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기 내리고 백기 올려 :
정치와 신파
ㅡ 오빠가 보고 있다
하, 세상이 수상하다 보니 " 악(惡) " 만 남았다. 그에 따라 드라마도 독해졌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했던가 ? 등장인물은 점점 영악해졌고 복수는 잔인해졌으니 그만큼 눈물도 많아졌다. 복수와 눈물은 비례한다. 이빨 < 악 > 물고 주먹 < 꽉 > 쥐고 일어선 자만이 통읍(慟泣)할 자격이 있다. 막장 드라마 이전에 신파'가 있었다. 연극 본위의 클래식한 예술성보다는 흥행을 목적으로 한 연극이 신파극이다. 신파의 주인공은 대부분 사랑에 속고 돈에 운다. 흥행 바람이 불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바짓가랑이 잡고 흐느끼는 " 눈물 바람 " 이다. 사랑 때문에 눈물 한 바가지 흘리지 않은 이 뉘 있으랴.
눈물만큼 효과 좋은 무기도 없다. 착했던 이수일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가 되어 돌아온다. 그런 < 그 > 가 심순애의 눈물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국인에게 < 눈물 > 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만병통치약인 모양이다. 며칠 전 필리버스터에서 생긴 일을 복기하자 : 박영선이 필리버스터 의사 진행 발언대에 오르자마자 작정한 듯 박연 폭포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티븨 앞에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을 시청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통속 신파 드라마'가 송출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현대 정치사를 다룬 기록 영화'가 사전 통보도 없이 아내의 유혹으로 바뀐 경우라고나 할까 ? 보다 잔인하게 설명하자면 정치를 이야기하는 데 스튜디오에 느닷없이 파리가 날아다니는 상황이었다.
어, 어어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신파 속 주인공인 박영선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일까 ? 그녀는 처절하게 울었다. 문제는 매를 맞기도 전에 아프다며 징징거린다는 데 있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픈 게 인지상정이지만, 내 성정이 못돼 먹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따듯한 << 공감 >> 보다는 차가운 << 반감 >> 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통증에 공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통증이 " 환상통 "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시청자 입장에서 보자면 채널 선택권을 박탈당한 느낌이 들어 억울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기록 영화이지 싸구려 통속 막장 드라마'가 아니었다. 박영선은 자주 " 소수 정당의 설움 " 에 대해 말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번 무대에도 그 버릇은 고치지 못했다.
이 모든 비극은 과반의 의원 수'를 확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표를 달라는 읍소'다. 과반수를 넘기지 못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웃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의원 수 130명을 보유했던 더민주'가 < 소수 정당 > 이라면 정의당은 < 소수점 정당 > 이란 말인가 ? 김대중은 단 한번도 과반수 이상의 의원을 보유한 정당에 소속된 적이 없다. 평민당은 16명으로 출발한 정당이었고, 김대중은 당당하게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지날달, 29일. 정치권의 관심이 온통 필리버스터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박영선은 보수 기독교 단체인 << 나라사랑운동본부 >> 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해서 차별금지법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열정적으로 토로했다. 차별을 금지해야 될 야당 정치인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것.
그녀는 말했다 : 차별금지법, 동성애법, 인권관련법, 이거 저희(더민주)는 다 반대합니다. 누가 이것을 찬성하겠습니까 ? 특히 이 동성애법, 이것은 자연의 섭리와 하나님의 섭리를 어긋나게 하는 법, 이라고 말해서 우뢰맨 같은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보수 기독교 단체를 향한, 제대로 된 취향 저격 발언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대하지는 않는다. 또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동성애를 혐오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을 권리는 있지만 동성애를 반대할 권리는 없다. 만약에 동성애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타인의 사생활 간섭이다. 여기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테러방지법을 거부하는 이유가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간섭하는 데 있다면,
박영선 의원은 타인의 성적 취향(사생활)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동성애 반대는 명백히 타인에 대한 간섭이다. 그녀가 국회의사당에서 흘린, 분노에 찬 눈물의 의미는 새누리당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초록은 동색인 법이다. 막장 드라마 속 여인의 증오는 대부분 한때 사랑했던 정인(情人)에 대한 사랑의 변질이다. 끝으로 이용마 MBC 해직 기자'가 트위트에 남긴 글을 소개하면서 이 페이퍼를 마무리하기로 하자 ■
박영선 선배
선배를 맨 처음 만난 건 2001년 5월쯤이었을 겁니다. 당시 경제부에서 금융권을 담당하던 제가 선배를 만난 건 어쩌면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선배가 진행하던 <경제매거진>의 마지막 방송에 제가 갑자기 파견되어 방송을 했지요. 제 아이템은 구조조정과 관련된 노동자 문제였던 걸로 압니다. 선배는 제 아이템에 대해 좋은 평을 해주셨고, 저 역시 <경제매거진> 폐지에 저항하던 박 선배의 심정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인연이었는지 다른 팀원들과 함께 선배의 집에 초대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뒤 박 선배는 경제부장으로 영전했습니다. 저는 대단히 짧았지만 인상 깊었던 만남으로 인해 선배에게 인간적인 호의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선배가 경제부장으로서 보여줬던 모습은 너무 큰 실망이었습니다. 재벌의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는 경제부 기사에 깜짝 놀랐습니다. 박 선배의 경제부 논조는 조중동의 반복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요. 박 선배와 제가 경제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함께 경제부에서 일을 한 적도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기대와 너무 다른 박 선배의 경제관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경제부를 운영하던 박 선배가 어느 날 열린우리당에 입당했습니다. 이것도 사실 놀랄 일이었죠. 야당과 비슷한 경제관을 가진 분이 갑자기 여당으로 갔기 때문이지요. 정치권 입문 배경에 관한 소문도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제 기사 때문이란 소문이었지요. 박 선배와 관련된 한국IBM에 대한 검찰 수사 소식을 뉴스데스크 톱뉴스로 두 꼭지나 보도하자, 마침 입당제의를 받던 차에 화를 내고 떠났다는 미확인된 소문이 당시 파다했습니다.
그런데 박 선배는 저를 또 한 번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박 선배가 국회 재경위를 맡아 재벌을 비판하며 심상정·김현미 의원과 함께 주목받는 여성 의원 3인으로 거론되었기 때문이지요. 경제부장 시절 누구보다 재벌 비호에 앞장섰던 분의 갑작스런 변신이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막후에서 시민단체 출신 비서관이 박 선배에게 재벌 비판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그럴듯한 소문도 들렸지만 그러려니 했습니다. 국회에서 좋은 일을 하면 그만이니까요.
그 뒤 정치권에서 승승장구하던 박 선배가 저를 다시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원내대표가 되어서 세월호특별법 협상을 할 때입니다. 세월호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박 선배가 보여준 나이브함과 과단성에 무척 당혹했습니다. 주변에서 함께 논의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나 하는 의혹이 들 정도로 소통이 되지 않는 독단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연속 말이지요. 세월호 사안은 여야가 적당히 주고받을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박 선배가 세월호 때 보여주었던 문제가 이후 정치과정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내에서 소위 비주류가 합법적으로 선출된 주류 당 대표를 흔들 때, 적당히 중립지대를 차지하면서도 비주류에 편향된 많은 행보들을 보았고, 안철수 의원이 탈당할 때 함께 나가지 않으며 좌고우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급기야 이번에는 여야의 중간지대에 서서 필리버스터를 그만두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셨더군요.
박 선배는 항상 저를 놀라게 하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적절한 타이밍의 결단력과 과감한 추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박 선배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두고 보좌를 잘 받으면 추진력이 있어서 큰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독단으로 인해 대형 사고를 칠 수 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문제나, 이번 필리버스터 중단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하기 전에 많은 소통이 필요합니다. 특히 박 선배의 개인적인 정무적 판단이 많이 작용한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박 선배에게는 조중동의 사고방식이 이미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열린우리당에서 재벌을 비판하던 때를 제외하면 박 선배의 모습은 사실 일관됩니다. 조중동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죠. 재벌 비판으로 잠시 가려졌을 뿐이지요.
이런 얘기가 이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박 선배 주장대로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입니다. 다음달 투표할 생각이 뚝 떨어졌습니다. 제가 돌아가야할 MBC를 생각하면 야당이 과반을 차지해야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지금까지 스스로를 독려해왔지만, 필리버스터 중단으로 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생각입니다. 누가 바보에게 지휘봉을 맡기려고 하겠습니까? 야당이 여야 지지자 양측에서 모두 비난을 받으니 야당 심판론이 정권 심판론보다 높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오늘밤은 잠이 쉽게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참고할 책
울리히 벡, 위험사회 ㅣ 영화 << 다이하드 >> 디지털 사회와 그 적들( http://blog.aladin.co.kr/749915104/6245043 )
하이테크 첨단 사회에서는 << 빅데이터 >> 를 쥔 세력이 << 빅브라더 >> 가 된다. 하이테크 첨단 사회'에서 빅데이터에 자료를 제공하는 쪽은 소비자'다. 당신이 사용하는 휴대폰 사용 내역과 전자 결제로 이루어지는 각종 카드 내역(심지어 교통 카드 내역은 당신의 동선을 빅브라더에게 제공한다)이 모여서 빅데이터가 되고, 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빅브라더는 권력을 누린다. 내가 만약에 독재자'라면 각종 선거의 개표 방식은 수개표가 아닌 전자 시스템에 의한 개표 방식을 선호할 것이다. 전자 시스템은 언제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디지털이란 0과 1의 세계로 이루어진 세계일 뿐이니깐 말이다. 울리히 벡은 바로 그 사실을 경고한다. 영화 << 다이하드 >> 에서 경찰이 빌딩 안으로 침투하는 데 애를 먹는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빌딩의 보안 시스템이 완벽하다는 데 있다. 안전 방어 시스템이 위험 요소로 작동하는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