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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평점 :
파와 민들레
옛 기억을 더듬으면 구멍가게는 아침 일찍 문을 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서 요리를 하다 부족한 식재료가 있으면 이른 아침'부터 " 쓰레빠 " 신고 구멍가게'로 달려가고는 했으니까. 대부분은 두부나 파 따위를 샀던 것 같다. 나는 구멍가게, 만화가게, 떡볶이 가게 주인의 자식'을 부러워했었다. 붓 들고 영화배우들의 얼굴이나 그렸던 아버지를 부끄러워했기에 아버지가 붓을 놓고 구멍가게나 차렸으면 싶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내 바람에 콧방귀를 뀌고는 했다. " 하이고 ~ 구멍가게는 아무나 하는 줄 알어 ? 부지런해야 구멍가게도 하는 거지, 너희 아버지처럼 게으른 사람은 절대 못한다. " 일리 있는 말이었다.
구멍가게를 꾸린다는 것은 새벽 일찍 가게 문을 열고 밤 늦게 닫는 고된 일에 속했으니까. 감성 돋는 추억을 경계하는 편이지만 나는 < 구멍가게 > 에 대한 향수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따스한 두부와 파릇파릇한 대파'가 있던 곳. 특히, 구멍가게'라는 단어 자체가 좋다. 쑥도 아니면서 마음에 쏙 들었다. 규모가 작다는 의미에서 " 구멍 " 이라는 낱말을 붙인 듯하다. 신기하게도 내 기억 속 구멍가게는 없는 게 없는 곳이었다. 신기하지, 이토록 광활한 우주를 구멍'이라 표현하다니 어른들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깐. 세월이 흘러 구멍가게는 슈퍼마켓'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였다.
사람들은 구멍가게'라는 간판을 버리고 그 자리에 슈퍼마켓이라는 상호를 내걸기 시작했다. 극적인 변화였다.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꿈은 " 슈퍼 " 하게 가져야제. 그러니까, 슈퍼마켓이라는 작명은 " 아메리칸 드림 " 에 대한 소망 충족을 반영한 표현이었다. 바로 이 지점, 바로 그 시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나에게는 없는 게 없던 구멍가게가 슈퍼마켓으로 불리우기 시작하면서 슈퍼마켓은 부족한 게 많은 가게'가 되었다. 어릴 때, 구멍가게에 들어설 때마다 설레던 마음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코딱지만한 공간에도 < 없는 게 없던 가게 > 는 < 있는 게 없는 마켓 > 으로 변했다는 사실.
비로소 깨닫게 되는 진실. 슈퍼ㅡ 라는 이름에 현혹되지 말 것. 그때부터 나는 슈퍼히어로(영웅)을 믿지 않았다. 한국 사회를 작동하는 서사인 슈퍼-, 대형 -, 멀티-. 대규모-, 영웅- 따위는 모두 헛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 있는 게 없는 것 " 이요, 그곳은 " 있는 게 없는 곳 " 이었다. 시바, 우리...... 속지 말자. ㅡ 쓰다 보니 감성이 터지는 바람에 첫머리가 주저리주저리 길었다. 각주로 빼자니 아쉽고 삭제하자니 시간이 아까워 내버려둔다. 본문은 지금부터'다. 나의 가설은 한국인이 " 파 사와라 ! " 라고 말할 때 파'라는 단어에서 무의식적으로 파 음(도레미파솔라시도 할 때)으로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곰곰 생각하면 무릎 탁, 치고 아, 할 것이 분명하다. 맞아. 그런 것 같아. 어쩔 ~ 나는 한국 사람이 파'를 말할 때 파(pa) 음으로 소리낸다는 가설을 3년 동안 연구했다. 가설을 증명할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지만 이 글의 첫머리'가 길었던 관계로 이 글에 싣지는 않기로 했다.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우리가 파를 소리낼 때 무의식적으로 pa 음으로 소리를 내듯이, 무의식이 지배하는 단어는 꽤 많다. 이것 또한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생략하기로 하고 한 가지 예'만 나열하기로 한다. 민들레 ! 사람들은 민들레'라는 단어를 신뢰한다. 민들레에는 소박함, 진실함, 선함 따위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민들레'라는 상호가 들어간 상품은 왠지 무공해, 친자연적 상품으로 인식하게 된다. 왜 그럴까 ?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얘기를 들으면 깜짝 놀라서 노래미도 아니면서 놀라게 될 것이다. < 민들레 > 는 < 믿을래 > 와 유사하다. 우리는 민들레'라는 단어에서 믿을래를 연상하게 된다. 그렇기에 민들레는 상호가 붙은 상품을 보면 믿음에 가는 것이다. 내가 만약에 민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식 이름을 민들레로 짓겠다. 그 아이는 커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하다(혹은 타인의 믿음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거나). 민 씨 성을 가진 이웃들은 참고하길 바란다.
끝으로 여담이지만 내가 정치인이라면 당명을 " 민(民)들레 " 라고 지었을 것이다. 믿음이 가는 당명이지 않은가 ? 안도현의 << 백석 평전 >> 을 읽다가 문득 생각나서 이 리뷰를 작성한다. 백석 시인은 소박한 언어를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작가'였다. 그가 내 글을 읽었다면 구멍과 파와 민들레에 대한 내 애정에 대하여 격하게 공감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