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맨은 밸을 두 번 버렸다

 

                                                                      군 입대 전, 잠시 영화사에서 일한 적 있다. 말이 좋아 < 사원 > 이었지, 사실은 사환(使喚), 급사, 웨이터, 보이, 충무로의 심부름꾼 아이 혹은 어이 ! ” 라고 불리던 애송이. 아,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어느 날, 사장이 나를 부르더니 전봇대나 벽에 포스터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 쪽 > 팔려서 손사래를 치려고 하는 순간, 사장 입에서 꽤 근사한 하루 품삯이 튀어나왔다. 열흘 정도 고생하면 한 달 월급 정도는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또한 퇴근 후에 할 수 있는 일이니 투잡이 되는 셈이다. 사장이 품삯을 제시하는 순간, 나는 파리를 낚는 두꺼비처럼 냅다 하겠다고 소리쳤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포스터맨 라이프 ”.  퇴근하면 도시의 하이에나가 되어서 불야성 같은 번화가 전봇대나 벽에 포스터를 붙였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왜 이 일이 단가가 높은지 알 수 있었다. 포스터를 붙일 만한 전봇대나 벽은 이미 다른 연극 포스터나 영화 포스터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 뜨고 두리번거리다가 포스터를 붙일 만한 담벼락을 발견하게 되면  가게 담벼락 주인이 나타나 지랄을 한 적도 있고, 학교 안전 거리 내 유해 광고를 붙였다고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있으며, 포스터 위에 덧발랐다고 동종 포스터맨에게 삿대질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럴 때는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열흘 동안의 포스터맨 생활을 하면서 밸(배알)을 두 번 버렸다. 토끼가 심장을 숲에 두고 나왔듯이. 고생 깨나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 내가 절실히 깨달았던 것은 간절히 원하면 보인다는 점이었다.

평상시에는 거리를 걸을 때 담벼락을 의식한 적이 없었는데, 포스터맨 생활을 열흘 정도 하다 보니 거리의 담벼락만 보였다. 영화에서 남자가 첫눈에 사랑에 빠질 때 그 여자만 선명하게 보이고 주변은 온통 화이트 아웃 되는 효과와 비슷했다. 그렇다. 내 눈에 너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경험이다. 배가 고픈 사람 눈에는 빵집만 눈에 들어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 내 눈에는 담벼락밖에 안 보였다. 나는 담벼락에게 외쳤다. “ 오갱끼데스까... 와따시와 갱끼데스 ! ” 하물며 몇 십 년을 한 분야에 몰두한 학자라면 오죽 할까. 여성학을 공부한 정희진은 O헨리의 << 크리스마스 선물 >> 이라는 단편에서 남녀의 성차를 읽어낸다.

 

O.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다시 펼치니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다른 이야기다. 이렇게 짧은 분량에 이토록 생각할 거리가 많으니 새삼 문학과 철학의 경계가 따로 없구나 싶다. 대단한 장편(掌篇)이다. 스물두 살의 가난한 부부 짐과 델라. 사랑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것을 팔아 상대에게 가장 필요한성탄절 선물을 한다. 델라는 머리카락을, 짐은 시계를 팔지만 그들이 받은 선물은 이제는 소용없는 머리빗 세트와 시곗줄. 나는 두 가지가 걸렸다. 하나는 가난한 남성은 물건을 팔지만, 가난한 여성은 몸의 일부(머리카락)를 파는(팔 수 있는) 현실. 이것이 성매매가 성별 중립적이지 않은 이유다. 선물을 사기 위해 매혈하는 남성은 드물다. 게다가 델라의 머리카락 묘사는 남성들의 판타지가 투사된 듯 사뭇 관능적이다. “지금 델라의 아름다운 머리채는 갈색의 폭포처럼 잔잔하게 흔들리며 몸 주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려 마치 긴 웃옷같이 되었다.”(335)

한겨레 칼럼, 정희진의 어떤 메모 2015. 12.18

    

 

정희진은 << 크리스마스 선물 >> 에서 인류의 오랜 불평등을 읽어낸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기는 하나, 또 한편으로는 정희진이기에 가능한 신선한 접근이기도 하다. 정희진의 지적대로 남자는 < ()의 부분 > 을 팔아서 머리빗을 사고, 여자는 < ()의 부분 > 을 팔아서 시곗줄을 산다.   재미있는 사실은 머리빗이 미용 도구라는 점에 있다. 여성의 긴 머리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오브제요, 로망이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숱이 많고, 부드러우며,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은 젊음과 건강을 알려주는 지표. 이 말은 곧 좋은 번식 능력을 가진 여성 이라는 증거가 된다. << 라푼젤 >> 이라는 동화에서 왕자가 라푼젤의 긴 머리카락을 보고 사랑에 빠진 것도 긴 머리키락이 가지고 있는 좋은 유전자에 대한 무의식적 인식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여자 인형을 봐도 그렇다. 못난이 인형은 대부분 헤어스타일이 짧고(양배추 인형을 보라), 예쁜 여자 인형은 머리카락이 길다. 모발과 성적 판타지는 김훈의 << 언니의 폐경 >> 에서도 나온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의 속옷에 가끔씩 여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었다 끄트머리까지 힘이 들어 있었다 겨울 속옷의 섬유 올 틈에 파묻힌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떼어내자 더운 방바닥 위에서 머리카락은 탄력을 받고 꿈틀거렸다.

- 언니의 폐경,32

 

김훈은 번식 능력을 상실한 여자(언니의 폐경)와 대조되는 오브제로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이 나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 탄력을 받고 꿈틀거 리는 머리카락을 전면에 내세운다. 무시무시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진화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긴 머리 여성은 상품 교환 가치가 매우 뛰어난 유전자를 가진 존재다. 인류의 역사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 자원 획득 잠재력 > 이라는 개념이 있다. 쉽게 말해서 자원 획득 잠재력 이 높다는 것은 < 위너 > 이고, 낮다는 것은 < 루저 > 라는 뜻이다. 싸워서 이기는 놈이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한다. 그리고 위너와 루저가 확립되면 자원 획득 잠재력이 떨어지는 놈은 이래저래 먹이를 상납해야 한다.

자원 획득 잠재력이 높은 놈은 상대방과 싸워서 먹이를 빼앗기도 하지만, 피의 숙청 없이도 루저의 자발적 헌납으로 먹이를 획득하기도 한다. 이래저래 가진 놈은 더 많은 자원을 획득하고 없는 놈은 탈탈 털리게 된다. " 내가 탈수기냐옹! " 여기서 자원은 먹이나 재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밀림의 왕 사자 수컷은 수많은 암컷을 거느린다. 인간 세상이라고 해서 다를 것 없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는 가난한 자보다 더 많은 여성과 섹스를 할 수 있다. 남성에게 있어서 재화의 획득은 권력과 미녀를 얻을 수 있는 무기인 셈이다. 강력한 한 방이다. 반면 여성에게는 아름다움이 무기이다. 자고이래로 여성은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재화를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 크리스마스 선물 >> 에서 남자와 여자가 팔 수 있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성매매란 결국 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결과. 성매매 문제를 단순히 윤리적 문제로만 접근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성매매는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 (성산업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가장 위험한 직업군에 속한다. 성매매란 속을 열고, 염통 꺼내 놓고, 배알도 꺼내 놓아야 하는 일이다. 배알 꼴리는 일이 어디 성매매뿐이랴. 승자 독식 사회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배알이 꼴려도 염통 꺼내 놓고 굽신거려야 할 세상이다. 싸장님의 원 펀치에 쓰리 강냉이(이빨)가 털려도 말이다. 네네, 알겠습니다요. 몽고 간장 공장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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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01-0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진자는 사람의 자존을 사고 그이들을 비굴하게 만드는 데 비용을 지불하죠. 그것이 권력이라 착각하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1-03 21:29   좋아요 0 | URL
두산 보십시오. 야구 볼 때마다 그놈의 사람이 미래다, 라는 광고가 허벌나게 많이 나와서 도대체 저 그룹은 기업 이미지 광고에 돈을 얼마나 쏟아부은 것을까, 라는 생각이 야구 볼 때마다 들었는데 막상 자기네 신입사원 처우는 개판이었나 봅디다.

samadhi(眞我) 2016-01-03 23:24   좋아요 0 | URL
삼성도 선경(sk)도 마찬가지죠. 제가 오뚜기랑 매일 제품을 맛 없다고 구매를 꺼려했는데 이 나라의 몇 안 되는 좋은 기업이라 앞으로 애용하고자 합니다. 입에 맞는 것들은 그 만큼 착취해서 그런 것 아니겠냐는 제 남편의 말에 일리가 있다 여겨지네요.
우수한 상품 뒤에 노동착취가 자리하고 있으리라는 생각.

곰곰생각하는발 2016-01-04 09:12   좋아요 0 | URL
선경... ㅎㅎㅎㅎㅎㅎㅎ 아, 선경에서 빵 터졌습니다. 마자마자.. 엣날에는 선경이었죠. 아, 이걸 깜빡 잊고 있었네요....

지금행복하자 2016-01-0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머리에 대한 성적 판타지군요. 여자가 결혼하고 나이가 들면서 여자가 머리를 자르는 것은 성적 대상에서 멀어지고 있는거군요~ 물론 최선을 다해 유지하는 여자들도 있지만요.
남자들의 긴 생머리에 대한 환상은 어디에서 부터 시작되었을까요 ~ 탐스러운 머리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는 알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1-03 21:31   좋아요 0 | URL
저도 머리를 길러봐서 압니다. 이게 보통 시간이 많이 투자되는 게 아닌니다. 더군다나 겨울에 머리 감고 나가면... (말릴 시간이 업ㅅ잖아요..) 여성들이 결혼하면 왜 머리를 파머하는지 알겠더군요....
종종 그런 생각은 합니다. 긴머리 관리는 남자가 원해서 일까, 아니면 스스로 긴머리가 마음에 들어서일까.. 하고 말이비다.

표맥(漂麥) 2016-01-03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딜 내놔도 손색없는 글... 읽는 순간이 즐겁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1-03 21:32   좋아요 0 | URL
손색없는 글이라는 표현에 함박웃음을 ^---------------- ^

세실 2016-01-0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픈 화이트 아웃...
문득 곰발님은 지금까지 몇개의 직업을 가졌을까 궁금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1-03 21:33   좋아요 0 | URL
큰 줄기는 다 한통속이었고 나머지는 그 줄기의 세컨드이니 뭐... 많은 직업은 아닙니다..ㅎㅎ

stella.K 2016-01-03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오늘은 곰발님의 글이 이해가 가지 않네요.
왜 곰발님 얘기가 나왔다 갑자기 정희진 얘기가 나오는지는 건지...?

전 폐경이란 말도 남자의 언어란 생각이 들어요.
폐경인 여자는 더 이상 여자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처럼.
누가 폐경이 아니라 완경이라고 하던데 그게 맞는 말은 아닐까 싶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1-03 21:35   좋아요 0 | URL
아 누가 정희진 논리가 비약이라고 해서, 한곳에 눈을 팔면 그쪽만 보인다는 걸
말하기 위해 쓰다 보니 그리 되었네요...

폐경이 확실히 남성적 시선이죠.

수다맨 2016-01-03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이 여성을 작중에서 형상화하는 전략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또다른 단편인 `화장`에서 주인공의 아내는 성적 매력이 제거된 모습(말라버린 질, 메마른 음모 등)으로 철저하게 묘사되는 반면에 주인공이 사모하는 여인인 추은주는 수사적이고 관능적으로 표현되고 있죠. 바로 이 때문에 김훈이 `마초`나 `남근주의자`로 공격받는데ㅡ틀린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ㅡ그보다 남성 작가들 대다수가 이런 이중적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문제 삼아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저께는 댁에 잘 들어가셨는지요? 덕분에 잘 마셨습니다. 언제 한번 또 뵙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1-03 21:37   좋아요 0 | URL
수다맨 님의 지적이 맞습니다. 김훈은 마초이고 남근주의자 같습니다. 언제 한번 김훈을 까도록 하죠...ㅎㅎㅎ
수다맨 님에게 귤( 요 귤이 무진장맛있어서 챙겼는데)을 줄려했는데 술 마시다 보니 깜빡했네요....
근데 역시 그날 먹은 닭도리탕은 진짜 맛이 없더군요... 복잡거려도 계림으로 갔어야 하는데.. 제가 워낙 북적거리는 식당을 싫어하는지라....

만병통치약 2016-01-03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트가 아니라 터맨이었군요^^ / 전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평생비슷한 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딱 한번 조금 길러서 파마를 해본적이 있습니다. 기르기 전까지가 가장 고통스럽더군요. / 성매매는 이쪽말도 맞는것 같고 저쪽말도 맞는것 같고 어렵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6-01-03 21:45   좋아요 0 | URL
전 고등학교 때 중처럼 삭발한 적 있습니다. 면도기로 박박 밀었죠. 선생이 머리 길다고 잡아당기면서 이발하라고 해서 홧김에 다음날 삭발을... 그 선생에게 죽도록 맞았습니다. 반항하냐고 말이죠....
길다고 지랄, 깎았다고 지랄... 하튼 그땐 제 정체성의 혼돈 시대였습니다. 삭발 후 다시 기르기까지가 정말 힘들더라고요..

(제목은 말장난입니다..ㅎㅎ 포스트맨 - 포스터맨으로, 벨-밸(배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