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염을 기르는 이유
옛날 일이다. 내가 항상 다니던 동네 목욕탕이 한 달 간 내부 수리 중이어서 공사 중인 목욕탕이 하루빨리 수리를 마치고 다시 열리기를 학수고대했던 날이 있었다.
동네 단골 목욕탕은 매우 낡아서 70년대 물바가지를 여전히 쓰는 시설이었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이곳에서 때를 밀어야 속이 시원했다. 이상하지, 겉의 때를 밀었을 뿐인데 속이 시원하다니 ! 드디어 개장하던 날 새벽에 목욕탕을 찾았다. 표를 받고 늘 가던 대로 2층 계단 왼쪽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새로 뽑힌 듯한 매표소 직원이 큰 소리로 나를 불러 세우더니 오른쪽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이 단호함과 간결함에는 새로 문을 연 목욕탕의 자부심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공사를 크게 했다더니 남탕 위치가 바뀌었나 보네. 소소적인 줄 알았는데 대대적인 공사였구나.
나는 방향을 바꿔 오른쪽 계단을 올라 남탕 문을 열어젖혔다. 아, 그립고 그립고 그리웠던 동네 목욕탕. 벽두 새벽인지라 휴게실 안에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장발인 그는 휴게실 평상에 앉아 다리를 쫙 벌린 채 발톱 소재 중이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는 아열대 우림에서나 볼 수 있는 검은 숲이 보였다. 저토록 울울한 숲은 아마존 이후 본 적이 없어서 경이로웠다. 숲에 가려서 페니스가 보이지 않을 정도라면 울창하긴 울창하구나. 굉장해. 저 숲에 과테말라 아나콘다도 살겠어. 그런데 그곳은 내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이상한 아우라가 존재했다.
뭐지. 이 위화감은 ?! 겨울철 찬 바람이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자 곱사등이처럼 고개를 묻고 발톱을 소재하던 이가 고개를 들어 내가 서 있는 문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고개가 젖혀지자 서서히 가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 ? 어어어어어어어어어... 가슴에., 가슴에, 가슴에..... 유방이. 남자에게도 가슴 비대증이 생긴다더니 ! 그와 나는 서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1초, 2초, 3초...... 내 눈이 500원 동전처럼 커지는 순간, 동시에 그의 벌어진 다리가 잽싸게 오므라들었다. 파리를 낚아채는 파리지옥의 주둥이처럼. 나는 용수철처럼 밖으로 튕겨져 나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여탕이었다.
안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곳을 도망쳐야 했다. 계단을 뛰어내려와 매표소 직원을 찾았다. 그는 태연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머리가 길고 피부가 뽀얗기에 여자인 줄 알았어요. 그날 이후로 궁여지책으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피부가 여자보다 창백했던, 머리만 기르고 수염을 깎은 시절에는 여자라는 오해를 많이 받곤 했다. 남자와 여자를 분리한 독서실에 독서실 총무는 나를 여성 전용 독서실로 안내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한 번은 탑골 공원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셨다가
나를 보고는 여자화장실인 줄 알고 급히 방향을 선회해서 밖으로 나가려다 발목을 겹질려서 나동그라지신 적도 있다. 나는 쓰러진 할아버지를 부축하고는 타인의 아밀라아제와 타인의 암모니아를 닦아야 했다. 어찌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던지. 수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좋게 포장하자면 중성적인 이미지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야리꾸리한 이미지 때문에 종종 남자들이 나에게 커밍아웃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성애자여서 그 간절한 고백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남자가 남자에게 고백했다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성애자인 나로서도 정말 괴롭다. 하지만 어쩌랴, 검은 개 꼬리 십 년 땅에 묻었다고 황구 개 꼬리 되는 것은 아니니까. 엠마뉘엘 카레르의 숨겨진 걸작 << 콧수염 >> 은 남자가 오랫동안 길러왔던 수염을 깨끗하게 면도를 하면서 시작된다. 아내를 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로 준비한 수염 깎기는 아내가 눈도 깜짝하지 않으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아내는 남편에게 " 당신은 수염을 기른 적이 없어요. " _ 라고 말한다. 아내뿐 아니라 친구들, 회사 동료들, 심지어 단골 담배가게 할아버지까지도 그의 콧수염이 "원래 없었다" 고 말하면서 남편의 당혹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환장허것네.
유쾌하게 시작한 소동극은 이내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역전된다. 엠마뉘엘 카레르는 평온한 일상에서 작은 균열을 찾아내어 그것을 확대 재생산해내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작가'이다. 재미있는 소설이다. 대표작 << 겨울아이 >> 와 함께 놓치면 후회할 소설이다 ■
덧대기 ㅣ 개인적으로는 << 콧수염 >> 보다는 << 겨울아이 >> 가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