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계 단 계 , 계 단 을 생 각 함 :
친 구 에 게
만나고 싶은 학창 시절의 친구'가 있다. 모범생은 아니었다. 남도에서 상경한 빈농의 아들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친구 아버지는 막노동 일을 하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하셨다. 그 친구 또한 수업이 끝나면 신문 배달 일을 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도 아니었다. 나보다 성적이 낮았다. 그 사실은..... 하, 바닥을 기었다는 뜻이다. 싸움을 잘했던 친구도 아니다. 그 친구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것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내향적 성격으로 조용한 편이었지만 의외로 낙천적인 친구였다. 그의 미래는 뻔했다. 대한민국에서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흙수저 출신이 걷게 되는 길은 뻔하니까. 하지만 이 친구가 내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 이유는 평범함 속에 감춰진 특별함에 있다. 이토록 내성적인 친구가 눈동자에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눈빛으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성경 시간이었다. 그는 성경 과목을 가르치는 목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 예수는 굶주린 사내였습니다. 나눔을 실천하셨으니 온전히 풍족한 식사를 하지 못하셨던 분입니다. 저는 교회 목사님들을 보면 항상 의문이 생깁니다.
왜 요즘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다 비만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 "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하고 피식 웃는 학생도 있었다. 선생의 얼굴이 맨드라미처럼 새빨갛게 번졌다. " 너, 나와 ! " 그날 내가 본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목사가 아니라 무자비하게 제압하는 폭군이었다. 그는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맞았지만 억울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디에나 엄석대(일그러진 우리들의 영웅에 나오는 캐릭터)는 있듯이 우리 반에도 엄석대는 존재했다. 그는 특정 아이를 괴롭혔는데 내 친구가 조용히 엄석대에게 말했다. " 이젠.... 좀 그만 괴롭혀라. "
상활 파악도 하지 못하고 피식 웃는 학생은 없었다. 사실 폭력 선생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엄석대였으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반전은 없었다. 그는 엄석대의 역린을 건드린 대가로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맞았다. 애초에 이 싸움은 최홍만과 김국진의 대결이었으니 말이다. 친구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엄석대가 아이들을 괴롭힐 때마다 그는 괴롭히지 말라고 지적했고, 그때마다 맞았다. 100전 100패였다.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맞을 짓을 왜 하는 거지 ?! 세월이 흘렀다. 문득 그때 일이 생각났다. 100전 100패였던 그 친구의 전적을 생각하다가 내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친구는 패자가 아니라 승자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엄석대는 내 친구의 지적이 지속되자 어느 순간 아이들을 괴롭히는 짓을 멈췄다. 그가 뉘우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친구의 지적이 계속되자 어느 순간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내 친구는 비록 엄석대와 싸워서100전 100패한 친구였지만 100전 100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승리한 친구였던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이 자리에서 하자면, 나는 그 친구가 신문보습소에서 월급을 타는 날에만 일을 도와준답시고 그 친구의 신문 배달 일을 도왔다. 그는 일을 도와준 대가로 짜장면을 사주고는 했다. 그 맛에...... 그러니까 그 맛에 !
오늘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를 고려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생각보다 추웠다. 집회 내내 오돌뼈도 아니면서 오들오들 떨었다. 민주 시민 정신이 투철해서 집회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참석하지 않으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참석했다. 너무 추워서 집회 중간에 빠져나와 근처 술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한 잔 한 잔 마시다 보니 취했다. 온통 박근혜와 최순실에 대한 이야기만 쏟아졌다. 술집에 모인 취객은 모두 우주의 기운을 받아 박근혜와 최순실을 저주하고 있었다. 통쾌한 기분보다는 뼈아픈 통증이 몰려왔다. 사자가 물러난 자리에는 하이에나가 그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승만이 비운 자리를 박정희가 차지했고, 박정희가 비운 자리를 전두환이 차지했으며, 전두환이 비운 자리를 노태우가 채웠다.
집회를 마치고 버스를 탔는데 엉뚱한 버스를 탔다. 아차 싶었다. 다시 내리고 갈아타기에는 피곤한 몸이어서 중간 어디 즈음에 내려서 택시를 탈 요량으로 버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10분이 흘렀을까 ? 낯익은 가파른 길이 보였다. 어릴 적에 그 친구의 배달 일'을 도와준답시고 따라가다 보면 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했다. 여름이면 그 계단을 오르느라 항상 땀에 흠뻑 젖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그 계단을 기억하는 이유는 계단 폭이 일정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넓은 계단도 있고 좁은 계단도 섞여 있었다. 계단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보니 자칫 방심하면 헛다리 짚는 경우가 발생해서 아차 싶은 경우가 많았다.
내가 뭐 이런 개같은 불량 계단이 다 있냐며 투덜대자, 그 친구는 으레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래도 난 이 계단이 제일 좋아. 계단을 걷는 재미가 있거든. 다른 계단은 넓이가 일정해서 굳이 계단을 생각하며 걷지 않잖아. 하지만 이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에는 항상 계단만을 생각해야 해. 계단 하나하나에 집중해야지. 재미있잖아. " 취기 탓이었을까, 아니면 절망 탓이었을까 ? 버스 창가에서 그 계단을 보다가 울컥 눈물이 났다. 그 친구가 그립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지만 씻고 자야겠다.
덧대기 ㅣ 박근혜가 자문을 얻고자 청와대에서 자문위원회를 소집했다고 한다. 자문위원회에 소속된 고문은 30명인데 이날 참석한 인원은 6명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