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수필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홍매 지음, 안예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용재수필(容齋隨筆) / 홍매 지음 / 안예선 옮김 / 지만지”

 

 

《장자(莊子)》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들은 유용(有用)의 쓰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용(無用)의 쓰임은 알지 못한다.”

이런 말도 있다. “쓸모없음을 잘 알고서야 그 쓸모를 말할 수 있다. 대지는 매우 넓고 크지만 사람에겐 두 발을 디딜 자리면 족하다. 나머지 다른 곳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두 발로 디딘 땅을 빼고 다른 곳을 다 파버린다면 주변은 깊은 못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용의 쓰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저자 홍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날짐승은 날개로 날지만 만약 그들의 다리를 묶는다면 날 수 없게 된다. 달리는 것은 다리를 써서 달리지만 그 팔을 묶어버린다면 달릴 수가 없다. 과거 시험장에서는 학문과 재능이중요하지만 무디고 아둔한 자 또한 쓸모가 있다. 전쟁을 할 때는 용기를 우선으로 하지만 겁쟁이도 쓸데가 있는 법이다. 어떻게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일괄적으로 구분하겠는가?

그러므로 군주는 천하의 많은 선비들을 무용지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이러한 생각은 마음에 담아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상당히 쓸모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낮은 자존감에서 허덕이는 사람은 예외로 한다. 그러나 나를 쓰는 사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사람을 쓰는 입장이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만 찾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까 자문해보는 계기도 된다.

 

저자 홍매(洪邁, 1123~1202)의 자는 경로(景盧), 호는 용재(容齋)이며, 시호는 문민공으로 파양(지금의 장시성 러핑시)사람이다. 홍매의 부친과 형들은 모두 명성 있는 학자이자 관료였다. 부친인 홍호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15년간 억류되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송나라로 돌아왔다. 홍매는 3형제 중 막내였는데 형들 또한 학문적으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고 저작을 남겼다. 이러한 가풍 속에서 성장한 홍매는 자연스럽게 사대부로서의 처세와 학문의 자세를 익힐 수 있었다. 홍씨 가문의 3형제는 당시 “3洪의 문명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할 정도로 손꼽히던 수재들이었다.

 

흔히 에세이(essay)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수필(隨筆)’이라는 용어를 제일 처음 사용한 용례가 바로 《용재수필(容齋隨筆)》이다. 그러나 홍매가 사용했던 ‘수필’이라는 용어의 함의는 지금처럼 개인의 경험과 감상을 가볍게 서술하는 신변잡기성의 감성적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다.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 경전과 역사, 문학작품에 대한 고증과 의론, 전인(前人)의 오류에 대한 교정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모두 저자가 독서를 통해 다져진 지식과 생각이 토대이다.

 

凊나라대 학자들의 공부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중요한 것이 ‘찰기(札記)’였다고 한다. 이는 독서를 할 때마다 느낀 점을 기록해서 오랜 시간 축적되면 내용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한 권의 저작으로 만들어냈다. 청대 고증학을 대표하는 역작의 대부분은 이러한 ‘찰기’에서 만들어졌고, 그 시작은 홍매의 《용재수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글 중 특히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다.

김일제(金日磾)에 대한 이야기다. 김일제는 본래 흉노족 휴도왕의 태자였으나 부왕이 한 무제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중국으로 끌려와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 김일제가 한나라의 황궁으로 끌려와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무제가 연회를 베풀어 말 구경을 했는데, 무제의 곁에는 후궁과 궁녀들이 가득했다. 김일제 등 수십 명은 말을 끌고 황제 곁을 지나가면서 몰래 궁녀를 훔쳐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김일제만은 그러질 않았다. 김일제의 용모는 매우 단정하고 점잖았으며, 그가 기른 말 또한 살지고 기름졌다.

황제는 그의 재주를 훌륭하게 생각해 그날로 말을 총괄하는 관직에 임명했으며, 김일제는 후에 무제의 유조를 받고 어린 황제를 보좌했다. 김일제와 상관걸은 모두 말 때문에 재능을 인정받았으니, 한 무제의 인재 등용은 명철하고도 빈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말(馬) 때문에 인정을 받았다.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비록 패한 나라지만 태자였다. 그러나 그(김일제)는 그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겸손했다. 자기 관리를 잘했다. 그뿐이다. 작은 일에 성실한 자 큰 일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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