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런 신발 !




                                                                 

                                                                                                    봄이 오면 운동화를 사고 싶다는 마음이 을숙도 점례 할매집 둔덕에 피는 쑥도 아니면서 불쑥 솟는다. 지난겨울 내내 방한을 위해서 무거운 신발만 신다가 봄이 되니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싶지만,

나이가 들다 보면 운동화를 신을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곤 된다. 뿐만 아니라 운동화 가격도 만만치 않다. 실용성을 따지자면 한두 번 신다가 신발장에 갇힐 운동화를 사느니 그 돈을 보태서 좋은 구두 한 켤레를 사는 게 경제적 소비이다. 나는야.....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행동가 !  4년째 1일1식을 실천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최소주의 삶에 경도되어서 내가 소유한 물건을 내다 버리기 시작했다. 일단 현관에 위치한 신발장에 갇힌 신발은 두세 컬례만 남기도 모두 처분했고 책은 돈이 될 만한 것은 팔고 나머지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가지고 나가서 나눠주었다. 책장을 1/5 줄이는 데 성공 ! 

옷은 90% 정도 처분했다.  작년에 입지 않은 옷은 올해도 입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작년에 입지 않았고 올해도 입지 않은 옷은 내년에도 입지 않을 가능성에 매우 높다는 어느 미니멀리스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버리기로 했다. 내가 동물 털로 만든 오리나 거위 털 패딩을 입은 소비자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는 이유 또한 내가 오리나 거위 털 패딩을 처분했기에 가능했다. 비열한 지적질이 아닐 수 없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의 말씀 올린다. 아임쏘리 ! Ummmm..... 아임파인탱큐,엔드유 ? 그래도 봄인지라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5월 7일에 피는 진달래처럼 폴짝폴짝 뛰고 싶다.

어느 미니멀리스트는 경제적 소비와 윤리적 소비를 위해서 옷을 살 때에는 옷 가게에 가기 전에 먼저 집 옷장을 열어보라고 충고했다. 나는 무릎 탁, 치고 아, 했다. 아 _ 하고 나서 무릎을 탁, 치면 이상하니까. 옳거니 ! 그는 옷 매장에서 가장 예쁜 옷을 사는 것보다는 집 옷장에 걸린 옷과 두루두루 어울릴 만한 옷을 사야 실패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합리적 소비자이자 경제적 소비자이며 윤리적 소비자이기도 한 나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운동화를 사기 전에 옷장 대신 잘 신지 않은 신발들만 따로 모아둔 다용도실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깜짝 놀랐다. 운동화라고는 한 켤레도 없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멀쩡한 운동화가 여섯 켤레나 있는 것이 아닌가 ?  더군다나 밑창을 살펴보니 밑창이 거의 닳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새 운동화나 다름없었다. 어찌 된 일인가.  타임라인을 뒤로 돌려보기로 했다. 지난 날들이 주마등까지는 아니더라도 밝은 형광등처럼 지나갔다. 아, 이런 씨이이인발 !  나는 해마다 봄이 되면 운동화 한 켤레를 샀던 것이다. 운동화 한 켤레 없는 내 빈궁한 삶을 저주하며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재재재재......  그리고는 봄날에 잠깐 신었다가 경성 모던보이 풍각쟁이 날라리 오빠처럼 쉽게 싫증을 내고는 다른 고무신으로 갈아탄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비자이며 내로남불의 이중인격자인가.  입만 열었다 하면 윤리적 소비를 외치던 녀석이 알고 보니 해마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놈이었던 것이다.  운동화 여섯 켤레를 세탁기에 넣어 세탁한 후 뽀송뽀송하게 말렸다. 피식, 웃음이 났다.  참.... 골고루 샀구나. 퓨마, 나이키 1.2, 컨버스, 소커니, 아디다스. 이토록 어리석은 소비 욕망 - 들. 깊이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 신발처럼 깨끗한 운동화를 보면서 결심했다. " 그러고 보니 뉴발란스 운동화가 없네 !  뉴발란스 하나 사야겠어...... "


 

 






덧 ㅣ 이 화창한 봄날, 이게 다 문재인 덕이다. 만수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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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8-04-27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빛과 그림자를 드라마틱하게 활용하는 곰곰생각하는발님의 사진..

네.. 이게 다 문재인 덕입니다
충분히 누리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4-28 06:05   좋아요 1 | URL
막국수처럼 막 찍은 사진입니다..ㅎㅎㅎ


하여튼 이게 다 문재인 덕이고 촛불 시민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와같다면 님 !! (제가 알기로는 나와같다면 님, 항상 촛불 집회에 나오셨던 분.. )
 

 

                       

당신의 시간을 삽니다  :


 





시간에 쫓기는 청춘들 


 


                                                                                                   보통 섹스는 시간을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쾌락이다. 이 글은 사정 시간을 지연해서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차원을 이야기하는,  조루냐 지루냐 그것이 문제로다 _ 따위를 논하는 장이 아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남성이 여성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남성은 여성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훌륭한 매너와 선한 의지를 선보여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둘은 사랑을 나눈다.  물론, 치명적 매력의 소유자여서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은 한량도 있지만 일반 남성 대부분은 원빈 앞에서 모두 오징어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었던가.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인가, 부끄럽고요. 됐고 !  그런데 성범죄 가해자들은 이 지루한 시간을 생략한 채 바로 결과만을 얻으려고 한다.  그들은 권력과 재력으로 이 지난한 공정을 생락한다. 

매춘은 돈을 주고 여성의 몸을 산다기보다는 이성과 섹스를 하는데 들어가는 시간 비용을 사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그 상품을 만드는데 들어간 노동자의 시간(품값)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노동 시간이 늘어날수록 가격은 올라간다.  현빈의 츄리닝이 공장 츄리닝에 비해 명품인 이유는 장인이 손수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인 탓이다.  자본가가 노동자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돈을 주고 타인의 노동 시간을 구매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을 수 있는 것은 가사 노동자가 정성을 들여서 밥상을 차렸기 때문이니까. 

반대로 가난한 노동자는 항상 시간에 쫓긴다.  아침에 눈 뜨면 부랴부랴 씻고 출근길 지옥철에 몸을 싣는다.  늦잠이라도 자는 날에는 분초를 다투는 달리기도 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와는 달리 시간을 구매할 여윳돈이 없기 때문에 항상 시간에 쫓긴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차이도 불공정한 시간 배분에 있다.  흙수저는 치솟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해서 알바 일을 하지만 금수저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면 된다. 당연히 흙수저는 금수저에 비해 공부 경쟁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특혜와 편법이 난무하게 되면 일반 평사원이 전무가 되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 30년은 3년으로 단축되기도 한다.

대한항공 조현민 씨처럼 말이다. 조현민은 애비와 에미를 허벌나게 존나 잘 둔 덕에 남들이 임원이 되기 위해 투자한 시간을 무려 27년이나 생략한 채 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허벌나게 존나 말이다. 나는 그들 로열 패밀리에게 허벌나게 존나 묻고 싶다. " 자사 노동자를 그렇게 노예 부리듯이 부려먹으면 허벌나게 좋냐 ?  " 이렇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 격차는 시간 불평등을 야기한다.  대한민국 일반 노동자의 노동 시간이 살인적 수치'라는 것은 한국 사회가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여기에 더해 치솟는 집값은 가난한 도시 노동자의 집터를 서울에서 서울 외각 자리로 밀려나게 만든다.

당연히 출퇴근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살인적인 노동 시간과 함께 퐌타스띡한 출퇴근 시간을 더하면 가난한 노동자는 늘 시간이 모자란다.  개그콘서트에서 인기 있었던 코너 << 생활의 발견 >> 은 흙수저의 시간 불평등을 이야기한다. 이와 관련하여 쓴 글이 있기에 갈무리하며 매조지하자.














개그콘서트,  생활의 발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시장의 법칙이다. 골목 또한 마찬가지다. 흩어져서 제각기 경쟁하는 것보다 같은 업종의 가게들이 모여서 골목을 형성할 때가 더 유리하다. 골목 형성이 효율적인 상권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벌집처럼 오밀조밀하게 모인 군집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광고 역할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단, 가고 본다 ! 가장 좋은 책은 종이책이지만 그래도 최선책이 아니면 차선책이 있지 않은가 ? 풍전옥이 문전성시라면, 그 옆의 전주집은 어떤가 ? ** 골목의 장점은 상황에 대처할 피드백이 공존한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터들이 좋은 상권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이 영광은 < 원조 > 들의 <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가난의 서사‘ > 를 밑바닥에 깔고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가난했던 그들이 그곳에 터를 잡은 까닭은 그곳이 변두리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

 

골목의 큰 판이 바로 시장이다. 이 시장도 원조들의 가난한 성공담을 바탕으로 한다. 변두리는 어느새 이들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상권의 중심이 된다. 땅값이 오른다. 재주는 상인이 부렸는데, 상금은 건물 입대 주인이 주워 먹는 꼴이다. 최초의 시장이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시장 근처를 중심으로 주거지가 형성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였으니 달동네가 형성되는 것이다. 할렘의 한국 버전이 바로 달동네다. 할렘의 탄생이다. 처음에는 값 싼 지역으로 출발했지만 시장의 범위가 커지자, 땅 값은 치솟는다. 이 치솟는 집값을 마련할 여지가 없는 사람은 좀 더 먼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한국의 부동산 정책이라는 것이 대충 이런 식이다.

 

지금부터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다. 시장 밖 주거지로 옮긴 ( 더 싼 방을 위해서 ) 시장 노동자는 시장 중심에서 멀어진 만큼 더 많은 노동 시간을 할당받는다. 왜냐하면 출퇴근 시간이 그만큼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시장 안 노동자'보다 1시간은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서야 한다. 그래서 집이 없는 시장 노동자는 이래저래 지친다. 그런데 문제는 더욱 꼬인다. 시장 중심을 장악했던 외지인은 배가 부르자 복잡한 주거 복합 상권에서 벗어나 전원 생활을 즐기고자 한다. 퇴직연금자나 건물 임대업자 그리고 성공한 자영업자들의 출퇴근 시간'이야 엿장수 마음대로가 아닌가 ?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쫓아냈던 원주민이 사는 곳‘으로 옮긴다. 땅값은 오르게 되어 있다. 이에 시장 노동자는 쫓겨나듯이 다시 더욱 먼 곳으로 옮긴다. 그만큼 출퇴근 시간은 더욱 늘어난다. 악순환. 악순환이다. 이제는 서울에 직장을 둔 경기도 외각 거주자가 탄생한다. 그들은 출퇴근 왕복 세 시간을 거리에 버리는 것이다.

 

초기 < 생활의 발견 >서사는 바로 가난 때문에 자신의 주거지를 빼앗긴 가난한 외각 거주자의 씁쓸한 풍경을 다룬다. < 생활의 발견 > 이 주는 웃음은 장소와 사연 ( 둘 중 하나는 이별을 통보한다. ) 의 엇박자가 주는 골 때리는 장면에서 쏟아진 페이소스'다. 그들은 그곳에서 이별을 통보한다. 노릇노릇 구운 삼겹살과 마늘을 상추에 싸서 한 입 가득 입에 물고는 우리 헤어져 ! ” 를 진지하게 말한다. 이별과 식욕의 관계는 마치 < 금각사 > 의 미시마 유키오< 인간실격 > 의 다자이 오사무의 관계만큼이나 어색한 상극이다. 이별 앞에서의 왕성한 식욕이라니 !

  

하지만 호탕하게 웃다 보면 왠지 모를 비애가 느껴진다. 그것은 슈퍼맨이 아닌 소시민의 비애이리라. 이별에 어울리는 장소는 어디일까 ? 비 내리는 풍경이 보이는 창 넓은 커피숍 정도가 적당한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콩트 속 주인공은 대부분 식당이다. 왜 그들은 커피숍이 아닌 식당을 선택할까 ? 보아하니, 콩트의 배경은 저녁인 것 같다. 퇴근길이거나, 수업을 끝내고 만난 것이다. 그들은 식당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한다. 밥도 먹고, 자판기 커피도 마시며,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한다. 그들은 한곳에 앉아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는 것이다. 부자들이야 밥은 식당에서, 술은 술집에서, 이별 통보는 마지막에 들린 찻집에서 하지만 가난한 자는 그럴 수가 없다. 돈도 돈이거니와 시간도 없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는다. 그놈의 퇴근길은 지옥 같다. 걸레처럼 지친 몸으로 잠이 들고, 다시 걸레처럼 늘어진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상황이 그러하니 마음먹고 제대로 이별을 통보할 수도 없다.그냥 한곳에 앉아서 오늘 해야 될 모든 코스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가 이별 고백을 했던 감자탕 집 < 풍전옥 >은 식당이었으며, 술집이었고, 커피숍이었다. 짬짜면이었다. 이렇게 중요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이렇게 왁자지껄하는 웃기는 짬뽕 같은 식당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정말, 정말, 정말 웃기는 짬뽕이다. < 생활의 발견 > 을 볼 때마다 나는, 내 마음 속에서 사는 찌르레기가 한 마리가 찌르르르 울어서 마음이 아프다. 이별조차도 멋지게 할 수 없는 서울이라는 곳에서, 이별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넘치는 노동 시간 앞에서, 퇴근길 지옥 앞에서 우리는 꾸역꾸역 살아간다. 마음도 몸도 모두 지친 우리는 슬픔 앞에서도 침이 고인다. 마치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밥그릇 앞에서 무한 대기해야 하는 개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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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4-23 09:29   좋아요 0 | URL
제 이웃이 말씀하시더군요. 요즘은 ˝ 시간을 낸다는 ˝ 말을 잘하지 않는다고 말이죠. 정말 지금 노동자는 시간조차 낼 시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2018-04-27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7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롱패딩을 입든 말든 당신이 뭔데 지랄이야 _ 라고 말하는 이에게 :  







정치와 패딩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동물 (깃)털로 만든 옷 10벌 가운데 8벌은 살아 있는 짐승의 털로 만든다고 한다. 처음부터 살아 있는 짐승의 털을 뽑아 옷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뽑은 오리나 거위 깃털을 다른 용도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다가 만들기 시작한 것인데 수요가 급증하다 보니 이제는 강제로 산 짐승의 깃털을 뽑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 깃털을 깎는다 " 는 행위가 아니라 " 깃털을 뽑는다 " 는 데 있다. 깎는다와 뽑는다의 차이를 못 느낀다면 제일 좋은 방법은 역지사지.  김건모는 노래한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네가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     영화 << 올드보이 >> 에서 오달수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당신은 상상하는 순간 비겁해질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이 사람을 A라고 하자)강제로 당신 머리털을 뽑는 장면을 상상하면 된다.  모근에는 살점과 함께 찢어진 살에서 배어 나온 피가 묻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 이 모오오오오오든 것이 1분 안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찢어진 살은 그 자리에서 실로 꿰매진다.  당신이 소시오패스가 아니라면 그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A는 털이 뽑힌 당신을 한 번 쓰고 버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경제적이지 않으니까.  휴먼 패딩을 생산하는 A는 털이 다시 자랄 때까지 당신을 보살핀다.  두 번째 고통은 첫 번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머리털이 강제로 뽑힐 때의 고통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은 기억을 각인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영단어를 암기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육화된 기억이다.  이런 식으로 머리털이 뽑힐 때마다 고통은 N 번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럽다. 

동물 깃털로 만든 옷의 소재를 제공하는 동물들은 평균 10여 차례 정도 털이 뽑히고 나서야 비로소 죽는다고 한다. 이렇듯 짐승은 인간이 부리는 멋을 위해서 평생을 벌거숭이로 살다가 죽는다. 지금 당신이 멋을 내기 위해서 입고 있는 패딩은 그런 식으로 유통된다. 모피를 입고 동물 보호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동물 털로 만든) 패딩을 입고 동물 보호를 주장하는 사람은 서로 다르지 않다. 가죽을 얻기 위해 짐승을 죽여서 가죽 옷을 만드는 행위와 산 짐승의 털을 강제로 뽑아서 패딩 옷을 만드는 행위 중 어느 것이 더 비윤리적일까 ?   내가 보기에는 후자가 더 비윤리적이다.

나는 동물 생명권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인류 멸망이 곧 지구 멸망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동물 털 소재로 만든 패딩을 유행 따라 입고 다니는 소비 형태에 대하여 비판은 해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개고기 식용 반대를 외치며 캣맘을 자처하면서 적극적으로 동물 생명권을 주장하는 당신이 유행따라 패딩 신상을 몇 벌씩 구매하며 블링블링한 엣지를 뽐낸다면 그 행위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신랄하게 비난할 것이다. 여보세요, 지금 당신이 멋으로 입고 다니는 패딩 속 깃털은 피묻은 깃털입니다.  보통 구스다운 한 벌에 들어가는 거위의 깃털은 15마리에서 20마리 정도라고 한다.  

이 표현을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 보통 구스다운 한 벌에 들아가는 거위의 피 묻은 깃털은 15마리에서 20마리 정도입니다아. "  누군가가 패평을 부탁한다면 나는 이런 논평을 내놓겠다.  신의 엣지에 나는 때찌. 제 점수는요 !          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 선택 = 정치 " 라는 점이다. 미시(微視)가 거시(巨視)를 세우는 토양이듯이 거시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의 발화점은 대부분 미시사에서 사소하게 다루던 꼬투리였다.  쉽게 말해서 숲을 전소시킨 발화점은 젖은 풀잎 하나

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을 통해서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인터넷 기사를 읽으며 누른 클릭, 좋아요, 댓글 하나가 결국에는 거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다. 마찬가지다. 당신이 특정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 선택한 목록 또한 결국에는 정치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모피를 구매하려 할 때 윤리적 저항에 직면하듯이 구스 다운 패팅 역시 윤리적 저항에 직면했으면 좋겠다.  끝으로 노래 한 곡 띄웁니다. 인순이가 부릅니다. 거위의 꿈. 저는 이 곡을 끝으로 물러납니다. 좋은 밤 되세요. 굿나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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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4-20 11:14   좋아요 0 | URL
동물 윤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 소비자는 문제가 있습니다.
동물 털 소재로 만든 패딩 소비율이 한국이 1위 러시아가 2위란 소리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 소련은 살인적인 추위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한국은 ? 그거 아시나요 ? 모피 소비율 세계 1위도 한국이라는 거 ?
그 수많은 캣맘과 댕댕이 아빠 엄마들은 그렇게 동물 사랑을 부르짖으시면서 어떻게 살아 있는 짐승의 털을 뽑아서 만든 옷을 죄책감없이 입으며 옷맵시를 뽐내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2018-04-22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4-22 21:31   좋아요 0 | URL
잘 들어갔습니다.. ㅎㅎㅎ 다음에도 또 봅시다.. ㅎㅎ
 

 


 




 

 

 

 

 

 

 

 

 

 

 

 

 

 

 

 


춘향과 이몽룡 그리고 me too



 



                                                                                               << 춘향전 >> 에서 " 춘향 " 은 남성 독자에게 자신의 지고지순한 절개를 세 번 증명해야 한다. 삼세번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좋은, 완결된 숫자이자 완벽한 서사의 종결이 아닌가 !

그래서 춘향은 몽룡을 향한 일편단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치명적 유혹 내지 시련세 번 견디어야 한다. 그것은 기생이라는 하층민이 럭셔리 양반 계급으로 수직 상승하기 위한 통과 의례이다(기생인 춘향은 자신이 꽃뱀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유혹자는 변 사또'다. 변 사또는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 하지만 단칼에 거부한다. 수청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숙청을 의미한다. 그녀는 신체적 고통을 받는다. 당시, 국가 소유였던 기생 신분이 중앙 국가 권력을 대신해서 내려온 지방 분권 권력의 수청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숙청 대상이지만 춘향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첫 번째 도장 깨기에 성공한다.

두 번째 유혹자는 춘향 앞에 거지꼴로 나타난 이몽룡이다. 춘향이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몽룡이 언젠가는 소년 급제하여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는데 이 희망을 거세함으로써 첫 번째 시련보다 더 큰 시련을 던져준다. 어머머, 이 거지 같은 사랑을 계속 유지해도 좋은 것일까 ?  첫 번째가 신체적 시련이라면 두 번째는 심리적 시련이다(고문 피해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육체 고문보다 힘든 것은 심리 고문이라는 고백이다). 하지만...... 견딘다, 춘향은 !   이로써 춘향은 자신의 사랑이 신분 상승에 눈이 먼 물욕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증명한다. 두 번째 도장 깨기도 성공이다. 하지만 관객은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세 번째 유혹자는 암행어사 이몽룡이다. 서열만 놓고 보자면 사또가 늑대'라면 어사라는 신분은 사자'다. 목에 칼을 쓰고 머리를 풀어헤친 춘향 앞에 펼쳐진 암행어사출두 장면은 명불허전이리라.  춘향이가 본 것은 체포 작전 현장이 아니라 으리으리한 의전 행사'다.  그것은 욕망의 불꽃놀이다. 어사 이몽룡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춘향에게 묻는다. 수청을 들라 !  이것은 첫 번째 도장 깨기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  뭐, 다들 아시다시피 춘향은 세 번째 도장 깨기에 성공한다. 내가 << 춘향전 >> 에서 주목한 대목은 왜 춘향이는 자신의 절개를 세 번 증명해야 남성 사회로부터 그 진정성을 획득하는가, 이다.  그리고 유혹하는 자는 왜 모두가 남성뿐인가 ?

최근에 대한민국을 뒤흔든 미투 혁명에서 피해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피해 고백이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남성 욕망이 반영된 탓이다. 춘향전에서 첫 번째 시련을 던져주는 사람이 가해자인 변사또라면 그보다 더 큰 시련을 던져주는 사람은 이몽룡이라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구경꾼인 우리는 미투 사건에서 벗어난 존재이지만 사사건건 개입하여 1차 가해보다 더 큰 가해를 가하는 이몽룡이다. 내가 보기에는 춘향전에서 변사또보다 나쁜 인간은 이몽룡이다. 그리고 미투 피해자의 진심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당신이다  


 



춘향과 이몽룡 그리고 me too, part 2 


 


 

                                                                                                                                                                                 춘향은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은 일부러 거지로 변장한 후에 옥중에 갇힌 춘향을 몰래 찾는다.

비루 먹은 개처럼 꾀죄죄한 모습으로 춘향 앞에 나타난 배삼룡, 아니 이몽룡.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법. 몽룡 때문에 죽음을 앞둔 춘향 입장에서는 몽룡이라는 인간이 시들시들한 노란 싹수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이고 ! 이 글러 먹은 인간아 _ 라고 타박을 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거지 꼴을 하고 나타난 몽룡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맹세한다. 이 부분에서 몽룡, 감동 먹어. 그리고 몽룡과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는 관객도 감동 두 번 먹어 x 2.  하지만 나는 이 옥중 장면에서 열광하는 몽룡과 관객을 향해 퍽유 세 번 날려 x 3. 시바, 지금 뭐하는 개수작이야 !

이 도령이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놈이라면 하다못해 시름에 빠진 춘향에게 내일 너를 구해주겠으니 하룻밤만 더 견디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희망으로 절망을 견뎠던 춘향이 거지가 된 몽룡을 보고서는 절망한 나머지 자결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나. 그런 걱정은커녕 기껏 한다는 짓이 죽음을 앞둔 춘향의 절개(지조)나 시험하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춘향이가 일편단심 민들레여서 좋겠다, 시발놈아. " 이 수작은 다음날에도 반복된다. 몽룡은 어사 출두 의전 퍼포먼스를 한 후에도 춘향을 시험한다. 그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이렇게 말한다.

" 수청을 들라 ! " 조마조마한, 몽룡도 관객도 모두 다 조마조마한 마음. 춘향이 침묵을 깨고 말한다. " 수청을 들겠나이다. 오늘 밤 화끈하게 놀아보아요. "  농담이다. 만약에 춘향이 어사의 수청을 수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해피엔딩일까, 해피 엔드일까 ?  << 춘향전 >> 에서 가해자는 변 사또이고 피해자는 성춘향이며 이몽룡은 주변인에 가깝지만, 이 소설에서 진짜 나쁜 가해자는 이몽룡이다. 옥중 만남 장면과 어사 출두 장면에서 몽룡이 춘향의 절개를 시험하는 장면은 명백한 2,3차 가해'이다. 내가 춘향전과 안희정 미투 폭로 사건을 오버랩하는 이유이다. 가해자 안희정은 변 사또이고 피해자 ***은 춘향이다.

그리고 춘향이에게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하는 네티즌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익명으로 춘향이의 지조를 묻는 이몽룡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전 << 춘향전 >> 이 가부장 남성의 욕망이 중심인 서사이면서도 정작 제목은 < 춘향전 > 이라는 데 있다. 왜, 몽룡전이 아니라 춘향전인가 ?  2008년 12월, 조두순 사건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사건 발생 초기에 명명되었던 나영이 사건이라는 명칭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췄다는 비난에 직면하자 그 이후로 조두순 사건으로 바뀌었다. 하여, 나는 같은 이유로 << 춘향전 >> 을 << 변사또전 >> 혹은 << 몽룡전 >> 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동의하는 사람은 푸쳐핸섭 !

 

 




춘향과 이몽룡 그리고 me too, part 3 


 

 

 

 

 

                                                                                         시간 날 때마다 고백한 바, 나는 임권택 영화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남자.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 시청자처럼, 특정인에 대한 악플도 그 사람을 향한 지속적인 관심의 변형이어서 오로지 까기 위해서 극장에서 임권택 영화를 돈 주고 봤다. 이 정도면 성실한 악플러가 아닐까 ?

 

아비가  딸에게 독약 먹여 눈멀게 하는 패륜을 예술혼이라고 구라치는 << 서편제 >> 를 보다가 실소한 이후,  꾸준히 임권택 영화를 보면서 실소를 남발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고 이 맛에 돈 내고 영화를 잘근잘근 씹는다.   정점은 << 하류 인생 >> 이었다.  부부강간을 부부관계라고 포장하는 개구라에 경악을 금치 못해서 팔짝 뛰었던 기억이 난다. 시바, 이런 짓은 개구리도 안한다 !                   성관계를 거부하는 아내를 폭력으로 때려눕힌 후 섹스하는 장면 다음 컷 1)은 임권택의 여성관을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는 시그니처다. 이것은 영화도 후지지만 감독이 더 후진 케이스.

 

 

 

어디 그뿐인가 ?   영화 << 화장 >> 에서는 꼴에 구라파 예술 영화 흉내 낸답시고 영화 속 아내의 더러워진 여성 성기를 씻기는 장면을 노출시키는데(말 그대로 성기 노출 장면이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도 이 장면에서 성기 노출이 꼭 필요한 장면이었는지 의아할 뿐이다. 성기를 노출시키면 예술이 된다 ?!   이 장면은 사전에 합의된 사안이 아니었다고 한다.  원래는 이 장면에서 상반신 노출만 하기로 했었는데 감독이 느닷없이 성기 노출을 포함한 전라 노출을 요구 2) 했다고 한다. 여성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결정 사항이었을 텐데 

 

촬영 도중에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이 불현듯 예술적 영감이 찾아왔드나, 이 영감탱이야.  모야. 이런 된장, 고추장, 간장, 이명박은 다스 공장 대장....... 허허 !   평론가 정성일이 한국 영화의 금자탑 운운하며 꿀 빨았던 << 춘향전 >> 을 보다가 다른 감독이 만든 << 춘향전 >> 을 비교 평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권택의 << 춘향전, 2000 >> 에서 이몽룡은 칼을 뒤집어쓴 춘향 앞에 두 번 나타난다.  한 번은 옥에 갇힌 춘향 앞에 거지꼴로 나타나고 다음은 어서화 쓴 어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옥에 갇힌 춘향을 만나는 장면에서 이 도령은 몰락한 폐족을 충실하게 연기할 뿐 절망에 빠진 춘향에게 솔루션을 제시하지 않는다. 걱정하는 쪽은 오히려 춘향이다. 그 유명한 사랑의 맹서. 서방님, 내가 죽거들랑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오. 싸랑해요.               이도령은 걱정은커녕 춘향의 굳은 맹서(절개)를 확인하고는 기분이 좋은 듯 옥을 나서면서 월매와 농담 따먹기 놀이를 하기도 한다. 내가 임권택의 << 춘향전 >> 을 보면서 느꼈던 의문은 이렇다. 이몽룡은 내일이면 죽는 춘향이에게 왜 그 어떤 위로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  저 깊은 절망 때문에 스스로 명을 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어사 출도 장면에서도 이도령은 신분을 속인 채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는 제안을 한다. 두 경우(옥중 장면, 어사 출도 장면) 모두 춘향의 절개를 시험하는 장면이다. 반면에 신상옥 감독이 만든 << 성춘향,1961 >> 에서는 이몽룡이 옥에 갇힌 춘향을 만나는 장면이 없다. 그리고 어사 출도 장면에서도 고개 숙인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는 자극적인 스폰서 제안을 하지 않는다. 잰더 인식 측면에서 보자면, 춘향의 절개를 시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상옥의 << 성춘향,1961 >> 이 임권택이 만든 << 춘향전,2000 >> 보다 진보적이다. 반면에 북한 영화 << 춘향전,1980 >> 에서는 이몽룡이 옥에 갇힌 춘향과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사뭇 애절하고 인간적이다.

 

춘향은 거지꼴로 나타난 이몽룡을 보더니 대뜸 과거 시험 결과를 묻는다. 몽룡이 낙방했다고 하자 춘향은 고개를 푹 숙인다. 아놔, 나 좆된 거임 ?! 이런 표정이다. 그런 춘향 앞에 이몽룡은 말한다. " 춘향아, 이 밤 지나면 내 다시 올테니 한탄 말고 기다리오. (옥을 빠져나가다가 다시 춘향에게 다가오며) 내가 다시 오기 전에 스스로 명을 끊었다가는 그대의 소원도 듣지 않을 테니 마음 굳게 먹고 날 기다리오 ! " 내가 임권택의 춘향전을 보며 가졌던 의문을 북한 영화 속 이몽룡의 대사가 속 시원하게 풀어준다. 어사 출도 장면에서도 이몽룡은 고개 숙인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죽음을 넘나드는 마음 고생을 한 춘향에게 농담 따먹기 놀이를 한다는 것은 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인간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이처럼 3편의 춘향전을 비교 평가하다 보면 임권택 영화가 얼마나 비열한 잰더 감수성과 여성관을 가졌는지를 엿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임권택 영화는 형편없는 영화다. 내 주장에 동의한다면 모두 다 푸쳐핸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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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8-04-13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십여 년전에 보았던 코미디 프로가 언뜻 기억나네요. 춘향전의 결말을 뒤튼 희극이었는데 첫 번째(변사또) - 두 번째(거지꼴 이몽룡) 도장 깨기에도 성공(?)한 춘향은 얼굴 가린 암행어사와 마주하게 됩니다. 암행어사는 수청 여부를 묻고, 춘향은 거듭된 거부는 결국 죽음뿐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어사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맙니다. 그 순간 암행어사는 얼굴을 공개하며 황당한 표정을 짓지요.
두 사람은 어쨌거나 첫날밤을 함께 보내지만 표정은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등을 맞대고서 곰곰 생각을 하지요. 이몽룡은 여자의 절개를 의심하고, 춘향은 자신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시험하려 했던 이몽룡의 속마음을 의심하면서, 극이 끝납니다. 그때는 배를 잡고 웃으면서 봤는데, 다시 생각을 해보니 이런 글을 집필한 작가의 역량이 정말이지 대단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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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숭  이  라  서     다  행  이  야   :




 




혹   성   탈   출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ADHD 환자가 되곤 한다. 영화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엉뚱한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면 동행한 사람의 속을 뒤집곤 한다.

나는 A에게 이렇게 묻는다. " 그런데 말이야...... 왜 제니퍼가 제퍼슨을 죽였지 ? "  5,4,3,2,1, 퐈이야 ! A의 대답  :  멍청아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제퍼슨이 제니퍼를 죽였잖아 !!             이게 다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엉뚱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문 결과'다. 영화 << 혹성탈출 >> 를 보면서도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원숭이가 인간의 지능을 얻었으니 다행이지. 개가 인간의 지능을 얻었다면 세상은 개판이 되었을 거야. 인류라는 말도 사라지겠지. 남성은 짝짓기 경쟁에서 밀려날 것이 분명해. 특히 남성에게 개의 진화 현상은 재앙에 가까울 것이다. 뭐, 이런 상상들.

개가 인간의 지능과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벌어질 일들 : 한국 남자들은 입만 열면 복종, 우정, 의리를 이야기하지만 개의 충성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인간의 우정과 의리는 자신이 모시는 보스의 흥망성쇠에 따라 달라진다. 존만이 이명박 선생님을 모시던 충복들의 배신을 보라.  반면에 개는 주인의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주인의 초라한 행색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개는 없다.  바로 이 조건 없는 우정이야말로 아름답지 않은가.  말하는 개의 탄생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본능을 가진 인간을 소외시킬 것이 분명하다. 인간 여성에게 매력적인 존재도 인간 남성이 아니라 말하는 개일 것이다.

진화 심리학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성에 비해 남성의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여러 실험을 통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반면, 개의 공감 능력은 개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인정하는 대목이다. 당신이 울고 있을 때 다가와 초롱초롱한 까만 눈으로 당신의 얼굴을 핥아주는 것은 개'다. 개는 주인이 슬픈 표정을 짓거나 소리 내어 울면 다가와 슬픈 표정으로 당신의 얼굴을 핥고 손을 핥으며 발을 핥는다. 이 짐승의 위로는 개를 키워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 교류다. 개가 주인의 기분을 알아채는 이유는 주인을 향한 몰입, 관심, 직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냄새를 통해 감정을 읽기 때문이다.

개의 후각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다(개는 냄새를 통해 주인의 질병을 간파하기도 한다). 아침 밥을 얻어먹는 일이 인생 목표가 되어버린 조선 가부장 인간 남자 수컷의 까다로운 요구 조건에 비해 개는 사료 한 그릇이면 끝이다. 말하는 개는 아침에 일어나 스스로 사료를 먹고 나서 침대에서 잠자는 애인의 얼굴을 핥아주고는 출근을 할 것이다. 멍멍 !  당신이 여자라면 인간 남자와 말하는 개 가운데 누구를 보이프렌드로 선택할 것인가. 뭐, 답 나오지 ?  경찰이나 검사 같은 특수직도 개에게 유리하다. 범죄자가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후각을 통해 거짓말을 간파하는 능력은 개에게는 식은 죽 먹기다.

이 모든 것을, 이 모오오오든 것을 종합하면 개가 인간의 지능과 언어를 습득한다면 인간 남자는 재앙이 될 것이다. 나는 영화 << 혹성탈출 >> 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개가 아니라 원숭이가 인간의 지능을 얻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영화가 끝나고 나서 A와 나는 술집으로 향했다. 나는 원숭이가 아니라 개가 인간의 지능을 얻게 되면 발생하게 될 인간 남자 수컷의 쓰빽따끌한 비극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A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늦은 밤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봉달 씨가 꼬리를 격하게 흔들며 나를 반겼다.

술에 취한 나는 개를 붙들고 늑대의 후예들이 인간 지능을 얻게 되면 도래할 인간 남성 수컷의 재앙에 대해 말했다. 봉달 씨가 비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 멍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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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11 2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개가 인간 지능을 얻어 인간 기능을 하게 되면 단박에 퇴화해 사라질 특질들 아닐런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4-12 15:03   좋아요 0 | URL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