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당신

기독교 서사가 " 거시적(大) ㅡ " 영역을 다룬다면 불교 서사는 " 미시적(小) ㅡ " 영역을 다룬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 스펙터클 " 에 방점을 찍고 불교는 " 미니멀리즘 " 에 방점을 찍는다.
예수와 부처, 두 성인의 죽음만 놓고 봐도 그렇다. 예수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웅장하다면 부처는 사소하다. 팔순 노인이 된 부처는 제자가 공양한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는데, 그는 설사를 심하게 하다 결국에는 탈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처는 예수에 비하면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죽음이며 동시에 " 하찮은 죽음 " 이다. 두 종교를 한 글자로 표현하자면 기독교는 < 有 > 에 대한 종교이고, 불교는 < 無 > 에 대한 종교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핵심은 " (죽은 예수가 사람들) 눈 앞에 나타나는 행위 " 다. < 있음(有) > 를 증명하는 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로, 예수는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 앞에 나타나 < 현존재 > 를 증명한다.
반면,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유(有)와 상(象)이 아니라 무(無)와 멸(滅)이다. 무상, 무념, 무소유를 넘어 < 적멸 > 에 이르는 단계가 목표다. 예수가 현시(顯視)를 통해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한다면 부처는 무아(無我)를 통한 < 세계 - 없음 > 을 권유한다. 無我, 그것은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는 세계이다. 작은 것에 대한 연민도 불교적 특징이다. 스님들이 겨울에 뜨거운 물을 식힌 후 하수구에 버리는 행위는 그곳에 사는 수많은 미물을 염려한 탓이라고 한다. 그들은 큰것의 죽음과 미물의 죽음을 같은 연민으로 바라본다. 이 또한 미니멀한 태도'다. 버리는 삶과 사소한 것에 대한 연민, 그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축소주의적 삶이다.
뒤늦게 티븨엔 16부작 드라마 << 시그널 >> 을 몰아서 보다가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 서사는 불교 서사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괴 사건을 다룬 에피소드(1,2화)에서는 미제 사건 전담반은 중요한 단서에 의지해서 수사를 진행하다가 낭패를 보게 된다. 그것은 중요한 단서가 아니라 관객/독자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미끼였던 것이다. 이 장르는 독자에게 하찮은 것처럼 보여서 흘려보낸 사소한 단서를 주의 깊게 보라고 요구한다. 추리물에서 중요한 단서처럼 보이는 것은 맥거핀으로 작동한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사소한 것을 놓치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
인간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얻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지만 뒤돌아보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집착하는 것은 추리물에서 관객의 눈을 흐리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 중요한 단서(라고 믿게 만드는 맥거핀) " 이다. 그 사이, 우리는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단서)한 것을 놓치고 산다. 나 또한 그렇다. 돌이켜보면 사소했던 당신, 내가 사랑했던 당신. 내 몰락이 네 가슴을 흔들었을, 그럴 당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