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는 핑계는 참 유용하다. 아무리 바빠도 책 한 줄은 읽으면서 글 한 줄 쓰는 건 왜 그리 어려운 건지.
얼마 전에 <코스모스>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지난 가을 <알쓸인잡>을 보다가 결심했던 <사피엔스>, <총,균,쇠>, <코스모스> 3종 세트 읽기를 완성했다. 읽고 싶은 책 목록이 가득한데 다 제쳐두고 저 3권을 먼저 읽은 건, 지금이 아니면 다시 또 못 읽고 바라만 볼 것 같기도 했고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읽다 보니 <총,균,쇠> 이야기도 너무 많이 나오고 해서였다. 그래서 이참에 늘 숙제 같던 저 책들을 처리(?)하자 싶었다. 그리고 그런 결심을 한 나 무한대로 칭찬한다!!
<사피엔스>는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아주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어떻게 보면 스릴러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유발 하라리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나갈 지 무척이나 궁금해지기도 해서 한 번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그렇다고 밤에 오는 잠을 막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현대 인류와 아주 비슷한 생명체는 약 250만년 전에 출현했다고 한다. 나는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선사시대를 다루는 책을 읽다보면 과거의 어느 일이 떠오르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뭘 몰랐구나 싶다.
2000년대 초반, 나는 교양으로 중어중문학과 수업을 들었는데 그 겨울방학 때 2주 정도의 기간으로 중국을 다녀오는 강좌가 있었다. 자매결연이었나 중경대학교랑 연결되어서 1주 정도는 중경대학교 외국인 기숙사에서 머물면서 수업도 듣고 근처 유적지도 다녀오고 나머지는 지금은 수몰된 지역이나 북경에 있는 자금성 등을 돌아봤다. 그 때 참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이 배웠다. 지금도 그 때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웃곤 한다.
중경대학교에 있을 때 중경대에서 우리에게 중국인 학생 한 명씩 붙여줬는데, 기숙사에서 그 아이들이랑 이야기할 때 있었던 일이다. 낮에 인사를 하고 학교를 구경시켜주고 밤에 기숙사 방에 돌아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중국인 학생이 우리에게 묻는 거다. "너네 역사 얼마나 됐어?" 라고. 그래서 나는 종이에 700,000년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그 숫자를 본 그 중국인 학생은 빙그레 웃더니 (진짜 말 그대로 빙그레 웃었다.) 종이에 2를 적고 우리를 보더니 0000000000 이렇게 적는거다. 쉼표도 안 찍고 숫자를 하나 하나 정성 들여서 말이다. 그 아이의 표정은 '중국 역사는 진짜 오래됐어. 너네보다 훨씬 말이야. 멋지지? 역시 중화사상 짱!' 뭐 그런 걸 담고 있었다. 그 때 우리의 반응은 살짝 흥분해서 아니, 중국어로 우리도 실제로는 저거만큼 됐다 이거를 어떻게 말하지? 이거였다. 하하하하하
중국만 가면 뭐든지 과장하게 되는 건지는 몰라도 우리들의 저 대화는 아직까지도 웃기고 부끄럽다. 지금 그 때로 돌아가면 적어도 그 말은 했을텐데. "너 지구의 나이는 알고 있니?", "현생인류가 언제 출현한 지 아니?", "최초 문명은 중국 아니잖아." 뭐 이런 말 말이다.
이 이야기는 어찌보면 <사피엔스>를 이해하기 좋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 종만이 지구상에 살아남았는지를 살펴보다 보면 인지혁명을 빼 놓을 수가 없고, 그 '상상력'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국가, 종교, 이데올로기 등으로 엮어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중국의 역사가 20억년 혹은 200억년은 되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상상력'이 발휘된 것이니, 호모 사피엔스의 상상력은 어마어마하다.
지금도 여전히 인종 청소니, 전쟁이니 이런 일들이 자행되는 것을 보면 유발 하라리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우리는 어쩌면 지구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종일지도 모르고, 스스로 불행으로 걸어들어가는 종일지도 모른다.
<총,균,쇠>는 <사피엔스>보다는 덜 재밌었다. 하지만 주제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었기에 즐겁게 읽었다. 이 책은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뉴기니의 얄리는 새를 연구하러 온 제레미 다이아몬드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였던 이 질문이 이 두꺼운 책을 나오게 했다. 질문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 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인류의 발전은 어째서 각 대륙마다 다른 속도로 진행 되었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다음으로 귀결된다. 구대륙이 신대륙을 침범해서 원주민들을 학살했는데, 이 때 주된 무기는 총(쇠) 그리고 균이다. 그러면 그 균은 왜 구대륙인들에게는 괜찮은데 신대륙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을까? 그건 구대륙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재배 가능한 작물종이 더 많았고, 가축화 할 수 있는 종이 더 많았기 때문에 구대륙인들은 그들로부터 오는 균에 면역력이 생길 수 있었다라는 거다. 하지만 신대륙은 기후 등 지리적 환경 때문에 재배할 수 있는 작물도, 가축화 할 수 있는 동물도 적었기에 구대륙에 비해 면역력이 떨어졌다고. 얄리의 질문은 지리적 특성이라는 대답을 얻었는데, 이는 결국 '운'이었다가 되었다. 백인이 인종적으로 뛰어나서도 아니고 더 똑똑해서도 아니다라는 게 사실은 핵심이다. 인간은 환경에 영향을 받게 되고, 흑인이든 백인이든 황인이든 상관없이 어떤 환경에 노출되어 경험치가 쌓이는 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비판을 받고는 있다지만, 우월한 인종은 없다라는 건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덧붙여 이 책 뒤에 있는 논문이 무척 흥미롭다. 서구학자가 이런 논문을 쓰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이 나올 당시 일본의 영향력이 클 때였는데도 말이다.
<코스모스>는 아주 읽기 어려웠다. 왜냐면 난 문과생이니까. SF 소설을 좋아하고, 숫자를 다루는 직업을 가졌지만 문과생이니까. 그래도 읽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저 과학만을 다룬 책이 아니었으니까. 칼 세이건도 그렇고 스반테 테보도 그렇고 마리 퀴리도 그렇고 이성적이기만 할 것 같은데 아주 감정적인 면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들은 거대한 이성으로 과학적 성과를 이루었고, 격정적인 감성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격렬하게 사랑한 것일까. <코스모스>의 저자인 칼 세이건은 이 책을 자신이 가장 사랑한 앤 드루얀에게 바쳤다.
이 책은 신화(포폴 부흐)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코스모스(*우주의 이렇게 훌륭하게 정돈된 질서(p.343))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우주적인 입장에서 보면 아웅다웅 살고 있는 우리네 삶이 찰나의 먼지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칼 세이건은 그런 식의 허무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주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하나로 보면서 '이 창백한 푸른 점'이 얼마나 아름답고 생동감 있는 별인지, 그 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야기 한다.
의외로 수천 년 전 이오니아 인들의 관찰력이나 통찰력이 굉장해서 놀랐다. 그 때는 공기가 깨끗하고 자연적인 빛 외에는 밤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 힘들었기에 밤하늘이 잘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들이 그렇게 잘 보이고, 지구 너머의 어떤 것들을 상상하고 거리를 가늠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쩌면 인간은 점점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종교와 기술의 진보라는 것이 인간의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학에서도 저 먼 과거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과학자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들(특히 데모크리토스)이나 문학가들, 예술가들의 일화나 문장들이 언급된다. SF소설인 <우주 전쟁>의 문장들도 소개된다. 과학자이면서 시인의 글을 쓰는 칼 세이건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찬란한 별들이 가득한 우주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구가 파괴되어 화성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에서 화성에는 생명체가 있는지, 금성에는 생명체가 있는지, 우리 은하 외에 다른 은하에는 생명체가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평화롭기를 바라기도 했고.
인간은 그동안 자신과 다르면 파괴하고 싶어했다. 그것이 같은 인간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다름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면 폭력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외계 생명체 역시 나와 다르다고 무조건 적대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탄소로 이루어진 우주, 탄소로 이루어진 인간. 정말 말 그대로 인간은 우주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며 살아가면 좋겠다.
10장을 읽던 중 4차원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4차원에서의 실체는 안팎이 뒤집혀질 수도 있다고. 내 몸 안에 있는 장기가 밖으로 나오고 은하가 내 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내 안에 우주가 있다는 게 진짜 말 그대로였을까 소름이 돋기도 했다. 신기하고 놀라운 주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데 재미있기도.
이 책은 20세기에 쓰여졌기 때문에 바뀐 내용들도 있다. 제일 눈에 크게 들어오는 하나는 명왕성의 존재다. 이건 나도 아니까. 명왕성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행성에서 제외 되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전히 태양계의 아홉 번째 행성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외에도 있겠지만 과학 지식이 일천한 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이 세 권을 읽다보면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셋 다 '나란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묻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사피엔스> - P586
커피에 중독된 독자들은 커피를 작물화한 고대 에티오피아의 농부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커피도 원래는 에티오피아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나중에 아라비아에 전해졌다가 다시 전세계로 퍼져나가서 오늘날 브라질이나 파푸아뉴기니 같은 머나먼 나라의 경제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다. -<총,균,쇠> - P573
책은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다. 책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조상의 지혜를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이렇게 해서 도서관은 인류가 이룩한 거대한 지식 체계와 위대한 통찰의 세계를 우리와 연결시켜 주는 고리의 구실을 한다. 도서관이 전해 주는 통찰과 지식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자연으로부터 숱한 고생 끝에 힘들여 발굴해 낸 고귀한 보물이다. 그들은 온 인류사를 거쳐 행성 지구의 전역에서 선발된 위대한 지성들이었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우리에게 큰 교훈과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류가 고유의 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중략) 우리가 키워 온 문명이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냐는 우리 각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공공 도서관을 지원하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공공 도서관이 인류 문화 창달의 버팀목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깊이 숙고해 봐야 한다. -<코스모스> - P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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