고난 본성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은 결국 바라는 대로 성장해 주지 않는 자녀를 둔 부모들의 고통을 배가시켜 왔다고 주장한다. 양육의 효과는 유전자의 영향보다 훨씬 작으니 부모가 양육을 통해 자식을 설계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충고한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말대로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쥐고 있지는 않지만 아이들의 현재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아이들의 현재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 힘도 쥐고 있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
저자가 오랜 기간 동안의 인류 진화의 역사를 통해 좀처럼 거부하기 힘든 '타고난 인간 본성'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또 인정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마냥 극단적인 '본성' 입장에 서서 극단적인 '양육' 입장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러차례 선을 긋는다. 그는 본성(nature) 대 양육(nuture)의 오래된 논쟁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리기에 앞서 책의 앞부분에서 미리부터 '진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 놓여 있다'고 한 발을 빼두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후반부에 이르면 그가 나름대로 '본성 대 양육'에 대해 생각하는 '저울의 눈금'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를 제대로 엿볼 수 있다.
행동 유전학의 세 가지 법칙은 심리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일 것이다. 그러나 세 가지 법칙이 여러 시사 잡지의 커버 스토리를 통해 소개되었음에도,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중략) 세 법칙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전자 50퍼센트, 공유 환경 0퍼센트, 단독 환경 50퍼센트(조금 양보하자면, 유전자 40∼50퍼센트, 공유환경 0∼10퍼센트, 단독 환경 50퍼센트).
이 책이 국내에 번역된 지도 벌써 6년쯤 된 것 같다. 이 책이 소개된 글을 보고 '뭔가 대단한 깊이가 있는 책'일 것같아 사두기만 하고 읽기를 미뤄오다가 뒤늦게 2007년 초에 읽기를 마쳤었는데 그 후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좀 더 쉽고 훨씬 더 흥미로운 책이 뒤늦게 국내에 번역되어 나오면서 스티븐 핑커의 '마음'에 좀 더 다가갈 기회를 얻었었다. 이번에 다시 한번 '빈 서판'을 읽어보니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아서 처음에 읽을 때보다 훨씬 속도있게 책장을 넘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작년 5월에 아이들과 함께 미국 동부지역의 명문대학들(하버드대, MIT대,예일대, 컬럼비아대 등)을 탐방할 기회를 가졌었는데(아이들이 그 쪽으로 진학할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단지 부모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 가운데 하나가 '여행'이라는 생각을 실천한다는 차원), 하버드대 교정에 들어섰을 때는 정말 이 사람, 스티븐 핑커만은 꼭 한 번 만나봤으면 하는 마음이 절실했었다.(설사 누가 만날 기회를 만들어 주었더라도 언어 '본능'이 아니라 언어 '환경' 탓에 내가 그를 만나고 싶었던 뜻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처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독후감'을 쓰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는데, 방대한 책의 무게에 압도되어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뒤늦게나마 밑줄친 부분과 노트에 적어둔 일부 내용들 덕분에 이렇게 두서없는 서평글이나마 쓸 수 있어서 저자에게 진 빚을 조금은 갚은 기분도 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인 스티븐 핑커가 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이는 이 훌륭한 책이 퓰리처상의 최종 후보에까지 올랐다가 결국 수상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스티븐 핑커의 주장이 너무 과격한 탓이어서 나름대로 종교적·정치적인 반대파들의 목소리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혹시 지나치게 두꺼운 책의 부피가 수상을 가로막은 장애요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아무튼 지적 도전과 탐험을 즐기고 싶은 분들에게 읽기를 권해 드리고 싶고, 혹시라도 이 책의 두께 때문에 미리부터 읽기에 실패할까봐 걱정이 앞서는 분들을 위해 제 나름대로 (스크롤에 대한 압박은 있을지 몰라도) 두께에 대한 부담없이 이 책을 맛볼 수 있는 요약본을 덤으로 준비했으니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시길 바란다.
☞ 빈 서판 ① ② ③ 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