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패딩을 입든 말든 당신이 뭔데 지랄이야 _ 라고 말하는 이에게 :
정치와 패딩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동물 (깃)털로 만든 옷 10벌 가운데 8벌은 살아 있는 짐승의 털로 만든다고 한다. 처음부터 살아 있는 짐승의 털을 뽑아 옷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뽑은 오리나 거위 깃털을 다른 용도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다가 만들기 시작한 것인데 수요가 급증하다 보니 이제는 강제로 산 짐승의 깃털을 뽑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 깃털을 깎는다 " 는 행위가 아니라 " 깃털을 뽑는다 " 는 데 있다. 깎는다와 뽑는다의 차이를 못 느낀다면 제일 좋은 방법은 역지사지. 김건모는 노래한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네가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 영화 << 올드보이 >> 에서 오달수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당신은 상상하는 순간 비겁해질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이 사람을 A라고 하자)가 강제로 당신 머리털을 뽑는 장면을 상상하면 된다. 모근에는 살점과 함께 찢어진 살에서 배어 나온 피가 묻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 이 모오오오오오든 것이 1분 안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찢어진 살은 그 자리에서 실로 꿰매진다. 당신이 소시오패스가 아니라면 그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A는 털이 뽑힌 당신을 한 번 쓰고 버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경제적이지 않으니까. 휴먼 패딩을 생산하는 A는 털이 다시 자랄 때까지 당신을 보살핀다. 두 번째 고통은 첫 번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머리털이 강제로 뽑힐 때의 고통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은 기억을 각인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영단어를 암기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육화된 기억이다. 이런 식으로 머리털이 뽑힐 때마다 고통은 N 번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럽다.
동물 깃털로 만든 옷의 소재를 제공하는 동물들은 평균 10여 차례 정도 털이 뽑히고 나서야 비로소 죽는다고 한다. 이렇듯 짐승은 인간이 부리는 멋을 위해서 평생을 벌거숭이로 살다가 죽는다. 지금 당신이 멋을 내기 위해서 입고 있는 패딩은 그런 식으로 유통된다. 모피를 입고 동물 보호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동물 털로 만든) 패딩을 입고 동물 보호를 주장하는 사람은 서로 다르지 않다. 가죽을 얻기 위해 짐승을 죽여서 가죽 옷을 만드는 행위와 산 짐승의 털을 강제로 뽑아서 패딩 옷을 만드는 행위 중 어느 것이 더 비윤리적일까 ? 내가 보기에는 후자가 더 비윤리적이다.
나는 동물 생명권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인류 멸망이 곧 지구 멸망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동물 털 소재로 만든 패딩을 유행 따라 입고 다니는 소비 형태에 대하여 비판은 해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개고기 식용 반대를 외치며 캣맘을 자처하면서 적극적으로 동물 생명권을 주장하는 당신이 유행따라 패딩 신상을 몇 벌씩 구매하며 블링블링한 엣지를 뽐낸다면 그 행위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신랄하게 비난할 것이다. 여보세요, 지금 당신이 멋으로 입고 다니는 패딩 속 깃털은 피묻은 깃털입니다. 보통 구스다운 한 벌에 들어가는 거위의 깃털은 15마리에서 20마리 정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