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老兵)은 죽어도 종이책은 죽지 않는다


                                                                              한 달 전에 e-book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서 공짜로 전자책 기기인 < 크레마 카르타 > 를 얻을 기회가 생겼는데 어영부영 미루다가 결국에는 제품 수령을 포기했다. (상품 수령 시, 내야 하는 세금) 3만 원의 비용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전자책에 대한 흥미'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 짓 > 인 것 같다. 내게는 필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기기가 필요할 것이 아닌가 ? e-book 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면 되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땅을 치며 후회했다. " 시바, 나는 참...... 멍청하구나 ! 이기적인 새끼야...... "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p-book보다 e-book 의 가치를 인정하는 쪽이다.

편리성, 가독성, 보관성, 가격 경쟁력 따위를 모두 종합하면 e-book 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좁은 집구석에 책을 만리장성처럼 쌓아놓은 경험이 있는 자'라면, 혹은 책 때문에 짐을 나르는 노동자에게 신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 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먼저 든다. 왜 그럴까 ?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공교롭게도 한국일보 양승준 기자'가 작성한 << 여성은 CD, 남성은 LP ? >> 라는 기사에서 찾았다. 무릎 팍, 치고 아, 했다. " 유레카 ! " 여성은 미래 가치'에 방점을 두고, 남성은 과거 가치에 대한 향수에 방점을 찍는다. 다시 말해서 여성은 " 앞날에 대한 걱정 " 을 많이 하고,  남성은 " 뒷날(왕년)에 대한 향수 " 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성향은 고스란히 LP 판매량과도 연결된다. LP 판매량 가운데 80% 이상이 남성 구매자'라는 사실은 남성의 " 레트로 지향적 성향 " 을 잘 보여준 사례'이다. LP를 구매한 소비자의 소비 성향을 놓고 보자면 여성은 CD를 사고 남성은 LP를 산다. 대표적 인물이 무라카미 하루키'다. 잘 알려지다시피, 그는 음악 애호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LP 애호가'이기도 하다.

 

“ 현 40~50대가 음악을 한창 듣기 시작했던 10~20대에 즐겨 들었던 게 LP입니다. 점점 잃어가고 있는 순수함과 열정을 찾을 수 있는 상징적인 매체가 LP인 거죠. 이 추억을 중년 남성들이 LP에서 찾는 겁니다. LP는 턴테이블과 LP도 관리해야 하고 손이 많이 가는 취미잖아요. 조립식 장난감을 남성이 좋아하는 것처럼, 중년 남성들이 여성보다 LP를 더 취미로 선호하는 거라 볼 수 있죠.”

 

-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


LP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디지털 음원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것에 비해 여러모로 " 불편 " 을 감수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음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레코드판을 주기적으로 닦아야 하고, 텐테이블 관리도 필수적이다. 텐테이블 바늘 카트리지가 닳으면 교체도 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디지털 음원은 필요한 노래 한 곡'만 선택해서 반복적으로 들을 수 있지만, 레코드판은 앨범 전체를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 디지털 음원 시대에 접어들며 음악은 일회용품(스트리밍)으로 전락했다. 편리하다는 이유로 앨범이 음원으로 쪼개져 유통되다 보니 앨범에 담긴 맥락은 휘발됐다. 이와 달리 LP는 턴테이블에 올려 놓으면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해 분절된 음원과는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1 "

전자가 문고판 << 전쟁과 평화 >> 라면 후자는 톨스토이 완역판 << 전쟁과 평화 >> 인 셈이다. LP가 남성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레코드판과 턴테이블'이 가지고 있는 외형도 한몫했다. 무채색을 기본으로 하는 턴테이블은 남성적이다. 내부는 외부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음원이 재생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디지털 음원이 가지고 있는 < 볼 수 없음 > 과는 전혀 다른 아날로그적 시스템'이다. 종이책(p-book)과 전자책(e-book)이 맺는 관계는 LP와 디지털 음원'이 맺는 관계와 같다. p-book은 e-book에 비해 여러모로 불편하다. 관리는 필수'다. 주기적으로 먼지를 닦아야 하고, 종이가 물을 먹지 않도록 신경도 써야 한다. 그뿐인가 ? 현실에서는 " 검색창 " 이라는 편리한 찾기 기능이 없으니 분류와 배치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전자책 대신 종이책을 사용한다는 것은 불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학적 진보는 불편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불편한 과정들은 생략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편리를 위해 불편이 사라졌는데, 동시에 " 아우라 " 도 사라졌다. 전자책도 마찬가지'다. 전자책은 종이책이 가지고 있는 불편한 과정을 생략했지만 동시에 아우라도 delete 했다. 종이책에는 있지만 전자책에는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손때2다.




 

 

 

                                                  

 

1.  [ 복고 접해볼래! 2030 LP에 빠져들다 ] 한국일보, 양승조 기자

2.  새정치의 아이콘인 안철수는 새책'이다. 그에게서는 인간적인 스크레치'가 없다. 물 얼룩도 없고, 밑줄 친 페이지도 없고, 책을 읽다가 졸려서 잠시 페이지 모서리를 접어 놓은 흔적도 없다. 안철수라는 책은 깨끗하고 청결하다. 하지만 이 결벽은 정치가에게는 치명적이다. 좋은 정치가는 물 얼룩이 남아 있고, 밑줄 친 문장도 있으며, 접힌 모서리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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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2-11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 판매 중인 전자책은 결코 독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공급자 위주로 체계를 갖추다 보니까 표준이 없이 업체마다 제각각이고, 전자책 규격을 따르지도 않고, 특정 단말기가 아니면 책 내용을 볼 수 없고, 전자책을 구입해도 구매자가 소유하지 못하고, 공유를 허용하지 않는 등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전자책이 분명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전자책을 거들떠보지 않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1 15:35   좋아요 0 | URL
결정타가 전자책 중 읽고 싶은 책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전자책으로 읽자 했는데... 그냥 모니터 들여다보는..
왜 인터넷 소설 있잖습니까. 그런 거 읽는 느낌이 들어서 감동은 개뿔.. 아무것도 안 느껴지더라고요..

표맥(漂麥) 2016-02-1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복고파가 아닌 듯 합니다. 집에 있는 턴테이블... 버리진 못하고 먼지와 함께 소유만 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1 15:33   좋아요 0 | URL
글은 이렇게 썼지만, 저는 텐테이블 내다버렸습니다.. ㅎㅎ.

cyrus 2016-02-11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을 잘 알고 있는데다가 자기 나름대로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사람이 진정한 애서가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 종이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 항상 실수를 반복하죠. 책을 팔고 또 사오고. 오늘 《책장의 정석》을 알라딘 매장에 가서 팔았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강조한 말을 그대로 실천했어요. 책장에 보관하기가 애매하거나 불필요한 책은 팔 것.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2 13:22   좋아요 1 | URL
확실한 거는 꼭 필요한 책만 사고 나머지는 다른 방식으로 읽자, 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래서 소설은 잘 안 사게 되네요.. 고전 소설은 사는데 현대 소설은 안 사게 됩니다. 소설을 두 번 읽고 이러는 경우는 별로 없거든요.. 소설만 읽으려고 이북 리더기 구매할 까도 생각했었는데.. 체질적으로 전 모니터를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루종일 모니터만 보는데 책 읽을 때마저도 모니터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합니다..

samadhi(眞我) 2016-02-11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넌 나보다 구식이야˝라고 했던 아날로그의 대명사나 다름없던 선배의 말대로 촌스러워서(?) 종이책 아니면 못 보겠어요. 남편은 전자책에 길들이라고 재촉하는데 손에 착 감기는(?) 종이책이어야 눈에 들어오는 걸 어떡한답니까. 종이책이 없어지지 않는 한 종이책만 보다가 죽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2 13:20   좋아요 0 | URL
레코드판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종이책도 죽지는 않을 겁니다.
적당한 불편은 좋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필름 카메라처럼요.
필름 카메라 같은 경우는 ( 흑백인 경우 ) 여러가지 불편한 과정을 겪습니다.
도때기로 필름 잔뜩 사다가 암백(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보따리 비스무리한 것)에서 필름통에 필름 담는 맛도 있고, 현상, 인화할 때의 고역도 경험하고.. 전 제 집에 암실을 차렸었는데..
암실에 오래있다 보면 인화물질에 취해서 구토 증상이 나기도 합니다..

요런 맛도 있어야 필름 현상하고 났을 때의 묘한 쾌감 같은데 있는데
디지털은 니미.... 그런 맛이 없죠.....

(

yamoo 2016-02-12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아는 지인이 e-북 몇 천권을 그냥 준다고 제게 애플 테블릿 pc도 줬습니다. 우선 몇 백권을 담아 줬는데, 한 권도 제대로 못 읽고 있다는..
별 희한한 책이 다 있더만요..ㅋ 아마존은 공짜로 다운 받는 책의 종류가 수백권이 되더이다..ㅎ 신세계..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2 13:17   좋아요 0 | URL
저도 친구가 사용해 보라고 며칠 빌려줬는데.. 전, 영 못 읽겠더라고요..그냥 모니터 댓글 읽는 맛이 나서 영 몰입이 안 되러라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