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키스와 필레몬 Baucis and Philemon

 

제우스헤르메스는 이 세상에 대홍수를 일으키기에 앞서,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그네로 변신하고 지상에 내려왔다. 사람들은 문을 꼭 닫아 잠그고 그들을 냉대했다.

 

어느 날 밤 그들은 프리기아의 어느 산허리에서 가난한 농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필레몬과 그 아내인 바우키스가 사는 오두막을 찾아갔다. 노부부는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식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으나 거기에는 정성이 담겨 있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포도주를 아무리 마셔도 그 병이 가득 차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노부부가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한 마리 밖에 없는 거위를 잡으려 했을 때,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이를 만류하고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면서, 앞으로 지상에서 일어날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소박한 식사로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대접한 바우키스와 필레몬.
바르톨메오 스아르디. (케른, 발라프 리하르트 미술관)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노부부를 산으로 데려가 정상에 올랐을 때는 이미 그 지방 일대가 물에 잠기고 노부부의 오두막만이 남아 있었다. 두 신은 이 오두막을 화려한 신전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제우스는 필레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아내와 같이 여생을 제우스 신전의 신관으로 지내고 싶다고 하고, 또 어느 한쪽이 먼저 죽어 살아남은 사람에게 슬픔을 주지 않도록 부부가 함께 죽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제우스는 그 소원을 받아들여 그들이 죽었을 때 떡갈나무와 시나에나무로 변하게 만들었다.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은 노부부가 천상의 손님을 경건히 대접한 것을 기념하여 그 가지에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모이라이 파르카(parca)

 


단수형은 모이라. 운명의 여신 세 사람을 가리킨다. 보통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기보다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로마 이름인 파르카(parca)가 '아기를 낳는자', 그리스 이름인 모이라가 '잘라내는 자' 또는 '할장하는 자'를 의미하듯이, 멜레아그로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운명의 여신들에게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여, 탄생의 순간에 그 전생애에도 결정하는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멜레아그로스가 태어난 지 7일 후, 운명의 여신들이 그를 낳은 어머니 앞에 나타나 마침 난로 속에서 타고 있는 불을 보고, 저 장작이 모두 타면 아기가 죽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그의 어머니가 난로에서 장작을 꺼내 불을 껐기 때문에 멜레아그로스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멧돼지 사냥을 하다가 말다툼이 원인이 되어 멜레아그로스가 외숙부를 죽였다는 것을 안 어머니가 난로에서 꺼내 보관햇던 장작을 다시 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멜레아그로스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운명의 세 여신은 '밤'의 여신인
닉소스의 딸이었다. 헤시오도스는 그녀들의 이름이 클로토('실을 잣는 자') 라케시스('운명'의 그림을 그리는 자') 아트로포스 ('불가피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헤시오도스는 같은 작품 속에서, 이들 자매는 제우스와 질서를 의미한 테미스의 딸들이라고 하여, 그가 말하는 모이라들의 계보와 위치는 애매하다. 가령 운명의 여신들은 제우스의 신하인지 또는 제우스보다 우위에 있는지, 혹은 올림포스의 신들은 운명의 여신이 결정한 것을 번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이 명확하지 않다.

 

고대의 작가 대부분은 운명의 여신들을 올림포스의 신들보다 우위에 놓고 있다.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도, 최고신인 제우스가 운명의 여신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영웅들의 운명을 올려놓은 천칭의 균형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제우스는 운명의 결정자라기보다도 운명의 집행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데, 제우스는 사랑하는 아들 사르페돈이 트로이 전쟁에서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운명을 번복하지 못했다. 아이스킬로스도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제우스가 운명의 결정에 복종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헤시오도스 이후, 운명의 세 여신은 '잣는자'라는 의미를 가진 콜로토의 이름에서 발전하여 인간의 운명이라는 천을 짜는 노파들이 되었다. 즉 '운명의 그림을 그리는 자' '그 천의 길이를 결정하는 자', 그리고 '가위로 재단하는 자'의 세 사람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신화에서는 운명의 여신이 별로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거인족을 상대로한 싸움과 티폰과의 싸움 때 제우스의 편을 들고 거인족인 아그리오스와 토아스를 곤봉으로 죽였으며, 이미 제우스에게 쫓기고 있던 티폰에게 힘이 생긴다고 속여 몸이 마르는 음식을 먹이거나 한 것이 고작이다. 또
아폴론의 계략에 넘어가 술을 마시고 그의 친구인 아드메토스의 운명을 바꾸게 한 에피소드도 있다. 그때 술에 취한 여신들은, 아드메토스를 대신하여 죽을 사람이 있다면 그를 정해진 수명보다 더 오래 살게 해주겠다는 허락을 내렸던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anda78 2004-08-05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레아그로스도 잘못했지만... 그 어머니 정말 대단하네요. 무셔무셔...

꼬마요정 2004-08-05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역시 우리나라의 정서와는 많이 달라요... 모정보다 강한 건 없지 않을까요..??
 

안티오페 Antiope

1.

라브다코스가 어렸을 때 테베의 섭정으로 있던 닉테우스의 딸. 미인이었기 때문에 제우스의 눈에 들어, 사티로스로 모습을 바꾸고 나타난 제우스와 정을 통했다. 임신한 것이 눈에 띄게 되자 아버지의 진노가 두려운 나머지 시키온으로 도망가서 에포페우스 왕과 결혼했다.(일설에 의하면, 에포페우스에게 유괴되어 임신했다고 한다).

 



제우스와 안티오페. 주제와 구도는 베네치아의 영향을 받은 것 같으나 화법은 플랑드르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15년. 와토. (파리, 루브르 미술관)

아버지 닉테우스는 시키온까지 딸을 추적해 와서 에포페우스와 싸우다 죽었다. 또는 수치를 느끼고 자살했다고 한다. 이때 닉테우스는 형제인 리코스에게 에포페우스에 대한 복수와, 안티오페에게 벌을 내릴 것을 명하고 숨을 거두었다.

리코스는 테베의 군사를 이끌고 시키온을 공략하여 에포페우스를 죽이고 안티오페를 사로잡았다. 안티오페는 테베로 돌아오는 도중에 키타이론 산에 있는 에레우테라이에서 암피온과 제토스라는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리코스는 이들을 산에 버렸다.

테베에 돌아온 리코스는 안티오페를 자기 아내인 디르케의 노예로 삼았다. 디르케는 안티오페를 학대하고 오랫동안 지하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얼마후 그녀는 감옥을 탈출하여 키타이론 산으로 도주했는데, 이때 그녀를 구한 것은 공교롭게도 암피온과 제토스 쌍둥이를 도와준 양치기였다.

그후의 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쌍둥이는 안티오페가 어머니라는 것을 알자 디르케와 리코스를 죽여 복수 했다는 것이 첫번째 설이다. 두번째 설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안티오페>> (이 작품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에 있는데, 제토스는 안티오페를 도망친 노예로 취급하여 숨겨주지 않아, 안티오페는 키타이론 산에서 디오니소스 축제를 벌이고 있던 이프케에게 다시 잡혔다는 것이다. 

이프케는 안티오페를 미친듯이 날뛰는 황소뿔에 묶어 놓았다. 그러나 암피온과 제토스가 그녀의 양부인 양치기들 한테서 안티오페의 신분을 들은  안티오페를 구해내었다. 그 뒤 쌍둥이 형제는 디르케를 그 황소의 뿔에 묶어 놓았으나, 디르케가 디오니소스 신의 열렬한 신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안티오페가 디오니소스의 벌을 받고 광인이 되어 여러 나라를 방랑했다. 나중에 오르니토스의 아들 포코스의 힘으로 정상을 되찾고 그 아내가 되었다. 죽은 뒤에는 포코스와 함게 포키스에 매장되었다.

 

2.

아마존의 여왕인 히폴리테의 자매. 또는 히폴리테 자신의 별명. 안티오페가 테세우스에게 유괴되었을 때, 히폴리테는 아마존의 여병사들을 이끌고 아테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안티오페 (또는 히폴리테)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히폴리토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안드로메다  Andromeda

팔레스티나(이디오피아라는 설이 유력하다)의 이오페 왕 케페우스와 왕비인 카시오페이아(또는 카이오페)의 딸. 카시오페이아는 헤르메스의 아들 알보스의 딸이다.

카시오페이아는 자기 딸이 바다의 신인 네레우스의 딸들보다도 아름답다고 자랑했다. 이 말을 들은 네레우스의 딸인 네레이스들이 포세이돈에게 호소했다. 화가 난 포세이돈은 바닷뱀을 보내 케페우스의 왕국을 어지럽혔다. 리비아의 암몬 신탁은 안드로메다 자신이 바닷뱀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고했다. 이에 안드로메다는 해안의 바위 위에 쇠사슬로 묶어졌다. 바다의 괴물이 안드로메다에 접근하려 했을 때, 마침 메두사를 퇴치하고 돌아가던 페르세우스가 그 광경을 보았다. 그는 곧 케페우스의 왕궁으로 가서, 안드로메다를 아내로 삼게 해 준다면 괴물을 퇴치하겠다고 했다. 케페우스의 승낙을 받은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가지고 괴물에게 접근하여 그를 돌로 변하게 하고 (또는 칼로 베어 죽이고) 안드로메다를 구했다.


에드워드 반 존스의 [안드로메다의 구출] 구와슈, (사우산프톤 미술관)

케페우스안드로메다와 케페우스의 동생인 피네우스가 약혼한 사실을 숨기고 페르세우스안드로메다의 결혼피로연을 열었다. 연회도중에 피네우스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안드로메다를 탈취하려 했으나,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보이자 군사들이 모두 돌로 변하고 말았다.

페르세우스와 결혼한 안드로메다는 잠시 동안 아버지의 왕궁에서 살다가, 맏아들인 페르세스가 태어나자 그를 아버지의 후계자로 남기고 자기들은 세리포스 섬으로 갔다. 후에 페르세우스는 아르골리스의 왕이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인 알카이오스, 스테넬로스, 헬레이오스, 메스토르, 엘렉트리온과 딸인 고르고포네가 태어났다.

안드로메다는 죽은 뒤 아테나 여신에 의해 남편인 페르세우스, 아버지인 케페우스, 어머니인 카시오페이아, 바닷뱀 등과 함게 하늘로 올라가 별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카시오페이아만은 오만의 죄 때문에 의자에 앉은 채 하늘에 거꾸로 매달려 있게 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안드로메다의 아들 페르세스는 페르시아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이아스 또는 아옉스 Aias or Ajax

 

1.

살라미스 왕인 텔라몬과 페소보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테우크로스의 이복형이다. 아이아스라는 이름은 '독수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인 아이에토스에서 따온 것으로 그가 태어나기 전에 헤라클레스가 친구인 텔라몬에게 강한 아들이 태어나도록 제우스에게 기도를 올렸을 때 아버지인 텔라몬이 독수리를 보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일리아드>> 에서의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다음 가는 위대한 장군이며 커다란 방패를 손에 들고 싸움터로 나가는 모습은 탑처럼 웅장해 보였다. 말수가 적고 천천히 이야기 했지만 다정한 마음과 빼어난 용기의 소유자였다. 흔히 이복 동생인 테우크로스와 함께 싸움터로 나갔는데 이때 뛰어난 사수인 테우크로스는 형의 방패 뒤에 숨어 활을 쏘곤 하였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아이아스와 함께 참전하는 수도 있었다. 그는 그리스군의 방벽과도 같은 존재로서 흔히 싸움이 불리해질 때에는 자기편의 배후를 지켰다.

 

아이아스도 헬레네에게 구혼한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구혼자들은 누가 헬레네의 남편이 되든 간에 그 사람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해두었다. 아이아스는 살라미스로부터 12척의 배를 거느리고 그리스군에 가세했는데 아이아스 개인의 힘은 그의 부대의 힘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강했다. 헥토르와 맞승부를 겨루다가 커다란 바위로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직전에 해가 져서 무승부로 되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선물을 교환했는데 헥토르는 칼을, 아이아스는 보라색의 칼집을 각각 상대방에게 주었다. 그리스군이 아킬레우스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싸움터로 복귀하도록 재촉했을 때 아이아스도 친구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지만 의논하는 것은 오디세우스에게 맡겼다. 다음날 오디세우스가 곤경에 빠져 상처를 입었을 때 아이아스가 그를 도와 주었다.


아킬레우스의 시체를 그리스 진영으로 운반하는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
프랑소와 항아리의 일부분, 기원전 6세기 (피렌체 고고 미술관)

또한 해변 백사장에 정박해둔 전함을 지키기 위해 쌓아둔 방벽 옆까지 트로이군이 몰려왔을 때 또 한 명의 아이아스와 함께 메네스테우스를 구하고 트로이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트로이군이 아군의 함대를 습격했을 때 아이아스는 적의 화살의 표적이 되는 것을 무릅쓰고 커다란 곤봉을 휘두르며 갑판 위로 걸어다니면서 지휘하고 있었지만 적이 배에 불을 지르른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때마침 파트로클로스와 그의 미르미돈군이 달려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게게 공격당하여 죽고 갑옷을 탈취당했을 때 아이아스는 자신의 방패로 그 시체를 덮었다. 파트로클로스의 장례 경기가 벌어지자, 아이아스는 몇 경기에 참가하여 레슬링에서는 오디세우스와 무승부가 되고 창 던지기에서는 디오메데스에게 졌다. 후에 아킬레우스가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오디세우스가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에 아킬레우스의 시체를 그리스 진영 안으로 운반하여 갑옷을 지켰다.

 

아이아스의 죽음에 관한 몇가지 설중 가장 신빙성 있는 설은 <<오디세이아>>에 약간 나와 있고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아킬레우스가 사망한 후에 누가 그의 갑옷을 이어받을 것인가하는 논쟁이 벌어졌는데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가 이것을 요구하였다. 그리스군의 지휘관들은 이를 투표로 결정했다고 하고,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그들은 사로잡은 트로이의 예언자 헬레노스에게 결정하도록 위임했다고 한다.

 

아무튼 갑옷은 오디세우스가 차지하였다. 그래서 아이아스는 자기편 군대를 밤중에 공격하려 했는데 아테나 여신이 그를 미치게 만들어 자기편 병사들 대신 양떼를 죽이게 하였다. 제 정신이 든 아이아스는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고민하던 중 헥토르에게서 받은 칼로 자살하였다. 그 피가 땅에 스며들자 (장소는 그의 고국 살라미스라 한다) 거기서 아이리스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잎에 AI 두 글자의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는 그의 이름 맨 앞 두 글자이기도 하고 '슬프다!'는 의미의 그리스어이기도 하다.

 


아테나의 조종으로 미쳐서 저지른 자기의 우행을 부끄러워하여
칼 위에 몸을 던져 자살한 아이아스.
불티 출토 (런던 대영 박물관)

또 오디세우스의 배가 표류하다 난파했을 때 아킬레우스의 갑옷이 떠다니다가 트로아스에 있는 아이아스의 무덤 부근 해변에 떠밀려 왔는데 신의 심판으로 아이아스가 그토록 고대하던 물건을 사후에나마 손에 넣었다는 설도 있다. 아이아스가 사망한 후에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처음에 아이아스가 미쳤을 때 저지른 행위를 트집잡아 그의 시체를 매장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오디세우스가 그들을 설득하여 그것을 철회토록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그는 아킬레우스와 마찬가지로 파리스가 쏜 화실에 맞았지만 그가 어렸을 때 헤라클레스가 그의 몸에 사자 가죽을 씌워 불사신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트로이인들은 그를 진구렁에 산 채로 매장했다고도 한다. 또 하나의 설에 의히면, 그는 오디세우스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한다.

 

아이아스에게는 애첩인 테크메사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에우리사케스('폭넓은 방패'의 뜻)가 있는데 아이아스는 그를 프리기아인과의 싸움터에 데리고 왔다. 이 아들은 텔라몬의 뒤를 이어 살라미스 왕이 되었다.

 


 

2.

로크리스의 오프스 왕인 오일레우스의 아들. 헬레네의 구혼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일리아드>>안의 중요 인물이다. 아마도 텔라몬의 아들인 아이아스와 이름이 같기 때문에 함께 자주 싸움터에 나간 모양이지만 두 사람은 두드러지게 대조적이었다. 오일레우스의 아들인 아이아스는 키가 작고 발걸음이 빠르고 창던지기의 명수였으며 무명으로 짠 속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40척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트로이로 향했다.

 

성격면에서도 텔라몬의 아들인 아이아스와 크게 달랐다. 오만 불손하고 신들 - 특히 아테나 여신을 증오했다. 파트로클로스 장례 경기가 벌어졌을 때 전차 경기를 하는 도중 이도메네우스에게 지나친 모욕을 주었다. 도보 경주에서는 그가 이길 게 뻔했는데 아테나 여신이 농간을 부려 오디세우스가 승리하게 되었다. 즉 오일레우스의 아들인 아이아스는 쇠똥을 밟고 미끌어져 패배하였다. 그래서 그가 아테나 여신을 저주하게 된 것이다.

 

트로이를 약탈한 후에 아이아스는 자기 자신과 그리스인에게 커다란 재앙을 가져올 소행을 저질렀다. 즉 아테나 여신의 신상 옆으로 피해있던 카산드라를 끌어내어 욕보인 것이다. 이때 신상도 쓰러뜨렸는데 신상은 그 폭행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놓여져 있었다. 다른 그리스인들은 무서운 죄를 저지른 아이아스를 죽이려 했지만 그는 자신이 쓰러뜨린 신상을 꼭 붙잡고 있어서 그리스인들도 두려움 때문에 손쓸 수 없었다.

 

아테나 여신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아스와 그를 처벌하지 못한 다른 그리스인들에게 벌을 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리스 함대가 귀로에 올랐을 때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부탁하여 폭풍우를 일으키게 하여 함대가 에우보이아의 남부에 있는 카펠레우스 곶 앞바다에서 난파하였다. 아테나는 아이아스의 배에 벼락을 쳐서 격침시켰지만 아이아스는 바닷가로 헤엄쳐나와 신들의 노여움을 이겨내고 무사히 살아 남았다고 자만하였다. 그러나 기라에라는 바위산에 기어오르는 도중에 포세이돈의 벼락을 맞아 익사했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망한 후 아이아스는 테티스에 의해 미코노스 섬에 매장되었지만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은 아테나는 그의 조국인 로크리스에 악성 전염병을 퍼뜨렸으므로 로크리스인들은 델포이 신탁에 따라 해마다 두 명의 처녀를 트로이의 아테나 신전에 보내어 봉사하게 하는 데에 동의하였다. 두 명의 처녀를 트로이 주민의 눈에 띄면 죽임을 당하므로 눈치못 채게 하여 트로이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관습이 1천 년이나 계속되었다고 역사시대 후의 로크리스인들은 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