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문화의 뼈라면 저항은 문학의 뼈 :
눈물은 내려가고
밥술은 올라가지 않앰시냐
' 난 그런 밥 안 먹어! 그게 무슨 밥이라? 감저(고구마) 꽁댕이지. 맨날 그런 것만 맥이구…….' 내 말에 나 스스로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는데, 아닌게아니라 그 말이 어머니의 아픈 데를 정통으로 찌른 모양이었다. 보통 성난 것이 아니어서 눈에 불이 철철 넘치는 듯했다. '요새끼, 말하는 것 좀 보라! 그게 무슨 밥이라? 아이고 요것이 먹는 음식을 나무래는구나. 고생허는 에미 불쌍토 안해서 날 나무래여?'그렇게 해서, 나는 기둥을 꽉 껴안은 채 징징 울면서 네댓 대 매를 견뎌낸 다음, 밥상머리로 끌려갔는데, 한판 난리굿을 피운 뒤라 밥맛이 각별히 좋았다. 물론 밥이 아니라, 고구마 세 자루에 김치 세 가닥이었지만, 역시 목구멍은 포도청이었나 보다. 아직도 울음이 남아 연방 쿨쩍거리면서 고구마를 씹는 나를 넌지시 바라보던 어머니는, 숟갈이 필요없는 식사인데도 자못 엄숙하게 예의 숟갈론을 들먹였다.'그것 보라.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지 않앰시냐. 그러니까 먹는 것이 제일로 중한 거다.'
- p.80-81, 지상에 숟가락 하나
순문학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문학의 종착역은 여의도인데 읽어도, 읽어도, 읽어도 오이도라. 여기는 어디메뇨 ? 이처럼 삼천포에서 헤매다 보면 이럴려고 내가 밤 새워 제임스 조이스의 << 율리시스 >> 를 읽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곤 한다.
음식으로 치면 순두부 같다고나 할까 ? 보다 선명하고 명징하며 자극적인 맛을 찾다 보니 범죄소설에 빠지기 시작했다.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주눅 들다 형이하학의 세상을 경험하다 보니 새누리'라. 하지만 문학이 자폐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문학의 본질은 쉬운 말이 아니라 어려운 말이다. 세 살부터 여든 살까지, 시시한 사람부터 도도한 사람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소노녀남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문학이라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전자제품사용설명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문학보다는 차라리 자폐에 빠진 난해한 소설이 낫다. 가라타니 고진이 문학의 종말,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순문학의 죽음을 선언한 데에는 순문학으로는 밥 벌어먹기는커녕 밥 빌어먹을 것이라는 진단 때문이다. 한국만 순문학이 안 팔리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도 순문학은 팔리지 않는 책이다. 피장파장인 셈. 하지만 문화 예술 선진국들은 이들이 빌어먹지 않도록 국가에서 각종 지원책을 내놓아 그들을 돕는다. 박근혜 씨가 총제작하고 김기춘-조윤선이 연출한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말을 듣지 않는 문화 예술인이 벌어먹지 못하고 빌어먹도록 만들려는 프로젝트'였다. 에미나이, 눈물 뚝 그치라우. 이씹일쎄기 초자본주의 남조선 사회에서 눈물은 사치 아니갓어 ? 밥이 중하간, 아님 싸구려 감성이 중허간 ?
하지만 윤선이와 기춘 씨가 놓친 것이 있다. 공감이 문화의 뼈라면 저항은 문학의 뼈라는 점이다. 공감이 없는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공감은 반드시 我와 他를 겹쳐놓을 때 발생하게 되는 감정적 소모'다. 그 감정적 소모에서 희노애락이 생기니, 조용필이 그토록 강조한,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북한 속담에 눈물은 내려가고 밥술(숟가락)은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문학적으로도 손색이 없고 철학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속담이다. 눈물(감성)보다는 밥(이성 혹은 잇속)이 우선이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본질은 밥술이 올라가는 행위를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데에는 눈물의 하강이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와 그 무리는 단 한번도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은 적이 없는 인간이다.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은 경제 영역'에 속하지만 꼴등도 기억하는 세상은 문화 영역'에 속한다. 일등보다는 꼴등을 기억하는 세상일수록 살기 좋은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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