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사회 : 완장은 문신이다 !

 

 

 

 

 

 

 

 

 

 

 

 

 

 

 

 


 

 

 

낙지 사회 : 내 죽음을 족구'하지 마라 !

 

 

포크와 나이프가 암시하듯이 중세 때에만 해도 서구인의 식탁에는 동물이 통째로 올라오곤 했다. 동물의 사체를 해체하는 일이 식탁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7세기만 해도 통째로 올라온 고기를 손님들에게 칼로 잘라 나눠주는 것이 집주인의 영광으로 여겨졌다. 문명화 과정을 통해 동물 해부는 부엌에서 이뤄지고, 식탁에는 도살된 동물을 연상시키지 않을 정도로 조각이 난 예쁜 요리가 오르게 된다.

 

- 호모 코레아니쿠스 , 진중

 

 

이 좋아 " 나이프 " 이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 식칼 " 이다. 종종 중세 풍경을 다룬 그림을 보면 식탁 위에 돼지가 통째로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한다. 그러니깐 나이프'는 사체'를 해부하기 위한 용도'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도살 작업이 식탁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나이프보다는 젓가락 문화가 열 수 위'다. 젓가락 문화에서 칼질'은 반드시 부엌에서만 이루어진다. 엘리아스의 표현을 빌리면 젓가락은 우아하다. 동양에서는 식사 도중 다툼이 생기면 밥상을 엎지만 서양에서는 종종 나이프'로 찌르거나 포크로 찍었을 것이다.

 

 

지금 보고 있는 음식은 문명화의 결과이다.

 

사체를 해부하는 풍경'은 문명화 과정'을 통해서 점차 사라진다. 그 결과 우리가 보는 것은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음식 데코레이션 작품'들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음식 문화의 퇴화라 할 만한 증후'가 곳곳에서 발생한 것이다. 기괴한 풍경'이다. 다음은 해물탕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a. 어서옵셔 ! b. 해물탕 大자 주세요. c. 냄비는 보글보글. d. 주인 등장하며 해물탕 냄비 뚜껑을 열어 산낙지'를 넣는다. 산낙지는 말한다. " 앗, 뜨거워 ! 이 잔인한 인간 새끼들아 !!!! "  e. 뜨거운 물 속에서 몸부림치는 산낙지. f. 하하하, 호호호. 신기한 듯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한국인. g. 마,디,꾸, 나 !

 

침,     이 고인다. 한국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잔인해진 것이다. 이제는 뜨거운 물속에서 몸부림치는 낙지를 보며 즐거워한다.  싱싱하구나 !  내가 이 장면에서 딴지를 거는 이유는 볼거리를 위한 낙지의 죽음이 몇몇 금기를 어겼기 때문이다. 첫째, 볼거리를 위해 살해 장면이 전시되었다는 것이다. 죽은 후에 뜨거운 물속에 넣는 것과 살아 있는 상태에서 끓는 물속에 넣는 행위는 다르다. 후자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편을 연상시킨다. 둘째, 부엌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정이 식탁에서 벌어졌다는 점이 그것이다. 젓가락 문화'라는 세련된 문명을 가진 우리는 어느 순간 나이프를 쓰던 중세 서양'보다 못한 야만으로 퇴화한 것이다.

 

산낙지의 죽음을 보면 한국 사회'가 보인다. 해물탕 가게 주인이 산낙지'를 손님이 보는 앞에서 펄펄 끓는 냄비 속에 넣는 속내는 전시 효과/과시 효과' 때문이다. 산낙지'는 식당 손님에게 있어서 싱싱한 것, 믿을 만한 식재료'로 인식된다. 아, 낙지 낙지 산 낙지 ! 산낙지의 즉결 처형은 한마디로 믿고 먹을 만하다는 메시지를 소비자에게 전달한다. 주인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좋은 광고는 없다. 산낙지만 싱싱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윤/돈'을 위해서 윤리/생명'를 외면한다. 적어도 상업적 용도를 위해 죽음을 전시하면 안 되는 것이다. 끓는 물 속에서 꿈틀거리는 낙지 다리'를 보며 싱싱한 것을 연상하면 안 된다. 당신이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그 몸짓을 통해서 고통이라는 기표'를 생각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생명윤리는 지나가는 개에게나 주라지 ! " 주의'다.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이다.

 

볼거리를 위해 처절하게 죽어가는 해물탕 속 산낙지 현상'은 한국인이 문자 문화 대신 시각 문화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 서양 문명의 기원 > 을 쓴 강유원은 현대 문명이 서양 중세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성당과 같은) 화려한 볼거리'에만 신경 쓰고 문자 해독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던 중세 서양 문명과 (텔레비젼 시청과 같은) 보는 문화만 있고 생각하는 문화는 사라져 가는 현대 문명'은 서로 닮았다고 지적한다. 대한민국은 중세 문화를 닮았다. 대한민국이 드라마 왕국이라는 월계관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 를 쓴 월터 옹'도 같은 지적을 한다. 선진국은 대부분 문자 문화에 속하고, 후진국은 구술 문화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시각 문화와 구술 문화'에 속한다. 아침에는 아침 드라마를 보고, 저녁 6시 이후에는 시트콤을 본다. 그리고 채널을 돌리면 일일연속극을 시청하다가 9시가 되면 뉴스를 본다. 신랄한 장탄식이 이어진다. 정치평론가가 따로 없다. 뉴스를 보는 시간만큼은 도덕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10시가 되면 드, 드드드드드디어 드라마가 시작된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월화 드라마를 시청하고,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수목 드라마를 보며,금요일에는 드라마 스페셜을 본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주말 드라마를 또 본다. 오직 본다. 문제는 눈과 입'은 바쁜데 뇌'는 정지되었다는 점이다. 시청각 중심이 되면 생각은 열불이 나서 집을 나간다.

 

 

이러한 폐허는 고스란히 한국 사회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산낙지의 죽음'이 볼거리'를 위한 쇼라면, 갑의 횡포는 명함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폭력이다. 명함은 오로지 보여주기 상품'이 아니던가. 대한민국 특유의 전시행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멀리 볼 것 없다. 오세훈이 열정적으로 진행한 디자인 서울은 전형적인 전시 행정'이다. 한강에 둥둥 뜬 것은 섬이 아니라 오리다. 또 하나. 명품 브랜드에 대한 열광적 지지 또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각적 효과이다. 아빠는 중형차로 으스대고, 엄마는 가방으로 으스대고, 자식새끼는 등산복으로 으스댄다. 이 모든 게 다 과시적 욕망이 만든 참사다. 

 

< 웨이터 법칙' > 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업 파트너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상대방이 웨이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박근혜 각하'가 윤창중을 임명하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레스토랑에 가서 함께 식사라도 했다면 지금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결혼해도 좋을 사람이 생긴다면 해물탕 가게'에 데리고 가라. 상대방이 끓는 물 속에서 꿈틀거리는 낙지 다리를 보며 즐거워한다면......

 

 

 

 

 

 

 

 

 


 

 

+  1. 활어보다는 선어가 맛있다

일본은 활어회'보다는 선어회'를 먹는다. 회를 뜬 후 냉장 숙성'을 시켜야지 감칠 맛이 난다고 한다. 반면 한국인은 활어회'를 선호한다. 하지만 이것은 입맛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다. 활어회와 선어회를 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대부분 선어회'가 맛있다고 한다. 한국인이 입맛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활어회'를 선호하는 이유는 먹거리에 대한 강한 불신 때문이다. 두 눈으로 보아야지만 안심이 되는 것이다. 수족관은 그러한 욕망을 채워준다. 믿을 놈은 오로지 내 가족뿐이고, 두 눈으로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   2. 울릉도'만 소중하냐 낙지도' 소중하다

숨탄것'은 모두 진화의 결과이다. 치타'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몸무게'를 줄이다 보니 뱃살을 줄이게 되었다. 핀치 또한 환경에 맞는 쪽으로 부리가 진화하였다. 하지만 진화가 반드시 좋은 쪽으로만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치타만 해도 그렇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마른 체형을 유지하다 보니 다른 짐승에 비해 굶으면 쉽게 지친다. 지방이란 대체 에너지'가 아닌가. 통통한 하이에나는 사냥감을 놓쳐도 지구력 하나로 버티지만, 치타에게는 치명타다. 그래서 이름이 치(명)타'다. 

낙지도 수천 년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진화를 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 진화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 사는 낙지'는 불행한 존재다. 구라파나 아랍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을 왜 하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일까. 알다시피 다른 나라들은 비늘 없는 생선'은 잘 먹지 않는다. 더군다나 구라파 사람들은 문어'를 악마의 물고기'라고 해서 두려워 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혐오'이지만, 낙지 입장에서 보면 축복이다. 그렇지 않은가 ? 최상위 먹이사실인 인간이 혐오스럽다며 잡지 않으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한국에서 낙지는 최고의 보양식이다. 낙지 한 마리면 병든 소도 일으킨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한국이 팔레스타인 분쟁 지역이나 다름없다. 낙지 미디어 < 딱지 > 에서 밀착취재한 결과 한국인은 낙지를 산 채로 먹는다는 특종을 보도했다. 한국은 무간지옥'이다.

내가 보기엔 한국산 낙지'는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 할 필요가 있다. 치타처럼 잘못된 진화로 인하여 목숨을 앗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안 된다. 과연 한국에서 벌어지는 산낙지 문화'에 대항할 비장의 무기'는 무엇이 있을까 ? 만약에 당신이 낙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한국인이 산낙지를 거부감 없이 즐겨 먹는 이유는 < 무혈 >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낙지'는 빨간 피가 없기 때문에 한국인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 무혈 > 은 < 무통 > 으로 인식된다. 만약에 낙지 몸에 빨간 피'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산낙지를 즐겨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산 산낙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사 빨간 피'를 만들어서 다리가 잘려나갈 때 분수처럼 쏟아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 낙지 씨, 이 글 읽고 있나요 ? 내 말 허투루 듣지 마시고 유사 피'를 뿜어내는 방식으로 진화의 방향을 돌려보세요. 효과가 있을 겁니다. 한국 자본주의'란 천민 근성이어서 잔인한 방식으로 진화했지요. 고통 속에서 끊어진 다리를 꿈틀거리는데, 한국인은 그 비참을 보며 침이 고입니다. 그뿐입니까. 사람이 보는 앞에서 펄펄 끓는 탕 속에 산 채로 넣어야 속이 시원한 족속입니다. 야만도 이런 야만이 없지요. 당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부디 편안하시옵소서. 울릉도만 소중하냐, 낙지도 소중하다 ! 독도만 소중하냐, 낙지도 소중하다 ! 그럼 이만 총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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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013-05-1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먹고 살기 위해'란 말 한마디로 참 많은 게 허용되고 용서되는 야만스런 사회 아닌가 합니다.
어제부터 곰곰발님 포스트를 읽고 자꾸 여러 생각이 드는데,
을인 낙지 입장에선 칼만 대면 새빨간 피를 분출하는 몸으로 진화하면서
갑과 을이 전복되는 바닷물 속으로 사람들을 끌고 들어가야.. 등등..
혼자 별별 상상 다 하고 있어요. 하하

곰곰생각하는발 2013-05-18 12:06   좋아요 0 | URL
수사반장에서 범인들이 늘 하는 소리가 먹고살기위해서 아니겠습니까..ㅋㅋㅋ
이놈의 먹고살기'는 한 80년 동안 끈덕지게 이어져오고 있는 실정이니 짜증이 납니다.
하긴 물속이라면...ㅎㅎㅎㅎㅎ. 낙지가 갑이 되겠네요.
하루빨리 낙지도 빨간 피를 품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구리구리 2014-01-22 0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하다 들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분이 있는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이세상의 모든 자연에 인간은 최소한의 요구만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낙지는 정말 아니더군요.
지금까지도 TV에 그런게 나오는데... 아.... 뭐가 잘못된것인지....
한번 제대로 언론에서 두들겨 맞아야 하는데...
언론도 같이 놀고 있으니....
정말 공감하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직접 쓰신거죠?

곰곰생각하는발 2017-03-14 10:47   좋아요 0 | URL
2년이 흐른 후 댓글을 달게 되네요.. 늦어서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