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닷마을 다이어리 : 그래서, 뭐 ?! 어쩌라고 ?
내가 극장에 도착한 시간은 정오가 지난 1시 무렵이었다. 광화문 씨네큐브 극장은 의외로 한산했다. 문제는 영화 << 캐롤 >> 첫 회' 상영이 16 : 40분'이었다는 점이다. 4시간의 공백. 광화문 근처 " 다방 " 을 찾았으나 문을 연 곳은 없었다. 아, 어찌하오리까 ? 궁리 끝에 두 시 상영작인 << 바닷마을 다이어리 >> 와 << 캐롤 >> 티켓을 끊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영화 상영이 끝나면 바로 캐롤 상영 시간이었다. 그 옛날, 동시상영관이 있을 때에는 하루에 영화 6편도 본 적이 있던 내가 아니었던가 ! 하지만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대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앞섰다. 이 대책 없는 " 선한 믿음 " 이 과연 최선일까 ? 누군가가 말했다. 나쁜 나라에서 예쁜 말은 위선이라고, 지옥에서 생을 긍정하는 말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이 영화는 풍경도 예쁘고, 사람도 예쁘고, 마음도 예쁘다. 모든 것이 < 다 > 예쁘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반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 그래서 뭐 ??! 어쩌라고 ? " 좋게 말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따스한 시선'이라 할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현실을 외면한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밥 위에 얹은, 가시를 바른 생선살 같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릴 염려도 없고, 손으로 생선 뼈를 발라낼 필요도 없다. 위험이 제거된 안전'은 갈등이 제거된 가족 드라마와 같다.
갈등이 없으니 이를 해소할 카타르시스'도 없다. 물론 이 영화에서 갈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갈등은 소품처럼 소비된다. 착한 가족 서사 앞에서 감동하기에 이 시대는 피도 눈물도 없는, 동정 없는 세상'이 아닐까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 다시 묻고 싶다. " 그래서, 뭐 ? 어쩌라고 ??! "
2. 캐롤 :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자연스럽게 우는 연기보다 어려운 연기는 자연스럽게 웃는 연기'다. 눈물을 짜내는 것은 쉽다. 누구나 가짜 - 눈물을 흘릴 수 있으니까. 그 사실은 박근혜가 증명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진짜 웃음'은 어렵다. 입꼬리'를 사용해서 웃는 표정을 만들 수는 있으나, 이 표정이 가짜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눈은 웃지 않는데 입만 웃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미소와 웃음을 관장하는 근육은 눈 주위의 근육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에 연기력이 부족한 배우는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웃지 않는다. 당연히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입으로 연기하는 배우보다는 눈빛으로 연기하는 배우가 한 수 위'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훌륭한 배우에게 눈은 제 2의 입'이요, 눈빛은 화려한 대사'다. 영화를 연출해야 하는 감독 입장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배우야말로 넝쿨째 굴러온 < 복 > 과 같다. 영화 << 캐롤 >> 에서 케이트 블란쳇( 캐롤 에이드 役 ) 과 루니 마라 ( 테레즈 役 ) 는 대사로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시선으로 욕망을 표출한다. 두 배우는 말보다는 응시와 마주 보기 그리고 어긋남과 회피'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쏟아낸다. 관객은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눈이 보내는 시선은 발화의 메시지'보다 강력하다. 내가 이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유는 영화 원작자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와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구설수 때문이다. 일단, 범죄 심리 스릴러의 대가가 말랑말랑한 멜로 소설을 썼다는 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더군다나 양성애자'였던 하이스미스가 쓴 레즈비언 퀴어 멜로 소설'이니 더욱 그렇다(자전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내 호기심에 불을 지핀 것은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듀나 사이에 오고간 뾰족한 말풍선(들) 때문이다. 이동진은 영화 << 캐롤 - 라이브톡톡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제가 느끼기엔, 테레즈한테는 동성애적인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고 캐롤이 필요한 겁니다. 근데 하필이면 캐롤이 여자였을 뿐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동성애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상대방이 여자라는게 핵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성애적인 정체성에서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야라는 것이 그사람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될 수 있는거잖아요. 최근에 개봉을 앞두고있는 대니쉬걸같은 바로 그 영화가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러자 얼굴 없는 검객인 듀나'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페미니즘 이슈와 연관해서 트위터에 돌았던 잭슨 카츠의 테드 강연을 떠올려 보시길. 사람들은 " 인종 " 문제라고 하면 당연히 흑인, 라티노, 아시안을 떠올리지 백인을 떠올리지 않고, " 젠더 " 문제라고 하면 여자만 떠올리고 남자는 떠올리지 않음. 비슷하게 " 섹슈얼리티 " 이슈라고 하면 그게 당연히 성소수자 집단의 문제일 것이라 생각하지 이성애자 집단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 나 " 들이 존재함. " 나 " 가 그런 무지를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층으로서의 "나"의 지위를 보여주는 것. 이성애자는 평소에 이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해야 하는 상황이 많지 않으니까 별 생각없이 한 말이 차별발언이고 호모포빅 발언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 그게 욕먹으면 아 그렇구나 하고 고치면 되는거지 " 그런 뜻이 아니거든 ! " 하고 땡깡부릴 일이 아님. 비슷한 논지였던 마이클 키멜의 테드 강연에서도, " 특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종, 젠더, 계급이 보이지 않는다 " 라고 얘기함. 백인 여자는 거울을 볼 때 " 여자 " 를 보고 흑인 여자는 "흑인 여자"를 보지만 백인 남자는 " 인간 " 을 보죠. 이성애자도 마찬가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 " 하필 캐롤이 여자였기 때문에 ~ " 퀴어 영화가 되었다는 지적은 이성애 가부장 중심 시선이다. < 하필 > 이라는 부정적 부사의 사용'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동성애적 코드 대신 사랑이라는 보편성에 방점을 찍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매끈한, 흔적 없는, 이음매가 보이지 않는, 안전한, 깨끗한 봉합'이다. 이 무심(혹은 무관심,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연못에 이는 파문)이 때론 소수자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듀나가 지적한 것처럼 이동진의 발언'이 호모포비아와 연결된다는 지적은 과장이 아닐까 싶다. 이동진의 실수는 애티튜드의 문제이지 혐오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나의 이 지적은 옳다. 이동진에게는 다소 억울할 수도 있지만 이 오지랖은 정치적으로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