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 :
눈앞이 캄캄하다
꿈에 대장항문과 의사가 나타나 나에게 시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남자 이름'이어서 마음 놓고 진찰실에 들어갔다가 남자 이름 같은 항문 외과 여성 의사'라는 사실에 경악했던,
처음 본 순간 메두사를 본 사람처럼 얼굴이 돌처럼 굳었던 기억. 낯선 이 앞에서 팬티를 내리고 내 항문을 보여줘야 했던 그때 그 여자. 콧물을 삼키면 목구멍으로 들어가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똥구멍이 고장나면 눈구멍도 고장나기 마련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하여튼, 항문 외과 여성 의사'가 시력 상실을 선고하자 나는 12월에 내리는 눈처럼 펑펑 울었다. " 눈앞이 캄캄하다 " 는 관용구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눈물을 닦고, 눈물을 닦고, 눈물을 닦고, 눈물을 닦고....... 눈물을 닦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계는 온통 잿빛이었다. 말 그대로 캄캄한 세계였다. 어둠이 주변을 블랙홀처럼 삼키기 시작했다.
마치 페이드 아웃 기법으로 화면을 전환시키는 영화 속 특수효과처럼 말이다. 꿈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 사위는 꿈속 장면과 그닥 다르지 않았다. 새벽 3시, 캄캄한 밤이었으니까. 블루베리가 시력에 좋다는 소리'에 요즘은 블루베리'를 약처럼 먹고 있다. 포도처럼 씨가 없어서 먹기는 좋은데 맛이 없다 보니 물컹거리는 식감 때문에 불쾌감을 주지만, 어쩌랴. 무엇보다도 불편한 것은 " 읽기의 괴로움 " 이다.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읽은 책을 지인에게 보내야 하는데 아직도 못 읽고 있다. 그런 주제에 틈틈이 책을 샀다. 파스칼 키냐르의 << 음악 혐오 >> , 사이 몽고메리의 << 문어의 영혼 >> 그리고 존 하비의 << 이토록 황홀한 블랙 >> 이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문인 가운데 " 이토록 황홀한 문장력 " 을 가진 이'는 롤랑 바르트와 파스칼 키냐르, 두 사람을 뽑는다. << 섹스와 공포, 파스칼 키냐르 >> 는 박학다식한 인간과 이토록 황홀한 문장력이 만날 때 만들어지는 결과'였다. 어느 알라디너가 이기주의 << 언어의 온도 >> 를 " 인문에세이 " 라고 정의했을 때, 나는 경악했다. 맙소사, 코카콜라를 포도주 대용 음료'라고 하는구나. 물짐승 가운데 가장 경이롭게 생각하는 짐승이 바로 " 문어 " 다. 모르고 보면 징그러운 짐승이어서 괴수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짐승이지만 알고 보면 문어는 매우 매력적인 녀석'이다. 아이큐가 가장 높은 물짐승에 속할 뿐더러 변신의 천재이다. 뿐
만 아니라 호기심이 높아서 모험심이 강하고 인간과의 교류도 가능하다. 문어에 대한 사랑을 담아 두 편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일독을 권한다.
끝으로 << 이토록 황홀한 블랙 >> 은 눈앞이 캄캄한 세계에 대한 책이(라고 한)다. 일단, 책의 무게에 놀라게 된다. 책의 무게로 보아 종이 재질이 아트지'인 것 같은데, 일단 내용을 떠나서 이 가격에 이 정도 퀄리티(컬러 인쇄된 그림)라는 점에서 매우 만족한다. 내 로망 중 하나는 검은 고양이와 레브라도 리트리버종(種) 검둥개 한 마리를 함께 키우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검은 짐승의 눈을 보면 묘하게 슬퍼서 정이 가곤 했다. 그것은 길들여진 슬픔이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은, 결은 고운데 곁을 주지 않는 고집 센 슬픔에 가까웠다. 문재인 대통령이 검둥개 토리를 입양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검둥개는 검은 털이 재수없다고 해서 입양을 기피한다는 기사도 접했다. 뭘 모르고 하는 소리. 내 취향이 독특한지는 모르겠으나 검은 짐승은, 숭고하다. 이 책들을 언제 끝낼지는 모르겠으나 틈틈이, 캄캄한 세상에서 형설지공의 마음으로 읽어보련다.
■ 부록 ㅣ 오늘의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