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자  f'에게  


                             < 형 > 은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무리 똥통 학교라고는 하지만 장남이 학급에서 반장(하고 학년 부회장)을 했으니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부모 말쌈에 장남'은 고분고분했어라.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형은 항상 브랜드 옷과 신발을 신고 다녔다. 반면 나는 형이 입다가 버린 옷을 입고 자랐다. 형이 < 나이키 > 신발을 신고 다닐 때, 나는 < 나이스 > 신발을 신고 다녀야 했다. 쪽팔란 거라. 그래서 nice 에서 c를 볼펜으로 교묘하게 k로 " 리모델링 " 하고는 했다. 비만 오면 나이스'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 강제로 " 아웃팅 " 될까봐서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뿐이었다. c는 일종의 주홍글씨 A였던 셈이다. 이처럼 내게 돌아온 것은 낡은 옷과 짝퉁 신발(신발은 형으로부터 공수받을 수는 없었다. 바지 밑단은 줄이면 되지만 신발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procrustes's bed 가 아니지 않은가)이 전부였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형은 될성부른 나무였고 나는 히마리 없는 떡잎이었다.

그런데 형은 내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습속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그게, 아,  마땅한 심리학 용어가 없어서 대략 << 새것 - 거부증 >> 이라고 부르겠다. 형은 < 새것 - 거부증 > 환자'였다. 물건 앞에 < 새 - > 가 붙는 순간 부끄러움을 느끼는 병이다. 이해하시려나 ?  예를 들어 옷가게에서 산 새 옷을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병이다. 새 옷은 쪽팔려서 못 입겠단다. 그래서 형은 입지도 않은 새 옷을 세탁기에서 수십 번 세탁한 후에야 비로소 입고 다녔다. 그렇다고 히피처럼 찢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새것은 아니되 그렇다고 찢어진 것도 아닌 옷. 그 옷이 형에게는 안성맞춤인 모양이었다. 형과 나는 나이 터울이 있는지라 새것은 아니되 그렇다고 찢어진 것도 아닌 옷'은 몇 년 후에 내 것이 되었다. 영화 << 올드 보이 >> 가 그 당시에 만들어졌다면 친구들은 나를 올드보이'라고 놀렸을 것이다. 눈물이 나네, 시바.

내가 옛날 이야기로 말문을 여는 이유는 포스트모던한 대한민국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대대로 자연을 모방했다. 최대한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 미학의 궁극이었다. 사극을 볼 때 흔히 " 불초소생 " 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여기서 불초는 아버지를 닮지 못한 죄'다. 그렇기에 << 불초소생 >> 은 아버지(대자연)을 닮지 못한 못난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부자 관계에서 아버지는 원본이고 아들은 사본'인 셈이다.  형만한 아우가 없는 이유는 < 아우 > 가 아무리 뛰어난 필경사'라 해도 방대한 텍스트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쓰기'란 힘에 부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사란 결국 잘해야 본전인 경우'다. 설령,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필사를 했다 한들 " 원본의 위작 " 일 뿐이다.

사본이란 그런 운명인 것이다. 소문자 f(사본)는 최대한 F(원본)을 닮기 위해서 대장간을 찾아 대장장이에게 전신 성형을 의뢰한다. " 슨상님 ! 담금질로 최대한 쫙~ 쫘아아아악 ~  펴 주시오. 나도 한번 F처럼 각 잡고 살고 싶어야. "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현대 사회는 원본을 닮고자 하는 사본의 욕망'이 희석되었다. 이제 소문자 f는 대문자 F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f의 목적은 F 가 아니다. f는 아비 없이 태어난 신인류인 셈이다. 청바지가 좋은 예'이다. 이제 청바지는 새 청바지에서 낡은 청바지로 늙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이미 낡은 청바지'로 유통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기만이면서 동시에 모방, 흉내, 시늉'이다. 이제 신상품인 낡은 청바지 < f > 는 아버지를 닮으려는 노력보다는 단순히 흉내 내는 것에 그친다.

 

f가 닮고 싶은 것은 아빠의 청춘이 아니라 아빠의 연륜이 가지고 있는 권위'다. 청바지가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의 마모를 견뎌야 했다. 하지만 f는 인고의 세월을 " delete " 한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이니까. f의 다른 이름은 디지털이다. 디지털은 아날로그가 이룩한 과정을 모두 생략한다. 전자 시계는 날마다 테엽 감는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디지털 카메라는 아날로그 카메라가 거쳐야 하는 암실 과정을 생략한다. f는 성장통 없이 바로 어른이 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도 소문자 f 다.  절차(과정)가 생략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절차'다. 의사봉만 두들긴다고 합법은 아니다. 박근혜 정권을 볼 때마다 디카'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경쾌하게 송출하는 셔터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발, 셔터도 없으면서 셔터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내니 말이다. 이러다가는 눈 오는 소리'도 효과음으로 송출될지도 모른다. 펑펑, 눈 내리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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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12-0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최근에 읽은 모든 글 중에 가장 와 닿는 글입니다. 내게는 그렇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3 15:15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칭찬 복이 많네요. 좋은 눈을 가지신 표맥 님의 천리안이 빛을 발하는군요. 호호

stella.K 2015-12-03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참, 그런 병도 있습니까?
저는 옷 사는 걸 귀찮게 여기는 병이 있습니다.
꽤 오래된 병이죠. 엄마는 비싼 건 못 사 입으셔도 나름 패셔니스타신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멋있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그건 엄마의 덕이거나
아님 엄마 옷을 통째로 빌려입고 나올 때죠.
그런 점에서 전 불초소생이입니다. ㅠㅠㅠㅠ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3 16:31   좋아요 0 | URL
다행이네요. 선택은 또다른 스트레스입니다.
집에 패션니스트 한 명 있으면 온 가족이 다 패션리스트가 되기 마련입니다.
스텔라 님 행운아 !

samadhi(眞我) 2015-12-03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연년생 조카가 비슷한 상황이네요 근데 곰발님 상황보다 좋죠 동생한테. 제 조카들은 큰 애가 새 것을 싫어해 작은 애가 새 것을 입고 난 뒤에 해어진(작은 애가 정말 털털하거든요. 끄떡하면 운동화에 구멍을 내놓는 아이라서 저랑 비슷 ㅋㅋ) 옷을 형이 입어요. 바보형(?) 덕분에 동생이 득을 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3 16:40   좋아요 0 | URL
좋은 형제네요. 제가 초등일 때 형은 고딩이니 레벨이 안 맞습니다. 결국 몇 년 후에나 입거나 크게 입거나... ㅎㅎㅎ. 새 것 증후군이 의외로 있나 보죠 ? 하튼 형은 새 옷 입는 걸 극구 싫어했슴돠. 정말로 세탁기에서 일부러 30번 돌렸다니까요... 뭐라더라? 새 옷 특유의 냄새가 싫다나.. 뭐 그런 핑계였던 것 같슴돠.

기억의집 2015-12-03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직권상정 했다는 뉴스 보니 이 나라가 어찌될까 싶었어요. 어휴, 백세시대인데, 노인네들의 생각은 변함 없으니, 더 암울해지네요. 진짜 f가 판치는 시대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4 09:02   좋아요 0 | URL
과거를 조종하는 사람은 미래를 조종한다.

조지오웰이 동물농장에서 한 말입니다. 1984인가 ???! 갑자기 헷갈리네요.
요즘 유난히 오웰이 다시 생각납니다.
정말 오웰은 탁월했어요. 정말 탁월했습니다.

참... 웤ㅇ 워킹맨 읽어보셨나요 ? 요즘 킹 신간 실망이라고 하셔서...
이 작품은 함 읽어보세요. 좋습니다.

워킹맨이 아니라 롱워크... 수정..

cyrus 2015-12-03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새것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럽기 보다는 사용하기가 아까워서 조심스럽게 사용해요. 그런데 처음에는 다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막 쓰게 되더군요. 스마트폰이 그렇죠. 스마트폰 새로 사면 소중하게 사용하지만, 일 년 지나면 스마트폰 액정이 깨져 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4 09:03   좋아요 0 | URL
저는 새것부터 막 쓰는 스타일입니다. 어릴 때부터 헌옷만 입고 자라서 행동이 그리 되었어요.
옷 찢어졌다고 혼날 일 없으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습관이 무섭다고, 그게 잘 고쳐지지가 않네요....
노트북 산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중고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