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fragile we are :
너에게 길을 묻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도는 친구를 보게 되면 그 친구에게 신경을 쓰게 된다. 천성이다, 다정한 목소리로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 그런데 사실....... 나 또한 물보다는 기름에 해당되는 쪽이었다.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했고, 주류 집단과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오래 전 일이다. 서대문 도서관에서 ●●●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가을 볕에 바짝 마른 나물처럼 수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몸이었다. 그를 도서관 휴게실에서 종종 마주쳤지만 어느 누구도 그와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형색이 초라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은 산만했고 눈동자는 늘 불안했다.
그 친구가 휴게실을 벗어나면 여기저기서 이상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저 새끼, 미쳤다며 ? 도서실에서 여러 번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누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 친구였다. 담배 한 개비를 달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초롱초롱한 그 눈동자. 그 친구는 늘 고개를 숙이고 우왕좌왕하다 보니 얼굴을 정면에서 볼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잘생긴 얼굴이라기보다는 예쁜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나를 형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그의 가방 속에는 사회과부도와 지리 교과서만 들어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하루 종일 지리 책만 펼쳐 놓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 친구에게 왜 지리 과목만 공부하냐고 물었다. 그 친구에게서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 형, 나는 길을 잘 헤매...... 길을 잘 몰라... 길을... 자꾸, 헤매......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수능 시험을 치르고 최종 면접만 남겨둔 상태에서 단국대 천안 캠퍼스로 향하는 하행선 기차를 탄다는 것이 그만 상행선을 타는 바람에 수능 면접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고(그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주머니 속에 칼을 숨기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그 친구의 조현증이 시작된 결정적 순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내가 절실히 깨달은 것은 " 인간은 깨지기 쉬운 유리컵 " 같다는 점이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이 곧 병을 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지난해 겨울 초입. 거리를 걷다가 스팅의 < fragile > 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길을 잃어 병을 얻은, 눈동자가 달 없는 밤보다 어둡고 별보다 반짝거렸던 그 친구 생각을 했다. how fragile we are, how fragile we are, how fragile we are . 인간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_ 라고 묻는 질문에 마음이 아팠다. 뾰족한 것은 약한 것을 숨기기 위한 위악'이다.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꺠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드랑 큰 울음 한 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덕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년
깊은 땅 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진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 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어 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 시집 < 태아의 잠 >, '유리에게' 전문
그를 꿈에서 본 적이 있다. 꿈길을 걷다가 쇼윈도우에 사람 형상을 닮은 선인장이 장식으로 놓인 가게를 발견했다. 무심한 마음으로 지나쳤다가 이내 되돌아왔다.
저 선인장, 그 친구를 닮았다. 나는 그 친구가 선인장으로 환생했다고 믿었다. 꿈이니까 가능한 믿음이었다. 너른 잎을 돌돌 말아 가시가 된, 불안이 만든 가시투성이 삶. 가시가 장미의 결심이라면 그 가시는 선인장의 불안이었다. 선인장 가시 한 개를 따서 집으로 돌아왔다. 파란색 플라스틱 바가지에 물을 담은 후 가시를 띄웠다. " 물에는 신기한 힘이 있지. 움켜쥔 손을 항상 펼쳐 놓거든...... " 돌돌 말렸던 가시가 풀리더니 너른 잎이 되었다. 생강나무 잎이었다. 꿈에, 꿈 속에, 꿈 속에서의 그 선인장은 생강나무였다.이 좁고, 날카로우며, 위협적인 가시 안에서 사는 넓고, 부드러우며, 촉촉한 잎의 위악적 삶. 잠에서 깬 나는 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인장
소라게'가 사는 집은 패각이다. 연체동물의 몸에서 분비된 석회질이 단단한 조개껍데기를 만드는 것이다. 겉은 딱딱한 각질의 세계이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뼈 없는 무른 몸이다. 뼈 없는 몸이 뼈로 만든 집을 만드는 것이다. 달팽이도, 우렁도, 선인장 가시도 마찬가지다. 가시는 말랑말랑한 몸이 토해 놓은 딱딱한 패각의 세계'이다. 그 가시의 배를 가르면 동글동글한 푸른 잎'이 숨어 산다. 그러니깐 날카로운 가시는 푸른 잎이 숨어 사는 방이고, 달팽이집이며 소라껍질이다. 이 좁고, 날카로우며, 위협적인 가시 안에서 사는 넓고, 부드러우며, 촉촉한 잎이라니. 아, 이 위악적 삶의 세계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