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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ㅣ 안전가옥 앤솔로지 8
김혜영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12월
평점 :
얼마 전까지 정말 더웠는데 어느새 해 뜨는 시간은 늦어지고 해 지는 시간은 빨라졌다. 하늘은 높고 파랗고 바람이 분다. 시간은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어쩌면 견디기 쉽게 도와주기도 한다. 상처 받은 이가 그렇게 시간에 기대어 견디는 동안, 상처를 준 이는 어떻게 지내는 걸까. 여기 다섯 가지 이야기 중에 상처를 주고 받은 이들의 이야기가 세 개,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상처 받은 세상을 헤쳐나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두 개가 있다.
<습습 하>, <엔조이 시티전(傳)>, <김민수(학부재학생)>이 끔찍한 상처를 극복하는 이야기라면, <우리 안에>, <편의점의 운영원칙>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해 상처 받은 이들이 함께 사태를 극복하는 이야기이다.
<습습 하>에서 성범죄의 희생양이 된 그녀는 나와 룸메가 사는 방 옆 방에 산다. 큰 방을 억지로 두 개의 방으로 나눈 탓에 전기요금은 늘 하나의 고지서만 나왔고, 나와 룸메는 고지서를 먼저 챙겨 옆 방의 그녀로부터 5천원을 더 받아 계란을 사 먹었다. 그랬기에 사라진 고지서는 옆 방으로 잠입(?)하기 딱 좋은 이유였다. 엉망진창 쓰레기장인 그녀의 방은 망가진 그녀의 삶과 같았다. 가해자는 자유롭고 피해자인 그녀는 계속 고통 받고 있다. 그런 그녀의 언니가 속을 알 수 없는 상자 하나를 보내온다. 그리고 그 상자는 그 가해자의 식도와 통한다. 자, 그 상자 안에 무엇을 넣고 싶은가. 과연 그녀와 그녀의 언니와 나와 룸메는 어떻게 될까. 그녀는 그 고통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계란 없는 열불라면은 너무 매워 스읍스읍 소리가 났다.
<엔조이 시티전(傳)>은 가상현실 RPG 게임 이야기이다. 장화홍련전(傳)이나 아랑전설이 떠오르는 이야기인데, 나도 모르게 숨 죽이며 게임 하듯 읽었다. 엔조이 시티라는 게임을 하며 방송을 하는 나는 게임 속 이름이 '춘향'이며 '남원 마을' 길드장이다. 이제 회사가 나몰라라 던진 이 게임을 좋아하던 터라 마지막까지 이 곳에서 게임을 하며 방송을 하던 나는 이 남원 마을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 한다. 게임에 귀신이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싶어 읽다보니 사뭇 공포 영화 보는 것 못지 않게 흥미진진했다. 억울하게 죽은 장화와 홍련이 사또 아니 춘향이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 게임 속 미션을 던지고 미션을 완수한 후 아이템을 획득해서 다음 미션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일반 게임과 같지만 어쩐지 책 밖에 있는 나에게도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장화와 홍련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그 억울함은 풀 수 있는 것일까.
<김민수(학부재학생)>은 현재 젊은이들의 슬픈 이야기인 동시에 이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야기이다. 전염병 때문에 화상 수업이 당연하게 된 시국에 비대면 강의를 듣는 사람 중에 김민수(학부재학생)이라는 계정이 아무래도 도강을 하는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다. 모든 게 미상인 그 계정은 유령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채로 그렇게 계속 비대면 강의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계정과 같은 강의를 듣는 제인은 졸업이 코 앞이고, 연인인 현준은 졸업해서 인턴 생활을 하다 재계약에 실패한 상태다. 둘은 제주도로 놀러 가기로 했는데, 제주도 펜션의 부부는 어딘가 이상하다. 현준은 떠도는 소문을 이용해 김민수(학부재학생) 계정을 만들어 제인을 스토킹 하고, 제인을 혼자 내버려두고, 온갖 나쁜 말로 제인을 괴롭힌다. 상대를 칼로 찌르는 건 자신을 찌르는 것과 같다는 걸 언제쯤 알게 될까. 그런 걸 안다면 그런 짓을 하지 않겠지. 제인은 이제 가만히 폭력에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웠고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김민수(학부재학생)의 존재는 누가 우선이었던 걸까.
<우리 안에>는 손톱 먹고 사람이 된 쥐 이야기가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김 순경과 아내는 곧 부모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바깥에는 점점 인간의 지능을 닮아가는 거대한 쥐 떼가 있다. 처음에는 작은 동물부터 나중에는 성인 남자에 이르기까지 공격을 한다. 마치 싸이코패스나 연쇄살인마들이 단계를 밟아가듯이 말이다. 재난은 예고 없이 온다고 재난에 대비해 보지만 막상 닥친 위험 앞에서 김 순경은 '골든 아워'를 놓치고 약하다 생각했던 아내는 오히려 든든한 김 순경의 조력자이자 배우자였다. 마치 좀비 떼와 싸우는 영화를 보듯, 연쇄살인마로부터 도망치는 영화를 보듯 눈에 힘을 주고 읽었다. 부디 둘 다 아니 셋 다 무사하길. 험난한 세상에 아기를 빼앗기지 않기를, 되찾을 수 있기를. 살아남을 수 있기를 모두가.
<편의점의 운영 원칙>은 마치 나폴리탄 괴담을 보는 듯 했다. 규칙들을 나열하고 어딘가 모순되는 규칙을 하나 넣어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그 모순이 편의점 알바생인 변정희를 구하고, 편의점 점장의 딸을 구할 희망을 주게 된다. 세상은 마물 따위의 저승에 속한 것들이 나타나고 있었고 그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면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해치우던지 피하던지 해야하는 무슨 영화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특히나 이 편의점은 심령 스폿이라고 그런 마물들이 자주 출현하는 곳이라 야간 알바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곳이다. 아니, 그런데 그렇게 위험한데 밤에 꼭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일까. 편의점 본사에 항의라도 해서 밤에는 영업을 안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은데 말이다. 한국인은 부지런하다 뭐 이런 괴담은 아닐까... 좀비물이 한창일 때 한국인은 좀비 출현을 대비해서 일찍 출근하고, 붙잡는 좀비를 퇴치하면서 출근하고는 동료 직원과 오늘 만난 좀비에 대해 뒷담화 한다는 우스개소리가 뭔가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고나 할까.
어차피 마물이든 귀신이든 모두 인간에게서 비롯한 것이니 결국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건 불변의 진리인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또 사람이 사람을 살리니 세상 일이 참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제 더 이상은 울고만 있지 않고 맞서 싸워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덜 아프고 더 나은 세상을 살아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