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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엽충 - 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 ㅣ 오파비니아 4
리처드 포티 지음, 이한음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12월
평점 :
단 순 한 열 정
나는 거웃을 수집했지요. 검은 털, 금빛 털, 붉은 털, 심지어는 흰 털도 더러는 있었지요. 꽤 많이 모아 그걸로 베개 속을 채웠지요. 나는 이걸 베고 잤지요. 하지만 겨울에만....... 여름에 이걸 베고 자려면 너무 더워요. 그런데 좀 지나고 보니까 그 짓도 심드렁해졌는데....... 아시겠지만 냄새도 몹시 나고 해서 그만 태워 버렸지요. 히히히. 두목, 그게 내 장부였던 셈이지요.
- 그리스인 조르바 중
그 사람 이름은 모른다. 얼핏 들은 것도 같은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별명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동네친구들 사이에서 “ 뽕 아저씨 ”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실 이 표현은 어폐가 있다. 내가 가입한 동네 주당 모임 나이는 평균 20대 중반이었고 그는 갓 서른을 넘긴 사내였으니 “ 아저씨 ” 보다는 “ 형(님) ” 에 가까웠지만 그에게 아저씨라는 호칭을 부여한 까닭은 M자형 탈모가 시원하게 진행 중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는 비쩍 마른 체격에 복부 비만인 “ 올챙이 아저씨 스타일 ” 이었다. 아저씨 앞에 붙는 “ 뽕 ” 이라는 연원은 불분명하다. 아마도 < 뻥 > 과 < 뿅 > 의 중간 단계에서 파생된 어감이 아닐까 싶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허풍이 심했고 사랑의 물약(?) 따위로 수많은 환락가 여성과 불타는 밤을 보냈다는, 화장실 낙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무용담을 늘어놓아서 그가 하는 말은 당최 믿을 수가 없었다. 남들이 10분짜리 단편 영화를 찍을 때 혼자서 56부작 < 격동 30년 > 을 찍는다고 하니 말이다. 어딜 봐도 그는 << sex bomb >> 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불타는 주둥이를 선물하셨다. 동네친구들은 그가 자랑하는 “ 만난 지 1시간 이내에 여자를 < 뿅 > 가게 만든다는 기술 ” 이 < 뻥 > 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쉴 새 없이 내뱉는 걸죽한 입말에 중독되고는 했다.
그는 그날도 포장마차 안에서 < 격동 30년 中 38부작 > 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고것이 야시시시시시 눈을 뜨며 말하더라고. 침대에다 냅다 자빠트렸지....... ” 맙소사, 런닝 타임 2시간짜리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환락가에 쏟아 부은 돈으로 아파트 두 채는 샀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엘에이, 오호츠크해 불알덴부르크 비치 리조또 밤바다 쌍끌이 그물에 잡힐 크릴 새우 같은 놈아 ! ” 그는 내 표정에 깃든 차가운 조소(嘲笑)를 읽은 것이 분명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가 검은 다이어리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보물 1호라고 했다.
나는 그만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장부 속에는 수많은 여성의 거웃이 나열되었는데, 거웃은 투명 테이프에 붙어서 종이에 잘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 거웃 수집가 > 였다 ! 오, 판타스틱 베이베 ~ 그가 말했다. “ 이 털들이 다 똑같아 보이지 ? 몰라서 하는 소리다. 사람에게 지문이 있듯이 거시기 털도 각자 특색이 있기 마련. 굵기, 길이, 꼬인 형태, 색깔, 강도가 다 다르지. 다만 네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털에도....... 성깔이 있다 ! ” 그가 수집한 거웃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마다 눈동자는
캄캄한 밤에 북위 128, 동경 47.2 도 좌표 위에 뜬 kt 상업용 인공위성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났다. 순간, 그가 순수한 < 과학 소년 >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우표를 수집하는 소년의 순결한 고집처럼 말이다. 그것은 색욕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처럼 보였다. 내가 그의 악취미에 대해 호감을 갖는 이유는 거시사(擧示史)보다는 미시사(微示史), 공룡보다는 기생충, 한국 타이어 자동차 바퀴보다는 말레이시아 바퀴(바퀴벌레의 정식 명칭은 바퀴벌레가 바퀴다)에 더 호감을 갖는 내 성향과도 연관이 있었다. 나는 세계적 건축가가 지은 웅장한 건축물을 < 올려다보기 >
보다는 작은 의자를 < 내려다보는 > 쪽을 선택하는 편이었다. 신기하게도 건축가들은 건축물뿐만 아니라 의자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니 말이다. 영화에 빗대서 설명하자면 건축물이 장편 영화라면, 의자는 단편 영화인 셈이다. 장편 영화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는 감독은 이미 단편 영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법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나 존 카펜터 감독처럼 말이다. 내가 의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또 있다. 명성 드높은 거장의 예술 작품을 엉덩이로 깔아뭉갤 수 있으니까. 나보다 잘난 사람의 작품을 뭉갤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리처드 포티의 << 삼엽충 >> 은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교양 과학서’다. 과학 에세이를 즐겨 쓰는 저술가 메리 로치가 농담을 무기로 글을 쓴다면, 리처드 도킨스는 독설이 강점이며, 스티븐 제이 굴드는 문장 실력이 뛰어나다. 좋은 교양 과학서는 특정 과학 분야의 지식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간장게장 등딱지에 밥이나 비벼 먹을 줄 알았지, 누가 삼엽충 등딱지를 통해 4억 50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적 탐험에 호기심을 느낄 독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 어려운 정보를 쉽게 풀어낼 줄 아는 책이 좋은 대중 교양 과학서‘다.
리처드 포티는 이 책 도입부를 토마스 하디 소설 << 푸른 눈동자 >> 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책 끝머리는 << 짖어대는 사냥개들 >> 이라는 소설을 쓴 자크 데프라에 대한 인물평으로 마무리한다. 지질학자였던 자크 데프라‘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 데이터 표본을 조작한다. 다른 곳에서 채집한 삼엽충 표본을 자신이 연구하는 지층에 몰래 파묻은 것이다. 나중에 그 사실이 발각되어 그는 업계(?)에서 축출된다. 업계‘에서 사라졌던 그가 다시 등장한 곳은 엉뚱하게도 문학 동네였다. 그는 과학자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가 쓴 소설이 공
쿠르상 후보에 오른 것을 보면 애초에 과학자보다는 예술가’가 더 적성에 맞는 직업인지도 모른다. 리처드 포티는 삼엽충을 연구하는 과학자이지만 놀랍게도 작문 실력이 웬만한 소설가 못지않다. 나 같은 일반 독자들은 아무래도 과학적 사실보다는 문학적 입담에 친숙하다 보니 이런 식의 접근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포티는 말한다. “ 예술가는 무언가를 꾸며냈을 때 기쁨을 느끼고 과학자는 발견을 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기쁨을 맛본다. ” 그런 점에서 자크 데프라와 황우석은 무언가를 꾸며냈을 때 기쁨을 느끼는 부류‘다. < 황우석 > 이 티븨에 나와 자신이 연구하는 과학과 애국을 하나로 연결하려 했던
거시적 허세는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 거시기 ” 해 보여서 역겨워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 엘에이, 오호츠크 밤바다 쌍끌이 그물망에 잡힐 크 ! ” 순수한 열정보다 불순한 야망이 앞설 때 과학자는 타락하게 된다. 뛰어난 과학자라 해도 잘못된 이론을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오류들은 과학 발전의 걸림돌이 되기는커녕 디딤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해석은 잘못되었지만 그 해석에 사용된 (그가 수십 년 동안 모은) 표본은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이는 행위는 전혀 다른 문제다. wag the dog ,
오염된 표본(꼬리 부분)은 훗날 진실(몸통 전체)을 왜곡할 수 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서야 되겠는가 ? 그렇기에 과학자가 < 잘못된 이론을 주장하는 것 > 과 <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혹은 거짓 행위)을 하는 것 > 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정치학이나 군사학에서는 남을 속이는 행위는 지략에 해당될 수 있지만 과학에서는 천벌에 해당된다. 황우석은 그 율법을 어긴 것이다. 미디어에 노출된 이미지와는 달리 과학자들은 대부분 작은 분야에서 일한다. 연구실 또한 고물상 수준이다. 비록 그 분야의 < 과학적 성과 > 가 < 미래의 수익 > 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돈의 색깔‘에 따라 우열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모든 나약함과 기벽이 배어 있는 인간 활동 가운데 하나다
- 삼엽충, 296쪽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불현듯 그 옛날 < 뽕 아저씨 > 생각이 났다. 내가 그의 은밀한 장부를 보았을 때 느꼈던 < 이상한 호감 > 을 포티는 지구 정반대에 살고 있는 내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 비밀 수첩에는 묘하게 나약한 심성과 열병에 가까운 기벽이 공존했다. 그가 스무 살 때부터 환락가를 들락날락거리며 모은 오래된 취향을 4억 5천 년 전에 살았던 삼엽충 등딱지에 인생을 건 열정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겠으나 수집 행위가 범죄 행위가 아닌 이상은 이 세상 모든 수집은 기본적으로 순수한 열정의 형태라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라는 소설도
그가 가지고 있던 나약함과 기벽이 만든 위대한 결과물이 아니었던가 ? 그것은 병약하고 지루했던 현실에 대한 보상이었다. 뽕 아저씨와 알렉시스 조르바가 < 거웃 > 을 수집했다면, 벤야민은 < 사료 > 를 수집했고, 프루스트는 < 기억 > 을 수집했다. 그들이 수집했던 것은 값나가는 보물이 아니라 시시껄렁한 고물상 골동품에 가까웠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이었던 벤야민은 코르셋, 총채, 빨간색 머리빗, 파란색 머리빗, 옛날 사진, 비너스 조각상 기념품 따위에 대한 사료를 모으기 위해 베를린 국립도서관과 파리 국립도서관을 드나들었고, 프루스트가
침대에 누워서 수집한 기억 또한 마들렌과 홍차처럼 시시껄렁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모두 거창한 수집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야망보다는 열정이 낳은 순수한 고집이었다. 리처드 포티라면 그 열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열정을 쏟는다는 것에 대한, 아주 기묘한 열정 말이다 ■