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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 - 아웃케이스 없음
마크 웹 감독, 조셉 고든 레빗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설익은 것과 설익은 것이 만날 때
요리에는 젬병이다. 한때는 요리에 취미를 붙여볼까_ 하는 마음으로 요리책을 사서 연습을 하기도 했으나 불 같이 급한 내 성격이 불을 다루는 노동과 만나니 불난 데 기름 붓는 꼴이라.
차라리 양파나 마늘이나 까는 일이 내게는 어울린다. 내가 만든 음식의 팔 할은 실패'였다. 며칠 전이었다. 팬을 달군 후 기름을 넉넉히 붓고 약한 불에 부침개를 얇게 지졌다. 한쪽 면이 노릇노릇 익자, 나는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부침개를 뒤집어야 하는데 뒤집는 기술이 부족한 것이다. 실패가 쌓이면 경험이 되는 법. 나는 후라이팬을 앞으로 밀었다가 땡겼다. 너무 땡겼다, 젠장. 계획대로라면 부침개는 체조 선수처럼 공중에서 180도 회전을 한 수 팬 안으로 떨어져야 했다. 웬걸 ! 부침개는 바닥에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나는 다시 부침개를 부쳤다. 반드시 성공하리라. 하지만 이번에도 강약 조절에 실패했다. 첫 번째가 너무 강했다면 두 번째는 너무 약했다. 부침개는 공중에서 회전하지도 못한 채 겹쳐서 반달 모양이 되었다. 이 정도 두께면 부침개가 아니라 팬케이크'였다. 실수를 어떻게 해서든 만회하려고 두 면을 뗄려고 수작을 부렸지만 익지 않은 면끼리 붙은 부침개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견우와 직녀처럼. 와플 두께의 부침개를 씹으며 생각했다. 참...... 다행이다. 그래도 먹을 수는 있으니까 ! 두께 때문일까 ? 익지 않은 밀가루 냄새 맛이 났다.

톰(조셉 고든 레빗 분)은 운명적 사랑을 믿는 청년이다. 그는 직장에서 첫눈에 썸머(주디 디샤넬 분)에게 반한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강한 확신. 반면, 썸머(주디 디샤넬 분)은 운명적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사랑은 하되 인연은 맺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여자'다. 마크 웹 감독이 연출한 << 500일의 썸머, 2010 >> 이야기'다. 서로 다른 연애관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_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이 흐른다. "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다. 하지만 먼저 알아둘 것은 이건 사랑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
얼핏, " 사랑의 콩깍지 " 는 유효 기간이 1년이라는 연구 결과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연인들이 헤어지는 이유는 변덕스러운 마음 탓이라기보다는 유전자 탓이라고 과학은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인간 본성이라고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톰과 썸머도 300일 즈음에 서로 어긋나기 시작한다. 사랑의 빳데리가 다됐나 봐요 ~ 영화가 끝나면 문득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 봄날은 간다 >> 가 생각난다.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썸머는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은수(이영애 분)를 닮았다. 이 영화는 미국판 " 여름날은 간다 " 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판타지를 제거한 리얼리티에 있다.
비유를 들다면 기름을 쏙 뺀 수육 같다고나 할까 ? 사랑에 대한 환상을 말하기보다는 사랑이라는 현실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살다 보면 누구나 다 사랑이 찾아온다.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실패한 부침개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란 설익은 것과 설익은 것이 만날 때 이루어진다고. 익지 않은 한쪽 면이 익지 않은 한쪽 면과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을 때, 밀가루의 점성이 아닌 열병으로 서로를 녹여서 붙어버린 부침개를 보면서 사랑을 읽어내는 내 감성은 아마도 실패한 사랑을 경험한 남자의 뼈아픈 후회일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설익은 것'이다. 다 익은 부침개는 겹쳐 놓아도 붙지 않으니까.
정작, 이 글은 << 500일의 썸머 >> 리뷰인데 부침개로 시작해서 부침개로 끝나는 글이 되었다. 나란 사람이, 뭐... 그렇지 ■
덧대기 ㅣ 요즘은 영화나 책을 읽고 나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영화나 책을 읽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